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5:1-23)
이 시편 55편은 54편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54편은 십 사람들이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 왕에게 고발하여 사울 왕으로 하여금 다윗을 추적하게 한 상황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올린 기도였습니다. 이 55편도 다윗이 같은 상황에서 한 기도인데 54편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림자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인 십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 왕에게 밀고한 것은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결탁을 해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빌라도에게 간청을 하여 재판을 받게 하는 일의 예시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이 시편에는 굉장히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시편을 읽으면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와 다윗이 올린 이 기도는 일맥 상통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라는 간단한 말을 세 번 반복하는 내용이지만 그 기도의 이면에 매우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시편이나 그밖의 구약에 있는 여러 말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의 원리를 배워가지만 이 신약 성경의 뿌리는 구약 성경인 것입니다. 가령,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사실 속에 숨어 있는 심오한 진리는 구약을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속죄 제물과 번제물이 되시는, 근본적이고 세밀한 내용은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를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가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대략적인 사실만 알 수 있고 이면에 숨어 있는 깊은 뜻은 알기 어렵습니다.
창세기는 요셉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말씀들은 현재 우리들이 구원받고 참된 마음의 평화를 발견한 이후에 신앙생활 속에서 생활의 구원과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어가는 문제가 그림자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같은 말씀들이 없으면 신약시대에 우리가 주님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시 55:1)
다윗은 마치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는 것 같은 답답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숨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의 마음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숨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욥도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3-9)
저도 구원받은 지 몇 년 후에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괴로운 때가 있었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캄캄하여 하나님을 아무리 찾아도 안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에 저는 이 욥기 23장을 읽다가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는 8절 말씀을 역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주님이 내 왼편에도 계시고 오른편에도 계시는구나. 나와 지극히 가까운 곳에 계시구나. 다만 내가 주님을 이 순간에 못 보고 있는 것뿐이로구나'하고 깨달아졌습니다. 성경이 어떤 때는 이렇게 역으로 깨달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윗은 가장 가까운 유다 지파 사람들이 자기를 사울에게 고발하여 사울 왕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상황에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리고 숨어 계시지 마시고 제발 나타나십시오.'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만하시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십시오."라고 부르짖으신 주님의 기도의 그림자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신 예수님
전혀 죄가 없으신 주님이 우리들의 죄를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하는 일이 주님으로서는 굉장한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별로 고통이 없이 쉽게 우리의 죄짐을 지셨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이 어느 정도인지 체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가 조금은 어렵습니다. 주님은 죄와 전혀 관계 없으신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고난을 받으셔야 합니까? 주님은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기 위해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순종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가 없습니다.
다윗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도 억울하게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는데 그런 일을 왜 당하느냐 하면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고난을 받지 않으면 순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말의 뜻을 알지만 실지로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을 배워가는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의 과정입니다.
어떤 괴로움과 고통이 너무 심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운 때에 만일 순종을 참으로 배운다면 신앙생활의 큰 진보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간구했습니다.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굽어 보시는 하나님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시 55:2)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중에 잡힌 여자를 바리새인들이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 고발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이 허리를 굽혀서 땅에다 글씨를 쓰셨습니다. 주님이 허리를 굽히신다는 말씀은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라는 다윗의 기도와 일맥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자꾸 재촉을 하니까 예수님이 허리를 일으켜 그들을 보시더니 "너희들 가운데 죄가 없는 자가 있으면 돌을 들어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굽어 보실 때에 율법의 기준에서 보면 전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도 하나님 앞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인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허리를 굽혀서 글씨를 쓰셨는데 여자에게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고 두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굽어 보실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기서 "내게 굽히사"라는 말은 굽혀서 절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움으로 나를 굽어 살펴주시라는 뜻입니다.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와 똑같은 내용입니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싫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 없으신 육신을 가진 주님이 온 세상 죄를 다 짊어지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주님의 고통이 없었다면 주님이 우리 죄를 지신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아주 심각한 고통을 당하신 거기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주님과 하나님만 알 수 있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사탄의 도구들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회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시 55:3)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은 예수님이 담당하시지만 그 도구 역할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제사장들과 로마의 군인들이 하였습니다. 이들이 주님께 죄를 덮어 씌워서 죽이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당하는 핍박도 이와 비슷합니다. 골리앗을 처치하여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므로 사울이 시기하여 다윗에게 죄를 덮어 씌워 그를 죽이려는 과정이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고난당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최를 삼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비둘기는 죄 짐을 지신 예수님의 그림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시 55:4-7)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입니다. 레위기 14장을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문등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레 14:1-7)
이 문둥병은 죄를 상징합니다.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에는 문둥병 환자가 상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문둥병 환자는 죄를 상징하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진영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문둥병이 나아도 정결함을 받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 속에 못 들어왔습니다. 제사장은 문둥병 환자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또 명하여 새 한 마리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습니다. 이 새가 두 마리지만 사실은 한 마리입니다. 한 마리는 죽는 것을 상징하고 또 한 마리는 날아가는 것을 상징하므로 두 마리가 필요합니다.
