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2편] 나의 영혼아 조용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 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2:1-12)

 '다윗의 시 영장으로 어두둔의 법칙을 의지하여 한 노래'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 62편은 어떤 위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다윗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시입니다.



말씀을 통해 경험하는 깊은 신앙의 차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 61:1)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떠한 위기 상황 속에서라도 조용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다윗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핍박이나 시련을 당하게 되면 마음이 요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구원받은 이후에 여러번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잠잠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서 빛을 받았을 때 조용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결심을 가지고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내게 닥친 이 어려움과 핍박을 이겨내야지 하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마음은 자꾸만 더 복잡해지고 피곤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빛을 주십니다. 이 빛을 받았을 때 어떤 환경 속에서도 조용히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깊은 신앙의 차원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한 사람의 마음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1-3)


 이 시 역시 다윗의 시입니다. 우리가 걱정과 염려와 괴로움으로 마음에 요동이 일어날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교만하고 눈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또 큰 일과 미치지 못할 일에 힘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너무 높은 이상을 가지면 현실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에 갈등이 생깁니다.

 다윗은 여기서 내 마음이 교만치 않고 눈이 높지 않아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다윗의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했던 것입니다. 마치 젖 뗀 아이가 그 어미의 품에 있음과 같다고 다윗은 말합니다. 젖먹이는 배가 고프면 울면서 보챕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는 조금씩 단단한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엄마만 곁에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냅니다. 젖을 먹는 아이는 엄마보다는 젖이 좋고, 젖을 뗀 아이는 젖보다 엄마가 좋습니다. 이것이 신앙적으로는 무슨 뜻일까요?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젖먹는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신앙이 자라면 젖을 떼고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자신이 젖을 먹는 사람인지 젖이 떨어진 사람인지 여기서 잘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구원을 받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젖을 뗀 것으 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젖 먹는 사람은 자그마한 일에도 항상 마음에 불평 불만을 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용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젖먹는 아이는 아직은 자기밖에는 모릅니다. 자기가 젖먹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습니다. 젖먹이는 자기만 제일이고 자기에게 젖을 먹여주지 않으면 울어댑니다.

 젖을 뗐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한 차원을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투심이나 간사한 마음, 남을 용서하지 않는 좁은 마음이 점차 줄어들어 남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때부터 생깁니다. 젖먹는 상태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의 신앙상태를 말합니다.

 젖을 떼면 그때부터는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기가 젖먹을 때는 엄마보다 젖을 사랑하지만 젖이 떨어지면 엄마를 사랑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를 알아보고 엄마에게 안겨 있으면 최고로 만족을 느끼는 것이 젖 떨어진 상태입니다. 다윗은 어른이면서도 어린 아이의 상태를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잘 표현한 것은 다윗의 경험도 있겠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이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이삭이 젖을 떼었을 때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굉장히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어린 시절 즉 우리 마음이 너무 좁고 인색하여 남의 허물을 볼 때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마음의 상태로 넓어진 것을 말합니다.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이것은 자신의 의로써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 그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시험이나 핍박을 받아도 조용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성장한 사람의 마음 상태입니다. 다윗은 많은 원수들이 자기를 둘러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조용히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경지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오직 저만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2)


 다윗은 자기를 돌아보면 낙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원수가 침범할 수 없도록 지켜주는 산성이시요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요동치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얻는 은혜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회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시 62:3-4)


 자신을 올바로 아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올바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 자신은 비가 오거나 어떤 충격이 있으면 쉽게 무너지는 담이요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인생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무 힘도 없이 넘어지는 담,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인생을 무슨 소용이 있다고 공격하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겸손한 표현입니까? 

 자신의 무가치성을 깊이 느끼고 자기를 부인하기까지는 굉장히 힘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바울은 자기 안에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고 죽은 상태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탄식을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비로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들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한 번 꺾어져야 됩니다. '주님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저는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하고 자기가 완전히 한번 꺾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데도 우리들 스스로가 그 은혜를 제한해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가령 큰 부자인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돈이 필요해서 아버지께 부탁을 했다고 합시다. 아버지가 백지 수표를 한 장 주었는데 그 수표에다 아들이 오만원이라고 써 넣었다면 그 수표는 오만원 짜리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더 도와주고 싶어도 스스로 써 넣어버린 액수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의 능력을 알고 자신의 사정을 있는 대로 고했다면 얼마든지 부족함을 채워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라는 찬송이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백지를 내놓아야 합니다. 지금 내 능력이 이 정도 되는데 이 정도만 도와주세요 하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온전한 은혜를 제한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을 인정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로부터서 은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넘어지는 담이요 흔들리는 울타리라고 고백한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낮아진 상태였습니다. 다윗이 만일 자기의 힘으로 원수들을 대적하였다면 다윗은 패배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을 비우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높아진 마음을 낮추시는 주님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이 죄악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 하셨은즉"(사 30:12-13)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허망한 자신들의 힘과 세력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퇴락한 담처럼 홀연히 무너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게 무엇인가 힘과 능력이 있다고 하는 생각, 나는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는 재주와 열심이 있고 또 믿음도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여러가지 모양으로 어떤 시험이나 핍박이나 어려움이 자꾸 닥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높아져 있는 우리의 마음들을 낮추고 무너뜨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어려움과 시험을 통해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진정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높은 데서 떨어뜨리려는 사탄의 음모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시 62:4)


