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회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편 58:1-11)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라 하였습니다.
알다스헷은 악기 이름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이 시편 58편이 어떠한 배경에서 읊은 시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마귀가 사람을 통해서 영향을 주고 악한 일을 행하는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는 내용으로 엮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공의와 정직이 없는 죄악 세상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 직히 판단하느뇨"(시 58:1)
이 세상 사람들은 공의를 말하지 않고 항상 불의한 것을 말합니다. 또 공의를 말할 일이 있어도 오히려 입을 다무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판단력이 근본적으로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고 올바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 니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참으로 복잡하고 이상한 존재입니다.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 속에서 움직이는 죄가 다 근본적으로 아담 안에서 발생한 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와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이 짓는 죄는 본질적으로 다 같은 것입니다. 아담은 어떤 면에서 악질적인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 죄가 씨가 되어 차츰차츰 더 악해져서 현재와 같은 죄악 세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최근에 뉴스를 들어보면 10대 청소년들이 성폭행을 하고 강도짓을 저지르는 것을 종종 보도합니다. 무기징역과 사형언도를 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완전히 죄가 들어찬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이런 죄를 안 지었다고 하더라도 아담 속에서부 터 생겨난 죄가 이렇게 발전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상이 더욱 악해지고 또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정당한 판단도 없고, 또 바른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악을 꾀하고 손으로 실행하는 인간의 모습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회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시 58:2)
마음의 행동을 겉으로 나타내는 것이 손이 가진 사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손이 얼마나 횡포가 심한지 모릅니다. 미국에서는 갱단의 두목이 사람을 수없이 파리 죽이듯 죽였는데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의 손이 잔인하고 강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마음의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준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단의 힘이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악을 꾀하고 손으로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인 것을 말합니다.
날 때부터 죄인된 인간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올 말 하는도다"(시 58:3)
여기서 모태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내용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악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라는 말씀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이미 날 때부터 혈통을 좇아나니까 피를 통해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들도 의식적인 죄는 아니지만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아직 양심의 활동이 없기 때문에 죄가 성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물론 심판의 기준이 되지만 사람들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행한 것도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는 자기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한 상태이므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죄가 성 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린 아이도 이미 양심의 활동이 생겨나기 이전에 벌써 죄성이 그 속에 있고, 그 피 안에 혈기라는 것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죄는 전부가 혈기에 의한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만 혈기가 아니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것, 거짓말 하는 것, 욕심부리는 것도 모두 혈기입니다. 부모님께로부터 피를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피를 통해서 죄가 유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날 때부터 죄인인데 성장해 가면서 죄가 조금씩 나타나 주위 환경에 따라서 죄를 크게 짓기도 하고 적게 짓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는 사실 굉장히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육신 속에 피가 운동하고 있는 한에는 완전히 죄와 상관없이 죄에서 벗어나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피가 있는 한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근본적으로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이시면서 나를 만져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고 하셨지만 피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피는 다 쏟아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몸에는 피가 없습니다. 물론 주님도 태어나셨을 때 피를 가지셨지만 그 피에는 죄성이 없었고 따라서 주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피는 깨끗한 피였습니다. 깨끗한 피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 대가를 지불할 수 있었고 또 우리의 모든 죄를 그 피로 능히 씻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피에 죄성이 있어 피가 더럽다고 하면 우리 죄를 대신 씻어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이 피 속에 흐르는 죄 때문에 하나님이 처음에 지으신,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다고 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창조되었을 때에 죄가 전혀 없었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고 그냥 죄가 없는 상태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만일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죄가 없는 깨끗한 세상일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
