"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시 51:1-19)
이 시편 51편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고 서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통해서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죄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충고했을 때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통회를 하고 식음을 전폐한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 입니다.
이 51편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일종의 기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회개에 대한 시로서는 가장 대표적입니다. 다윗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도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회개를 하고 그 결과가 분명하게 열매로서 나타나는 사실 또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되고 철저히 하나님과의 사이에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드러낸 다윗의 죄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홀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 51:1-2)
죄를 회개한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회개의 참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1절에는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했고, 2절에는 "말갛게 씻기시며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했는데 죄가 어떻게 깨끗이 도말되고 제해지는 것입니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 44:22)
는 말씀 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제해지고 말갛게 씻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해도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을 범한 죄는 인간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우리아를 전쟁터에 앞장 세워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는 아무리 고백을 하고 울어도 그 죄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온전하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3-4)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 우리아에게 죄를 짓고 그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는 죄를 또 범했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였는데 왜 여기서는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그 여인을 끌고와서 예수님께 고발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라고 하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은 다 양의 가책을 받아서 하나 둘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그 여자를 율법을 가지고 정죄하고, 돌로 치고 심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 여자를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 여자를 정죄를 할 자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정죄할 자격이 없는 그 사람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는 이러한 점에서 깊은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간음죄를 짓고 살인죄도 지었지만 그 죄를 판결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이신 하나님 앞에만 그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사람도 다윗의 죄를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든지 다 죄인이니까 죄인으로서 죄를 정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죄든지를 막론하고 죄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를 판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그 죄가 완전히 부정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죄의 부정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 자신이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죄에 대해서 100% 완전히 판결하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죄는 깨끗한 존재 앞에서만 판결이 되는 것이지 깨끗지 못한 사람 앞에서는 완전히 판결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는 말 속에는 굉장히 깊은 뜻이 담겨 있고 아주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깨끗하신 분이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깨끗한 눈과 마음으로 다윗의 죄를 보면 얼마만큼 더럽고 부정하고 악한가를 아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회개가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만큼 깨끗하고 거룩하신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부정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거룩한 빛 앞에 나가면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게 되지만 빛 앞에 나가지 않으니까 자기가 더러운 죄인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문제는 인간 관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완전히 제하시는 하나님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 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자는높아지리라"(눅 18:9-14)
그 당시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죄를 많이 짓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많이 매겨 이익을 취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리들을 민족을 착취하는 매국노요 죄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 악평을 받으면서도 돈이 탐나서 그런 일을 했던 세리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토색이나 불의하지 않고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이레에 두 번 금식하였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죄도 안 짓고 매우 거룩한 생활을 하는 사람같이 보였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의 기도와 죄인의 기도가 나오는데 바리새인은 자기 죄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만큼 거룩하고 진실되고 깨끗한 분인 줄 알았으면 하나님 앞에 감히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
죄인인 세리는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깨달은 세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앞에서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셨지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 8: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 시편 51편 다윗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회개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가령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죄가 생겨도 본질적으로 그 죄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입니다. 갑이라는 사람이 을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완전한 용서가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의 고백이나 자백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하시고 완전히 거룩하신 분이므로 우리 죄의 정체를 완전히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은 사람이 용서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람은 용서했다가도 다시 기억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번 용서하시면
그것은 완전한 용서입니다. 우리 죄를 말갛게 완전히 씻어주신다, 도말하여 주신다고 할 때에는 거기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비록 다윗은 흉악한 죄를 지었지만 그 죄가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이 심오한 시를 읊었습니다. 만일 시편 51편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 해결하고 깨끗이 씻음을 받아 자신있게 살 수 있는 원리를 잘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네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얼핏보면 마치 다윗이 죄를 핑계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죄의 근원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만일 행동으로 죄를 안 지었더라도 그 속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근본적으로 죄인인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간음을 범하지 않아도 죄인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나서 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죄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해결 받을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다윗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지만 육신적으로는 죄 가운데서 잉태해서 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죄를 자백하는 생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 51:6)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다윗과 똑같은 죄는 아니더라도 가끔 가끔 여러 가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를 짓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한다"는 것은 깊은 양심 속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가인이 동생을 쳐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은 진실을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내 동생을 죽였습니다."