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4편] 진정한 피난처 되시는 주님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나룰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10)


 이 시편 64편도 63편처럼 다윗이 원수들에게 쫓기는 환경에서 지은 시입니다. 원수들의 핍박과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다윗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고난 받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일의 그림자적인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림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예수님도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이 견디기 어려운 것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우리 인간들이 당하는 그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으로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충분히 느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호소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이나 슬픔 또는 어려운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탄식하면서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눈물과 통곡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 드렸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논리적으로는 이해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거하셨지만 육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문제는 완전히 인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로부터 지키시는 주님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 64:1)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윗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로 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죄 때문이 아니라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다윗은 원수의 두려움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원수의 두려움에서 생명을 보존해 달라는 말은 원수가 둘러쌀지라도 담대히 원수를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는 뜻입니다.



주님 안에 숨으라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64:2)


 다윗은 주님께 자신을 숨겨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숨는다는 말을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숨는 것의 정반 대는 높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서 주님 안에 숨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낮아지면 사탄의 공격을 받지 않지만 높아지면 사탄의 공격을 즉각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높이 드러나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수단과 노력을 믿고 자기의 의로써 살아가면 사신이 노출됩니다. 우리 육신은 노출되는 것을 좋아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 가든지 자신이 대접과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숨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의 육신이 노출되면 즉시 사탄의 화살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자기를 부인하면 대신 주님이 방패가 되시고 사탄과 원수의 공격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사탄의 공격에서 숨을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임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항상 남보다 앞장 서고 남보다 높아지려는 생각이 많습니다. 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칭찬받고 싶은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만에 빠지면 죄를 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낮아지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행악자의 비밀한 꾀라고 했는데 이 행악자의 비밀한 꾀는 바로 사탄의 꾀입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사탄이 와서 시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보다 지혜로우시므로 이길 수 있었지만 베드로나 고린도 교회의 경우를 보면 스스로 높아져 있을 때 사탄의 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높아진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사탄에게 넘어가기 쉽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문제가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미 십자가를 지신 주님 뒤에 숨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 뒤에 숨으면 더 이상 사탄이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주님에게 화살을 쏘아서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였지만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에 우리가 숨기만 하면 더이상 날아 올 화살이 없습니다.



믿음 안에 사는 비밀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8-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하였는데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것 은 "내가 살아 있어서 율법을 이렇게 지킬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인데 실제로 온전히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다 결국 그 율법에 의해 정죄되어 죽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자신의 힘으로 좀 더 신령해지고 거룩해지겠다 좀 더 열심을 내보겠다는 것이 바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자신을 긍정하고 높이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교만하여 자기를 높이려 하면 즉시 사탄의 화살을 맞게 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스스로 의롭고 거룩하고 신령하게 살려는 마음이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 안에 주님 이 살아계시는 것이지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거룩할 수도 없고 신령할 수도 없고 칭찬을 받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낼 것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열심을 내어 사람들에게 그 열심을 인정받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줄 착각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를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죽어버린 존재인 자기를 나타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자기가 없어 진 빈 자리를 대신 예수님이 채우십니다. 자신이 욕을 먹든지 무시를 당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영혼을 쏘는 화살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 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시 64: 3 —4)


 우리는 이 사탄의 화살을 잘 모르기 때문에 사탄과 싸우는 게 참 힘이 듭니다. 뱀은 이브를 찾아와서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 화살은 육신을 쏘는 화살이 아니고 영혼을 쏘는 화살입니다. 영혼을 쏘는 화살은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만들고 죽이기도 하는 사탄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2:16-18)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사람은 이미 부활이 지나갔기 때문에 앞으로 부활이 없고 따라서 우리는 부활을 믿을 필요가 없다며 성경에 맞지 않는 그릇된 말을 퍼트렸습니다.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이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부패시켜버립니다. 독한 창질은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에이즈와 같은 무서운 병으로 한 번 걸렸다 하면 사람이 죽게 되는 병입니다. 사탄의 말은 독을 묻힌 화살과 같아서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썩게 하여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탄의 말 속에는 독이 숨어 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성령이 떠나버린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는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합니다. 영혼의 이익이 아닌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면 부패해 버립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5-36)


 어떤 목사는 이 성경 구절을 읽어놓고 고함치면서 하는 말이 먼저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 갚으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익의 재료로 삼다 보니 그렇게밖에 안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무엇을 드리기 때문에 갚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은혜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 앞 구절인 33-34 절을 읽어보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


"누가 ~ 하겠느뇨"라는 표현은 긍정이 아니라 부정의 뜻을 지 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모사가 될 사람도 없으며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그냥 거져주시는 것이지 누가 무엇을 드렸기 때문에 갚아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넉넉한 은혜를 강력하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성경을 자기 욕심으로 읽으면 그 뜻 이 정반대로 완전히 뒤집어지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일이 많이 나타납니다. 기독교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변질되어 가는 과정도 이러한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이익을 생각하면 성경이 절대로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임박한 진노를 쌓는 무리들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시 64:5)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협력하여 영혼을 사냥하기 위해서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합니다.