그러나 아담 이전부터 사탄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탄이 아담을 넘어뜨려 죄를 짓게 하실 것을 미리 아셨으면서도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데서 예정론이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예정론에는 절대예정론과 예지예정론이 있습니다. 절대예정이란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요 그 밖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예지예정은 절대예정과는 뜻이 조금 다릅니다. 인간들이 사탄의 꾀임을 받아 죄를 짓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대책을 세우신다는 것이 예지예정이라는 신학이론입니다. 저는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해서 절대예정론을 믿었던 사람이었지만 구원을 받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니 그 신학적인 이론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탄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을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아셨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영원한 천국을 형성하시려는 궁극적인 목표를 두시고 이 역사를 꾸며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의 세계를 깊이 파고 들어가면 도저히 이해 안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아예 지옥갈 사람은 나지 않도록 하실 일이지 지옥 갈 것을 미리 다 아시고도 그대로 놔 두실까 꼬치꼬치 캐물으면 쉽사리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생각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틀림없는 성경의 역사적 사실이나 그 밖의 모든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가 말씀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사실에 근거하여 믿을 수 있는 부분까지도 부정해 버린다면 그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캐 들어가면 어떤 면에서 이론적 으로 의심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머리가 예민한 사람 중에는 그런 것 때문에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 어떤 고등학교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이 처음에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뒤에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답니다. 무신론자인 니체와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보면 아마도 그런 책을 많이 읽었 는가 봅니다. 얘기할 수 있는 모든 성경 말씀을 다 했지만 정말 그 사상 속에 깊이 뿌리박힌 의문을 풀어 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성령을 경험했을 때에 아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아직 자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이나 능력이 없다고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차츰 어려운 부분까지도 알아가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자기가 감당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문제만 갖다놓고 그걸 못 믿으니 아주 쉽고 간단한 부분까지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들이 니체나 카를 마르크스처럼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보다 훨씬 심각한 사상 속의 죄
우리는 도둑질, 강도질, 성폭행처럼 겉으로 크게 드러나는 것만 죄라고 잘못 생각하기 쉬운데 그보다 더 심각한 죄는 어떤 사상이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사상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말씀과 약속을 몸으로 성취하려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바보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의 악한 사상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행위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못 믿은 것이 아니고 그들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악한 사상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악한 사상과 생각은 행위로 나타나는 죄보다 훨씬 무서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육신적으로 행복과 영광을 누리게 해 주는 메시아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이 두 번 오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령 이사야 53장과 시편 22편에 나타나는 고난의 메시아입니다. 그런 성경은 읽어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오직 온 세계를 지배하는 영광의 메시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난의 메시아는 안중에 없고 오직 영광의 메시아만 자꾸 기다리니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사상을 불어 넣은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근본적으로 사탄이 그들 속에 그런 사상을 집어 넣어가지고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것이지요.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사탄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하고 귀신 들린 사람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사탄의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지 유대인들이 예수를 못 믿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메시아, 정치적인 메시아, 군사적인 메시아, 육신적으로 잘 되게 해 주는 메시아만을 기다리니 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못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3-44)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을 충동질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던 그 마귀는 지금도 살아서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켜 도질, 도둑질, 성폭행 등의 죄를 저지르게 하는 일뿐만 아니라 육신의 구원, 다시 말하면 사회 구원 운동을 지금 열심히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타락한 기독교 내부에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고 엉뚱한 사회 구원 운동을 부르짖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적인 죄보다도 악한 사상적인 악입니다. 이 악은 강도나 살인보다도 훨씬 더 직접 하나님을 도전하는 죄입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적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세례 요한이 나오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가 이스라엘에서 나와 유럽 공동체에서 나오게 될 적그리스도를 예비하게 됩니다. 사람의 시각에는 이러한 사회 구원 운동이 악하게 보이지 않고 선하게 보 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공산주의 운동도 일종의 사회구원 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대과제는 완전히 잊어버리도록 만들고, 완전히 육신만을 부흥시키고 이 세상을 건지자는 운동으로 전개되는데 이 시대에 있어서 사탄의 가장 현저한 활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운동입니다. 온 세계가 그 운동 속으로 지금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는 이 복음의 목적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인데 사회 원 운동은 그런 문제는 딴전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비판하고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핍박과 고난을 받는 상태에 있습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루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4-8)
완전히 사탄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이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들은 거미가 날줄과 씨줄을 쳐서 거미줄을 짜듯이 자기 행위와 사상의 옷을 짜고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탄이 불어넣은 악한 사상과 행위로 옷을 짜지만 그것으로 자기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울 수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리 선한 말을 많이 하고 정의를 부르짖어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배후에는 사탄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
그러면 이들과는 달리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 인 사상과 행위는 무엇입니까?
