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 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 하시나이다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또 노래하나이다"(시:65:1-13)
이 시편 65편은 사무엘하 21장과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 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흘랏 사람 바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잡고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 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의 행한 일이 다윗에게 들리매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취하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벳산 거리에 매어 단 것을 저희가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다윗이 그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삼하 21:1-14)
공의와 사랑을 아울러 지니신 하나님
기브온 사람은 본래 기브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서 온 것처럼 꾸며 여호수아를 속여 여호수아가 그들을 죽이지 않기로 약속을 맺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멸망시킬 때에도 그들만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 민족의 종 노릇을 하면서 명맥을 이어 갔습니다. 그런데 그후 사울이 이방사람인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어서 삼 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 여쭈니까 사울이 기브아 사람을 죽인 죄의 결과로 흉년이 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저질러 놓은 이 죄를 처리하는 과정이 이 사무엘하 21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속이고 약속을 맺었는데 나중에 가나안 칠 족속을 멸망시킬 때 그들도 당연히 멸망을 받아야 할 테인데 왜 그들을 죽이는 게 죄가 되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그들과 약속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나중에 그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고 또한 하나님의 의로움을 무시하는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 는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의 첩의 후손들 가운데 몇 사람을 목 매어 달아 죽이고 그들의 뼈를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한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고 비로소 비가 많이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 말씀을 근거해서 볼 때에 설령 이방 사람을 향해서 맹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한 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이름이 더럽혀지기 때문에 반드시 징벌이 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편 65편은 사울의 잘못에 따른 징벌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비로소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풍성한 비를 내리셨을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풍성한 수확을 노래한 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후에 다시 회복된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5:1)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라는 찬송도 있듯이 시온은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입니다. 3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렇게 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여호수아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한 사실을 사울 왕이 지키지 않고 기브온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벌이 시행되어 흉년이 3년 동안 들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아울러 지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죄에 대해서는 의로움이 나타나고 죄인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향해서 의로움을 나타내실 때에 예수님이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고 그 대가로 죄인을 용서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언제든지 죄를 처리하는 의입니다. 죄를 그냥 덮어놓고 무조건 복만 주시는 하나님은 아니셨습니다. 사울 왕 시대에 지은 죄였지만 다윗 왕 시대에 이르러서도 기어코 그 죄를 징계하시는 의로움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즉,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죄를 함부로 지어서는 안됩니다. 죄를 짓고도 파렴치하게 아무런 양심의 괴로움도 느끼지 않고 뉘우치는 생각도 없이 그냥 지나친다면 반드시 언젠가는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서 그 죄를 징계하는 일이 있습니다. 즉시 어떤 징계가 따르는 것은 아니라도 반드시 언젠가는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 사람과 전쟁하다가 이미 죽었지만 그의 그의 죄값으로 인해 결국 사울의 가정에 징벌이 내린 것입니다. 사울 왕이나 이스라엘 민족들도 다 하나님의 백성의 표준에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와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무서워할 줄 알고 죄는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분명히 구약시대에는 아비의 죄를 3〜4대까지 갚고 축복은 천대에까지 이른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죄를 갚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만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죄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의 대한 값은 언젠가는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우리 영혼은 단번에 지옥갈 죄에서 영원히 용서받았지만 우리 생활에서는 죄의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었으면 깊이 뉘우치고 통회하고 자백을 함으로써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깊이 뉘우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자백해야 할 텐데도 뻔뻔스럽게 아무런 양심의 괴로움이 없다면 즉시는 아니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죄에 따르는 징계를 받습니다.
