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4편]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간구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학대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 화가 항상 상달하나이다"(시 74:1-23)


 이 시는 아삽의 마스길이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시의 내용과 배경을 살펴보면 아삽의 후손들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때에 읊어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삽의 후손들이 바벨론 유수의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지은 교훈의 시를 후대에 그들의 조상인 아삽의 이름으로 편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민족의 부르짖음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시 74:1)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온전히 그 땅을 정복하지 못하더니 다윗 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땅을 정복하게 되었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 때에는 성전과 왕궁을 짓고 온 세상 에 이스라엘의 이름과 영광을 드높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도 나중에는 이방 여자들을 많이 취했고 여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우상들로 인해 이스라엘이 어지럽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차츰차츰 타락해서 바알 신이나 아세라 신 등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분열되게 되고 나중에 각각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이 교회 시대에 있어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세속화되어 이 세상 풍속을 좇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우리가 구원을 받고 처음에는 모든 일에 열심을 내지만, 제대로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마음이 차츰차츰 세상에 물들어 물질과 쾌락을 사랑하고 세상 풍습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세상에 끌려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이라는 말씀처럼 돈을 매우 사랑하는 마음이나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 숭배했던 마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우상 앞에서 절을 한다거나 섬기는 것은 없지만 우리 마음 속에 세상을 사랑하는 요소들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우리 마음이 세상을 향해서 가게 하는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믿음이 약화되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면 은연 중 마귀에게 끌려가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것이 바로 이러한 일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는 이방의 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면서부터 선민의 시대가 끝이 나고 이방의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 이방의 시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강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통치하시는 선민의 시대였지만,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도 그들을 떠나버리시고 이방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페르샤, 헬라, 로마 등의 이방 나라에 지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세속화되면 성령의 역사가 한곳에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버가모나 두아디라, 그리고 마지막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한때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나중에 세속화되어 완전히 세상으로 흘러가 버려 성령의 역사가 끊겨져 버린 것을 교회사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이러한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 속에는 사탄의 말을 잘 듣는 육신의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신앙생활의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과 훈련을 통해서 꺾여지고 약화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의 믿음이 굳건해지고 마음에서 우상이 제해질 수가 있습니다.

 육신은 세상을 굉장히 좋아하고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더욱 이 육신적인 요소가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편리한 과학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들의 말초 신경을 자극해서 우리 마음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강하게 유혹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굳건히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우리가 만일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에 져서 육신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들에 의해서 바벨론으로 끌려가듯이 사탄의 세력에게 굴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영원히 버리시는 것같이 생각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간구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시 74:2)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구속하사 백성으로 삼으신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시 74:3)


"주의 발을 드십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발걸음을 돌이켜 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뒤로하시고 떠나셨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원수들에게 억압당하고 파멸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발걸음을 돌이켜 이스라엘을 향해 달라는 것입니다.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여 자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시 74:4)


 예루살렘 성전은 이제 허물어지고 원수들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자기들의 기를 세웠습니다.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시 74:5-7)


 예루살렘 성전은 주님이 이름을 두신 곳인데 그만 원수들에 의해 다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향한 솔로몬의 기도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성전에 두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을 향한 솔로몬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7-29)


 천지 만물을 지으신 크신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이 건축한 자그마한 전에 와서 계시도록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에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어 주시라고 솔로몬은 간구했습니다. 솔로몬의 이 기도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이야기했었습니다.



신약시대의 성전一교회


 이 성전이 신약시대에는 바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전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교회하면 예배당 건물을 생각합니다만 조금만 성경 지식이 있다면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것 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인격체이지 외형적인 건물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시대 교회의 그림자인데 교회는 예수 님을 머리로 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이 지체로 연결되어 있는 인격체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교회는 죽은 돌이 아닌 산 돌로 지어진 돌집입니다. 기초석은 예수님입니다. 이 신령한 집이 성전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이 산 돌로 예수님께 연결이 되고 또 연결이 되어 눈에는 안 보이지만 신령한 집이 지어져 갑니다. 이렇듯 구원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중심으로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이고 성전인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잘 모르면 교회하면 예배당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총회장과 노회장이 있는 어떤 조직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산 돌, 즉 돌이 살았다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뜻 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께 연결되어 지어져가는 생명체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단 231—35)


