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울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가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 73:1-27)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입
시편은 총 150편으로 이것이 다시 4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시편 73편은 그중 제 3권의 첫번째 시인데 '아삽의 시'라는 표 제가 붙어 있습니다.
아삽은 헤만, 에단(여두둔)과 함께 성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은 자였습니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 아들들이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 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저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헤만의 형제 아삽은 헤만의 우편에서 직무를 행하였으니 저는 베레갸의 아들이요… 저희의 형제 므라리의 자손 중 그 좌편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는 에단이라"(대상 6:31 —33, 39, 44)
찬송하는 일을 말은 아삽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중요시하여 대규모 성가대를 조직하였는데 아삽과 헤만과 에단(여두둔)으로 하여금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성가대장의 역할을 맡겨 이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그들의 자손을 구별하여 세웠습니다.
"다윗이 군대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두둔에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랴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나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헤만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북기야와 맛다냐와 웃시엘과 스브엘과 여리못과 하나냐와 하나니와 엘리아다와 깃달디와 로암디에셀과 요스브가사와 말로디와 호딜과 마하시옷이라 이는 다 헤만의 아들들이니 나팔을 부는 자며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 하나님이 헤만에게 열네 아들과 세 딸을 주셨더라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여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저희가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 팔십팔 인이라"(대상 25:1-7)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 신 목적이 바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아삽은 선견자요 찬송을 맡은 자로서 늘 다윗 가까이에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다윗의 심정과 생각을 잘 헤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인물이었던 다윗 가까이에서 함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시편 50편을 비롯하여 73-83편의 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낀 먹구름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 73:1-3)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맡은 자로서 마음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걸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할 터인데 억울하게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오히려 악하고 교만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마음에 큰 의문과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고서는 마음 속에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우러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어둡고 답답한 마음으로 깊은 고민을 하면서 권선징악의 단순 논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시 73:4-5)
악인과 오만한 자가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징계와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현실적으로 볼 때, 오히려 악을 행하면서도 부유하게 잘 살며 장수하는 일들을 보면서 이 세상이 너무도 부조리하다, 하나님은 과연 계신가 하고 불평을 터뜨리기 쉽습니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 7:15)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도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
현실적으로 의인이 억울함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일들이 흔히 있음을 볼 때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고 잎사귀를 내듯 형통하지만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처럼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망하리라는 시편 1편 같은 말씀들이 잘못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 당장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내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길이 참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모든 행악과 그릇된 행위에 대한 심판을 즉시 내리셨다면 이 세상에서 한 사람도 구원 얻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없다는 망언까지 일삼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은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시 73:6-7)
악을 행해도 당장 아무런 일도 없고 오히려 권모술수로 권력과 이권과 재물을 쌓아가면서 점점 그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에게는 강포와 압제를 행하며 함부로 입을 열게 됩니다.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가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 73:8-9)
악한 말을 하는 입은 사탄이 권세를 잡은 공중, 즉 하늘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영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지구상의 하늘, 즉 공중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순서대로 창조하시면서 각 날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유독 하늘을 지으신 둘째 날만은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사탄이 공중에 권세를 잡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사탄은 공중 권세를 잡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악의 세력들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에 입을 하늘에 두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책임은 하나님께 돌리면서 원망을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인들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원망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저주까지 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혀가 땅에 두루 다닌다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저주스러운 말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악인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시 73:10)
