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 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악으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 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시 52:1-9)
아히멥렉에게 진설병을 대접 받은 다윗
이 시편 52편은 다윗이 사무엘상 21, 22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읊은 시입니다. 다윗이 그 장인 사울 왕을 피해 놉이라는 지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놉은 제사장들의 마을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직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신 때부터입니다.
다윗이 도망다니다가 너무 피곤하고 배가 고파 아히멜렉 이라는 제사장에게 가서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그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 성전 안에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덩이의 떡이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성소가 있는데 그 안에 지성소가 있고 12덩이의 떡이 진설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쪽에는 일곱 금촛대로 된 등대가 있고 지성소 회막 바로 앞에는 향단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항상 향을 피우는 역할을 제사장이 했습니다. 제사장은 진설병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새 떡을 갖다 놓고 또 묵은 떡을 물려내곤 합니다. 이 진설병은 제사장들이나 그 가족만 먹는 것이지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청하였을 때 이 진설병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진설병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 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1-8)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가다가 안식일에 제자들이 너무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셨지만 이곳 저곳을 전도하러 다니시는 동안 먹을 것이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일을 바리새인들이 비방했을 때 예수님은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진설병을 얻어 먹은 사건을 성경에서 인용하셨습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장차 왕이 될 사람이지만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너무도 시장하여 아히멜렉을 찾아가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것을 성경에서 읽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제사장은 아니지만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너무 시장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남의 밀밭 사이로 들어가 밀을 잘라 가지고 먹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심, 사랑, 은혜를 나타내시는 분이니까 길을 지나 가는 나그네가 너무 배가 고파서 하는 행위는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레 23:22)
다윗 왕 당시나 예수님 시대의 배 고픈 문제가 현재 우리들로서는 실감이 잘 안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렇게 시장할 때에 그걸 먹어도 상관이 없는데 유대인들은 그 날이 안식일인데 밀을 잘라 가지고 먹었으니까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따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고 대답하셨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서 시장기를 면한 것은 사랑의 하나님 께서 용납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통의 길,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다윗은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을 만나 떡을 먹은 뒤에 맨손으로 왔으니까 칼을 하나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을 통일시켜야 하고 또 싸워야 할 적들이 있었습니다. 그 적들은 사울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 가나안의 7족속들이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칠 때 쓴 칼이 성전 안에 있었는데 그 칼을 얻어 가지고 갔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을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다윗이 칼을 얻어 가지고 간 것은 자기를 죽이려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목자장이 된 에서의 후손 에돔 사람 도엑이 이 일을 사울에게 보고하여 다윗을 도운 아히멜렉을 비롯한 여러 제사장들을 칼로 쳐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울은 자기에게 아부하고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등용하였습니다. 심지어 이방 사람을 데려다가 신하로 삼고 자기의 목자장 노릇을 하게 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8-20)
누구든지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이 말씀을 명심하고 지켜야 합니다.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옆에 두고 읽어서 마음이 교만하여지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은 에돔 사람 도엑을 자기 목자장을 삼고 또 중요한 자리에 둔 것입니다. 도엑이 어떤 일로 아히멜렉에게 갔는지 모르지만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칼을 준 일을 고자질하여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도엑은 사울 왕의 명으로 마침내 그 칼로 제사장 85명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람이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을 취할 때 그만큼 악하고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울 왕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중에 블레셋 사람에게 죽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을 꾀한 도엑의 죄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시 52:1-3)
도엑이 사울 왕에게 아히멜렉에 대해서 고발한 그 말이 악하고 간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는 사울 왕에게 신임과 높임을 받게 됩니다. 사울 왕은 다른 신하들에게 제사장을 죽이라고 했는데
감히 제사장을 죽인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왕보다도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백성들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직접 가져가서 제사드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아히멜렉 제사장과 가족을 죽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벌벌 떨며 감히 그 일을 못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신하들이 감히 못하는 그 일을 이방인에게 시켰습니다. 도엑은 사울이 시키는 대로 행하여 그의 신임을 받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유익만을 구한 사람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가룟 유다 같은 사람입니다.
