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친 저회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53:1-6)
시편 53편은 시편 14편과 비슷한 내용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의 부패하고 악한 모습과 그 운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무신론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학문이 많고 똑똑하고 머리가 좋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리숙하고 미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 이 시대는 인간의 지식으로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는 시점에까지 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본래 신앙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진화론을 믿는 사람이 많은가 하면 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극히 적습니다.
차츰차츰 이 세상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가고 있는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굉장히 큰 축복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53편은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마할랏은 어떤 악기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스길이라는 말은 교훈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이 교훈하면서 어떤 악기에 맞추어 가지고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선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회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사람 속에는 인간의 의와 소위 정의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데 정의(正義) 에다가 바탕을 두고 논리를 전개해 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인간의 정의에 입각해서 보면 맞지 않는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인간의 방법대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신이 없다는 개념에서 출발하는데 가장 평등하고 평화로운 이상적인 세계를 신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다는 무신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 막스는 본래 유대인으로서 구약 성경을 토대로 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성경에는 메시야에 의한 이상 국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메시야가 나타나면 그 메시야로 인해 평등하고 풍성한 사회가 되어 지배 계급이나 피지배 계급이 없는 살기 좋은 세상이 온다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2장이나 11장에 굉장히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가 온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 세계가 너무도 부조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게 됩니다. 결국은 성경은 옛날에 어떤 사람이 하나의 이상주의적인 이론을 써놓은 것이니까 그것을 인간의 사상과 방법으로 실천을 해가면 어느 날 이 지상에 이상주의적인 세계가 온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어느 날 인간들이 그런 사회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무자비한 투쟁과 혁명까지도 불사하면서 그 이상의 세계에 도달할 때까지 강한 힘으로 밀어 붙여야 한다는 이상론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마저도 붕괴되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서는 그런 이상주의적인 세계가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생각과 사상은 하나님을 도전하고 배반하는 힘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강간하고 심지어 사람을 납치해다가 파는 악한 일들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나 악은 그런 일반적인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악입니다. 사람들은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강도짓하는 것이 죄인 줄은 알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 줄은 모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죄의 가장 근본이고 그 아래 모든 죄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실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내 생각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고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행실은 올바른 행실대로 그릇된 행실은 그릇된 행실대로 낱낱이 계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나중에 구원 받은 사람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 보면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고 했는데 그 가느다란 하나님의 음성이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데 그걸 무시하고 억눌러 버립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욕심이 생기는 대로 행동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활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활입니다.
물론 구원 안 받은 사람들 중에도 양심이 예민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시각에서 이 성경을 읽으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패하여 악을 행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다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선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선한 일을 위해 살아가는 삶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몬 1:6)
여기서 선을 알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선을 생각하게 되면 성경은 완전히 도덕 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선사업과 같은 착한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그 선한 일은 통속적인 선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사실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 안에 들어와서 그 지체가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일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구원받았고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영원한 천국은 교회가 완성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계획이요 영원한 천국을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말씀은 어린 양인 예수님의 아내인 교회를 말하 는 것입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 21:9-10)
하늘에 있는 영원한 예루살렘은 영원한 천국이지만 현재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영원한 천국을 계획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의 세계를 이루어갈 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영원한 천국을 설계하셨고 우리를 그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지니고 있고 또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치 않지만 때로 거짓말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이 그 선한 뜻 안에 참예해 있으면 우리의 삶이 선한 일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각 있는 자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53:2)
하나님은 하늘에서 지각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를 굽어 살피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철학자나 과학자를 지각 있는 자라 합 니다. 또 어떤 종교인들을 가리켜서 지각 있는 자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각은 그런 세상 철학이나 과학, 종교나 사상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참 지각이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미국의 디엘 무디와 성경 다음으로 제일 많이 팔린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쓴 존 번연 같은 사람들은 이 세상 학문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국민학교 정도의 학벌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위대한 발자취를 이 세상에 남겼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은 그 책이 나온 지가 수백 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존 번연의 전기를 읽어 보면 어릴 때 굉장히 난폭한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존 번연은 어느 날 부인이 먼저 구원을 받고 그에게 권해서 나중에 구원을 받았는데 옥중 생활을 10년 이상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깊은 사실들을 알아갔고 그것을 바탕으로 천로역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글들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존 번연에게 지혜의 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은 참된 지각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도 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면 생각이 트이고 보통 사람이 잘 모르는 것을 찾아내는 힘이 생깁니다.