"저가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이 말씀대로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결국 자신을 위해서 유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한 므나를 받은 종이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가만히 묻어 놓았다가 나중에 주인께 다시 본전만 돌려드리다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습니까? 주인은 그 종에게 주었던 한 므나를 빼앗아 가지고 열 므나 있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 19:26)
한 므나 가진 사람은 주인을 깍쟁이 같이 생각해서 자신이 장사하여 이익을 남겨도 그것을 취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티끌만큼도 손해를 보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원 받고 나서 확실하게 '나는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라는 마음의 결정이 한번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어쩌다 보면 실수도 하고 죄도 짓는 일이 있습니다. 다윗도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그 기본적인 바탕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확실한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귀머거리 독사 같은 악인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시 58:4-5)
뱀을 잘 훈련시키면 재주를 부리는가 봅니다. 요즈음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굵은 뱀을 목에다 칭칭 감고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가끔 봅니다. 그런데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는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부리는 사람의 주문대로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악인을 이러한 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들어도 전혀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감동을 받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을 좀 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에 영향이 하나도 없고, 변화가 전혀 없다면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이 있구나' 하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악인을 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시 58:6-8)
얼핏 이 말씀을 읽으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라는 말씀과 배치되는 것 같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회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라"(마 12:34-37)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하시는 분인데 왜 이 유대인들을 보고는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편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했는데 다른 한편에 보면 사울이나 다윗 왕에게 가나안 족속이나 아말렉을 하나도 남김없이 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인심을 써서 아각왕을 살려 주고 양이나 소의 살진 것은 다 끌고 왔습니다. 그것을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보다 마음씨가 훨씬 좋고 의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울 왕을 버리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이런 부분을 읽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렇게 비정하고 무자비할 수 없다 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이 잘못된 것이라고 섣불리 결정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우리는 100%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철저히 멸망시키라고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올 때에 그들이 대항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계획과 일을 도전한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나님은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성경을 보면 죄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 종류의 죄는 사람 속에 있는 죄의 법칙과 육신의 욕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이성을 보고 성적인 죄를 짓는다거나 물건을 보고 탐심을 내는 죄 따위가 그런 예인데 그것은 다 용서 받을 수 있는 죄 입니다. 그런데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직접으로 사탄에 의해서 조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도전하는 죄입니다.
보통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법칙에 의해 짓는 죄와 사탄이 뒤에서 조종하는 죄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 속에 있는 죄의 법칙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그 법칙이 작용을 하는 것이지요. 직접으로 사탄의 조종을 받아 짓는 죄는 하나님 일을 도전하고 거짓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마 12:22-26)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귀신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지만 그 배후에는 주님의 일을 도전하고 반대하는 사탄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잘 모르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시 58:6)
베드로전서에 보면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다고 했습니다. 뱀이나 사자는 사탄의 상징입니다. 사탄은 사람을 앞세워 사자처럼 나타납니다.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시 58:7-8)
이것은 악인들을 철두철미하게 멸망시키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마음 속에 사탄을 대상으로 두고 이 시를 읊었습니다. 예수님도 실지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배후에 있는 마귀들과 싸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사탄을 미워하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이므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사탄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주님 앞에서 반드시 심판 받을 말의 화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7-9)
시편 58장 7절에서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겪임 같게 하신다고 하였는데, 입으로 저주하거나 욕하는 말이 화살입니다. 혀끝에서 나가는 말이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화살을 쏘아 가슴을 명중시키듯이 말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그 말은 화살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탄도 처음에 말을 가지고 하와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말의 화살로 아담 부부의 영혼을 죽인 것입니다. 실지로 화살을 가지고 사람을 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말의 화살이 위험합니다.