라고 대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을 받았어도 이 육신 속에는 죄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항상 우리 육신 안에 죄가 있고 부정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진실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만일 가인이 진실을 말했다면 그의 운명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떠한 죄를 지어도 하나님 앞에는 진실해야 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가 죄를 자백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는 생활이 신앙생활인데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 털어 내놓고 의논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안 짓는 것을 기뻐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죄를 지었을 때 진실하고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내놓는 것을 훨씬 더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굉장히 가까워지게 됩니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 51:6)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를 안 지어서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드러내어 고백할 때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진실을 원하시고 진실되기만 하면 용서해주십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우슬초는 땅에서 줄기가 뻗어가는 키가 작은 풀인데 구약 성경 레위기에 보면 비둘기나 양을 잡아 피를 뿌릴 때 사용했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달라"는 말은 주님의 피로 나를 깨끗케 해 달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피로써 죄사함 받은 사람인데 왜 이런 말씀을 했겠습니까?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자기의 죄성을 진실되게 하나님께 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가로막힌 것이 없이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캄캄하고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죄가 정말 용서되었습니까? 용서 안 되었으면 자백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용서된 것입니다. 빛 가운데 해결되는 것은 용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죄를 지으면 마음이 어두워지는데 그 때 다시금 용서되어진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피가 깨끗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 때 한 번만 이 사실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깨달아서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피로써 죄사함 받은 것을 못깨달았어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있는 "너희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깨닫고 구원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피를 깨달아 구원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고 마음이 어두우면 다시 피를 깨닫지 않더라도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죄를 깨끗케 해주셨다는 사실이 평생을 두고 우리 마음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에 기름 부음이…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이 말씀은 창세기에 얍복강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육신의 생각이 꺾어지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뼈가 꺾여지면 사람은 힘을 다 잃어버리고 죽습니다. 그러나 뼈가 꺾어지는 경험을 통해서 굉장히 기쁘고 즐거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거기에서 새로운 생을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9-10)
이 말씀과 관련하여 에베소서 1장 말씀을 살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17-18)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고 계시를 받아 깨달아간다는 말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신다"는 것은 구원받을 때의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새롭고 한 차원 높게 주님을 알아가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비록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정해져서 한 차원 높게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듯이 지금 우리들도 구원받을 때 주님을 알았던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더욱 깊이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새롭게 아는 것입니다. 깊은 죄에 빠졌던 다윗은 그 상태를 딛고 일어나 한 걸음 더 나가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주의 성신"이라는 말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왕은 인간으로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백성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름 부음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은 기름 부음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 안에 있으면 기름 부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했는데 이 성령을 거두어 버리면 다윗이 하나님으로 받은 왕의 사명이 완전히 끝나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멸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명을 가지고 살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기름 부음이 있는 교회 안에 산다는 것은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여기에는 시련도 있고 고난도 있고 핍박도 있지만 기름 부어진 그 영역에서 떠나는 것은 곧 축복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초대 교회는 모두 기름 부음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기름 부음에 의해서 교회는 모든 말씀을 깨닫고 알아가는 기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교회 안에서 연합하여 동거하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거기에 머리 되신 주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이 내려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흘러내리는 몸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그 몸에서 공급 받는 생활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삶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 51:12-13)
요한 일서 1장 7절에도 이미 말씀했듯이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도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져 버리거나 뚜렷한 죄를 안 지어도 마음이 자연스럽게 세상으로 가 버리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언제 구원받았다는 기억만 있고 활발한 움직임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를 하면서 자기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던 마음에서 벗어나 다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다윗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구원의 즐거움이 완전히 사라진 채로 평생을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여 활발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그 전보다 오히려 힘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주 앞에 있음을 자백하고 깨끗함을 받아 확실한 위치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그 전보다 오히려 힘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기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 복음을 죄인들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서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내용이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전도를 했는데 의외로 니느웨 사람들이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했습니다. 