백향목은 높은 나무이고 우슬초는 담 밑에 나는 풀로 가장 낮은 식물입니다. 홍색실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새를 잡아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함께 가져다가 새 피를 찍는 것은 높은 사람의 죄나 낮은 사람의 죄나 율법을 범한 사람의 죄가 모두 그 피로 용서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들에 놓아 준 살아있는 새는 멀리 멀리 공중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그 새는 죄 짐을 지신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시편 55편 4절. 5절을 보면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 7절에는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비둘기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때 문둥병자를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사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비둘기처럼 멀리멀리 날아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문둥병자 같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 죄 를 멀리멀리 옮기셨습니다. 광야에 옮기셨다는 말은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무덤 속에 죄와 함께 완전히 묻히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리 죄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멀리 가 버렸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다윗은 이렇게 시적인 표현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죄악과 횡포가 가득한 무리들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시 55:8-11)
다윗은 고향이 베들레헴이었지만 장차 예루살렘에서 왕노릇을 하도록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당시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고 사울은 십 사람들과 함께 다윗을 죽이려는 모의를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울과 그 무리들의 그 당시의 강포와 죄악과 잔해가 묘사되어 있지만 이것 역시 예수님 시대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세력이 와서 머물고 있고 종교적으로도 너무너무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는 광경이 여기에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악과 횡포가 가득한 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시면 이 기도가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나중에 부활 승천하시게 됩니다.
자기 백성에게 배반당하신 예수님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시 55:12-14)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 말씀을 좋아하던 사람들, 한때에는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예수님을 칭찬하고 높이던 사람들, 제사장과 서기관들, 모두가 예수님의 동족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1)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일차적으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물론 은 세상 인류의 죄를 위하여 오셨지만 현실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적으로는 예수님과 같은 민족인 그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린 사실을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라'며 다윗을 높이던 그들이 돌아서서는 사울 왕 편이 되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이 예수님이 당한 상황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한때 구원받고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 중에서 나중에 교회를 떠나 악한 말로 비방하고 거짓 증거까지 서슴지 않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에게 조금 손해보는 일이 생긴다 싶으면 교회를 등지고 형제 자매를 원수시하는 그 마음이 바로 육신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의 육신 속에 있습니다. 육신은 절대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육신 안에 있는 사탄과 성령이 싸우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서로 내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믿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께 마음을 지켜 달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지켜지는 것도 주님께 달린 것입니다. 잠언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했는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지 자신이 스스로 다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하잘 것 없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께 의지하여 지켜 달라고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당할 때 자신의 지혜나 지식, 의지력만을 과시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마음이 바로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던 백성들이 오히려 등을 돌리고 원수시할 때 주님의 마음은 더욱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어느날 주님은 감람산 쪽에서 예루살렘을 건너다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주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요 나중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완전히 회복되어 영광스럽게 될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는 그 예루살렘이 완전히 죄악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는 죄악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2, 3장에 나타난 일곱 교회 중에 두아디라 교회는 완전히 죄의 소굴입니다. 사탄의 시험과 꾀에 넘어가 완전히 사탄에게 사로잡힌 교회입니다.
신앙생활은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
사탄은 아담을 시험하여 넘어뜨린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이 세상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을 시험에 넘어뜨려 세상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세상을 빼앗고 예수님은 잃어버린 것을 완전히 다시 찾으시는 것이 인류 역사의 과정입니다.