여기 잔에 가득한 물을 마신다는 말은 저주스러운 물, 환란의 물을 마신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백성들은 사탄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 정신과 생각이 완전히 하나님께로부터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죽었다는 무신론이 생겨난 것입니다. 스탈린이나 모택동, 버틀란트 러셀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영국의 무신론자 러셀은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증명하면서 예수는 사람을 기만하는 거짓말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올바로 살아온 삶에 대한 회의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 73:12-13)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잘 지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지금 마음 속에 '내가 마음을 정직하고 선하게 먹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손을 씻는다는 말은 지은 죄를 씻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손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손을 가지고 남의 물건을 훔친다든지 남에게 나쁜 짓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손을 씻는 생활입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내어주면서 "본의 아니게 이 예수를 죽이게 되었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서 무죄하다."고 손을 씻었습니다. 손을 씻어 무죄하다고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한 손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 73:14)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섬기며 살았는데도 종일 재앙을 당하고 날마다 징계를 받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입을 꼭 다물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자세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 의 시대를 대하여 괘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시 73:15-16)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시 이 우리에게도 이 시편 기자처럼 억울한 일이 생기더라도 꾹 참고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기자는 자기 마음 속에 억울한 일에 대해서 생각은 하였지만 입을 꼭 다물고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저렇게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데, 왜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마음을 바로하여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데 이렇게 고통과 괴로움과 징계를 당할까? 날마다 어려움을 당하는데 왜 이럴까? 하나님을 섬기는 게 다 헛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의 한계에까지 갔지만 이 시편 기자는 그것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입으로 발설을 했으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세계에다가 큰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한 일이나 악한 말은 전염병처럼 빨리 퍼져갑니다. 남을 흉보거나 하는 말은 휘발유에다가 성냥불을 켜서 던지는 것과 같고 선한 말은 물에 젖은 나무에다 성냥불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 속에는 악한 것이 점화가 훨씬 잘 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감정을 나쁘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말을 삼가해야 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면 왜 저렇게 악한 사람은 잘 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정직한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은 고통을 당할까.' 하는 의심이 마음에 꽉 차올랐지만 그것을 입으로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말을 발설했더라면 주의 아들들에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라는 것입니다.
궤휼은 남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동물이 기에 마음 속에 품은 감정은 어디 가서 쏟아내 버리면 속이 시원해집니다. 소위 스트레스라는 것이 해소되는 거지요. 어떤 사람의 비행을 보고 마음 속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하고 있다가 누구를 만나면 그 일을 다 지껄여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좋지 않은 감화는 영향력이 빠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은 꾹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아, 내가 잘 참았다.'하고 느낄 때가 올 것입니다. 모임 안에서 활동하면서 이런저런 불평을 가지게 되는 일들이 많지만 그 불평을 마음 속에서 소화를 시켜야지 입 밖으로 내면 즉시 번져 갑니다. 전염병처럼 확 퍼져버리는 것입니다.
말을 지껄이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릇되게 만들고 넘어뜨리게 됩니다. 내 마음의 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전염을 시켜 동조자를 만들게 되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합법적으로 어떤 정의를 실현시키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정의가 그대로 실현됐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지옥에 가 있을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만을 자꾸 따지면 교회는 다 깨지고 맙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꼭 옳지만 잘못된 일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육신적인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5-16)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판단치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따라서 판단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육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 판단이 정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현실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우리의 육신의 생각을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 판단이 당장에는 옳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다는 것을 밝히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주며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이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정한 것과 불의한 것을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어떤 의견 충돌이나 불협화음이 없을 수는 없는데 그런 가운데서 자기 주장을 내세워서 형제 자매 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성령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깊은 고민 속에서 해답을 찾는 마음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시 73:16)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다른 사람도 자기와 같은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이 될까 염려해서 입을 꾹 다물고 참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신앙 문제로 인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깊은 고민을 해보지 않는 사람은 이 말씀의 뜻을 잘 모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민이 너무 심해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떤 말씀에서 문제가 풀려 큰 기쁨을 느끼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깊이 부딪치면 생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실의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사람이 그런 고민에 빠집니다. 얼렁뚱땅하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런 고민에 안 빠집니다.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그런 깊은 고민에 빠지지만 나중에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면 훨씬 더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법입니다.