아히멜렉은 이 악한 혀와 생각을 가진 도엑과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제사장 아닌 사람에게 주었으니까 율법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 신하들이 처한 극한 상황을 보고 아히멜렉이 그 떡을 준 것은 그 속에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보통 사람이 아니고 기름 부은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이 그를 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엑은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고 보호하셔서 아히멜렉을 통해 한 이 일을 사울 왕에게 고해 바쳐 아히멜렉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도엑은 나중에 자기 혀를 잘못 놀린 그 죄로 인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나중에 사울 왕이 블레셋 사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죽은 후에 도엑의 운명도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피차간에 참소를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남을 저주하는 말을 하면 그 저주하는 말이 자기에게로 반드시 돌아옵니다. 무슨 악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마태복음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22-3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니까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힘입어서 쫓아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천국이 왔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성령으로 말 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성령으로 하신 일로 받아들였다면 그들에게 천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으로 하신 일을 귀신의 왕을 힘입어 쫓아낸다 하였으니 성령을 거역하고 성령을 욕한 것입니다.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 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4-37)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 사랑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준 것은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일입니다. 그것은 착한 일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는 분이므로 그 일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일인 그 일을 사울 왕에게 고해 바쳐 제사장들을 죽도록 만든 도엑의 죄는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그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매우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어도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지 않고 사랑 하신다면 그 사람을 악평하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 에 도전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따 라서 말은 우리 생활의 근원이고 생활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못하게 되면 사탄의 말이 됩니다. 사탄은 이것을 굉장히 기뻐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여인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그 여자를 이미 사랑으로 용서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들은 그들 자신이 죄인된 자로서 죄인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구원은 받았어도 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똑같은 죄는 아니더라도 제각기 여러 모양의 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남의 잘못을 함부로 평가하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가 과연 남이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 남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묘한 심리적인 작용과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남의 말을 하는 것은 별식과 같아서 배 속 깊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5-6)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 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말하는 것은 바로 사탄에게 속아서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지만 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맞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의 일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일이요 하나님 마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을 능가하고 법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일에 대해서 도엑은 혀를 놀려 악평을 했고 그 결과 엄청난 죽음을 가져왔는데 이것도 스스로 사탄에게 속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혀를 신중히 사용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 있는 말씀대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마음속에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말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다스려 가는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혀를 잘못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셀라)"(시 1403)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때로는 적절한 유머나 위트, 농담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서로 친밀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도 지나치면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형제나 자매들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100% 옳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얘기해 버리면 결국은 그 말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영히 악을 멸하시며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시 52:3)
도엑은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는 것을 본 그대로 얘기했습니다. 그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도엑의 말이 선보다 악을 사랑한 것이 되고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까?
여기서 우리는 도엑의 마음 상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엑은 우선적으로 그 말을 함으로써 사울 왕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자기의 욕심과 이권이 있었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였습니다. 아히멜렉의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사랑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 일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자신의 판단력이나 기준에서 함부로 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악의 길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시 52:4)
여기에 "말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하였는데 예레미야 15장에도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렘 15:16)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남의 말을 하는 것도 주의하고 또 남의 말을 듣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누가 이러쿵 저러쿵 남을 악평하는 따위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시 52:5)
현실적으로 도엑도 이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악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들을 영원히 멸망시킨다는 뜻입니다. 그 근원이 사탄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들은 다 멸망당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3-44)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면 근본적으로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마귀의 말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구원받기 전에 죄에 대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죄를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며 뉘우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가능한 것입니다.
마귀의 거짓말이 내 안에 들어 앉아 있으면 주님의 참된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알고 회개가 되어버리면 그때 주님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겸손한 사람에게만 들어옵니다. 그러나 높아진 마음도 회개가 되면 낮아집니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 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6-7)
도엑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사울 왕의 신하가 되었고 사울이 준 높은 자리에 서서 물질의 힘으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49편에 그 런 사람에 대한 말씀이 자세히 나옵니다.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12)
이런 사람들이 현실주의자이고 지금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상태에 있는 세상입니다. 머지않아 이 죄악 세상은 하나님의 큰 심판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면류관을 바라보고 사는 신앙생활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이 세상 사람들은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악평하고 핍박하지만 이 세상의 역사는 결국 정확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진행됩니다. 성경을 놓고 인류의 역사를 세밀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너무도 정확하시고 우리들의 미래도 너무 확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인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과 계획을 정확히 이해하고 확신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물질과 명예와 지위 따위로 힘을 삼고 세상을 열심히 사는 사람 들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죽음과 함께 시들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참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충실하게 신앙생활한 사람은 의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또 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면류관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눈에도 안 보이는 그 면류관을 위해 사는 엉뚱한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돌아가셨지만 다시 영광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은 근본적으로 목표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의 금 면류관은 현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경에 틀림없이 약속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바울이 말한 것처럼 틀림없이 우리에게도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여러가지 모양의 가시 면류관이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으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시 52:9)
도엑이 자기를 배반하고 아히멜렉을 죽이는 그런 일이 있었지만 결국 다윗은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전 가나안 땅을 아우르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겨 주님의 이름이 영원히 그곳에 거하게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다윗은 이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왕이 되기까지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결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함께하신 주님의 이름이 오늘날 우리 안에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여기 보면 "보혜사 곧 성령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신 것이 주님의 이름이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가운데 성령이 주님의 이름으로 거하시며 우리들을 인도하여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다윗처럼 그 길을 굳굳히 걸어가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히멥렉에게 진설병을 대접 받은 다윗
이 시편 52편은 다윗이 사무엘상 21, 22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읊은 시입니다. 다윗이 그 장인 사울 왕을 피해 놉이라는 지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놉은 제사장들의 마을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직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신 때부터입니다.