이기면 다 찾고 지면 빼앗겨 버리는 시험이 있는데 그 시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생활 속에도 여러 가지 시험이 찾아오는데 그 시험에 넘어지면 복을 잃어 버립니다. 그대신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면 잃어버렸던 것을 도로 찾게 됩니다. 아담과 주님이 겪으신 두 종류의 시험이 이 역사 속에서 모든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항상 시험이 오는 이유는 사탄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험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지켜보시는 일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시험을 당할 때에 주님을 의지해야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시험을 당했을 때에 자신의 꾀나 힘으로 처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의지함으로써 시험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생활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 속에서 믿음이 단련되고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질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사망이 홀연히 저회에게 임하여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시 55:15)
성경에 보면 산 채로 지옥에 가는 자가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계 19:19-21)
여기에서 짐승은 적그리스도요 거짓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지도자입니다.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에 던지웁니다. 이렇게 산 채로 지옥에 가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유럽 합중국의 지도자 곧 적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이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산 채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몇 천 년전이나 몇 천 년 후라도 하나님은 항상 현재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반항하고 도전했던 예수님 초림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나중에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유대인들도 똑같이 현재의 시점에서 멸망의 자식들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산 채로 지옥에 갈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뿐이지만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6-17)
이스라엘 풍속은 항상 저녁이 먼저입니다. 해가 지고 저녁 12시부터 다음 날에 들어가니까 저녁이 먼저이고 다음이 아침이니 정확한 표현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녁, 아침, 낮은 단순히 시간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이 있듯,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시 55:18-19)
이 말씀에서 우리가 한 가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수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우리에게 은혜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수시로 마음이 변합니다. 조금만 좋으면 기뻐하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시무룩해집니다. 또 하나님이 자기를 미워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과 기분이 변한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땅에 빛이 비치고 구름이 끼면 어두워지지만 구름 위에 있는 태양은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6-8)
중심의 생각을 읽으시는 하나님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 55:20-21)
다윗과 함께 있을 때는 다윗에게 좋은 말을 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그를 배반하고 사울에게 밀고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이처럼 말과 행동이 달라지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글이나 입으로 표현된 말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말까지도 들으시는 분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회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이처럼 마음 속에 있는 그 생각까지도 하나님은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말씀이신 분이지만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듣습니다. 대자연이나 우주에 나타난 법칙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말씀을 연구하여 조금씩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연구를 해도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말씀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행적은 하나님 안에 있던 말씀이 그대로 육신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말씀과 예수님의 육신 속에 나타난 말씀은 완전히 일치가 됩니다. 지금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의 행적이 글로 성문화되어 사람들이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과 행동이 틀리면 증인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말과 생활이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더욱 이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입의 말이 우유 기름처럼 미끄러워도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의 생각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 —3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짊어진 죄 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신앙생활 속에서 생기는 여러가지 어려움이나 고민 등도 책임져 주시는 분입니다.
주를 의지하는 자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5:23)
다윗은 사탄에 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장차 받게 될 심판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고난과 시련을 이기며 순종을 배워가는 사람이 받을 축복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이 시편 55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 기도를 통해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영광에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모습과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순종을 배우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편 55편은 54편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54편은 십 사람들이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 왕에게 고발하여 사울 왕으로 하여금 다윗을 추적하게 한 상황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올린 기도였습니다. 이 55편도 다윗이 같은 상황에서 한 기도인데 54편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림자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인 십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 왕에게 밀고한 것은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결탁을 해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빌라도에게 간청을 하여 재판을 받게 하는 일의 예시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이 시편에는 굉장히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시편을 읽으면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와 다윗이 올린 이 기도는 일맥 상통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라는 간단한 말을 세 번 반복하는 내용이지만 그 기도의 이면에 매우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시편이나 그밖의 구약에 있는 여러 말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의 원리를 배워가지만 이 신약 성경의 뿌리는 구약 성경인 것입니다. 가령,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사실 속에 숨어 있는 심오한 진리는 구약을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속죄 제물과 번제물이 되시는, 근본적이고 세밀한 내용은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를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가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대략적인 사실만 알 수 있고 이면에 숨어 있는 깊은 뜻은 알기 어렵습니다.
창세기는 요셉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말씀들은 현재 우리들이 구원받고 참된 마음의 평화를 발견한 이후에 신앙생활 속에서 생활의 구원과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어가는 문제가 그림자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같은 말씀들이 없으면 신약시대에 우리가 주님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다윗은 마치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는 것 같은 답답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숨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의 마음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숨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욥도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3-9)
저도 구원받은 지 몇 년 후에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괴로운 때가 있었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캄캄하여 하나님을 아무리 찾아도 안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에 저는 이 욥기 23장을 읽다가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는 8절 말씀을 역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주님이 내 왼편에도 계시고 오른편에도 계시는구나. 나와 지극히 가까운 곳에 계시구나. 다만 내가 주님을 이 순간에 못 보고 있는 것뿐이로구나'하고 깨달아졌습니다. 성경이 어떤 때는 이렇게 역으로 깨달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윗은 가장 가까운 유다 지파 사람들이 자기를 사울에게 고발하여 사울 왕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상황에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리고 숨어 계시지 마시고 제발 나타나십시오.'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만하시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십시오."라고 부르짖으신 주님의 기도의 그림자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신 예수님
전혀 죄가 없으신 주님이 우리들의 죄를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하는 일이 주님으로서는 굉장한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별로 고통이 없이 쉽게 우리의 죄짐을 지셨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이 어느 정도인지 체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가 조금은 어렵습니다. 주님은 죄와 전혀 관계 없으신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고난을 받으셔야 합니까? 주님은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기 위해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순종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가 없습니다.