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나타나는 깨달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성소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는 언약궤나 법궤 뿐만 아니라 향단, 등대, 떡상 등등 여러가지 기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이 문제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은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성소는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 모임에서 가끔 성경에서 무엇을 깨달았다는 사람 들이 있는데 자기가 개인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사실을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한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었던 법궤는 예수님과 말씀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신데 그 머리는 바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깨닫는 것은 말씀이 열릴 때 깨닫는 것이지 그 말씀이 열리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 속에 말씀이 주어져서 그 말씀이 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떠나서 그 말씀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군대에 갔는데 무언가 마음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산에서 대변을 보다가 무엇을 깨달았답니다. 대변이 뱃속에 있을 때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데 뱃속에서 나오니까 냄새가 나더랍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임 밖으로 나가면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성전 안에서이지 밖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성전 안에는 말씀이신 법궤가 지성소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말씀이 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대일로 개인에게 아무렇게나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 다. 그런 말씀을 깨달았으면 모임 안에서 밑거름이 되어 자기를 낮추며 봉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선생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갈 때에 말씀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안목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 아삽
"주께서 저희를 참으로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시 73:18-19)
아삽은 이제 말씀을 깨닫고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라는 좁은 울타리 속에 갇혀서 하나님을 바라다 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넓은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살았는데 왜 어려움을 겪고, 저 악한 사람들을 잘 사는가' 하는 생각은 근시안적인 좁은 소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소에 내려가 말씀을 깨달았을 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안목이 생겨 시야가 넓어져 비로소 하나님처럼 사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 속에 파묻혀 좁디좁은 생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제대로 보입니다. 그 악인들은 잠시 잠깐 형통할 뿐이요 곧 멸망할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좁은 안목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악인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회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 73:20)
사람은 잠이 들면 꿈을 꾸지만 그 꿈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깨어나면 무시해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깨신다는 것은 주님이 잠드셨다가 일어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1-8)
하나님은 영원히 죽지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시편 기자가 주께서 깨어나신다 하였는데 이것은 주님이 주무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세상 사람들이 죽음에서 깨어나 주님 앞에 심판을 받기 위해서 설 때에는 자기들이 무시했던 그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두렵고 떨림으로 심판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지만 저희 악인들은 사망의 부활로 주님께 앞에 서게 될 것 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잘못 판단한 것을 뉘우침
"내 마음이 산란하고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시 73:21)
그래서 기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잘못 하나님을 판단한 것을 깊이 뉘우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이 심장을 찔러 회개케 한 것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2-23)
이성 없는 짐승은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삽이 짐승과 같다는 말은 자기가 전에 품었던 그 생각은 순전히 본능적으로 품었던 육신의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죄를 안 짓고 살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악한 사람은 오히려 잘되느냐는 생각은 짐승들처럼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본능적으로 무엇을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진리인 줄 착각하기 쉽습니다. 기자는 자기가 거의 넘어질 뻔하였을 때에 주님께서 자기를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 나이다"(시 73:24-2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 119:97-104)
우리가 참으로 지혜로워지고 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그냥 형식적으로 읽는 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아삽은 육신의 생각에서 하마터면 실족할 뻔했던 데에서 깨어나 이제는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가 어떤 말씀이 우리를 깨우쳐 주실 때에는 우리도 아삽과 같은 마음이 생깁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누구나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는 말씀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12 사람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 세 사람은 주님이 그 제자 가운데서도 특별히 구별을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정도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에게 가까이한다'고 하셨는데 역으로 해석하면 나는 나를 멀리하는 자에게는 멀리한다는 뜻이 됩니다.
아삽은 하나님이 왜 이럴까 하는 모든 문제가 다 풀려버리고 이제는 하늘에나 땅에나 주님밖에 없다는, 감사가 넘치는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나 땅에서 주님만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간절히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있으면 행복할 텐데 그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상급이 되시는 주님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시 73:26-27)
창세기 15장 1절에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상급이다" 하신 그 말씀대로 진정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요 기업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안목이 넓어진 사람은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음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을 말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였는데 세상을 짝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이 음녀입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 마지막의 타락한 교회가 음녀입니다. 음녀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적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모시는 타락한 교회입니다. 아삽은 안목이 넓어지면서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 73:28)
참으로 멋있는 고백입니다. 조금 전만해도 하나님을 오해하여 하마터면 입으로 불평을 터뜨릴 뻔했던 지경에까지 갔다가 이제는 모든 문제가 풀어지면서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평을 터트리는 사람이 될 뻔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입을 열어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입
시편은 총 150편으로 이것이 다시 4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시편 73편은 그중 제 3권의 첫번째 시인데 '아삽의 시'라는 표 제가 붙어 있습니다.