언젠가 제가 TV에서 공상과학 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공기 중에 파장을 일으키며 공간 속을 떠돌아 다니는데 옛 사람이 한 말까지도 잡아 다시 재생시킬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하는 영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말로 정죄함을 받고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심판 날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말해 놓은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지금은 과학적으로 그런 일이 공상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음담패설이나 남을 저주하는 말, 거짓말, 흉보는 말, 그 밖의 공개되지 않는 그런 말들이 아마도 주님 앞에는 다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녹음 테이프에 사람이 말한 것을 다 담아 놓을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지껄여 대는 것입니다.
우리는 캄캄한 밤중이나 혼자 앉아 있을 때라도 하나님 앞에 책임질 수 있는 말만을 해야 합니다. 함부로 쏘아대는 모든 말의 화살은 결국 주님 앞에서 다 꺾이고 맙니다. 이 세상은 온통 사탄이 쏘아대는 화살로 꽉 들어찬 세상입니다만 어느날 분명히 그것이 다 꺾여질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말이 눈에 안 보이는 전파의 형태로 변하여 온 세계 도처에 널리 퍼져 얽혀 있습니다. 만일 이런 말들이 오가는 것들이 사람의 눈에 보인다면 겁이 나서 살기 힘들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지구를 둘러 덮고 있듯이 그 말의 화살들이 완전히 거미줄처럼 지구를 싸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주님의 말씀이 나타나면 그 모든 화살을 다 꺾어버리고 주님은 완전히 승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순간 순간 기분에 따라 함부로 말하는 것을 극히 삼가해야 합니다. 그런 말들 은 주님 앞에서 꺾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희희낙낙거리는 우매한 인생들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 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시 58:9)
전도서 7장 6절에 보면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 같다고 하였습니다. 한 토막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희희낙낙하고 노래 부르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불이 잘 붙지 않아 타다가 그만 꺼져 버리는 파릇파릇한 가시나무와도 같은 사람의 일생입니다. 아무런 생각도 꿈도 의미도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그저 희희낙낙하며 쾌락을 누리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매자의 웃음 소리가 솥 밑에 있는 가시나무가 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하면 사람의 생각에도 그런데 하나님이 시기에 그러한 인생의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다윗은 일찌기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신다고 말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꼭 찬송가만 부르고 살자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는 어떤 장단에 따라서 민요나 가요도 부를 수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거룩한 척하고 경건한 척 신앙심 좋은 척 하며 위선을 꾸밀 필요는 없지만 우리 중심의 생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을 밟으시는 주님의 심판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시 58:10)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사 63:1-3)
옛날 유럽에서는 포도주를 큰 통에 넣어 두고 사람이 그것을 위에서 밟아서 포도즙을 짰습니다. 그러면 붉은 피 같은 포도즙이 흘러내렸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죄인들을 발로 밟으시면 선혈이 옷을 붉게 만들고 발을 적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죄인을 밟아서 피를 흘려 승리 한다는 이 구절은 잔인한 내 용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계 14:19-20)
1 스다디온은 215.5 야드(약 197m) 입니다. 아마겟돈 전쟁 때에 세상 사람 3분의 1 정도가 피를 흘린다고 생각해 보면 현실적으로 여기에 기록된 숫자만큼 될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가나안의 칠족속을 멸망시키는 것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의 그림자인데, 이 세상이 완전히 심판되고 피바다가 될 사실을 말하는것입니다.
심판과 보응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날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1)
그때에 사람들이 그 일을 보고 심판과 보응을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저는 이 성경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이 세상이 지금 심판의 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희망찬 마음으로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나이다"(시 26:9)
이 구절은 시편 58편 마지막 구절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심판 때에 세상 사람들이 '아,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셨구나. 하나님은 과연 공의로우신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그때 가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 앞에서 참으로 감사함이 넘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죄인이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사실과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의를 세상 사람들은 배우려 하지 않습 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은혜의 때인데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배운다면 죄인에서 의인으로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를 놓치면 마지막 때에 피를 흘리고 심판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의를 알게 됩니다.