이런 것이 진짜 지각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각이 있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으니까 일차적으로는 지각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주님을 좀더 깊이 알아가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회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더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지만 극히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서전을 썼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자서전을 읽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대략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략은 알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깊이 알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 함께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그 사람에 대해서 깊은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으면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이 되어 주신다는 것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내게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닥칠 때에 그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는 그 주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면 알수록 은혜와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회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회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벧후 1:3-9)
예수님을 깊이 알아갈 수 있는 것이 지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지각이 있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지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무지한 자들의 핍박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시 53:4)
여기에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다고 하였는데 죄의 근원인 에덴 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은 아직은 선도 모르고 악도 몰랐습니다. 아담은 지금 우리하고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벌써 악을 가지고 있고 또 선도 알고 있습니다. 그 아담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 속에 들어가버리면 아담은 완전히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에게는 그만 사탄의 말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와에게 들어간 사탄의 말이 그 다음에 아담에게도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사탄의 말이 마음에 들어가 버리자 아담은 무지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지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되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한 마디를 아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리의 무지가 한 꺼풀씩 벗겨지는 만큼 성경이 이해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그 무지한 것이 다 벗겨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디엘 무디나 찰스 피니 같이 주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은 성경이 열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저희는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사탄의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고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제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하고 못살게 굴었던 우상 숭배하는 백성들도 사탄에게 완전히 잡혀 사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성령이 없고 사탄의 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아주 기뻐하는 마음으로 잡아 먹습니다. 그러한 일을 예수님에게도 하고 또 나중에는 교회에게 계속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하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죽였던 그 악의 세력들이 교회시대에 와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삼키려 하는 것입니다. 떡 먹듯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 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
사람을 죽이는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면서 아주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로마의 대박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는데 어쩌다 붙잡히면 원형 극장 안에서 사자들과 싸움을 시켰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검투사가 있으면 다른 검투사와 칼싸움을 시키고 여러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사자 굴을 열고 사자가 나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먹으면 술을 마시면서 그걸 좋아하였습니다.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 황제 숭배는 태양신 숭배와 연결됩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부터 니므롯은 하늘의 황제 태양신이 되었고 그 아내 세미라미는 하늘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 사상이 죽 이어져서 로마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나중에 로마 황제는 태양신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도 원래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축제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 로마 박해 시대에는 태양신 숭배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떡 먹듯이 잡아 죽였던 것입니다.
「카타콤의 순교자」라는 책을 보면 그러한 내용이 자세히 나옵니다. 카타콤은 원래 성을 쌓기 위해 흙을 파낸 굴인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핍박을 피해 이 굴 속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밖에서 비밀리에 양식을 구해다 먹었는데 어쩌다 그리스도인이 잡히게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 그들을 살육하는 잔치를 베풀며 희희낙락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요 종교의 자유가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은 있을 수 없지만 지난 우리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고 핍박하는 일들이 꾸준히 계속되어 왔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도 복음의 역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중국에 가 있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산주의가 들어오면서 구원받은 사람을 굉장히 많이 죽였다고 합니다.
워치만 니 같은 이들도 옥중에서 죽었고 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지만 그걸 드러내 놓고 말을 못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배자인 사탄이 항상 우리를 공격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시 53:5)
이 말씀에는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동생을 죽인 사건이 나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은 모른다고 둘러댔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소리를 친다. 너는 저주를 받게 되고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가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큰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가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를 만나면 자기를 죽일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어떤 표를 주어 죽임을 면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인이 비록 동생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를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입니다. 그 때 가인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자비로운 분이구나. 내가 하나님을 몰랐었구나' 하며 그 하나님을 알고 그 앞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의 말이 가인의 마음 속에는 깨달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악이 있고 사탄의 법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창 4:16-17)
여기 보면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왜 하나님을 떠났습니까? 하나님 앞에 있으면 굉장히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때려 죽인 아우의 핏소리를 하나님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하나님 앞에 있으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에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는데 가인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가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터인데도 스스로의 생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떠난 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동생의 핏소리가 들린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해칠까봐 무서워 성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전부 성을 쌓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성을 쌓고 삽니다. 이 인간 사회는 전부 성을 쌓고 살아갑니다.
