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 이 아니요 나의 죄악을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셀라)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나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17)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사무엘 상 19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사울이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가로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사울이 또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 를 침상 채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 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사울이 미갈에 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삼상 19:8-17)
시편 59편도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는 항상 이러한 점에 유의를 해야 합니다.
죄 없이 고난 받으신 주님의 그림자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악을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루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셀라)"(시 59:1-5)
이 말씀을 얼핏 읽으면 다윗이 죄를 하나도 안 지었다는 뜻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때는 다윗이 아직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짓기 전입니다만 죄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울 왕이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런데도 사울이 다윗을 시기해서 그를 죽이려 한 것이 바로 죄 없이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면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장인이지만 유대 민족의 대표자 격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는 것을 빌라도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이 사람은 죽일 만한 죄가 없다고 극구 변명했지만 유대인들의 아우성에 못 이겨 예수님을 죽이도록 내어 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았는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9-21)
세상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두움에 숨어있어야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는 사람들도 보면 밤에 활동하여 자기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비추셨습니다. 그냥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암흑상과 종교적 부패상 특히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죄상을 자꾸 폭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편을 들어 눈감아 주시지 않으니 미워한 것입니다. 그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해서 예수님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생활 방식은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 정통파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생활 방식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생활을 하며 거룩한 척 겉모양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턱 나타나시더니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들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고 가난하고 병들고 못사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집도 재산도 없는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생활과 예수님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빛 가까이에 가면 그들의 불의한 것이 자꾸 폭로가 되니 자연히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고 멀리하게 마련입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죄를 지으면 그만 움츠러들고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 기 위해 변명을 하거나 모임에 도전을 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 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핍박을 받습니다.
의로운 자를 핍박하는 불의한 세력
이 세상은 불의한 세력이 강하여 의로운 세력을 핍박합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4)
이 세상은 불의한 세력이 의로운 세력을 둘러싸 맥을 못주게 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불의한 세상에 예수님이 혜성처럼 나타나셨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나타날 때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습니다. 원수 골리앗이 나타나 큰 소리를 치자 모두 겁을 내어 벌벌 떨기만 했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이 어둡고 영적인 힘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부패하고 타락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때 다윗은 비록 소년이었지만 할례 받지 않은 개 같은 저런 것 때문에 왜 벌벌 떠느냐, 내가 나가겠다 하여 골리앗을 쳐 죽인 것 입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다윗이 혜성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다윗을 모두가 환영을 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그러나 그러던 인심들이 나중에는 다 돌아서서 다윗을 미워하여 잡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이 죄 없이 미움을 받고 쫓겨 다닌 것은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진리를 배척하는 자들의 운명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시 59:6)
이 말씀은 14절에 또 한번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바울이 편지할 때 개들을 삼가라 하였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 3:2)
계시록 22장에도 개들과 어둠에 속한 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 있게 됩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계 22:15)
여기서 성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 개는 문자 그대로의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사악하고 사납고 잔인한 인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 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영적인 감각이 없는 개와 돼지 같은 자들은 참된 보물의 가치를 모르고 발로 밟아 상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에 성령을 우리 마음에 모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진리와 성령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아무리 말해도 모르고 오히려 개처럼 물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방 사람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를 먹나이다"라고 재차 간청한 일이 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방 사람이 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는 영적인 감각이 없고, 아주 사나운 생각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진리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말합니다.
인생과 세상 역사의 종말
그러면 이 개가 왜 늦게 돌아다닌다고 하였을까요?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 비유를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야 기름을 준비해 가지고 오니 문이 닫혀 있어 주인에게 문을 열어 달라했지만 주인이 거절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못 들어가고 문 밖에서 두루 다니는 그 상태가 개처럼 울며 늦도록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창세기 7장에 노아의 방주가 다 준비되어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시니 처음에 노아의 말을 듣지 않던 사람들이 나중에 주먹 만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차츰 물이 차자 방주에 와서 문을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이 그만 멸망당해 가는 그 모습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날이 저물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다가 나이 많아서 죽을 날이 가까운 것도 인생으로서 날이 저문다는 뜻입니다. 또 역사적으로도 세상 역사가 거의 끝나가서 마지막 시대가 되어 환란이 닥쳐오면 그것이 바로 저물 때입니다.