확실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삶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려고 하면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주님의 의를 따라서 살아가는 생활은 고난과 핍박을 받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 의인의 생활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도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고 살았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를 배워서 사는 것처럼 참으로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고난과 핍박을 받는 의인들에게 큰 영광으로 보상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라 하였습니다.
알다스헷은 악기 이름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이 시편 58편이 어떠한 배경에서 읊은 시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마귀가 사람을 통해서 영향을 주고 악한 일을 행하는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는 내용으로 엮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공의와 정직이 없는 죄악 세상
이 세상 사람들은 공의를 말하지 않고 항상 불의한 것을 말합니다. 또 공의를 말할 일이 있어도 오히려 입을 다무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판단력이 근본적으로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고 올바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 니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참으로 복잡하고 이상한 존재입니다.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 속에서 움직이는 죄가 다 근본적으로 아담 안에서 발생한 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와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이 짓는 죄는 본질적으로 다 같은 것입니다. 아담은 어떤 면에서 악질적인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 죄가 씨가 되어 차츰차츰 더 악해져서 현재와 같은 죄악 세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최근에 뉴스를 들어보면 10대 청소년들이 성폭행을 하고 강도짓을 저지르는 것을 종종 보도합니다. 무기징역과 사형언도를 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완전히 죄가 들어찬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이런 죄를 안 지었다고 하더라도 아담 속에서부 터 생겨난 죄가 이렇게 발전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상이 더욱 악해지고 또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정당한 판단도 없고, 또 바른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악을 꾀하고 손으로 실행하는 인간의 모습
마음의 행동을 겉으로 나타내는 것이 손이 가진 사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손이 얼마나 횡포가 심한지 모릅니다. 미국에서는 갱단의 두목이 사람을 수없이 파리 죽이듯 죽였는데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의 손이 잔인하고 강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마음의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준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단의 힘이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악을 꾀하고 손으로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인 것을 말합니다.
날 때부터 죄인된 인간
라는 말씀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이미 날 때부터 혈통을 좇아나니까 피를 통해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들도 의식적인 죄는 아니지만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아직 양심의 활동이 없기 때문에 죄가 성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물론 심판의 기준이 되지만 사람들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행한 것도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는 자기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한 상태이므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죄가 성 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린 아이도 이미 양심의 활동이 생겨나기 이전에 벌써 죄성이 그 속에 있고, 그 피 안에 혈기라는 것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죄는 전부가 혈기에 의한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만 혈기가 아니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것, 거짓말 하는 것, 욕심부리는 것도 모두 혈기입니다. 부모님께로부터 피를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피를 통해서 죄가 유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날 때부터 죄인인데 성장해 가면서 죄가 조금씩 나타나 주위 환경에 따라서 죄를 크게 짓기도 하고 적게 짓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는 사실 굉장히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육신 속에 피가 운동하고 있는 한에는 완전히 죄와 상관없이 죄에서 벗어나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피가 있는 한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근본적으로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이시면서 나를 만져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고 하셨지만 피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피는 다 쏟아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몸에는 피가 없습니다. 물론 주님도 태어나셨을 때 피를 가지셨지만 그 피에는 죄성이 없었고 따라서 주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피는 깨끗한 피였습니다. 깨끗한 피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 대가를 지불할 수 있었고 또 우리의 모든 죄를 그 피로 능히 씻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피에 죄성이 있어 피가 더럽다고 하면 우리 죄를 대신 씻어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이 피 속에 흐르는 죄 때문에 하나님이 처음에 지으신,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다고 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창조되었을 때에 죄가 전혀 없었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고 그냥 죄가 없는 상태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만일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죄가 없는 깨끗한 세상일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