아삽은 헤만, 에단(여두둔)과 함께 성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은 자였습니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 아들들이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 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저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헤만의 형제 아삽은 헤만의 우편에서 직무를 행하였으니 저는 베레갸의 아들이요… 저희의 형제 므라리의 자손 중 그 좌편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는 에단이라"(대상 6:31 —33, 39, 44)
찬송하는 일을 말은 아삽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중요시하여 대규모 성가대를 조직하였는데 아삽과 헤만과 에단(여두둔)으로 하여금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성가대장의 역할을 맡겨 이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그들의 자손을 구별하여 세웠습니다.
"다윗이 군대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두둔에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랴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나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헤만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북기야와 맛다냐와 웃시엘과 스브엘과 여리못과 하나냐와 하나니와 엘리아다와 깃달디와 로암디에셀과 요스브가사와 말로디와 호딜과 마하시옷이라 이는 다 헤만의 아들들이니 나팔을 부는 자며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 하나님이 헤만에게 열네 아들과 세 딸을 주셨더라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여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저희가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 팔십팔 인이라"(대상 25:1-7)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 신 목적이 바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아삽은 선견자요 찬송을 맡은 자로서 늘 다윗 가까이에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다윗의 심정과 생각을 잘 헤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인물이었던 다윗 가까이에서 함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시편 50편을 비롯하여 73-83편의 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낀 먹구름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맡은 자로서 마음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걸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할 터인데 억울하게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오히려 악하고 교만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마음에 큰 의문과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고서는 마음 속에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우러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어둡고 답답한 마음으로 깊은 고민을 하면서 권선징악의 단순 논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악인과 오만한 자가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징계와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현실적으로 볼 때, 오히려 악을 행하면서도 부유하게 잘 살며 장수하는 일들을 보면서 이 세상이 너무도 부조리하다, 하나님은 과연 계신가 하고 불평을 터뜨리기 쉽습니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 7:15)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도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
현실적으로 의인이 억울함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일들이 흔히 있음을 볼 때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고 잎사귀를 내듯 형통하지만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처럼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망하리라는 시편 1편 같은 말씀들이 잘못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 당장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내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길이 참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모든 행악과 그릇된 행위에 대한 심판을 즉시 내리셨다면 이 세상에서 한 사람도 구원 얻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없다는 망언까지 일삼습니다.
악을 행해도 당장 아무런 일도 없고 오히려 권모술수로 권력과 이권과 재물을 쌓아가면서 점점 그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에게는 강포와 압제를 행하며 함부로 입을 열게 됩니다.