낮은 주님의 일을 하는 시간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 라"(요 11:9-10)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 나사로가 병 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이 왔는데 일부러 가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머물러 계셨다가 그 후에 유대로 가겠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그곳에 가면 유대인들이 죽이려 들 것이라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낮은 일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시고 계시는 동안이 낮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주님이 하시는 그 기간이 낮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룰 때 까지는 일을 하셔야 하니까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넘어지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낮에는 실족하지 않는다 하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 역시 낮이라는 기간이 앞에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는 이 기간은 여러분들에게 빛이 있는 기간이고 낮입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 그 기회를 놓쳐 버리면 날이 저물어 버립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 때 빛 가운데서 해결을 못하면 어두워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손해를 봅니다. 우리가 감당하고 해야 할 어떤 일들이 앞에 있을 때가 빛이 있는 동안인데 그 때를 놓쳐 버리면 날이 저물어 버립니다. 이 세상도 환란의 때가 오면 완전히 저물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동안 할 일들을 부지런히 해 나가야 합니다.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을 노리는 사탄
한편 날이 저무는 것은 마음이 어두어져 버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
분한 마음이 오래 가지 않도록 즉시 마음을 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하고 다툰다거나 싫은 소리를 들으면 분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을 즉시 해결하지 않고 오래 있으면 해가 빠져 버립니다. 마음이 캄캄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 캄캄한 틈을 타서 사탄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말씀을 마음에 두고 즉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 니다. 자백할 것은 자백하고 서로 화해할 것은 화해하면서 언제나 빛을 유지하면서 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어두움 속에 휘말려 맥을 못추게 됩니다. 사탄은 어두움을 좋아하여 그 속에서 활동하므로 우리 마음이 캄캄해지면 반드시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 간에도 다투는 일이 생기면 마음이 많이 상하고 신앙적으로 힘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마음에 다툼이 있고 그 분한 마음이 오래 가면 날이 저물어 버립니다. 그러면 힘을 완전히 잃어버려 암흑의 세계가 되고 사탄으로 틈 탈 기회를 주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시 59:7)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시 36:1-2)
악인의 근본적인 특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데 담대합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 죄가 어두움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문제를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한 죄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하나님을 겁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은 이 죄는 안전한 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렇게 되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양심이 완전히 마비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겁낼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만 아는 죄가 비밀히 숨어 있지만 그 죄 때문에 두려워 할 존재가 없으니 안전하다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죄를 물 마시듯 짓고 사는 악인의 특성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보면 하루라도 범죄 사건에 대한 보도가 없이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습니다. 가령 성폭행이라든지 도둑질, 강도, 사기 등등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매일 한 건 이상은 항상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악해져 있습니다. 그런 데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양심에 전혀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어떤 때는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비웃으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시 59:8)
언젠가 뉴스를 보니 김일성의 80회 생일 잔치를 하는데 중국에서 400톤 가량의 쇠고기를 선물로 가지고 가고 일본에 있는 사람들도 여러가지 선물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무 마음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김일성 같은 악인을 80회 생일까지 살려 놓으셨으니까요. 6·25 때 죽은 사람만 해 도 300만 명이 넘고 김일성에게 숙청당해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입 니다. 남한 출신인 남로당 당수 골수 공산주의자인 박헌영도 못 마땅히 여겨 숙청 대상으로 총살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80회 생일까지 살았어요.
김일성은 본래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외삼촌이 목사였고 어머니도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김일성도 아마 어린 시절에는 교회에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된 건지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이천만이 넘는 북한 동포들은 그 많은 세월 동안 김일성과 공산당에 속아 억압을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자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산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비웃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처럼 성질이 급하지 않으십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을 이미 보시고 계십니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큰 소리치고 떠드는 것을 하나님은 비웃으십니다.