그러나 아담 이전부터 사탄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탄이 아담을 넘어뜨려 죄를 짓게 하실 것을 미리 아셨으면서도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데서 예정론이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예정론에는 절대예정론과 예지예정론이 있습니다. 절대예정이란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요 그 밖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예지예정은 절대예정과는 뜻이 조금 다릅니다. 인간들이 사탄의 꾀임을 받아 죄를 짓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대책을 세우신다는 것이 예지예정이라는 신학이론입니다. 저는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해서 절대예정론을 믿었던 사람이었지만 구원을 받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니 그 신학적인 이론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탄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을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아셨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영원한 천국을 형성하시려는 궁극적인 목표를 두시고 이 역사를 꾸며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의 세계를 깊이 파고 들어가면 도저히 이해 안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아예 지옥갈 사람은 나지 않도록 하실 일이지 지옥 갈 것을 미리 다 아시고도 그대로 놔 두실까 꼬치꼬치 캐물으면 쉽사리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생각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틀림없는 성경의 역사적 사실이나 그 밖의 모든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가 말씀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사실에 근거하여 믿을 수 있는 부분까지도 부정해 버린다면 그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캐 들어가면 어떤 면에서 이론적 으로 의심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머리가 예민한 사람 중에는 그런 것 때문에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 어떤 고등학교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이 처음에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뒤에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답니다. 무신론자인 니체와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보면 아마도 그런 책을 많이 읽었 는가 봅니다. 얘기할 수 있는 모든 성경 말씀을 다 했지만 정말 그 사상 속에 깊이 뿌리박힌 의문을 풀어 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성령을 경험했을 때에 아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아직 자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이나 능력이 없다고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차츰 어려운 부분까지도 알아가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자기가 감당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문제만 갖다놓고 그걸 못 믿으니 아주 쉽고 간단한 부분까지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들이 니체나 카를 마르크스처럼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보다 훨씬 심각한 사상 속의 죄
우리는 도둑질, 강도질, 성폭행처럼 겉으로 크게 드러나는 것만 죄라고 잘못 생각하기 쉬운데 그보다 더 심각한 죄는 어떤 사상이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사상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말씀과 약속을 몸으로 성취하려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바보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의 악한 사상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행위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못 믿은 것이 아니고 그들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악한 사상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악한 사상과 생각은 행위로 나타나는 죄보다 훨씬 무서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육신적으로 행복과 영광을 누리게 해 주는 메시아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이 두 번 오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령 이사야 53장과 시편 22편에 나타나는 고난의 메시아입니다. 그런 성경은 읽어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오직 온 세계를 지배하는 영광의 메시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난의 메시아는 안중에 없고 오직 영광의 메시아만 자꾸 기다리니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사상을 불어 넣은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근본적으로 사탄이 그들 속에 그런 사상을 집어 넣어가지고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것이지요.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사탄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하고 귀신 들린 사람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사탄의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지 유대인들이 예수를 못 믿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메시아, 정치적인 메시아, 군사적인 메시아, 육신적으로 잘 되게 해 주는 메시아만을 기다리니 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못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3-44)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을 충동질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던 그 마귀는 지금도 살아서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켜 도질, 도둑질, 성폭행 등의 죄를 저지르게 하는 일뿐만 아니라 육신의 구원, 다시 말하면 사회 구원 운동을 지금 열심히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타락한 기독교 내부에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고 엉뚱한 사회 구원 운동을 부르짖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적인 죄보다도 악한 사상적인 악입니다. 이 악은 강도나 살인보다도 훨씬 더 직접 하나님을 도전하는 죄입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적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세례 요한이 나오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가 이스라엘에서 나와 유럽 공동체에서 나오게 될 적그리스도를 예비하게 됩니다. 사람의 시각에는 이러한 사회 구원 운동이 악하게 보이지 않고 선하게 보 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공산주의 운동도 일종의 사회구원 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대과제는 완전히 잊어버리도록 만들고, 완전히 육신만을 부흥시키고 이 세상을 건지자는 운동으로 전개되는데 이 시대에 있어서 사탄의 가장 현저한 활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운동입니다. 온 세계가 그 운동 속으로 지금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는 이 복음의 목적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인데 사회 원 운동은 그런 문제는 딴전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비판하고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핍박과 고난을 받는 상태에 있습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루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4-8)
완전히 사탄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이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들은 거미가 날줄과 씨줄을 쳐서 거미줄을 짜듯이 자기 행위와 사상의 옷을 짜고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탄이 불어넣은 악한 사상과 행위로 옷을 짜지만 그것으로 자기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울 수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리 선한 말을 많이 하고 정의를 부르짖어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배후에는 사탄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
그러면 이들과는 달리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 인 사상과 행위는 무엇입니까?