 '저희가 그를'이라고 했는데 '저희'는 다윗을 공격하는 세력을 말하고 '그'는 다윗이 자기를 객관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결국 저희는 사탄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을 시험하고 넘어뜨리려고 도전을 합니다.

 사탄은 첫째로 아담을 높은 데서 떨어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왕권을 아담에게 주셨는데 사탄은 아담을 유혹하여 그 왕권을 탈취해 버렸습니다. 다음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 이 사탄에게 3가지 시험을 받으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 천하 만국을 보이면서 내게 절하면 이것을 주겠다는 시험,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뛰어내리라는 시험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돌덩이를 보고 떡이 되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온 세상 돌을 전부 떡을 만들어서 장사를 할 것입니다. 실지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 성경 말씀은 뒤에 다 두고 그렇게 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것이 높은 데서 넘어뜨리는 사탄의 방법입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한 것도, 온 세상의 영광스러운 것을 보여주면서 사탄에게 절하면 그 모든 것을 준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은 이브를 찾아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질 수 있다고 하는 말에 넘어가 이브는 완전히 곤두박질해서 떨어졌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생활 속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길 옆에는 언제나 사탄이라는 복병이 있습니다. 저도 육신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참 좋은 일이 생기겠다 싶어 해보면 나중에 굉장히 곤경에 처하는 일을 여러번 겪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희생과 손해를 치르든지 그 길을 꾸준히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지고 맙니다.

 사람들은 사탄이 도깨비처럼 뿔이 달리고 무섭게 생긴 존재인 줄로만 압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접하는 사탄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사람의 배후에 있는 사탄을 만납니다. 사람을 앞장 세워서 나타나는 사탄은 굉장히 아름답게 미소 짓고 호리는 음성으로 말합니다. 아주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것 같고 그 말을 들으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은 얼굴로 우리에게 항상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사탄은 사람을 잡아먹는 것 입니다.



영혼을 노략하는 사탄의 꾀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내 마음판에 새기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어다 보다가 어리석은 자 중에,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이 계집은 떠들며 완패하며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모퉁이.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그 계집이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서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여러 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잠 7:1-27)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는 음녀입니다. 청년을 아주 온갖 고운 말과 목소리로 유혹을 합니다. 이 성경 속에는 정결한 여자가 있고 음녀가 있습니다. 정결한 여자는 주님의 신부인 교회를 말하고 음녀는 예수님을 남편으로 맞이하지 않는 교회를 말합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 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중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계 17:1-4)


 이 음녀는 적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한 운동을 하는 타락한 교회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운동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사탄의 유혹은 어디에든지 있습니다.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은 음성으로 속삭이지만 그 뒤에는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좋은 일만 찾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거기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참 소망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시 62: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라는 말씀 처럼 우리는 구원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희미해지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 되살아납니다. 육신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만큼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는 영적이든 육신적이든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지 않으면 만족이 없습니다. 돈의 경우를 보더라도 돈이 나를 위로해 주고 힘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강하게 느껴지면 자연히 돈에 대한 사랑도 그만큼 멀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약하게 느껴질수록 그 빈 자리에 세상적인 인정이나 쾌락 따위를 채우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사랑 아니면 세상적인 것 둘 중의 하나로 채워져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으로든 채워지지 않으면 외롭고 허전하여 세상 살 맛이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한국 사람들의 의식 구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만 해도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잘 살아보자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온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사람만큼 부지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새마을 노래 가사가 그 시대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살아보자고 열심히 일하던 것이 이제는 우리도 즐기자고 하는 생각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고생하며 귀찮게 일만 할 것인가? 그렇게만 살다 끝나면 무엇 하느냐! 이제는 즐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힘든 일에 종사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갑니다. 공장과 농촌의 노동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국제경쟁력도 약화되고 수출도 줄기 시작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가치관이 자주 바뀌어가면서 이제는 일하기보다는 편히 쉬고 즐기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망을 현실적인 즐거움이나 물질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치관이 완전히 다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분명히 산 소망이 있는데 이 소망을 잃어버리고 죽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외로워하고 낙담하는 것입니다. 산 소망은 썩지 않고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토하라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62:6-7)