피난처 되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 이다 우리 방패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시 59:9-11)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기름 부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다윗이 도달한 그 경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무엘이나 나단 선지자 같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물론 알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영적 경험이 없는 그밖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피할 곳도 없고 안전한 곳도 없는 상황 속에서 악한 자가 모든 수단과 힘을 다 동원해서 공격해도 오로지 주님으로만 방패와 피난처를 삼고 살아가겠다고 다윗은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자기 를 받아 주지 않지만 하나님이 영접해 주신다면 그것 말고 무엇을 더 찾을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치러오는 사람들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가끔 우리 주변에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 속에 하나님이 왜 저런 사람을 그냥 놔 두시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자기를 죽이려 하는 원수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원수가 없고 공격하는 사람이 없다면 사람들이 평안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하나님을 잊을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원수에게 공격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순조로우면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무서운 시련과 핍박 속에서 고난을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풍성한 상급을 받기 위한 고난의 기간
신앙생활이 마냥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시 55:9)
우리는 그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내 감정과 생각으로만 판단을 해서 나름대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데 큰 장애 요인이 됩니다. 만일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 그리고 로마 군병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논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박해하여 죽인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저희를 죽이지 마십시오. 은혜를 잊어버릴 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육신이라는 원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육신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육신이 자꾸 나를 세상으로 유혹하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영적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이 원수라고 해서 당장 목숨을 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육신의 힘과 싸움을 하는 그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음미하고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간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이 살아 있는 이 기간은 아주 중요한 기간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 풍성한 상급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말에 따르는 책임과 정죄함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시 59:12)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 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4-3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악한 사람들께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들도 이 말씀을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다. 좋은 말이든 좋지 않은 말이든 일단 입 밖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다시 자신에 게로 돌아와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분풀이하기 위해 하는 말, 뒤에서 헐뜯는 말, 저주하는 말들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수가 있습니다. 더더욱 구원받은 사람끼리 욕하고 저주하면 반드시 그 말이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자녀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이 다투면 마음이 몹시 상합니다. 자식들이 의좋게 잘 지내면 더할 수 없이 기쁘지만 다투거나 반목을 하면 부모의 마음이 아주 상하는 것입 니다. 서로를 향해 화를 낸 아들이나 딸에게 부모는 화가 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한 말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같은 형제 자매인데 서로를 향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서 섭섭하게 한 그 말이 결국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바탕 해대야만 속이 시원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말과 남을 미워하는 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피차간에 이것을 굉장히 주의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악한 사람이 악한 말을 해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는 하지만 자신은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시지만 나중에는 그를 벌하십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예입니다. 가룟 유다가 없었으면 예수님은 팔리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만 결국 가룟 유다는 지옥에 갔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가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잠 16:21-22)
입이 선한 사람은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한다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입으로 남에게 좋은 영향도 주고 좋지 않은 영향도 주니 말 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한 말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심판과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성경 말씀을 토대로 신중하고 사려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생각 없이 말을 하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습니다.
사탄의 세력을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 심을 땅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시 59:13)
앞에서는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했는데 여기서는 왜 진노하심 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라고 하였을까요? 이것은 이 세상 마지막 심판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은 사탄의 세력을 둘러 엎으시고 멸망시키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광을 알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아담에게 맡기셨는데 그것을 사탄이 빼앗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사탄에게 빼앗긴 아담의 통치권을 완전히 되찾아 직접 다스리십니다. 심판은 바로 주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아 오랜 세월동안 다스려온 이 세상은 완전히 죄악과 암흑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 죄악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통치권과 영광이 나타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심판은 우리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영광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므로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물기 전에 찾아야 할 생명의 양식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시 59:14)
이 말씀은 시편 59편 6절과 같은 표현으로 앞에서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눅 13:22-27)
인생의 날이 저물어 일단 생명의 문이 닫혀 버리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문 밖에 두루 다니면서 생명의 양심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시 59:15)
이 세상 해는 거의 저물어져 갑니다. 늦기 전에 찾아와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살아야 할 터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찾지 않습니다. 일단 문이 닫혀버리면 주인 없는 개처럼 울면서 돌아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늦기 전에 생명의 양식을 찾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면 주님께서는 문을 열어 주십니다.