사울이 저지른 죄였지만 그 결과로 사울의 소생들은 일곱 사람이나 목 매어 달려 죽었습니다. 나중에 사울과 요나단의 뼈들과 같이 묻혔는데 죄의 책임을 공동으로 져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따른 징벌이 시행된 이후에야 하나님이 응답을 하셔서 이스라엘이 풍년이 들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서원을 하고 잊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이행하여야합니다. 만일 그 서원을 도저히 이행할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자백해야 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5:2)
서원을 갚거나 죄를 자백하고 철저하게 처리한 이후에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육신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 65:3)
죄악이 나를 이겼다니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누구든지를 물론하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 리라"(요 8:32-36)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시니까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무슨 소리를 하느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자유하는 사람들인데 무슨 자유가 또 필요하냐고 못마땅해 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유하다고 생각을 했고 자기들은 안식일과 율법을 철저히 지키니까 죄가 없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성직자나 교회 지도자들이 남의 죄는 지적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죄는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참으로 발동을 하면 자신의 죄를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으로 거짓되고 위선적인 죄를 알 수 있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속으로는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물질에 욕심을 내면서도 그런 것이 죄인 줄은 몰랐습니다.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은 다 위선자들입니다. 저도 과거에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율법을 엄밀하게 따져놓고 보면 한 사람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는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가 명령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명령대로 따라서 사는 것이 종이 아닙니까?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도 육신적으로는 죄의 종입니다. 화가 날 때에 참지 못하고 누가 마음에서 미워지면 아무리 미움을 품지 않고 사랑하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음란한 생각을 품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에서 자꾸 생각이 일어납니다. 육신은 죄의 법칙 안에 있기 때문에 죄의 법칙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죄악이 나를 이겼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개인적으로도 책임이 있지만 이스라엘 국가의 책임을 지고 있는 왕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과거에 지은 죄도 다윗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사울이 지은 그 죄악이 다윗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우리를 회복시키는 주님
그러면 다윗이나 우리들을 언제나 이기고 있는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그 다음에 다윗은 말하기를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신앙 간증입니다. 죄의 깊은 구덩이 속에 들어가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주님이 내 죄를 속죄해 주신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마치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 철두철미하게 죄의 위력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구속하사 죄를 처리하시는 길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물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만 계속적으로 그것을 우리 생활 속에서 이루어가야 합니다. 죄를 지을 때 그 죄를 깊이 느끼고 그 죄가 나를 이겼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는 사람, 죄에 대한 마음의 싸움이 있는 사람이라야만 주님이 나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해 주셨다는 것은 구원받을 때에 다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또 이 말을 했습니 까?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죄를 자백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숨겨놓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은 어두움입니다. 자꾸만 어두운 데로 들어가서 숨는 것이 죄의 속성이고 죄를 가진 사람의 행위가 그런 것입니다. 내가 가진 비밀을 누가 알까 봐서 굉장히 겁내고 비밀을 폭로해 버리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렇게 어두운 가운데 숨으면 짐승이 산에다 쳐놓은 함정에 빠져 울부짖듯이 항상 숨겨놓은 어두운 죄가 내 마음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빛 가운데 내어놓으면 주님이 그 죄를 씻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다시금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됩 니다. 이 마음에 비밀한 죄를 숨겨놓고 있으면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제하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교제가 아닙니다. 어두움이 속에 있는데 무슨 교제가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빛 가운데 내놓아야 합니다. 빛 가운데 죄를 내놓는다는 것은 꼭 여러 사람 앞에서 죄를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조용히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성격의 죄도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가 회복될 때 그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속죄는 구원받았을 때 이미 받았지만 마음의 어두움은 죄를 자백하고 교제가 회복될 때에 풀어져 버리고 그 때에 예수님의 피를 다시금 경험하게 됩니다.
성전이신 주님 안에 거하는 복된 사람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주님 안에 거하게 된 우리들은 다 복된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택하신 민족입니다. 성전 모형을 보면 가에 울타리가 있고 한쪽에 대문이 있고 그 대문을 들어서면 그 안에 성전 뜰이 있습니다. 주의 뜰에 있다는 말은 주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충만한 신성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예수님의 육신이 성전인데 그 안에는 신성이 충만합니다. 신성은 하나님의 성품인데 그 성품이 예수님 안에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예수님의 육신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한 영이 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교회는 머리 되신 주님의 몸입니다.