다윗이 도망다니다가 너무 피곤하고 배가 고파 아히멜렉 이라는 제사장에게 가서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그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 성전 안에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덩이의 떡이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성소가 있는데 그 안에 지성소가 있고 12덩이의 떡이 진설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쪽에는 일곱 금촛대로 된 등대가 있고 지성소 회막 바로 앞에는 향단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항상 향을 피우는 역할을 제사장이 했습니다. 제사장은 진설병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새 떡을 갖다 놓고 또 묵은 떡을 물려내곤 합니다. 이 진설병은 제사장들이나 그 가족만 먹는 것이지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청하였을 때 이 진설병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진설병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 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1-8)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가다가 안식일에 제자들이 너무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셨지만 이곳 저곳을 전도하러 다니시는 동안 먹을 것이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일을 바리새인들이 비방했을 때 예수님은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진설병을 얻어 먹은 사건을 성경에서 인용하셨습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장차 왕이 될 사람이지만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너무도 시장하여 아히멜렉을 찾아가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것을 성경에서 읽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제사장은 아니지만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너무 시장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남의 밀밭 사이로 들어가 밀을 잘라 가지고 먹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심, 사랑, 은혜를 나타내시는 분이니까 길을 지나 가는 나그네가 너무 배가 고파서 하는 행위는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레 23:22)
다윗 왕 당시나 예수님 시대의 배 고픈 문제가 현재 우리들로서는 실감이 잘 안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렇게 시장할 때에 그걸 먹어도 상관이 없는데 유대인들은 그 날이 안식일인데 밀을 잘라 가지고 먹었으니까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따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고 대답하셨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서 시장기를 면한 것은 사랑의 하나님 께서 용납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통의 길,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다윗은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을 만나 떡을 먹은 뒤에 맨손으로 왔으니까 칼을 하나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을 통일시켜야 하고 또 싸워야 할 적들이 있었습니다. 그 적들은 사울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 가나안의 7족속들이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칠 때 쓴 칼이 성전 안에 있었는데 그 칼을 얻어 가지고 갔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을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다윗이 칼을 얻어 가지고 간 것은 자기를 죽이려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목자장이 된 에서의 후손 에돔 사람 도엑이 이 일을 사울에게 보고하여 다윗을 도운 아히멜렉을 비롯한 여러 제사장들을 칼로 쳐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울은 자기에게 아부하고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등용하였습니다. 심지어 이방 사람을 데려다가 신하로 삼고 자기의 목자장 노릇을 하게 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누구든지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이 말씀을 명심하고 지켜야 합니다.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옆에 두고 읽어서 마음이 교만하여지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은 에돔 사람 도엑을 자기 목자장을 삼고 또 중요한 자리에 둔 것입니다. 도엑이 어떤 일로 아히멜렉에게 갔는지 모르지만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칼을 준 일을 고자질하여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도엑은 사울 왕의 명으로 마침내 그 칼로 제사장 85명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람이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을 취할 때 그만큼 악하고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울 왕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중에 블레셋 사람에게 죽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을 꾀한 도엑의 죄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시 52:1-3)
도엑이 사울 왕에게 아히멜렉에 대해서 고발한 그 말이 악하고 간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는 사울 왕에게 신임과 높임을 받게 됩니다. 사울 왕은 다른 신하들에게 제사장을 죽이라고 했는데
감히 제사장을 죽인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왕보다도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백성들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직접 가져가서 제사드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아히멜렉 제사장과 가족을 죽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벌벌 떨며 감히 그 일을 못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신하들이 감히 못하는 그 일을 이방인에게 시켰습니다. 도엑은 사울이 시키는 대로 행하여 그의 신임을 받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유익만을 구한 사람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가룟 유다 같은 사람입니다.