"저가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이 말씀대로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결국 자신을 위해서 유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한 므나를 받은 종이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가만히 묻어 놓았다가 나중에 주인께 다시 본전만 돌려드리다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습니까? 주인은 그 종에게 주었던 한 므나를 빼앗아 가지고 열 므나 있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 19:26)
한 므나 가진 사람은 주인을 깍쟁이 같이 생각해서 자신이 장사하여 이익을 남겨도 그것을 취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티끌만큼도 손해를 보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원 받고 나서 확실하게 '나는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라는 마음의 결정이 한번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어쩌다 보면 실수도 하고 죄도 짓는 일이 있습니다. 다윗도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그 기본적인 바탕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확실한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귀머거리 독사 같은 악인
뱀을 잘 훈련시키면 재주를 부리는가 봅니다. 요즈음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굵은 뱀을 목에다 칭칭 감고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가끔 봅니다. 그런데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는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부리는 사람의 주문대로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악인을 이러한 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들어도 전혀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감동을 받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을 좀 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에 영향이 하나도 없고, 변화가 전혀 없다면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이 있구나' 하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악인을 꺾으시는 하나님
얼핏 이 말씀을 읽으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라는 말씀과 배치되는 것 같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회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라"(마 12:34-37)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하시는 분인데 왜 이 유대인들을 보고는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편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했는데 다른 한편에 보면 사울이나 다윗 왕에게 가나안 족속이나 아말렉을 하나도 남김없이 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인심을 써서 아각왕을 살려 주고 양이나 소의 살진 것은 다 끌고 왔습니다. 그것을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보다 마음씨가 훨씬 좋고 의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울 왕을 버리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이런 부분을 읽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렇게 비정하고 무자비할 수 없다 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이 잘못된 것이라고 섣불리 결정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우리는 100%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철저히 멸망시키라고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올 때에 그들이 대항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계획과 일을 도전한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나님은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성경을 보면 죄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 종류의 죄는 사람 속에 있는 죄의 법칙과 육신의 욕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이성을 보고 성적인 죄를 짓는다거나 물건을 보고 탐심을 내는 죄 따위가 그런 예인데 그것은 다 용서 받을 수 있는 죄 입니다. 그런데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직접으로 사탄에 의해서 조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도전하는 죄입니다.
보통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법칙에 의해 짓는 죄와 사탄이 뒤에서 조종하는 죄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 속에 있는 죄의 법칙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그 법칙이 작용을 하는 것이지요. 직접으로 사탄의 조종을 받아 짓는 죄는 하나님 일을 도전하고 거짓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마 12:22-26)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귀신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지만 그 배후에는 주님의 일을 도전하고 반대하는 사탄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잘 모르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다고 했습니다. 뱀이나 사자는 사탄의 상징입니다. 사탄은 사람을 앞세워 사자처럼 나타납니다.
이것은 악인들을 철두철미하게 멸망시키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마음 속에 사탄을 대상으로 두고 이 시를 읊었습니다. 예수님도 실지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배후에 있는 마귀들과 싸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사탄을 미워하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이므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사탄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주님 앞에서 반드시 심판 받을 말의 화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7-9)
시편 58장 7절에서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겪임 같게 하신다고 하였는데, 입으로 저주하거나 욕하는 말이 화살입니다. 혀끝에서 나가는 말이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화살을 쏘아 가슴을 명중시키듯이 말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그 말은 화살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탄도 처음에 말을 가지고 하와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말의 화살로 아담 부부의 영혼을 죽인 것입니다. 실지로 화살을 가지고 사람을 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말의 화살이 위험합니다.