성전이신 주님의 몸된 교회에 자신이 영광스러운 지체로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집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의 성전의 구조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성품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었는데 지성소는 내부는 금으로 꾸미고 겉은 조각목으로 꾸미고 수달피로 덮었습니다. 성전은 겉으로 보면 굉장히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부에 들 어가면 참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겉보기에는 볼품이 없는 분이셨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한 성품은 금과 같이 영광스럽고 굉장히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지성소 안에 들어 가면 빛이 없는데 전부가 금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에 그 영광의 빛 때문에 다른 빛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육신 안에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신성과 성품이 충만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一성령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교회 안에 무엇이 충만하다고 했습니까? 만물이 충만하다고 했습니까?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라고 했는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 만드신 신성을 가지신 분의 충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과 아름다움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지혜와 총명과 거룩함, 의로움,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개개 인을 놓고 보면 보잘것이 없습니다. 거룩함도 없고 사랑도 없고 의로움도 없고 항상 마음에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시시한 존재들이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아 머리되신 주님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되어 있는 이 교회는 상상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길 가운데 때때로 온갖 어려움과 곤혹스러운 일들이 닥쳐왔지만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주님의 일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과 행동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진 이 참된 비밀을 깨달으면 교회 가운데 성령이 충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비밀을 알고 참으로 신앙생활 가운데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분들이 모임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 안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시 65:5)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로 인해 엄한 공의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3년 동안이나 흉년이 든 것입니다. 그렇게 흉년이 든 이유를 알 수 없어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물었더니 오래 전에 사울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가리워져 하나님께 그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을 나타내신 결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윗이 사울의 집 후손들 가운데 일곱 사람을 목 매달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비를 내리셨는데 이것을 보고 이방사람들도 놀랐습니다.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는 이방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도 이방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배우지 않았습니까? 죄를 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신 그 일 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배우지 못한 악인들에게 임할 심판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 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 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8-10)
악인과 의인의 차이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의를 배우느냐 못 배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은총을 입을 때에 의를 배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우리에게 내릴 죄의 형벌이 예수님께 내렸습니다. 이 일은 다른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내린 것입니다. 그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배우지 못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의 의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이시구나 하고 배우지만 이미 때가 늦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는 철저히 처리하는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죄를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까 됐지 하고 죄를 가볍게 생각하면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는 일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어떤 심판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심판이 나타나게 됩니다.
철저하고 세밀하게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권능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 65:6-7)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마치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하는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우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는 분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께 우리가 보태야 할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일을 철저히 행하십니다. 우리 사람들처럼 대충하시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시 119:140)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아주 정밀하고 세밀한 분이십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철저하고 세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깊이가 있는 사람은 대체로 모든 일을 세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얼렁뚱땅 하는 식으로 살아가지 않고 말씀에 비추어 세밀히 따지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평안이 없고 늘 문제가 생겨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 말씀에서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모든 것을 대범하게 봐주신다는 식으로 생각하여 대충 살아가는 경향이 어떤 면에서는 많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넓으시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아주 세밀히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그 넓은 은혜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얼렁뚱땅 사는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계수할 가치가 있는 삶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줄거워하게 하시며"(시 65:8)
지구가 자전하는 과정에서 아침이 오고 밤이 옵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아직도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못 얻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침이 가고 저녁이 오는 속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어느날 이 성경을 통해서 참 진리를 발견하면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 됩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 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12)