아히멜렉은 이 악한 혀와 생각을 가진 도엑과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제사장 아닌 사람에게 주었으니까 율법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 신하들이 처한 극한 상황을 보고 아히멜렉이 그 떡을 준 것은 그 속에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보통 사람이 아니고 기름 부은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이 그를 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엑은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고 보호하셔서 아히멜렉을 통해 한 이 일을 사울 왕에게 고해 바쳐 아히멜렉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도엑은 나중에 자기 혀를 잘못 놀린 그 죄로 인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나중에 사울 왕이 블레셋 사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죽은 후에 도엑의 운명도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피차간에 참소를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남을 저주하는 말을 하면 그 저주하는 말이 자기에게로 반드시 돌아옵니다. 무슨 악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마태복음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22-3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니까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힘입어서 쫓아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천국이 왔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성령으로 말 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성령으로 하신 일로 받아들였다면 그들에게 천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으로 하신 일을 귀신의 왕을 힘입어 쫓아낸다 하였으니 성령을 거역하고 성령을 욕한 것입니다.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 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4-37)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 사랑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준 것은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일입니다. 그것은 착한 일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는 분이므로 그 일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일인 그 일을 사울 왕에게 고해 바쳐 제사장들을 죽도록 만든 도엑의 죄는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그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매우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어도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지 않고 사랑 하신다면 그 사람을 악평하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 에 도전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따 라서 말은 우리 생활의 근원이고 생활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못하게 되면 사탄의 말이 됩니다. 사탄은 이것을 굉장히 기뻐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여인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그 여자를 이미 사랑으로 용서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들은 그들 자신이 죄인된 자로서 죄인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구원은 받았어도 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똑같은 죄는 아니더라도 제각기 여러 모양의 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남의 잘못을 함부로 평가하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가 과연 남이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 남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묘한 심리적인 작용과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남의 말을 하는 것은 별식과 같아서 배 속 깊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5-6)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 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말하는 것은 바로 사탄에게 속아서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지만 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맞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의 일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일이요 하나님 마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을 능가하고 법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일에 대해서 도엑은 혀를 놀려 악평을 했고 그 결과 엄청난 죽음을 가져왔는데 이것도 스스로 사탄에게 속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혀를 신중히 사용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 있는 말씀대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마음속에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말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다스려 가는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혀를 잘못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때로는 적절한 유머나 위트, 농담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서로 친밀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도 지나치면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형제나 자매들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100% 옳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얘기해 버리면 결국은 그 말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영히 악을 멸하시며
도엑은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는 것을 본 그대로 얘기했습니다. 그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도엑의 말이 선보다 악을 사랑한 것이 되고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까?
여기서 우리는 도엑의 마음 상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엑은 우선적으로 그 말을 함으로써 사울 왕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자기의 욕심과 이권이 있었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였습니다. 아히멜렉의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사랑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 일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자신의 판단력이나 기준에서 함부로 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악의 길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말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하였는데 예레미야 15장에도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렘 15:16)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남의 말을 하는 것도 주의하고 또 남의 말을 듣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누가 이러쿵 저러쿵 남을 악평하는 따위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도엑도 이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악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들을 영원히 멸망시킨다는 뜻입니다. 그 근원이 사탄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들은 다 멸망당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3-44)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면 근본적으로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마귀의 말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구원받기 전에 죄에 대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죄를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며 뉘우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가능한 것입니다.
마귀의 거짓말이 내 안에 들어 앉아 있으면 주님의 참된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알고 회개가 되어버리면 그때 주님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겸손한 사람에게만 들어옵니다. 그러나 높아진 마음도 회개가 되면 낮아집니다.
도엑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사울 왕의 신하가 되었고 사울이 준 높은 자리에 서서 물질의 힘으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49편에 그 런 사람에 대한 말씀이 자세히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현실주의자이고 지금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상태에 있는 세상입니다. 머지않아 이 죄악 세상은 하나님의 큰 심판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면류관을 바라보고 사는 신앙생활
이 세상 사람들은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악평하고 핍박하지만 이 세상의 역사는 결국 정확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진행됩니다. 성경을 놓고 인류의 역사를 세밀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너무도 정확하시고 우리들의 미래도 너무 확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인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과 계획을 정확히 이해하고 확신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물질과 명예와 지위 따위로 힘을 삼고 세상을 열심히 사는 사람 들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죽음과 함께 시들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참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충실하게 신앙생활한 사람은 의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또 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면류관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눈에도 안 보이는 그 면류관을 위해 사는 엉뚱한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돌아가셨지만 다시 영광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은 근본적으로 목표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의 금 면류관은 현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경에 틀림없이 약속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바울이 말한 것처럼 틀림없이 우리에게도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여러가지 모양의 가시 면류관이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으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도엑이 자기를 배반하고 아히멜렉을 죽이는 그런 일이 있었지만 결국 다윗은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전 가나안 땅을 아우르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겨 주님의 이름이 영원히 그곳에 거하게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다윗은 이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왕이 되기까지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결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함께하신 주님의 이름이 오늘날 우리 안에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여기 보면 "보혜사 곧 성령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신 것이 주님의 이름이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가운데 성령이 주님의 이름으로 거하시며 우리들을 인도하여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다윗처럼 그 길을 굳굳히 걸어가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