악한 말을 하는 입은 사탄이 권세를 잡은 공중, 즉 하늘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영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지구상의 하늘, 즉 공중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순서대로 창조하시면서 각 날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유독 하늘을 지으신 둘째 날만은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사탄이 공중에 권세를 잡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사탄은 공중 권세를 잡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악의 세력들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에 입을 하늘에 두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책임은 하나님께 돌리면서 원망을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인들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원망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저주까지 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혀가 땅에 두루 다닌다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저주스러운 말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악인들
여기 잔에 가득한 물을 마신다는 말은 저주스러운 물, 환란의 물을 마신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백성들은 사탄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 정신과 생각이 완전히 하나님께로부터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죽었다는 무신론이 생겨난 것입니다. 스탈린이나 모택동, 버틀란트 러셀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영국의 무신론자 러셀은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증명하면서 예수는 사람을 기만하는 거짓말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올바로 살아온 삶에 대한 회의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잘 지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지금 마음 속에 '내가 마음을 정직하고 선하게 먹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손을 씻는다는 말은 지은 죄를 씻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손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손을 가지고 남의 물건을 훔친다든지 남에게 나쁜 짓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손을 씻는 생활입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내어주면서 "본의 아니게 이 예수를 죽이게 되었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서 무죄하다."고 손을 씻었습니다. 손을 씻어 무죄하다고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한 손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섬기며 살았는데도 종일 재앙을 당하고 날마다 징계를 받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입을 꼭 다물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자세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시 이 우리에게도 이 시편 기자처럼 억울한 일이 생기더라도 꾹 참고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기자는 자기 마음 속에 억울한 일에 대해서 생각은 하였지만 입을 꼭 다물고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저렇게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데, 왜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마음을 바로하여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데 이렇게 고통과 괴로움과 징계를 당할까? 날마다 어려움을 당하는데 왜 이럴까? 하나님을 섬기는 게 다 헛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의 한계에까지 갔지만 이 시편 기자는 그것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입으로 발설을 했으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세계에다가 큰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한 일이나 악한 말은 전염병처럼 빨리 퍼져갑니다. 남을 흉보거나 하는 말은 휘발유에다가 성냥불을 켜서 던지는 것과 같고 선한 말은 물에 젖은 나무에다 성냥불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 속에는 악한 것이 점화가 훨씬 잘 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감정을 나쁘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말을 삼가해야 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면 왜 저렇게 악한 사람은 잘 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정직한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은 고통을 당할까.' 하는 의심이 마음에 꽉 차올랐지만 그것을 입으로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말을 발설했더라면 주의 아들들에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라는 것입니다.
궤휼은 남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동물이 기에 마음 속에 품은 감정은 어디 가서 쏟아내 버리면 속이 시원해집니다. 소위 스트레스라는 것이 해소되는 거지요. 어떤 사람의 비행을 보고 마음 속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하고 있다가 누구를 만나면 그 일을 다 지껄여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좋지 않은 감화는 영향력이 빠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은 꾹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아, 내가 잘 참았다.'하고 느낄 때가 올 것입니다. 모임 안에서 활동하면서 이런저런 불평을 가지게 되는 일들이 많지만 그 불평을 마음 속에서 소화를 시켜야지 입 밖으로 내면 즉시 번져 갑니다. 전염병처럼 확 퍼져버리는 것입니다.
말을 지껄이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릇되게 만들고 넘어뜨리게 됩니다. 내 마음의 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전염을 시켜 동조자를 만들게 되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합법적으로 어떤 정의를 실현시키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정의가 그대로 실현됐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지옥에 가 있을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만을 자꾸 따지면 교회는 다 깨지고 맙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꼭 옳지만 잘못된 일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육신적인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판단치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따라서 판단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육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 판단이 정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현실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우리의 육신의 생각을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 판단이 당장에는 옳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다는 것을 밝히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주며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이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정한 것과 불의한 것을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어떤 의견 충돌이나 불협화음이 없을 수는 없는데 그런 가운데서 자기 주장을 내세워서 형제 자매 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성령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깊은 고민 속에서 해답을 찾는 마음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다른 사람도 자기와 같은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이 될까 염려해서 입을 꾹 다물고 참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신앙 문제로 인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깊은 고민을 해보지 않는 사람은 이 말씀의 뜻을 잘 모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민이 너무 심해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떤 말씀에서 문제가 풀려 큰 기쁨을 느끼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깊이 부딪치면 생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실의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사람이 그런 고민에 빠집니다. 