인생은 참으로 허무합니다. 우리 죄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홍수처럼 몰아가는 인생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 하였듯이 정말 허무한 인생입니다.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아침이 오고 저녁이 가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닫고 나서 구원받은 다음에는 하루를 살면 하루 산 만큼 이틀 살면 이틀 산 만큼 계수가 되는 삶이 전개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가인의 계통과 셋의 후손의 계통이 나옵 니다. 누구누구는 몇 세까지 자녀를 낳으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계수입니다. 가치 있는 삶, 미래가 있는 삶, 뭔가 생산성이 있고 쌓여가고 있는 삶, 진정으로 계수할 가치가 있는 삶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하루 살고 이틀 살며 아침이 오고 저녁이 가는 것이 이제는 허무한 것이 아니고 약속이 있는 삶입 다. 그냥 허무하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모 든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헛살아 가는 시간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수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 65:9)
하나님의 강이라는 말이 나타나는데 계시록 21장에 보면 생명수 강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린다는 말씀이 있고 에스겔서 47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계 22:1-2)
"그가 나를 데리고 전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 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겔 47:1)
이 하나님의 강은 실제로 거기에 손발을 담그고 마실 수도 있는 강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성령의 단비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씩에 복 주시나이다"(시 65:10)
여기 보면 사울 당대에 지은 죄를 처리하고 나니까 이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려사 풍성한 곡식을 맺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마음에 어두움이 있고 어떤 때는 징계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잘못한 일이 많은데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성립이 되어버리면 응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였는데 이는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는 그때가 바로 성령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날 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
"주의 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시 65:11-12)
연사라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말합니다. 그러면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긍흄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여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씀은 연사에 복 주신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봄에는 싹이 나게 하시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라게 하시며 가을에는 풍성히 결실하게 하시는 은사를 내리시는데 그것이 바로 연사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도 이처럼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뉘우치면서 답답하고 고통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찾아 헤매이는 때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고 다시 우리를 도우실 때인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그 때를 지내야만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이같은 은혜가 있습니다. 연사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열매
주의 길에 기름이 떨어진다 하였는데 기름은 성령을 말합니다. 이 기름이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다 하였는데 이 작은 산이 무엇일까요?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 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욜 3:18)
여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산과 들과 시내와 골짜기 그리고 샘들은 모두가 현실적이면서도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 니다.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라 하였는데 이 작은 산은 젖을 내는 어머니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곡식이 풍부하면, 즉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적인 열매가 많으면 교회의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일들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를 경험한 자의 감사와 찬송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시 65:13)
하나님의 의가 시행되는 거기에는 의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때는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또 징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한 때를 통과하여 의의 열매를 맺으면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의 찬송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절대로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떤 시련을 겪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지난날의 어떤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낮추어서 순종하면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시편 65편은 사무엘하 21장과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 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흘랏 사람 바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잡고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 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의 행한 일이 다윗에게 들리매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취하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벳산 거리에 매어 단 것을 저희가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다윗이 그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삼하 21:1-14)
공의와 사랑을 아울러 지니신 하나님
기브온 사람은 본래 기브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서 온 것처럼 꾸며 여호수아를 속여 여호수아가 그들을 죽이지 않기로 약속을 맺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멸망시킬 때에도 그들만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 민족의 종 노릇을 하면서 명맥을 이어 갔습니다. 