산성이요 피난처 되시는 주님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다"(시 59:16-17)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이 닫혀 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심판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아래 평안을 누리며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요 피난처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닫혀진 문 밖은 개들이 울며 돌아다니는 세상이지만 그 안은 이 세상의 답답하고 고통스럽던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감사와 찬송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과 그의 신하들이 자신의 생명을 노력질하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런 시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힘과 보호 하심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 속에 주님께 감사함을 느낍니다. 오늘까지 우리를 온갖 어려 움과 시련 속에서 지켜주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사무엘 상 19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사울이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가로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사울이 또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 를 침상 채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 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사울이 미갈에 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삼상 19:8-17)
시편 59편도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는 항상 이러한 점에 유의를 해야 합니다.
죄 없이 고난 받으신 주님의 그림자
이 말씀을 얼핏 읽으면 다윗이 죄를 하나도 안 지었다는 뜻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때는 다윗이 아직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짓기 전입니다만 죄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울 왕이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런데도 사울이 다윗을 시기해서 그를 죽이려 한 것이 바로 죄 없이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면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장인이지만 유대 민족의 대표자 격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는 것을 빌라도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이 사람은 죽일 만한 죄가 없다고 극구 변명했지만 유대인들의 아우성에 못 이겨 예수님을 죽이도록 내어 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았는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9-21)
세상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두움에 숨어있어야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는 사람들도 보면 밤에 활동하여 자기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비추셨습니다. 그냥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암흑상과 종교적 부패상 특히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죄상을 자꾸 폭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편을 들어 눈감아 주시지 않으니 미워한 것입니다. 그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해서 예수님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생활 방식은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 정통파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생활 방식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생활을 하며 거룩한 척 겉모양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턱 나타나시더니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들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고 가난하고 병들고 못사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집도 재산도 없는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생활과 예수님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빛 가까이에 가면 그들의 불의한 것이 자꾸 폭로가 되니 자연히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고 멀리하게 마련입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죄를 지으면 그만 움츠러들고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 기 위해 변명을 하거나 모임에 도전을 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 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핍박을 받습니다.
의로운 자를 핍박하는 불의한 세력
이 세상은 불의한 세력이 강하여 의로운 세력을 핍박합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4)
이 세상은 불의한 세력이 의로운 세력을 둘러싸 맥을 못주게 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불의한 세상에 예수님이 혜성처럼 나타나셨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나타날 때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습니다. 원수 골리앗이 나타나 큰 소리를 치자 모두 겁을 내어 벌벌 떨기만 했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이 어둡고 영적인 힘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부패하고 타락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때 다윗은 비록 소년이었지만 할례 받지 않은 개 같은 저런 것 때문에 왜 벌벌 떠느냐, 내가 나가겠다 하여 골리앗을 쳐 죽인 것 입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다윗이 혜성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다윗을 모두가 환영을 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그러나 그러던 인심들이 나중에는 다 돌아서서 다윗을 미워하여 잡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이 죄 없이 미움을 받고 쫓겨 다닌 것은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진리를 배척하는 자들의 운명
이 말씀은 14절에 또 한번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바울이 편지할 때 개들을 삼가라 하였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 3:2)
계시록 22장에도 개들과 어둠에 속한 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 있게 됩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계 22:15)
여기서 성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 개는 문자 그대로의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사악하고 사납고 잔인한 인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 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영적인 감각이 없는 개와 돼지 같은 자들은 참된 보물의 가치를 모르고 발로 밟아 상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에 성령을 우리 마음에 모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진리와 성령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아무리 말해도 모르고 오히려 개처럼 물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방 사람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를 먹나이다"라고 재차 간청한 일이 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방 사람이 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는 영적인 감각이 없고, 아주 사나운 생각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진리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말합니다.
인생과 세상 역사의 종말
그러면 이 개가 왜 늦게 돌아다닌다고 하였을까요?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 비유를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야 기름을 준비해 가지고 오니 문이 닫혀 있어 주인에게 문을 열어 달라했지만 주인이 거절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못 들어가고 문 밖에서 두루 다니는 그 상태가 개처럼 울며 늦도록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창세기 7장에 노아의 방주가 다 준비되어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시니 처음에 노아의 말을 듣지 않던 사람들이 나중에 주먹 만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차츰 물이 차자 방주에 와서 문을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이 그만 멸망당해 가는 그 모습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날이 저물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다가 나이 많아서 죽을 날이 가까운 것도 인생으로서 날이 저문다는 뜻입니다. 또 역사적으로도 세상 역사가 거의 끝나가서 마지막 시대가 되어 환란이 닥쳐오면 그것이 바로 저물 때입니다.
