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3편]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깊은곳에 들어 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시 63:1-11)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에 갔을때 지은 것입니다.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없이 가니 오늘날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 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 종자들과 그와 함께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삼하 15:19-23)


 유다 광야는 예루살렘에서 50여 리 쯤 떨어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산 위에 있는데 동쪽으로 산을 내려가 여리고 쪽으로 가면 들판이 있고 조금 지나가면 요단강이 나옵니다. 그 요단강을 건너면 이방인의 세계입니다. 다윗이 아직 요단강을 건너기 전 입니다만 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에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곤핍한 땅에서 주를 갈망하오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 다"(시 63:1)


 성경 말씀은 이중 삼중적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을 기록했지만 거기에는 예언적인 뜻이나 영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 왔느뇨 시바가 가로되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삼하 16:1-2)


 다윗이 물이 귀한 광야에 있을 때 시바라는 사람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먹고 힘을 얻으라 하였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실제적으로는 물이 없어 갈증이 심한 상태였지만 그것보다는 영적인 갈증이 더 심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영혼의 상태가 피곤하고 갈증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주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물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을 지나가시다가 우물 가에서 쉬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오니까 물을 좀 달라고 청합니다. 현실적으로 주님도 육신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갈증을 느끼고 물을 요청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그 여자가 주님께 물을 간구하는 상황으로 변해갑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울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3-15)


 처음에는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그 여자가 예수님께 물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처음에는 육신적인 갈증을 해소시키는 물을 달라 하였지만 나중에는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여자는 아직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 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물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영혼의 갈증을 면하는 것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예수님께서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땅 속에서 나오는 물이 있어야 하고 우리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이 있어야만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현실적으로는 대단히 육신이 피곤하고 물이 없어 갈증이 심한 상태에서 이 시를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영혼의 갈증이 심한 것을 말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나 인간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그 육신적인 문제 때문에 자칫 영적으로도 실망하고 낙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육신의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를 계기로 해서 하나님을 찾는 갈증이 생기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고 어떤 영적인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육신적인 어려움에만 파혀 하나님꼐로부터 오는 좋은 일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포자기해 버리게 됩니다.



교회 안에 흐르는 생수-성령


 다윗은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은 아주 높은 산 위에 형성된 도시입니다. 정상에서 1~2백 미터 정도 내려오면 시온산이 있는데 거기에 솔로몬 성전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솔로몬은 성전은 없어졌고 회교사원이 들어선 한 편에 통곡의 벽만이 남아 있습니다.

 통곡의 벽에서 왼쪽으로 가면 굴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안에 들어 가면 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디서 솟아나는지 굉장히 많은 물이 솟아나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해발 200여 미터쯤 내려가 산 아래 광야에 가면 오히려 물이 없습니다. 다윗의 갈증은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생긴 갈증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을 떠난 데서 오는 영적인 고통과 갈증이 더욱 컸던 것입니다. 다윗이 마음을 두었던 예루살렘은 현재 우리로서는 교회를 뜻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새 예루살렘은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신약시대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계셨지만 신약시대에 오면 교회에 계십니다. 물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신다고 할 수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전에도 여러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받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고 예루살렘은 교회의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을 떠나 있는 다윗이 영혼의 갈증을 느끼며 하나님을 찾는 것처럼 지금 우리들도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영적인 갈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7장에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하였는데 이것은 저희가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곧 성령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적인 갈증이 해소됩니다. 우리 마음에 영적인 갈등이 있을 때에는 성령이 계시는 교회 안에서 언제나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교제를 가지다 보면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에 다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련과 고난 가운데 나타나는 주님의 영광과 권능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2)