그런데 그후 사울이 이방사람인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어서 삼 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 여쭈니까 사울이 기브아 사람을 죽인 죄의 결과로 흉년이 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저질러 놓은 이 죄를 처리하는 과정이 이 사무엘하 21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속이고 약속을 맺었는데 나중에 가나안 칠 족속을 멸망시킬 때 그들도 당연히 멸망을 받아야 할 테인데 왜 그들을 죽이는 게 죄가 되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그들과 약속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나중에 그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고 또한 하나님의 의로움을 무시하는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 는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의 첩의 후손들 가운데 몇 사람을 목 매어 달아 죽이고 그들의 뼈를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한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고 비로소 비가 많이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 말씀을 근거해서 볼 때에 설령 이방 사람을 향해서 맹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한 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이름이 더럽혀지기 때문에 반드시 징벌이 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편 65편은 사울의 잘못에 따른 징벌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비로소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풍성한 비를 내리셨을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풍성한 수확을 노래한 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후에 다시 회복된 이스라엘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라는 찬송도 있듯이 시온은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입니다. 3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렇게 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여호수아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한 사실을 사울 왕이 지키지 않고 기브온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벌이 시행되어 흉년이 3년 동안 들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아울러 지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죄에 대해서는 의로움이 나타나고 죄인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향해서 의로움을 나타내실 때에 예수님이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고 그 대가로 죄인을 용서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언제든지 죄를 처리하는 의입니다. 죄를 그냥 덮어놓고 무조건 복만 주시는 하나님은 아니셨습니다. 사울 왕 시대에 지은 죄였지만 다윗 왕 시대에 이르러서도 기어코 그 죄를 징계하시는 의로움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즉,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죄를 함부로 지어서는 안됩니다. 죄를 짓고도 파렴치하게 아무런 양심의 괴로움도 느끼지 않고 뉘우치는 생각도 없이 그냥 지나친다면 반드시 언젠가는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서 그 죄를 징계하는 일이 있습니다. 즉시 어떤 징계가 따르는 것은 아니라도 반드시 언젠가는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 사람과 전쟁하다가 이미 죽었지만 그의 그의 죄값으로 인해 결국 사울의 가정에 징벌이 내린 것입니다. 사울 왕이나 이스라엘 민족들도 다 하나님의 백성의 표준에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와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무서워할 줄 알고 죄는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분명히 구약시대에는 아비의 죄를 3〜4대까지 갚고 축복은 천대에까지 이른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죄를 갚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만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죄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의 대한 값은 언젠가는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우리 영혼은 단번에 지옥갈 죄에서 영원히 용서받았지만 우리 생활에서는 죄의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었으면 깊이 뉘우치고 통회하고 자백을 함으로써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깊이 뉘우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자백해야 할 텐데도 뻔뻔스럽게 아무런 양심의 괴로움이 없다면 즉시는 아니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죄에 따르는 징계를 받습니다.
사울이 저지른 죄였지만 그 결과로 사울의 소생들은 일곱 사람이나 목 매어 달려 죽었습니다. 나중에 사울과 요나단의 뼈들과 같이 묻혔는데 죄의 책임을 공동으로 져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따른 징벌이 시행된 이후에야 하나님이 응답을 하셔서 이스라엘이 풍년이 들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서원을 하고 잊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이행하여야합니다. 만일 그 서원을 도저히 이행할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자백해야 됩니다.
서원을 갚거나 죄를 자백하고 철저하게 처리한 이후에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육신
죄악이 나를 이겼다니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누구든지를 물론하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 리라"(요 8:32-36)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시니까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무슨 소리를 하느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자유하는 사람들인데 무슨 자유가 또 필요하냐고 못마땅해 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유하다고 생각을 했고 자기들은 안식일과 율법을 철저히 지키니까 죄가 없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성직자나 교회 지도자들이 남의 죄는 지적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죄는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참으로 발동을 하면 자신의 죄를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으로 거짓되고 위선적인 죄를 알 수 있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속으로는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물질에 욕심을 내면서도 그런 것이 죄인 줄은 몰랐습니다.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은 다 위선자들입니다. 저도 과거에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율법을 엄밀하게 따져놓고 보면 한 사람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는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가 명령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명령대로 따라서 사는 것이 종이 아닙니까?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도 육신적으로는 죄의 종입니다. 화가 날 때에 참지 못하고 누가 마음에서 미워지면 아무리 미움을 품지 않고 사랑하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음란한 생각을 품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에서 자꾸 생각이 일어납니다. 육신은 죄의 법칙 안에 있기 때문에 죄의 법칙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죄악이 나를 이겼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개인적으로도 책임이 있지만 이스라엘 국가의 책임을 지고 있는 왕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과거에 지은 죄도 다윗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사울이 지은 그 죄악이 다윗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우리를 회복시키는 주님