얼렁뚱땅하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런 고민에 안 빠집니다.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그런 깊은 고민에 빠지지만 나중에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면 훨씬 더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법입니다.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나타나는 깨달음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성소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는 언약궤나 법궤 뿐만 아니라 향단, 등대, 떡상 등등 여러가지 기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이 문제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은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성소는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 모임에서 가끔 성경에서 무엇을 깨달았다는 사람 들이 있는데 자기가 개인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사실을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한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었던 법궤는 예수님과 말씀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신데 그 머리는 바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깨닫는 것은 말씀이 열릴 때 깨닫는 것이지 그 말씀이 열리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 속에 말씀이 주어져서 그 말씀이 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떠나서 그 말씀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군대에 갔는데 무언가 마음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산에서 대변을 보다가 무엇을 깨달았답니다. 대변이 뱃속에 있을 때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데 뱃속에서 나오니까 냄새가 나더랍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임 밖으로 나가면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성전 안에서이지 밖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성전 안에는 말씀이신 법궤가 지성소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말씀이 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대일로 개인에게 아무렇게나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 다. 그런 말씀을 깨달았으면 모임 안에서 밑거름이 되어 자기를 낮추며 봉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선생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갈 때에 말씀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안목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 아삽
아삽은 이제 말씀을 깨닫고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라는 좁은 울타리 속에 갇혀서 하나님을 바라다 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넓은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살았는데 왜 어려움을 겪고, 저 악한 사람들을 잘 사는가' 하는 생각은 근시안적인 좁은 소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소에 내려가 말씀을 깨달았을 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안목이 생겨 시야가 넓어져 비로소 하나님처럼 사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 속에 파묻혀 좁디좁은 생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제대로 보입니다. 그 악인들은 잠시 잠깐 형통할 뿐이요 곧 멸망할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좁은 안목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악인
사람은 잠이 들면 꿈을 꾸지만 그 꿈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깨어나면 무시해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깨신다는 것은 주님이 잠드셨다가 일어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죽지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시편 기자가 주께서 깨어나신다 하였는데 이것은 주님이 주무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세상 사람들이 죽음에서 깨어나 주님 앞에 심판을 받기 위해서 설 때에는 자기들이 무시했던 그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두렵고 떨림으로 심판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지만 저희 악인들은 사망의 부활로 주님께 앞에 서게 될 것 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잘못 판단한 것을 뉘우침
그래서 기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잘못 하나님을 판단한 것을 깊이 뉘우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이 심장을 찔러 회개케 한 것입니다.
이성 없는 짐승은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삽이 짐승과 같다는 말은 자기가 전에 품었던 그 생각은 순전히 본능적으로 품었던 육신의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죄를 안 짓고 살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악한 사람은 오히려 잘되느냐는 생각은 짐승들처럼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본능적으로 무엇을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진리인 줄 착각하기 쉽습니다. 기자는 자기가 거의 넘어질 뻔하였을 때에 주님께서 자기를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지혜로워지고 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그냥 형식적으로 읽는 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아삽은 육신의 생각에서 하마터면 실족할 뻔했던 데에서 깨어나 이제는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가 어떤 말씀이 우리를 깨우쳐 주실 때에는 우리도 아삽과 같은 마음이 생깁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누구나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는 말씀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12 사람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 세 사람은 주님이 그 제자 가운데서도 특별히 구별을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정도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에게 가까이한다'고 하셨는데 역으로 해석하면 나는 나를 멀리하는 자에게는 멀리한다는 뜻이 됩니다.
아삽은 하나님이 왜 이럴까 하는 모든 문제가 다 풀려버리고 이제는 하늘에나 땅에나 주님밖에 없다는, 감사가 넘치는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나 땅에서 주님만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간절히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있으면 행복할 텐데 그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상급이 되시는 주님
창세기 15장 1절에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상급이다" 하신 그 말씀대로 진정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요 기업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안목이 넓어진 사람은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음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을 말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였는데 세상을 짝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이 음녀입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 마지막의 타락한 교회가 음녀입니다. 음녀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적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모시는 타락한 교회입니다. 아삽은 안목이 넓어지면서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고백입니다. 조금 전만해도 하나님을 오해하여 하마터면 입으로 불평을 터뜨릴 뻔했던 지경에까지 갔다가 이제는 모든 문제가 풀어지면서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평을 터트리는 사람이 될 뻔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입을 열어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