"저희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희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시 10:5)


 이 악한 자들의 길은 언제든지 튼튼하고 주의 심판은 너무 높아서 저희 안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심판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심판이 너무 높이 있기 때문에 그 심판이 눈에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흑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하나님의 진노가 당장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현재의 신앙생활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반드시 들림받은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 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구원받은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육신을 가지고 행한 일에 대해 선악 간에 심판을 받습니다. 물론 지옥을 가는 심판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그러한 문제를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가 날 때는 막 내버리고 서로 원망하며 미워하기도 합니다. 다투기도 하고 욕심부리기도 하고 거짓말도 합니다. 그러한 일들로 인해 분명히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는데도 그런 일은 아예 생각도 안합니다. '까짓것 뭐 그래도 지옥은 안 가는데'라고 생각 할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크게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구원 받은 이후에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보아온,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서로 다투고 화를 내는 문제였습니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


 이 세상 사람들은 설령 다투어도 술 한 잔 마셔버리면 확 풀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끼리 서로 다투고 마음이 상했더라도 그냥 한잔 마시고 확 풀어버리는 것처럼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술이 들어가서 취해버리면 그 취한 것이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을 확 풀어버리는가 봅니다. 저는 술취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풀어버리고 나면 그걸로 끝나는가 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쉽게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술 대신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술 한 잔 마시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술은 그냥 주머니에 돈 몇 푼이 있으면 술집에 가서 한 잔 사먹어 버리면 되지만 성령의 충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형제 간에 화목하기가 성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가는 과정에서 실족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어떤 형제와 마음이 상 해서 그렇게 됩니다. 마음에 상처가 생겨버리면 믿음의 힘이 그만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꺼져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굉장히 주의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노리는 사탄의 음모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시 64:6)


 묘책을 찾았다는 것은 영혼을 죽일 방법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얼마나 많이 별렀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안식일날 병 고치고 성전 안에 들어가서 채찍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을 쫓아내버리는 일 등 예수님 하신 일은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저 예수를 죽일까 하고 방법을 찾았는데 그 때 등장한 인물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 낌새를 알고 찾아와서 내가 예수를 넘겨줄테니 얼마 주겠느냐고 흥정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죽일 묘책을 찾은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들은 예수님을 죽여놓고 춤을 추며 굉장히 좋아했을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사실 알고 보면 이 세상은 참으로 위험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시각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상태를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낭떠러지 위를 아장아장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그냥 곤두박질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신앙생활 속에서 어떤 어려움이 부딪히면 그만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가버립니다.

 다툼이 있거나 물질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겨나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등 모든 문제가 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을 노리는 사탄의 음모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세상인 것입니다. 아무리 위험한 세상이라도 절대적인 승리자이신 주님을 참으로 믿는다면 아무 염려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음녀의 비밀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 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 들이 가득하더라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1-5)


 이 말씀은 현재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녀의 비밀에 대해서 언급한 말씀입니다. 계시록 17장은 이 세상 마지막 시대에 사탄의 비밀이 이 세상에 꽉 들어 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이 세상을 적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넣으려는 움직임이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불법의 세력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재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란한 음악과 춤, 성적 타락과 마약 등등도 다 사단이 비밀히 쳐 놓은 그물입니다. 돈을 위해서는.친구도 부모도 배신하고 사람의 목숨을 초개처럼 생각하는 물질만능주의의 풍조와 쾌락주의에 휩쓸려 이 세상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타락한 교회와 위험한 세상


 잠언 7장에 보면 한 청년이 음녀에게 끌려가는 광경이 나옵니다.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어다 보다가 어리석은 자 중에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혹암 중에라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이 계집은 떠들며 완패하며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모퉁이,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그 계집이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서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내 침상에는 화문요와 애굽의 문체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회락하자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여러 가지 고운 말로 혹 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잠 7:6-27)


 제가 한 번은 브라질에 갔는데 우리 일행이 저녁 먹은 직후 어둑 어둑한 곳을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여자들이 나오더니 마구 붙들고 늘어져요. 캐나다의 어떤 형제는 크게 혼이 났습니다. 꼭 붙잡고 놓아 주지를 않아 끌려들어갈 뻔했어요. 이 세상이 그런 세상이예요.