그러면 다윗이나 우리들을 언제나 이기고 있는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그 다음에 다윗은 말하기를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신앙 간증입니다. 죄의 깊은 구덩이 속에 들어가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주님이 내 죄를 속죄해 주신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마치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 철두철미하게 죄의 위력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구속하사 죄를 처리하시는 길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물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만 계속적으로 그것을 우리 생활 속에서 이루어가야 합니다. 죄를 지을 때 그 죄를 깊이 느끼고 그 죄가 나를 이겼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는 사람, 죄에 대한 마음의 싸움이 있는 사람이라야만 주님이 나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해 주셨다는 것은 구원받을 때에 다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또 이 말을 했습니 까?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죄를 자백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숨겨놓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은 어두움입니다. 자꾸만 어두운 데로 들어가서 숨는 것이 죄의 속성이고 죄를 가진 사람의 행위가 그런 것입니다. 내가 가진 비밀을 누가 알까 봐서 굉장히 겁내고 비밀을 폭로해 버리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렇게 어두운 가운데 숨으면 짐승이 산에다 쳐놓은 함정에 빠져 울부짖듯이 항상 숨겨놓은 어두운 죄가 내 마음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빛 가운데 내어놓으면 주님이 그 죄를 씻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다시금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됩 니다. 이 마음에 비밀한 죄를 숨겨놓고 있으면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제하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교제가 아닙니다. 어두움이 속에 있는데 무슨 교제가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빛 가운데 내놓아야 합니다. 빛 가운데 죄를 내놓는다는 것은 꼭 여러 사람 앞에서 죄를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조용히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성격의 죄도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가 회복될 때 그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속죄는 구원받았을 때 이미 받았지만 마음의 어두움은 죄를 자백하고 교제가 회복될 때에 풀어져 버리고 그 때에 예수님의 피를 다시금 경험하게 됩니다.
성전이신 주님 안에 거하는 복된 사람들
주님 안에 거하게 된 우리들은 다 복된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택하신 민족입니다. 성전 모형을 보면 가에 울타리가 있고 한쪽에 대문이 있고 그 대문을 들어서면 그 안에 성전 뜰이 있습니다. 주의 뜰에 있다는 말은 주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충만한 신성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예수님의 육신이 성전인데 그 안에는 신성이 충만합니다. 신성은 하나님의 성품인데 그 성품이 예수님 안에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예수님의 육신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한 영이 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교회는 머리 되신 주님의 몸입니다.
성전이신 주님의 몸된 교회에 자신이 영광스러운 지체로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집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의 성전의 구조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성품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었는데 지성소는 내부는 금으로 꾸미고 겉은 조각목으로 꾸미고 수달피로 덮었습니다. 성전은 겉으로 보면 굉장히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부에 들 어가면 참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겉보기에는 볼품이 없는 분이셨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한 성품은 금과 같이 영광스럽고 굉장히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지성소 안에 들어 가면 빛이 없는데 전부가 금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에 그 영광의 빛 때문에 다른 빛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육신 안에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신성과 성품이 충만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一성령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교회 안에 무엇이 충만하다고 했습니까? 만물이 충만하다고 했습니까?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라고 했는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 만드신 신성을 가지신 분의 충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과 아름다움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지혜와 총명과 거룩함, 의로움,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개개 인을 놓고 보면 보잘것이 없습니다. 거룩함도 없고 사랑도 없고 의로움도 없고 항상 마음에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시시한 존재들이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아 머리되신 주님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되어 있는 이 교회는 상상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길 가운데 때때로 온갖 어려움과 곤혹스러운 일들이 닥쳐왔지만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주님의 일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과 행동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진 이 참된 비밀을 깨달으면 교회 가운데 성령이 충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비밀을 알고 참으로 신앙생활 가운데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분들이 모임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 안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로 인해 엄한 공의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3년 동안이나 흉년이 든 것입니다. 그렇게 흉년이 든 이유를 알 수 없어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물었더니 오래 전에 사울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가리워져 하나님께 그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을 나타내신 결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윗이 사울의 집 후손들 가운데 일곱 사람을 목 매달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비를 내리셨는데 이것을 보고 이방사람들도 놀랐습니다.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는 이방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도 이방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배우지 않았습니까? 죄를 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신 그 일 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배우지 못한 악인들에게 임할 심판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 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 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8-10)
악인과 의인의 차이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의를 배우느냐 못 배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은총을 입을 때에 의를 배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우리에게 내릴 죄의 형벌이 예수님께 내렸습니다. 이 일은 다른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내린 것입니다. 그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배우지 못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의 의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이시구나 하고 배우지만 이미 때가 늦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는 철저히 처리하는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죄를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까 됐지 하고 죄를 가볍게 생각하면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는 일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어떤 심판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심판이 나타나게 됩니다.