어떻게 그 전도가 실효를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요나가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삼일을 지낸 경험이 없다면 단순히 교리만을 전했을 뿐일 겁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요나는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고, 회개하면 하나님께 용서 받는다는 그 사실을 실지로 경험한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경험한 사실을 간증했기 때문에 니느웨 성 사람들이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하나님께 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여기서 하나님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원상복구해 주신다면 죄인들에게 자신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생하게 증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죄를 지었을 때 진실되게 회개하고 그 죄와 싸우다 거기서 해방을 받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사실이 있다면 아주 강력하고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없으면 구원을 받기는 받았어도 사람들을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다윗처럼 죄를 지으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정확한 표준을 여기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찬송하여 주를 전파하리이다"(시 51:14-15)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참으로 마음에서 주님을 새롭게 찬양할 수 있는 때가 필요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도 하고 어떤 때는 찬송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생활의 오르내림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죄와 싸우고 내 육신과 싸우는 과정에서 어떤 때는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다가도 그러한 문제가 풀리면 찬송이 나오게 됩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시 51:16)
시편 50편 8절의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는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제물 자체를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9-12)
수소의 고기나 염소의 피 따위는 다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여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우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의 일면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통회하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되고 거기에서 빛을 찾고 해방을 받아 즐거움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물론 죄 짓는 것을 경계하고 조심하여야겠지만 지나치게 소심하여 신앙생활의 활발함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간혹 실수하여 죄를 지으면 진실한 마음으로 뉘우치고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확답을 받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를 안 지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죄를 안 지어도 죄 짓는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죄를 지었건 안 지었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솔직하고 진실하느냐는 것입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회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시 51:18-19)
다윗은 압살롬이 쳐들어 왔을 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요단강 건너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서 시온이 허물어지고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18절 내용은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온은 영적으로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개인적으로든지 교회적으로든지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하면 그 마음이 교회에서 멀어져 버립니다.
가만히 살펴 보면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도 사람과 사람이 다투어 마음이 상하면 교회와 멀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차츰차츰 형제 자매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교제를 싫어합니다. 혼자서 낙오자가 되버리는데 그게 죄의 결과입니다 뚜렷한 죄가 아닐지라도 형제 자매간에 마음이 상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시온이 허물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큰 문제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는 교회에서 마음이 떠나버리는 것이 바로 시온이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여 마음을 새롭게 하고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시온을 쌓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거기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수소는 주님을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산 제물로 드려져 흠향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대로 신앙이 완전하게 회복되어 하나님께 바쳐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 앞에 항상 진실하게 마음을 의지하며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여 힘차게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정확한 원리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51편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고 서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통해서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죄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충고했을 때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통회를 하고 식음을 전폐한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 입니다.
이 51편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일종의 기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회개에 대한 시로서는 가장 대표적입니다. 다윗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도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회개를 하고 그 결과가 분명하게 열매로서 나타나는 사실 또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되고 철저히 하나님과의 사이에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드러낸 다윗의 죄
죄를 회개한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회개의 참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1절에는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했고, 2절에는 "말갛게 씻기시며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했는데 죄가 어떻게 깨끗이 도말되고 제해지는 것입니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 44:22)
는 말씀 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제해지고 말갛게 씻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해도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을 범한 죄는 인간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우리아를 전쟁터에 앞장 세워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는 아무리 고백을 하고 울어도 그 죄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온전하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 우리아에게 죄를 짓고 그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는 죄를 또 범했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였는데 왜 여기서는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그 여인을 끌고와서 예수님께 고발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라고 하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은 다 양의 가책을 받아서 하나 둘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그 여자를 율법을 가지고 정죄하고, 돌로 치고 심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 여자를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 여자를 정죄를 할 자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정죄할 자격이 없는 그 사람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는 이러한 점에서 깊은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간음죄를 짓고 살인죄도 지었지만 그 죄를 판결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이신 하나님 앞에만 그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사람도 다윗의 죄를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든지 다 죄인이니까 죄인으로서 죄를 정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죄든지를 막론하고 죄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를 판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그 죄가 완전히 부정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죄의 부정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 자신이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죄에 대해서 100% 완전히 판결하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죄는 깨끗한 존재 앞에서만 판결이 되는 것이지 깨끗지 못한 사람 앞에서는 완전히 판결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는 말 속에는 굉장히 깊은 뜻이 담겨 있고 아주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깨끗하신 분이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깨끗한 눈과 마음으로 다윗의 죄를 보면 얼마만큼 더럽고 부정하고 악한가를 아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회개가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만큼 깨끗하고 거룩하신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부정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거룩한 빛 앞에 나가면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게 되지만 빛 앞에 나가지 않으니까 자기가 더러운 죄인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문제는 인간 관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완전히 제하시는 하나님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 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자는높아지리라"(눅 18:9-14)