낮은 주님의 일을 하는 시간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 라"(요 11:9-10)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 나사로가 병 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이 왔는데 일부러 가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머물러 계셨다가 그 후에 유대로 가겠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그곳에 가면 유대인들이 죽이려 들 것이라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낮은 일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시고 계시는 동안이 낮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주님이 하시는 그 기간이 낮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룰 때 까지는 일을 하셔야 하니까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넘어지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낮에는 실족하지 않는다 하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 역시 낮이라는 기간이 앞에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는 이 기간은 여러분들에게 빛이 있는 기간이고 낮입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 그 기회를 놓쳐 버리면 날이 저물어 버립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 때 빛 가운데서 해결을 못하면 어두워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손해를 봅니다. 우리가 감당하고 해야 할 어떤 일들이 앞에 있을 때가 빛이 있는 동안인데 그 때를 놓쳐 버리면 날이 저물어 버립니다. 이 세상도 환란의 때가 오면 완전히 저물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동안 할 일들을 부지런히 해 나가야 합니다.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을 노리는 사탄
한편 날이 저무는 것은 마음이 어두어져 버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
분한 마음이 오래 가지 않도록 즉시 마음을 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하고 다툰다거나 싫은 소리를 들으면 분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을 즉시 해결하지 않고 오래 있으면 해가 빠져 버립니다. 마음이 캄캄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 캄캄한 틈을 타서 사탄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말씀을 마음에 두고 즉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 니다. 자백할 것은 자백하고 서로 화해할 것은 화해하면서 언제나 빛을 유지하면서 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어두움 속에 휘말려 맥을 못추게 됩니다. 사탄은 어두움을 좋아하여 그 속에서 활동하므로 우리 마음이 캄캄해지면 반드시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 간에도 다투는 일이 생기면 마음이 많이 상하고 신앙적으로 힘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마음에 다툼이 있고 그 분한 마음이 오래 가면 날이 저물어 버립니다. 그러면 힘을 완전히 잃어버려 암흑의 세계가 되고 사탄으로 틈 탈 기회를 주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
악인의 근본적인 특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데 담대합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 죄가 어두움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문제를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한 죄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하나님을 겁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은 이 죄는 안전한 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렇게 되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양심이 완전히 마비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겁낼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만 아는 죄가 비밀히 숨어 있지만 그 죄 때문에 두려워 할 존재가 없으니 안전하다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죄를 물 마시듯 짓고 사는 악인의 특성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보면 하루라도 범죄 사건에 대한 보도가 없이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습니다. 가령 성폭행이라든지 도둑질, 강도, 사기 등등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매일 한 건 이상은 항상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악해져 있습니다. 그런 데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양심에 전혀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어떤 때는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비웃으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시 59:8)
언젠가 뉴스를 보니 김일성의 80회 생일 잔치를 하는데 중국에서 400톤 가량의 쇠고기를 선물로 가지고 가고 일본에 있는 사람들도 여러가지 선물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무 마음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김일성 같은 악인을 80회 생일까지 살려 놓으셨으니까요. 6·25 때 죽은 사람만 해 도 300만 명이 넘고 김일성에게 숙청당해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입 니다. 남한 출신인 남로당 당수 골수 공산주의자인 박헌영도 못 마땅히 여겨 숙청 대상으로 총살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80회 생일까지 살았어요.
김일성은 본래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외삼촌이 목사였고 어머니도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김일성도 아마 어린 시절에는 교회에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된 건지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이천만이 넘는 북한 동포들은 그 많은 세월 동안 김일성과 공산당에 속아 억압을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자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산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비웃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처럼 성질이 급하지 않으십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을 이미 보시고 계십니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큰 소리치고 떠드는 것을 하나님은 비웃으십니다.