국가는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개인 사이에도 마음에 성을 쌓습니다.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5)
이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시 36:5)
이 세상의 모든 자연법칙 속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다"(마 5:4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그 앞에 살기만 하면 절대로 두려운 곳이 아닙니다.
"너를 대하여 진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람이 산 길을 혼자 걷다가 해골이 하나 있으면 기겁을 할 것입니다. 해골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힘도 없고 생명도 없고 돌멩이 가지고 때려 버리면 부수어질 것인데 왜 겁을 냅니까? 참으로 이상합니다. 사람의 뼈라는 것은 생명도 아무런 힘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진치고 있는 그들은 하나님 보실 때에는 생명도 없고 힘도 없는 뼈와 같은데 두려워할 필요가'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위협하고 핍박하고 떡 먹듯이 먹으려고 달려 들어도 예수님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 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육신뿐이라면 이 육신뿐인 인간은 결국은 뼈뿐입니다. 생명도 능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인류 역사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 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 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회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1-6)
에스겔 선지자에게 골짜기에 있는 뼈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온 세계에 흩어졌는데 뼈처럼 힘도 없고 생명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힘을 주어서 회복시켜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뼈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생명체가 아니라 뼈처럼 보일 것입니다.
지금 중동 사태를 주시해 보면 온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도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는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에는 이방에 흩어져서 노예 생활하고 이방에 붙잡혀 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그대로 놔두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생기를 주어 힘을 얻게 하고 이스라엘로 모아들이시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갑니다.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일은 틀어지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혹 이 세상에 살면서 핍박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육신은 뼈뿐이지만 구원받은 생명은 건드릴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쩌다가 순교를 하게 된다면 세상에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또 순교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고생도 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53:6)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실 때 이스라엘은 완전히 복귀되고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결국 이 지상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온 세계가 예수님에 의해 통치되는 천년왕국이 형성되는 시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 53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힘써 자기 의를 지키 거나 악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모습과 운명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그 일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시편 53편은 시편 14편과 비슷한 내용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의 부패하고 악한 모습과 그 운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무신론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학문이 많고 똑똑하고 머리가 좋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리숙하고 미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 이 시대는 인간의 지식으로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는 시점에까지 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본래 신앙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진화론을 믿는 사람이 많은가 하면 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극히 적습니다.
차츰차츰 이 세상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가고 있는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굉장히 큰 축복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53편은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마할랏은 어떤 악기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스길이라는 말은 교훈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이 교훈하면서 어떤 악기에 맞추어 가지고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선
사람 속에는 인간의 의와 소위 정의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데 정의(正義) 에다가 바탕을 두고 논리를 전개해 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인간의 정의에 입각해서 보면 맞지 않는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인간의 방법대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신이 없다는 개념에서 출발하는데 가장 평등하고 평화로운 이상적인 세계를 신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다는 무신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 막스는 본래 유대인으로서 구약 성경을 토대로 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성경에는 메시야에 의한 이상 국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메시야가 나타나면 그 메시야로 인해 평등하고 풍성한 사회가 되어 지배 계급이나 피지배 계급이 없는 살기 좋은 세상이 온다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2장이나 11장에 굉장히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가 온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 세계가 너무도 부조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게 됩니다. 결국은 성경은 옛날에 어떤 사람이 하나의 이상주의적인 이론을 써놓은 것이니까 그것을 인간의 사상과 방법으로 실천을 해가면 어느 날 이 지상에 이상주의적인 세계가 온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어느 날 인간들이 그런 사회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무자비한 투쟁과 혁명까지도 불사하면서 그 이상의 세계에 도달할 때까지 강한 힘으로 밀어 붙여야 한다는 이상론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마저도 붕괴되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서는 그런 이상주의적인 세계가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생각과 사상은 하나님을 도전하고 배반하는 힘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강간하고 심지어 사람을 납치해다가 파는 악한 일들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나 악은 그런 일반적인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악입니다. 사람들은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강도짓하는 것이 죄인 줄은 알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 줄은 모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죄의 가장 근본이고 그 아래 모든 죄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실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내 생각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고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행실은 올바른 행실대로 그릇된 행실은 그릇된 행실대로 낱낱이 계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나중에 구원 받은 사람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 보면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고 했는데 그 가느다란 하나님의 음성이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데 그걸 무시하고 억눌러 버립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욕심이 생기는 대로 행동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활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활입니다.