 여기에 보면 다윗의 마음이 조금 전과는 달리 전환이 됩니다. 비록 예루살렘에서 멀리 떠나 있지만 그 마음은 주님을 향하면서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님의 권능과 영광이 나타나실 것을 마음 속에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여쭈었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을 때가 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영광을 얻으시게 됩니다. 주님의 권능과 영광은 우리가 마냥 편안히 살고 아무 문제가 없이 잘 되어 갈 때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주님의 영광과 권능은 어떤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 때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핍박도 시험도 시련도 없이 마냥 편안하게만 살고 있다면 주님의 영광과 권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주님의 진정한 권능과 영광을 고난과 순종을 통해서 나타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서 살고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어떤 어려운 일이나 문제가 닥쳐와도 그 일이 주님의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생겨나는 것이구나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세상에 빠져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믿음 자체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나타나는 것을 바라보았는데 바로 그 순간 다윗이 서 있는 장소가 성소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육신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마음이 성도들과 함께 연결되어 있으면 역시 성소가 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이 성도들과 함께하는 그 성소에서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힘찬 생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주의 인자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자신의 생명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가서 8장에 보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실히 알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제가 항상 이야기합니다만 이 세상 모든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는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하나님의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형제 간의 사랑이나 친구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사랑이 있어야만 삶의 의미가 있고 반면 사랑이 없으면 거기에서부터 모든 문제가 생겨납니다. 가족 간에 사랑이 없으면 그 가족은 아주 냉냉하고 살벌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형제 간에 우애가 없으면 남보다 훨씬 못합니다. 부부 간에 만일 사랑이 없으면 그 가정에는 파탄이 생깁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요즈음에는 부모의 사랑을 못느끼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답시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고 외쳐대기만 하니까, 부모에게 싫증을 냅니다. 이런 가정과 사회는 청소년 범죄와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자녀가 공부를 못할망 정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주고 다른 분야에서 보람과 적성을 발견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격려해 주는 가운데서 가족의 행복이 깃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는 우리 영혼의 생명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에 우리의 죽은 영혼이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 수 있다면 우리 생명이 더욱 그 안에서 활기차고 왕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며 사는 사람은 항상 그 영혼이 메마른 상태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언제나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느끼면서 살 수 가 있을까요?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는 굉장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점차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고달픈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힘들고 어렵고 실망스러운 상태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때에는 에베소 교회에 권면하신 말씀처럼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을 회복한다면 그 안에서 힘찬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신앙생활은 성령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성령과는 관계없이 외형만 꾸미면서 살다가 끝나버릴 수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교회처럼 성령을 달라고 하나님께 빈다고 해서 성령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을 때 일차적으로 성령을 받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이 계시지만 이 육신이 성령의 음성 을 싫어합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은 성령의 생각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구원받은 사람도 성령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생활을 계속하면 나중에는 성령의 생각이 희미해져 완전히 잠든 상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성령의 음성은 양심 속에서 세미하게 들려오는데 이 양심의 소리를 배척하여 막아버리면 나중에는 양심이 마비되어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 듣고 순종하면 점점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소리를 자꾸자꾸 배척하고 강한 육신의 소리에 끌려가면 성령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회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6-17)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영의 사람, 즉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주님이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에베소서 말씀은 구 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성령의 음성을 좇지 않고 육신의 음성만 좇아서 살면 마음에 주님이 안 계십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우리 멋대로 하면 주님이 우리들의 마음을 조절하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계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완전히 뿌리가 깊히 박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 은 없네"라는 찬송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주님을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一참된 행복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우리는 한꺼번에 주님의 사랑을 다 알아버릴 수는 없습니다. 어떤 때는 주님의 넓은 사랑을 아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주님의 깊은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과정입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신앙생활이 피상적인 것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귓전을 스쳐 지나가는 말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실생활에서 경험을 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통과될 때만이 주님의 사랑이 내 생명보다 훨씬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내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얼마나 그 마음이 힘이 있고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주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눈이 어두워지고 믿음이 없어 주님의 사랑 속에 깊이 빠져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지 못한다는 것은 몹시도 아쉬운 일 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는 여러가지 경험들이 있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면 반드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신비적인 어떤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직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 이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고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생명보다 낫다면 이 세상 어떤 것을 가지고도 채울 수 없는 행복이 그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자꾸 외부적인 것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외부적인 것에 두지 않고 얼마나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에 둔다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진정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손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시 63:3-4)


 손을 든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손을 든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 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성전에 들어가다가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것을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손으로 잡아 일으킨 일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데에는 깊은 영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서 주님이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열왕기상 8장에도 보면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은 후에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성전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이름을 두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는 전에도 여러번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주님의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나타내는 데 우리의 손을 들어 섬기는 일이 얼마나 축복스러운 일 입니까? 우리에게 주님의 이름이 계시면 틀림없이 우리가 이 손을들어 성도를 섬기며 봉사하는 일을 할 때 주님의 이름 안에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손을 들어서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고 주님과 관계없는 일에만 분주하기 쉽습니다.