언젠가 제가 TV에서 공상과학 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공기 중에 파장을 일으키며 공간 속을 떠돌아 다니는데 옛 사람이 한 말까지도 잡아 다시 재생시킬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하는 영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말로 정죄함을 받고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심판 날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말해 놓은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지금은 과학적으로 그런 일이 공상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음담패설이나 남을 저주하는 말, 거짓말, 흉보는 말, 그 밖의 공개되지 않는 그런 말들이 아마도 주님 앞에는 다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녹음 테이프에 사람이 말한 것을 다 담아 놓을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지껄여 대는 것입니다.
우리는 캄캄한 밤중이나 혼자 앉아 있을 때라도 하나님 앞에 책임질 수 있는 말만을 해야 합니다. 함부로 쏘아대는 모든 말의 화살은 결국 주님 앞에서 다 꺾이고 맙니다. 이 세상은 온통 사탄이 쏘아대는 화살로 꽉 들어찬 세상입니다만 어느날 분명히 그것이 다 꺾여질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말이 눈에 안 보이는 전파의 형태로 변하여 온 세계 도처에 널리 퍼져 얽혀 있습니다. 만일 이런 말들이 오가는 것들이 사람의 눈에 보인다면 겁이 나서 살기 힘들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지구를 둘러 덮고 있듯이 그 말의 화살들이 완전히 거미줄처럼 지구를 싸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주님의 말씀이 나타나면 그 모든 화살을 다 꺾어버리고 주님은 완전히 승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순간 순간 기분에 따라 함부로 말하는 것을 극히 삼가해야 합니다. 그런 말들 은 주님 앞에서 꺾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희희낙낙거리는 우매한 인생들
전도서 7장 6절에 보면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 같다고 하였습니다. 한 토막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희희낙낙하고 노래 부르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불이 잘 붙지 않아 타다가 그만 꺼져 버리는 파릇파릇한 가시나무와도 같은 사람의 일생입니다. 아무런 생각도 꿈도 의미도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그저 희희낙낙하며 쾌락을 누리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매자의 웃음 소리가 솥 밑에 있는 가시나무가 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하면 사람의 생각에도 그런데 하나님이 시기에 그러한 인생의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다윗은 일찌기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신다고 말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꼭 찬송가만 부르고 살자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는 어떤 장단에 따라서 민요나 가요도 부를 수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거룩한 척하고 경건한 척 신앙심 좋은 척 하며 위선을 꾸밀 필요는 없지만 우리 중심의 생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을 밟으시는 주님의 심판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사 63:1-3)
옛날 유럽에서는 포도주를 큰 통에 넣어 두고 사람이 그것을 위에서 밟아서 포도즙을 짰습니다. 그러면 붉은 피 같은 포도즙이 흘러내렸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죄인들을 발로 밟으시면 선혈이 옷을 붉게 만들고 발을 적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죄인을 밟아서 피를 흘려 승리 한다는 이 구절은 잔인한 내 용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계 14:19-20)
1 스다디온은 215.5 야드(약 197m) 입니다. 아마겟돈 전쟁 때에 세상 사람 3분의 1 정도가 피를 흘린다고 생각해 보면 현실적으로 여기에 기록된 숫자만큼 될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가나안의 칠족속을 멸망시키는 것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의 그림자인데, 이 세상이 완전히 심판되고 피바다가 될 사실을 말하는것입니다.
심판과 보응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날
그때에 사람들이 그 일을 보고 심판과 보응을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저는 이 성경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이 세상이 지금 심판의 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희망찬 마음으로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 구절은 시편 58편 마지막 구절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심판 때에 세상 사람들이 '아,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셨구나. 하나님은 과연 공의로우신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그때 가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 앞에서 참으로 감사함이 넘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죄인이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사실과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의를 세상 사람들은 배우려 하지 않습 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은혜의 때인데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배운다면 죄인에서 의인으로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를 놓치면 마지막 때에 피를 흘리고 심판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의를 알게 됩니다.
확실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삶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려고 하면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주님의 의를 따라서 살아가는 생활은 고난과 핍박을 받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 의인의 생활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도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고 살았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를 배워서 사는 것처럼 참으로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고난과 핍박을 받는 의인들에게 큰 영광으로 보상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