물론 구원 안 받은 사람들 중에도 양심이 예민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시각에서 이 성경을 읽으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패하여 악을 행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다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선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선한 일을 위해 살아가는 삶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몬 1:6)
여기서 선을 알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선을 생각하게 되면 성경은 완전히 도덕 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선사업과 같은 착한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그 선한 일은 통속적인 선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사실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 안에 들어와서 그 지체가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일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구원받았고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영원한 천국은 교회가 완성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계획이요 영원한 천국을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말씀은 어린 양인 예수님의 아내인 교회를 말하 는 것입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 21:9-10)
하늘에 있는 영원한 예루살렘은 영원한 천국이지만 현재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영원한 천국을 계획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의 세계를 이루어갈 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영원한 천국을 설계하셨고 우리를 그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지니고 있고 또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치 않지만 때로 거짓말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이 그 선한 뜻 안에 참예해 있으면 우리의 삶이 선한 일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각 있는 자
하나님은 하늘에서 지각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를 굽어 살피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철학자나 과학자를 지각 있는 자라 합 니다. 또 어떤 종교인들을 가리켜서 지각 있는 자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각은 그런 세상 철학이나 과학, 종교나 사상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참 지각이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미국의 디엘 무디와 성경 다음으로 제일 많이 팔린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쓴 존 번연 같은 사람들은 이 세상 학문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국민학교 정도의 학벌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위대한 발자취를 이 세상에 남겼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은 그 책이 나온 지가 수백 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존 번연의 전기를 읽어 보면 어릴 때 굉장히 난폭한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존 번연은 어느 날 부인이 먼저 구원을 받고 그에게 권해서 나중에 구원을 받았는데 옥중 생활을 10년 이상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깊은 사실들을 알아갔고 그것을 바탕으로 천로역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글들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존 번연에게 지혜의 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은 참된 지각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도 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면 생각이 트이고 보통 사람이 잘 모르는 것을 찾아내는 힘이 생깁니다.이런 것이 진짜 지각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각이 있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으니까 일차적으로는 지각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주님을 좀더 깊이 알아가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회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더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지만 극히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서전을 썼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자서전을 읽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대략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략은 알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깊이 알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 함께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그 사람에 대해서 깊은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으면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이 되어 주신다는 것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내게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닥칠 때에 그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는 그 주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면 알수록 은혜와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회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회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벧후 1:3-9)
예수님을 깊이 알아갈 수 있는 것이 지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지각이 있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지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무지한 자들의 핍박
여기에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다고 하였는데 죄의 근원인 에덴 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은 아직은 선도 모르고 악도 몰랐습니다. 아담은 지금 우리하고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벌써 악을 가지고 있고 또 선도 알고 있습니다. 그 아담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 속에 들어가버리면 아담은 완전히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에게는 그만 사탄의 말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와에게 들어간 사탄의 말이 그 다음에 아담에게도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사탄의 말이 마음에 들어가 버리자 아담은 무지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지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되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한 마디를 아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리의 무지가 한 꺼풀씩 벗겨지는 만큼 성경이 이해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그 무지한 것이 다 벗겨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디엘 무디나 찰스 피니 같이 주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은 성경이 열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저희는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사탄의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고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제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하고 못살게 굴었던 우상 숭배하는 백성들도 사탄에게 완전히 잡혀 사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성령이 없고 사탄의 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아주 기뻐하는 마음으로 잡아 먹습니다. 그러한 일을 예수님에게도 하고 또 나중에는 교회에게 계속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하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죽였던 그 악의 세력들이 교회시대에 와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삼키려 하는 것입니다. 떡 먹듯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 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
사람을 죽이는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면서 아주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로마의 대박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는데 어쩌다 붙잡히면 원형 극장 안에서 사자들과 싸움을 시켰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검투사가 있으면 다른 검투사와 칼싸움을 시키고 여러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사자 굴을 열고 사자가 나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먹으면 술을 마시면서 그걸 좋아하였습니다.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 황제 숭배는 태양신 숭배와 연결됩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부터 니므롯은 하늘의 황제 태양신이 되었고 그 아내 세미라미는 하늘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 사상이 죽 이어져서 로마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나중에 로마 황제는 태양신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도 원래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축제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 로마 박해 시대에는 태양신 숭배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떡 먹듯이 잡아 죽였던 것입니다.