철저하고 세밀하게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권능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마치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하는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우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는 분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께 우리가 보태야 할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일을 철저히 행하십니다. 우리 사람들처럼 대충하시지 않습니다.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아주 정밀하고 세밀한 분이십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철저하고 세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깊이가 있는 사람은 대체로 모든 일을 세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얼렁뚱땅 하는 식으로 살아가지 않고 말씀에 비추어 세밀히 따지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평안이 없고 늘 문제가 생겨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 말씀에서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모든 것을 대범하게 봐주신다는 식으로 생각하여 대충 살아가는 경향이 어떤 면에서는 많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넓으시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아주 세밀히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그 넓은 은혜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얼렁뚱땅 사는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계수할 가치가 있는 삶
지구가 자전하는 과정에서 아침이 오고 밤이 옵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아직도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못 얻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침이 가고 저녁이 오는 속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어느날 이 성경을 통해서 참 진리를 발견하면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 됩니다.
인생은 참으로 허무합니다. 우리 죄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홍수처럼 몰아가는 인생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 하였듯이 정말 허무한 인생입니다.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아침이 오고 저녁이 가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닫고 나서 구원받은 다음에는 하루를 살면 하루 산 만큼 이틀 살면 이틀 산 만큼 계수가 되는 삶이 전개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가인의 계통과 셋의 후손의 계통이 나옵 니다. 누구누구는 몇 세까지 자녀를 낳으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계수입니다. 가치 있는 삶, 미래가 있는 삶, 뭔가 생산성이 있고 쌓여가고 있는 삶, 진정으로 계수할 가치가 있는 삶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하루 살고 이틀 살며 아침이 오고 저녁이 가는 것이 이제는 허무한 것이 아니고 약속이 있는 삶입 다. 그냥 허무하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모 든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헛살아 가는 시간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수
하나님의 강이라는 말이 나타나는데 계시록 21장에 보면 생명수 강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린다는 말씀이 있고 에스겔서 47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계 22:1-2)
"그가 나를 데리고 전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 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겔 47:1)
이 하나님의 강은 실제로 거기에 손발을 담그고 마실 수도 있는 강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성령의 단비
여기 보면 사울 당대에 지은 죄를 처리하고 나니까 이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려사 풍성한 곡식을 맺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마음에 어두움이 있고 어떤 때는 징계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잘못한 일이 많은데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성립이 되어버리면 응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였는데 이는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는 그때가 바로 성령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날 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
연사라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말합니다. 그러면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긍흄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여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씀은 연사에 복 주신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봄에는 싹이 나게 하시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라게 하시며 가을에는 풍성히 결실하게 하시는 은사를 내리시는데 그것이 바로 연사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도 이처럼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뉘우치면서 답답하고 고통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찾아 헤매이는 때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고 다시 우리를 도우실 때인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그 때를 지내야만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이같은 은혜가 있습니다. 연사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열매
주의 길에 기름이 떨어진다 하였는데 기름은 성령을 말합니다. 이 기름이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다 하였는데 이 작은 산이 무엇일까요?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 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욜 3:18)
여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산과 들과 시내와 골짜기 그리고 샘들은 모두가 현실적이면서도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 니다.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라 하였는데 이 작은 산은 젖을 내는 어머니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곡식이 풍부하면, 즉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적인 열매가 많으면 교회의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일들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를 경험한 자의 감사와 찬송
하나님의 의가 시행되는 거기에는 의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때는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또 징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한 때를 통과하여 의의 열매를 맺으면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의 찬송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절대로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떤 시련을 겪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지난날의 어떤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낮추어서 순종하면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