 여기에 마음을 토하라고 했습니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 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애 2:19)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갈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 슬픈 노래를 불렀습니다. 밤 초경에 일어나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하라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토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 마음을 토한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여러가지 어두운 마음, 죄에 대한 생각, 잘못된 행실 따위를 진심으로 주님 앞에서 자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토설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 감찰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가인이 동생을 쳐 죽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가인아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신 것은 가인이 자신이 저지른 죄를 토설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큰 질투심이 생기고 분한 마음이 나서 동생을 죽여버렸습니다." 하고 토설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성경을 읽다가 어떤 문제로 마음에 괴로움이 생기면 즉시 죄를 토설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이러한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토하는 마음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담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만을 토로할 뿐 아니라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도 토해야 합니다.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이 인생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고 선한 것도 없사오니 이제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한 다윗이 그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마음을 토하면 즉시 평안을 얻고 피할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술렁이던 마음, 괴롭던 마음들이 정리가 되면서 주님 앞에서 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인생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시 62:9)


 사람의 가치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움직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합니다. 조금만 잘하면 자랑을 하고 어떤 지위를 얻으면 그리 대단한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자기를 나타내고 자랑하려는 마음이 항상 사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 된 것처럼 말하고 무슨 힘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보실 때에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높은 산이나 낮은 곳이나 다 똑같아 보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보실 때에는 높은 자나 천한 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자기가 가진 조그마한 힘이나 지혜를 가지고 잘난 척하니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자고새라는 새는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데 실컷 품어서 알을 까고 나면 그만 날라가 버립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재물을 모아 품고 있어도 언제 날아간지 모르게 날아가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재물의 힘에 의지하는 인생은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이런 성경을 읽으면서도 실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근시안적으로 현재만 보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지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침륜과 멸망에 빠트리는 육신의 소욕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시 62:10)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재물을 의지하는 인생의 헛됨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비유로 저회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쏠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 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이 비유는 사실 이 세상 모든 인생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해지는 것보다 믿음에 부요해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적으로 부요해지려는 희망을 너무 악착같이 가져서는 안됩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것이라"(딤전 6:3-9)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아는 것이 지족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욕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집니다. 욕심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욕심을 크게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불만이 많아지고 항상 뭔가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천하보다 큰 구원과 지족하는 마음


 그러나 천하하고도 바꿀 수 없는 큰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비록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수천 명을 거느린 돈 많은 사업가보다 훨씬 복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일하게 받은 큰 구원을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시시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비록 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배설물처럼 취급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넓은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영원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소유물도 없이 살면서 수없이 고생을 했지만 세상을 비웃으며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육신은 약하지만 너무도 힘찬 삶을 살아갔습니다. 육신에 '가시'와 같은 고약한 병이 있었지만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비웃으면서 늠름하게 살아간 생애가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현재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바울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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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간절히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 62:11)


 여기서 하나님이 한두 번 말씀하신다는 것은 한번 말씀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거듭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음행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 고발하니까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서 땅에 글씨를 썼습니다. 그 다음에 유대인들이 또 독촉을 하니까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고 하시면서 또 땅에 글씨를 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한두 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한 번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사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서 인간들에게는 온 생각을 기울여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성들여 아주 진실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어찌 감히 흘려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간절히 말씀하시지만 우리들은 그 말씀을 저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권능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하였는데 권능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나아버리고 폭풍에게 잠잠하라 명하자 폭풍도 순종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권능에 비하면 사람의 권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권능도 없는 인생들이 마치 큰 권능을 가진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할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공의와 무한한 사랑을 아울러 지니신 하나님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2:12)


 만일 하나님이 권능만 있고 인자하심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 다음으로 사탄도 권능이 있습니다. 아담을 타락시키고 육천 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 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죄를 심어놓고 이 세상을 복잡하고 냉정한 곳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바로 마귀의 권능입니다. 공산주의의 이론도 인간의 이성으로 따지면 맞는 말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하다. 골고루 다 함께 잘 살아야 된다. 그런데 부자는 가난한 자를 착취하므로 프롤레타리 아들이 일어나 부르조아들을 둘러엎어 버리고 혁명을 일으켜서 평균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정의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사랑이 없을 때에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정의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다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정의로는 우리 죄를 심판하시지만 사랑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무한한 사랑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상이 뭡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이상적인 현장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유무상통의세계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날 임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가난한 자나 부한 자가 모두 함께 자발적으로 있는 것을 내놓고 더불어 살게 된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이 융합이 될 때에 이처럼 가장 이상적인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지향하는 이상의 세계입니다. 기독교의 이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만들어 서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강력한 인위적인 힘을 가지고 평균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그 사회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권능도 하나님께 속하고 인자함도 하나님께 속했다고 이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권능이 없습니다. 다 자기를 위한 사랑이고 자기를 위한 권능입니다.

 다윗은 생명이 위태로운 환경 속에서도 공의와 무한한 사랑의 권능을 지니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이렇게 시로써 읊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