 그런데 잠언에 나오는 이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입니다. 남편은은 예수님을 말하고 이 여자는 타락한 교회를 말합니다. 이 음녀는 바로 이 마지막 시대에 적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타락한 교회입니다. 이 음녀는 여러 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결국은 화살로 사람의 간을 꿰뚫듯이 사람의 영혼을 노략질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사람의 영혼을 죽이려는 음녀의 비밀이 활동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정신 차리지 않고 방심하면 언제 세상으로 끌려갈지 모릅니다. 그만큼 위험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믿음만 있으면 승리자이신 주님을 의지하여 넉넉히 세상을 이길수 있습니다.



믿을수 없는 세상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고 하였는데 우리 속담에도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북한에서는 자기 가족들 끼리도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고발하기도 한답니다. 공산주의 사상이라는 것이 그만큼 무섭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친구나 형제 자매 부모 자식 간에도 전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태를 가리켜 속뜻과 마음이 깊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벌거벗은 것같이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시 64:7) 


 하나님이 쏘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 라"(히 4:12-13)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 다 파괴되어버립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듯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말씀의 화살을 던질 때에 그 말씀과 안 맞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파괴되고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 앞에 설 때에 말씀 앞에서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벌거벗은 것같이 안되려면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큰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무익한 말에 대한 심판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시 64:8)


 저희 혀가 저희를 해한다고 하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 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4-37)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말은 남을 흉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무 유익이 없는 말입니다. 무익한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쉽고 덕이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악의가 없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 농담이나 유모어를 하는 것도 무익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딱딱한 분위기를 좀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유익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잘 웃기는 사람을 보면 굉장히 부럽지요. 썩 나타나기만 하면 벌써 웃음이 나오는 아주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너무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말을 해 놓고서는 나중에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에 주의해서 무익한 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익한 말은 틀림없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옵니다.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판을 받는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나 자매에게 말로써 상처를 주었 다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반드시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얼마나 부끄럽고 후회스럽겠습니까?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一부활의 능력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시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한다 하였는데 예수님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세력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사흘만에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시자 큰 낭패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났을 때에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은 돈을 듬뿍 주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들의 입 장에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이 일이 난처했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다가 기회가 와서 예수님을 죽여 묻어 놓았는데 왠걸 새벽에 천지가 진동을 하더니만 무덤이 열리고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살아나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배척했던 유대인들은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이 우리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 제자들의 전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부활을 이루어가는 신앙생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속에도 이런 부활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공격을 받아 낙담하여 깊은 구렁텅이 속을 헤매는 일이 바로 완전히 우리 자신이 멸망받아 죽는 경험인데 그 다음에 어떤 성경 말씀 한 마디가 마음에 깨달아져 버리면 언제 그런 일을 당했느냐는 듯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을 다시금 알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이제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모든 것을 보는 기준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사실이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실제로 경험이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지만 성령께서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역사할 때 우리 영혼이 단번에 거듭나며 그 다음에 계속적으로 생활 속에서 이루어가는 구원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망했다가 다시 소생하기도 하면서 부활의 생활을 이루어 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과정입니다.



의인의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의인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피한다고 했는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닥칠 때 예수님 안에 숨어버립니다. 그러면 사탄의 표적이 없어져 버립니다. 자기가 무엇이 된 것처럼 자기 의를 나타내려고 하고 스스로 높아지려 하면 사탄의 화살을 받지만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님 앞에서 낮아지면 주님의 품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늘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설교를 할까 하는 마음이 생겨 영 하기 싫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제 자신이 본래 죄인이요 보잘 것 없는 존재이므로 다만 온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맡기고 부탁드린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사탄의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낮추고 주님 안에 숨어 버리면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숨어있다가 슬며시 머리를 들 때 정통으로 총에 맞아 즉사하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자기가 보이지 않게 숨어 있으면 총에 맞지 않는데 우리가 마귀와 싸울 때도 항상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화살을 받으셨으니까 그 뒤에 그냥 가만히 숨어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애쓰지 않고 주님만 믿고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옛날에 이 원리를 알고 시를 읊었습니다. 다윗은 육신의 마음이 아닌 성령의 계시로 예수님이 오시면 되어질 일을 이렇게 시로써 읊어 놓았기 때문에 지금도 이 말씀을 우리가 읽고 큰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