피난처 되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기름 부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다윗이 도달한 그 경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무엘이나 나단 선지자 같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물론 알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영적 경험이 없는 그밖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피할 곳도 없고 안전한 곳도 없는 상황 속에서 악한 자가 모든 수단과 힘을 다 동원해서 공격해도 오로지 주님으로만 방패와 피난처를 삼고 살아가겠다고 다윗은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자기 를 받아 주지 않지만 하나님이 영접해 주신다면 그것 말고 무엇을 더 찾을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치러오는 사람들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가끔 우리 주변에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 속에 하나님이 왜 저런 사람을 그냥 놔 두시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자기를 죽이려 하는 원수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원수가 없고 공격하는 사람이 없다면 사람들이 평안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하나님을 잊을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원수에게 공격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순조로우면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무서운 시련과 핍박 속에서 고난을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풍성한 상급을 받기 위한 고난의 기간
신앙생활이 마냥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내 감정과 생각으로만 판단을 해서 나름대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데 큰 장애 요인이 됩니다. 만일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 그리고 로마 군병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논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박해하여 죽인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저희를 죽이지 마십시오. 은혜를 잊어버릴 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육신이라는 원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육신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육신이 자꾸 나를 세상으로 유혹하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영적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이 원수라고 해서 당장 목숨을 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육신의 힘과 싸움을 하는 그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음미하고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간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이 살아 있는 이 기간은 아주 중요한 기간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 풍성한 상급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말에 따르는 책임과 정죄함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 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4-3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악한 사람들께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들도 이 말씀을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다. 좋은 말이든 좋지 않은 말이든 일단 입 밖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다시 자신에 게로 돌아와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분풀이하기 위해 하는 말, 뒤에서 헐뜯는 말, 저주하는 말들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수가 있습니다. 더더욱 구원받은 사람끼리 욕하고 저주하면 반드시 그 말이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자녀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이 다투면 마음이 몹시 상합니다. 자식들이 의좋게 잘 지내면 더할 수 없이 기쁘지만 다투거나 반목을 하면 부모의 마음이 아주 상하는 것입 니다. 서로를 향해 화를 낸 아들이나 딸에게 부모는 화가 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한 말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같은 형제 자매인데 서로를 향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서 섭섭하게 한 그 말이 결국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바탕 해대야만 속이 시원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말과 남을 미워하는 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피차간에 이것을 굉장히 주의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악한 사람이 악한 말을 해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는 하지만 자신은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시지만 나중에는 그를 벌하십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예입니다. 가룟 유다가 없었으면 예수님은 팔리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만 결국 가룟 유다는 지옥에 갔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가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잠 16:21-22)
입이 선한 사람은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한다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입으로 남에게 좋은 영향도 주고 좋지 않은 영향도 주니 말 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한 말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심판과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성경 말씀을 토대로 신중하고 사려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생각 없이 말을 하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습니다.
사탄의 세력을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했는데 여기서는 왜 진노하심 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라고 하였을까요? 이것은 이 세상 마지막 심판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은 사탄의 세력을 둘러 엎으시고 멸망시키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광을 알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아담에게 맡기셨는데 그것을 사탄이 빼앗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사탄에게 빼앗긴 아담의 통치권을 완전히 되찾아 직접 다스리십니다. 심판은 바로 주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아 오랜 세월동안 다스려온 이 세상은 완전히 죄악과 암흑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 죄악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통치권과 영광이 나타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심판은 우리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영광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므로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물기 전에 찾아야 할 생명의 양식
이 말씀은 시편 59편 6절과 같은 표현으로 앞에서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눅 13:22-27)
인생의 날이 저물어 일단 생명의 문이 닫혀 버리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문 밖에 두루 다니면서 생명의 양심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해는 거의 저물어져 갑니다. 늦기 전에 찾아와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살아야 할 터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찾지 않습니다. 일단 문이 닫혀버리면 주인 없는 개처럼 울면서 돌아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늦기 전에 생명의 양식을 찾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면 주님께서는 문을 열어 주십니다.
산성이요 피난처 되시는 주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이 닫혀 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심판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아래 평안을 누리며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요 피난처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닫혀진 문 밖은 개들이 울며 돌아다니는 세상이지만 그 안은 이 세상의 답답하고 고통스럽던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감사와 찬송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과 그의 신하들이 자신의 생명을 노력질하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런 시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힘과 보호 하심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 속에 주님께 감사함을 느낍니다. 오늘까지 우리를 온갖 어려 움과 시련 속에서 지켜주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