「카타콤의 순교자」라는 책을 보면 그러한 내용이 자세히 나옵니다. 카타콤은 원래 성을 쌓기 위해 흙을 파낸 굴인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핍박을 피해 이 굴 속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밖에서 비밀리에 양식을 구해다 먹었는데 어쩌다 그리스도인이 잡히게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 그들을 살육하는 잔치를 베풀며 희희낙락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요 종교의 자유가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은 있을 수 없지만 지난 우리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고 핍박하는 일들이 꾸준히 계속되어 왔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도 복음의 역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중국에 가 있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산주의가 들어오면서 구원받은 사람을 굉장히 많이 죽였다고 합니다.
워치만 니 같은 이들도 옥중에서 죽었고 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지만 그걸 드러내 놓고 말을 못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배자인 사탄이 항상 우리를 공격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에는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동생을 죽인 사건이 나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은 모른다고 둘러댔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소리를 친다. 너는 저주를 받게 되고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가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큰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가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를 만나면 자기를 죽일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어떤 표를 주어 죽임을 면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인이 비록 동생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를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입니다. 그 때 가인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자비로운 분이구나. 내가 하나님을 몰랐었구나' 하며 그 하나님을 알고 그 앞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의 말이 가인의 마음 속에는 깨달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악이 있고 사탄의 법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창 4:16-17)
여기 보면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왜 하나님을 떠났습니까? 하나님 앞에 있으면 굉장히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때려 죽인 아우의 핏소리를 하나님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하나님 앞에 있으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에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는데 가인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가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터인데도 스스로의 생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떠난 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동생의 핏소리가 들린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해칠까봐 무서워 성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전부 성을 쌓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성을 쌓고 삽니다. 이 인간 사회는 전부 성을 쌓고 살아갑니다.
국가는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개인 사이에도 마음에 성을 쌓습니다.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자연법칙 속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다"(마 5:4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그 앞에 살기만 하면 절대로 두려운 곳이 아닙니다.
"너를 대하여 진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람이 산 길을 혼자 걷다가 해골이 하나 있으면 기겁을 할 것입니다. 해골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힘도 없고 생명도 없고 돌멩이 가지고 때려 버리면 부수어질 것인데 왜 겁을 냅니까? 참으로 이상합니다. 사람의 뼈라는 것은 생명도 아무런 힘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진치고 있는 그들은 하나님 보실 때에는 생명도 없고 힘도 없는 뼈와 같은데 두려워할 필요가'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위협하고 핍박하고 떡 먹듯이 먹으려고 달려 들어도 예수님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 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육신뿐이라면 이 육신뿐인 인간은 결국은 뼈뿐입니다. 생명도 능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인류 역사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 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 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회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1-6)
에스겔 선지자에게 골짜기에 있는 뼈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온 세계에 흩어졌는데 뼈처럼 힘도 없고 생명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힘을 주어서 회복시켜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뼈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생명체가 아니라 뼈처럼 보일 것입니다.
지금 중동 사태를 주시해 보면 온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도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는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에는 이방에 흩어져서 노예 생활하고 이방에 붙잡혀 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그대로 놔두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생기를 주어 힘을 얻게 하고 이스라엘로 모아들이시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갑니다.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일은 틀어지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혹 이 세상에 살면서 핍박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육신은 뼈뿐이지만 구원받은 생명은 건드릴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쩌다가 순교를 하게 된다면 세상에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또 순교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고생도 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실 때 이스라엘은 완전히 복귀되고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결국 이 지상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온 세계가 예수님에 의해 통치되는 천년왕국이 형성되는 시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 53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힘써 자기 의를 지키 거나 악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모습과 운명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그 일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