그 당시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죄를 많이 짓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많이 매겨 이익을 취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리들을 민족을 착취하는 매국노요 죄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 악평을 받으면서도 돈이 탐나서 그런 일을 했던 세리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토색이나 불의하지 않고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이레에 두 번 금식하였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죄도 안 짓고 매우 거룩한 생활을 하는 사람같이 보였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의 기도와 죄인의 기도가 나오는데 바리새인은 자기 죄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만큼 거룩하고 진실되고 깨끗한 분인 줄 알았으면 하나님 앞에 감히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
죄인인 세리는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깨달은 세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앞에서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셨지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 8: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 시편 51편 다윗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회개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가령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죄가 생겨도 본질적으로 그 죄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입니다. 갑이라는 사람이 을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완전한 용서가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의 고백이나 자백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하시고 완전히 거룩하신 분이므로 우리 죄의 정체를 완전히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은 사람이 용서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람은 용서했다가도 다시 기억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번 용서하시면
그것은 완전한 용서입니다. 우리 죄를 말갛게 완전히 씻어주신다, 도말하여 주신다고 할 때에는 거기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비록 다윗은 흉악한 죄를 지었지만 그 죄가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이 심오한 시를 읊었습니다. 만일 시편 51편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 해결하고 깨끗이 씻음을 받아 자신있게 살 수 있는 원리를 잘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얼핏보면 마치 다윗이 죄를 핑계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죄의 근원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만일 행동으로 죄를 안 지었더라도 그 속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근본적으로 죄인인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간음을 범하지 않아도 죄인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나서 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죄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해결 받을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다윗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지만 육신적으로는 죄 가운데서 잉태해서 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죄를 자백하는 생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다윗과 똑같은 죄는 아니더라도 가끔 가끔 여러 가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를 짓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한다"는 것은 깊은 양심 속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가인이 동생을 쳐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은 진실을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내 동생을 죽였습니다."라고 대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을 받았어도 이 육신 속에는 죄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항상 우리 육신 안에 죄가 있고 부정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진실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만일 가인이 진실을 말했다면 그의 운명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떠한 죄를 지어도 하나님 앞에는 진실해야 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가 죄를 자백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는 생활이 신앙생활인데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 털어 내놓고 의논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안 짓는 것을 기뻐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죄를 지었을 때 진실하고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내놓는 것을 훨씬 더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굉장히 가까워지게 됩니다.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를 안 지어서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드러내어 고백할 때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진실을 원하시고 진실되기만 하면 용서해주십니다.
우슬초는 땅에서 줄기가 뻗어가는 키가 작은 풀인데 구약 성경 레위기에 보면 비둘기나 양을 잡아 피를 뿌릴 때 사용했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달라"는 말은 주님의 피로 나를 깨끗케 해 달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피로써 죄사함 받은 사람인데 왜 이런 말씀을 했겠습니까?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자기의 죄성을 진실되게 하나님께 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가로막힌 것이 없이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캄캄하고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죄가 정말 용서되었습니까? 용서 안 되었으면 자백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용서된 것입니다. 빛 가운데 해결되는 것은 용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죄를 지으면 마음이 어두워지는데 그 때 다시금 용서되어진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피가 깨끗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 때 한 번만 이 사실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깨달아서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피로써 죄사함 받은 것을 못깨달았어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있는 "너희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깨닫고 구원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피를 깨달아 구원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고 마음이 어두우면 다시 피를 깨닫지 않더라도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죄를 깨끗케 해주셨다는 사실이 평생을 두고 우리 마음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에 기름 부음이…