영혼의 안식과 기쁨의 찬송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시 63:5)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 안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찬송이 절로 우러나옵니다. 소 뼈다귀를 오래 고은 국물과 아주 구수한 기름이 허약한 사람 속에 들어가 몸을 도와 힘을 북돋아 주는 것처럼 내 영혼이 만족하고 기쁘게 주를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시 63:6-7)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에 있었을 때 처음에는 육신적인 심한 괴로움과 영적 갈등이 있었지만 이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온전히 의지하여 그 생각들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전히 육신적으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 있지만 그 마음은 주님 안에 깊숙히 들어가서 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주님의 은혜를 만끽하는 상태로 마음이 몰입이 되었습니다.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 나게 하소서 "(시 17:7-9)


 이 시도 역시 다윗이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고 복을 받은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원수를 방비할 수 있는 울타리가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보호 아래 들어갔지만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아야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영적인 마음이 유지되는 데 그만 유혹과 시험이 오면 넘어져 버립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신앙생활의 본령에서 이탈해 가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대로 현실이 어떻든 간에 확실히 주님을 믿으면 그 현실을 넉넉히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이 믿음 안에 있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 환경을 초월하여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 63:7-8)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회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9 — 10) 


 이 세상에는 제일 불쌍한 사람은 실패하고 넘어지고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에도 그를 붙잡아 줄 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넘어질 때에 서로 붙들어 줄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지나갔지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선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 63:8)


 주님은 오른손으로 나의 왼손을 잡고 함께 힘있게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앞서 전도서에 있는 말씀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붙들어 일으켜 준다는 말씀은 우리 신앙의 반려자이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 말씀은 주님의 이름 아래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치른 세상을 살아가는 데 교회가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 것인지를 전도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곤경에 빠져서 홀로 허덕이고 있을 때 믿음의 식구들이 함께 의논하고 도와줄 때 다시금 '형제 사랑이 이렇게 귀하구나. 구원받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좋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영혼을 노략하려던 자들의 멸망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시 63:9)


 내가 주님을 멀리하여 떠나면 주님이 나를 붙드시려고 해도 붙드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주님 안에 거하면 어떠한 대적도 나를 주님 품안에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대적하고 나의 영혼을 노략하려는 무리들은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다윗의 생명을 노략하던 세력들도 결국은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칼에 세력에 붙인 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시 63:10)


 시랑은 사나운 짐승 여우를 말합니다. 여우의 밥이 된다는 것은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왕권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 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시 63:11)


 여기서 왕은 다윗이 다윗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만은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의 왕권에 동참할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 21:23-24)

 새 예루살렘 천국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는, 하나님의 영광 이 비치는 곳인데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의 왕들이 누구일까요? 이 땅의 왕들은 천년왕국 기간에 주님이 왕 노릇하실 때 같이 왕 노릇할 왕들입니다. 이 왕들은 세종대왕이나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세상 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때 천년왕국 기간에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영 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옵니다. 이 왕들의 영광은 현재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천년왕국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 고을 차지하는 왕이 있고 다섯 고을 차지하는 왕이 있고 두고을 차지하는 왕이 있습니다. 왕의 계급과 영광이 다릅니다.



영광을 예비하는 현재의 신앙생활


 현재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이 오시면 얻게 될 왕권에 동참하는 생활입니다. 왕권에 동참하는 영광을 우리가 현재 신앙생활 가운데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 5:22-24)


 우리는 성령의 소욕을 따른 만큼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냥 육체의 소욕만 따라하면 결코 왕 노릇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한 것입니다. 실지로 그렇게 되어 있는데도 그러한 사실을 현재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아직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이 아직도 살아서 나를 지배하면서 왕 노릇하는 영광을 깎아먹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이고 매우 구체적인 사실이지만 우리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육신의 욕심을 따르는 경향이 상당히 많은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제 가운데서 활발히 살아갈 때 다윗처럼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