다윗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도 억울하게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는데 그런 일을 왜 당하느냐 하면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고난을 받지 않으면 순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말의 뜻을 알지만 실지로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을 배워가는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의 과정입니다.
어떤 괴로움과 고통이 너무 심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운 때에 만일 순종을 참으로 배운다면 신앙생활의 큰 진보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간구했습니다.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굽어 보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중에 잡힌 여자를 바리새인들이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 고발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이 허리를 굽혀서 땅에다 글씨를 쓰셨습니다. 주님이 허리를 굽히신다는 말씀은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라는 다윗의 기도와 일맥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자꾸 재촉을 하니까 예수님이 허리를 일으켜 그들을 보시더니 "너희들 가운데 죄가 없는 자가 있으면 돌을 들어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굽어 보실 때에 율법의 기준에서 보면 전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도 하나님 앞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인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허리를 굽혀서 글씨를 쓰셨는데 여자에게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고 두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굽어 보실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기서 "내게 굽히사"라는 말은 굽혀서 절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움으로 나를 굽어 살펴주시라는 뜻입니다.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와 똑같은 내용입니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싫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 없으신 육신을 가진 주님이 온 세상 죄를 다 짊어지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주님의 고통이 없었다면 주님이 우리 죄를 지신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아주 심각한 고통을 당하신 거기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주님과 하나님만 알 수 있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사탄의 도구들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은 예수님이 담당하시지만 그 도구 역할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제사장들과 로마의 군인들이 하였습니다. 이들이 주님께 죄를 덮어 씌워서 죽이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당하는 핍박도 이와 비슷합니다. 골리앗을 처치하여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므로 사울이 시기하여 다윗에게 죄를 덮어 씌워 그를 죽이려는 과정이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고난당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최를 삼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비둘기는 죄 짐을 지신 예수님의 그림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입니다. 레위기 14장을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문등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레 14:1-7)
이 문둥병은 죄를 상징합니다.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에는 문둥병 환자가 상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문둥병 환자는 죄를 상징하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진영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문둥병이 나아도 정결함을 받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 속에 못 들어왔습니다. 제사장은 문둥병 환자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또 명하여 새 한 마리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습니다. 이 새가 두 마리지만 사실은 한 마리입니다. 한 마리는 죽는 것을 상징하고 또 한 마리는 날아가는 것을 상징하므로 두 마리가 필요합니다.
백향목은 높은 나무이고 우슬초는 담 밑에 나는 풀로 가장 낮은 식물입니다. 홍색실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새를 잡아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함께 가져다가 새 피를 찍는 것은 높은 사람의 죄나 낮은 사람의 죄나 율법을 범한 사람의 죄가 모두 그 피로 용서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들에 놓아 준 살아있는 새는 멀리 멀리 공중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그 새는 죄 짐을 지신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시편 55편 4절. 5절을 보면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 7절에는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비둘기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때 문둥병자를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사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비둘기처럼 멀리멀리 날아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문둥병자 같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 죄 를 멀리멀리 옮기셨습니다. 광야에 옮기셨다는 말은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무덤 속에 죄와 함께 완전히 묻히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리 죄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멀리 가 버렸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다윗은 이렇게 시적인 표현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죄악과 횡포가 가득한 무리들
다윗은 고향이 베들레헴이었지만 장차 예루살렘에서 왕노릇을 하도록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당시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고 사울은 십 사람들과 함께 다윗을 죽이려는 모의를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울과 그 무리들의 그 당시의 강포와 죄악과 잔해가 묘사되어 있지만 이것 역시 예수님 시대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세력이 와서 머물고 있고 종교적으로도 너무너무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는 광경이 여기에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악과 횡포가 가득한 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시면 이 기도가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나중에 부활 승천하시게 됩니다.