이 말씀은 창세기에 얍복강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육신의 생각이 꺾어지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뼈가 꺾여지면 사람은 힘을 다 잃어버리고 죽습니다. 그러나 뼈가 꺾어지는 경험을 통해서 굉장히 기쁘고 즐거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거기에서 새로운 생을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에베소서 1장 말씀을 살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17-18)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고 계시를 받아 깨달아간다는 말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신다"는 것은 구원받을 때의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새롭고 한 차원 높게 주님을 알아가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비록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정해져서 한 차원 높게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듯이 지금 우리들도 구원받을 때 주님을 알았던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더욱 깊이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새롭게 아는 것입니다. 깊은 죄에 빠졌던 다윗은 그 상태를 딛고 일어나 한 걸음 더 나가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의 성신"이라는 말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왕은 인간으로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백성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름 부음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은 기름 부음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 안에 있으면 기름 부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했는데 이 성령을 거두어 버리면 다윗이 하나님으로 받은 왕의 사명이 완전히 끝나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멸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명을 가지고 살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기름 부음이 있는 교회 안에 산다는 것은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여기에는 시련도 있고 고난도 있고 핍박도 있지만 기름 부어진 그 영역에서 떠나는 것은 곧 축복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초대 교회는 모두 기름 부음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기름 부음에 의해서 교회는 모든 말씀을 깨닫고 알아가는 기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교회 안에서 연합하여 동거하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거기에 머리 되신 주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이 내려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흘러내리는 몸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그 몸에서 공급 받는 생활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삶
요한 일서 1장 7절에도 이미 말씀했듯이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도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져 버리거나 뚜렷한 죄를 안 지어도 마음이 자연스럽게 세상으로 가 버리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언제 구원받았다는 기억만 있고 활발한 움직임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를 하면서 자기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던 마음에서 벗어나 다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다윗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구원의 즐거움이 완전히 사라진 채로 평생을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여 활발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그 전보다 오히려 힘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주 앞에 있음을 자백하고 깨끗함을 받아 확실한 위치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그 전보다 오히려 힘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기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 복음을 죄인들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서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내용이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전도를 했는데 의외로 니느웨 사람들이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했습니다. 어떻게 그 전도가 실효를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요나가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삼일을 지낸 경험이 없다면 단순히 교리만을 전했을 뿐일 겁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요나는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고, 회개하면 하나님께 용서 받는다는 그 사실을 실지로 경험한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경험한 사실을 간증했기 때문에 니느웨 성 사람들이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하나님께 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여기서 하나님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원상복구해 주신다면 죄인들에게 자신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생하게 증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죄를 지었을 때 진실되게 회개하고 그 죄와 싸우다 거기서 해방을 받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사실이 있다면 아주 강력하고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없으면 구원을 받기는 받았어도 사람들을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다윗처럼 죄를 지으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정확한 표준을 여기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참으로 마음에서 주님을 새롭게 찬양할 수 있는 때가 필요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도 하고 어떤 때는 찬송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생활의 오르내림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죄와 싸우고 내 육신과 싸우는 과정에서 어떤 때는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다가도 그러한 문제가 풀리면 찬송이 나오게 됩니다.
시편 50편 8절의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는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제물 자체를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수소의 고기나 염소의 피 따위는 다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여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우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의 일면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통회하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되고 거기에서 빛을 찾고 해방을 받아 즐거움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물론 죄 짓는 것을 경계하고 조심하여야겠지만 지나치게 소심하여 신앙생활의 활발함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간혹 실수하여 죄를 지으면 진실한 마음으로 뉘우치고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확답을 받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를 안 지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죄를 안 지어도 죄 짓는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죄를 지었건 안 지었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솔직하고 진실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쳐들어 왔을 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요단강 건너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서 시온이 허물어지고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18절 내용은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온은 영적으로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개인적으로든지 교회적으로든지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하면 그 마음이 교회에서 멀어져 버립니다.
가만히 살펴 보면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도 사람과 사람이 다투어 마음이 상하면 교회와 멀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차츰차츰 형제 자매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교제를 싫어합니다. 혼자서 낙오자가 되버리는데 그게 죄의 결과입니다 뚜렷한 죄가 아닐지라도 형제 자매간에 마음이 상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시온이 허물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큰 문제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는 교회에서 마음이 떠나버리는 것이 바로 시온이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여 마음을 새롭게 하고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시온을 쌓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거기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수소는 주님을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산 제물로 드려져 흠향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대로 신앙이 완전하게 회복되어 하나님께 바쳐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 앞에 항상 진실하게 마음을 의지하며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여 힘차게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정확한 원리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