자기 백성에게 배반당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 말씀을 좋아하던 사람들, 한때에는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예수님을 칭찬하고 높이던 사람들, 제사장과 서기관들, 모두가 예수님의 동족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1)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일차적으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물론 은 세상 인류의 죄를 위하여 오셨지만 현실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적으로는 예수님과 같은 민족인 그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린 사실을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라'며 다윗을 높이던 그들이 돌아서서는 사울 왕 편이 되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이 예수님이 당한 상황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한때 구원받고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 중에서 나중에 교회를 떠나 악한 말로 비방하고 거짓 증거까지 서슴지 않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에게 조금 손해보는 일이 생긴다 싶으면 교회를 등지고 형제 자매를 원수시하는 그 마음이 바로 육신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의 육신 속에 있습니다. 육신은 절대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육신 안에 있는 사탄과 성령이 싸우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서로 내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믿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께 마음을 지켜 달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지켜지는 것도 주님께 달린 것입니다. 잠언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했는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지 자신이 스스로 다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하잘 것 없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께 의지하여 지켜 달라고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당할 때 자신의 지혜나 지식, 의지력만을 과시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마음이 바로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던 백성들이 오히려 등을 돌리고 원수시할 때 주님의 마음은 더욱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어느날 주님은 감람산 쪽에서 예루살렘을 건너다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주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요 나중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완전히 회복되어 영광스럽게 될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는 그 예루살렘이 완전히 죄악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는 죄악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2, 3장에 나타난 일곱 교회 중에 두아디라 교회는 완전히 죄의 소굴입니다. 사탄의 시험과 꾀에 넘어가 완전히 사탄에게 사로잡힌 교회입니다.
신앙생활은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
사탄은 아담을 시험하여 넘어뜨린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이 세상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을 시험에 넘어뜨려 세상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세상을 빼앗고 예수님은 잃어버린 것을 완전히 다시 찾으시는 것이 인류 역사의 과정입니다.
이기면 다 찾고 지면 빼앗겨 버리는 시험이 있는데 그 시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생활 속에도 여러 가지 시험이 찾아오는데 그 시험에 넘어지면 복을 잃어 버립니다. 그대신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면 잃어버렸던 것을 도로 찾게 됩니다. 아담과 주님이 겪으신 두 종류의 시험이 이 역사 속에서 모든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항상 시험이 오는 이유는 사탄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험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지켜보시는 일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시험을 당할 때에 주님을 의지해야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시험을 당했을 때에 자신의 꾀나 힘으로 처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의지함으로써 시험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생활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 속에서 믿음이 단련되고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질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성경에 보면 산 채로 지옥에 가는 자가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계 19:19-21)
여기에서 짐승은 적그리스도요 거짓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지도자입니다.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에 던지웁니다. 이렇게 산 채로 지옥에 가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유럽 합중국의 지도자 곧 적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이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산 채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몇 천 년전이나 몇 천 년 후라도 하나님은 항상 현재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반항하고 도전했던 예수님 초림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나중에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유대인들도 똑같이 현재의 시점에서 멸망의 자식들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산 채로 지옥에 갈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뿐이지만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풍속은 항상 저녁이 먼저입니다. 해가 지고 저녁 12시부터 다음 날에 들어가니까 저녁이 먼저이고 다음이 아침이니 정확한 표현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녁, 아침, 낮은 단순히 시간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이 있듯,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한 가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수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우리에게 은혜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수시로 마음이 변합니다. 조금만 좋으면 기뻐하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시무룩해집니다. 또 하나님이 자기를 미워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과 기분이 변한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땅에 빛이 비치고 구름이 끼면 어두워지지만 구름 위에 있는 태양은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6-8)
중심의 생각을 읽으시는 하나님
다윗과 함께 있을 때는 다윗에게 좋은 말을 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그를 배반하고 사울에게 밀고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이처럼 말과 행동이 달라지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글이나 입으로 표현된 말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말까지도 들으시는 분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회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이처럼 마음 속에 있는 그 생각까지도 하나님은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말씀이신 분이지만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듣습니다. 대자연이나 우주에 나타난 법칙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말씀을 연구하여 조금씩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연구를 해도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말씀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행적은 하나님 안에 있던 말씀이 그대로 육신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말씀과 예수님의 육신 속에 나타난 말씀은 완전히 일치가 됩니다. 지금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의 행적이 글로 성문화되어 사람들이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과 행동이 틀리면 증인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말과 생활이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더욱 이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입의 말이 우유 기름처럼 미끄러워도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의 생각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 —3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짊어진 죄 짐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신앙생활 속에서 생기는 여러가지 어려움이나 고민 등도 책임져 주시는 분입니다.
주를 의지하는 자
다윗은 사탄에 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장차 받게 될 심판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고난과 시련을 이기며 순종을 배워가는 사람이 받을 축복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이 시편 55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 기도를 통해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영광에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모습과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순종을 배우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