 여기에 우상이 나오는데 장차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공중에서 돌이 하나 날아와서 우상의 열 발가락을 쳐 버리면 완전히 그 우상이 가루가 되어 버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쳐서 부숴뜨려버리는 돌은 바로 산 돌이신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산 돌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에 연결되면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생명을 받으면 주님과만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형제 자매들과도 연결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산 돌과 산 돌이 차츰차츰 연결이 되어서 집이 지어져 가는데 이 집은 세상적인 조직체가 아니고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주님이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이름을 두셨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며 또한 그 안에서 교회의 모든 일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의 참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저 아무렇게나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말로만 떠들어 대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19-20)


합심한다는 것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수이지 단수가 아닙니다. 혼자서는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인데 구원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두 사람 이상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다가 자기 마음에 안맞는 일이 생기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으니까 우리도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따로 모여 교회를 만들자고 모임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이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3-4)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는데 그 하나 된 것을 깨버리고 무리를 지으니 주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아닙니까. 교회는 사람의 결심이나 모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이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6-16)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잡아 일으키니 그가 걸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역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베드로가 굉장한 능력이 있는 줄 알고 쳐다보자 그는 이 일은 우리들의 경건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게 된 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써 교회에 주님의 이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교회에 주어진 주님의 이름으로 그 능력을 행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두 가지 역사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보혜사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오순절에 오셨고 주님의 이름이 거기에 맡겨져 교회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이 계신 곳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았으면 교회에 주님의 이름이 맡겨질 수 없습니다. 오순절의 역사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을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이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무렇게나 모였다고 해서 주님의 이름이 맡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구원받게 하는 역사와 기름 부음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구원받게 하는 역사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구원받은 것 이상의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해서 탄생하셨지만 세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기 전,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조용히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주님께 임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기름 부음입니다. 그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은 다음에 비로소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는 안되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만 주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더럽혀진 하나님의 성소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시 74:7)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 파괴되어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 더럽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잠시 동안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름을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만 외면하시고 발걸음을 옮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들을 떠나신 것입니다.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시 74:8)


 이스라엘 각 지역에는 성전 외에도 회당이 많이 있었습니다. 회당은 안식일마다 모여 율법을 읽는 곳입니다. 현재 서울에 수천 개 이상 되는 예배당이 있는데 실은 예배당은 교회가 아니라 회당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예배당을 회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점차 교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흩어져 있더라도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 그 자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 교회에서 건물을 자꾸 교회라고 하니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는 모임이란 말은 많이 썼던 것입니다.



주님의 표적과 증거를 잃어버린 민족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시 74:9)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물론 제사장도 때때로 하나님 의 음성을 듣기도 했습니다. 다윗 왕 같은 이는 선지자이기도 하고 왕이기도 했으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백성을 인도하고 정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자 선지자도 없어지고 믿음 있는 왕도 없어지고 제사장도 없어져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이들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서 원수를 무찌르고 승리하는 일들이 종종 나타났었습니다. 수리아의 나아만 군대 장관은 문둥병이 걸렸는데 이스라엘에 와서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 요단강에 씻으라는 말을 듣고 씻어 문둥병이 나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표적이 없어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것이 전혀 증거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신약시대로 말하자면 성령이 떠나 영적인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구원받은 사람도 일어나지 않게 되고 환난이나 시험을 당할 때에 마음을 한데 뭉쳐서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표적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 가운데서 서머나 교회를 보면 외적으로는 교회 건물도 변변히 없는 상태였지만 신앙을 굳건히 지켜 나갔습니다. 원형극장에 높이 장대를 달아놓고 그리스도인들을 화형을 시키고 사자 밥이 되게 하고 투사를 시켜 칼로 찔러 죽이도록 했지만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렇듯 용감히 죽어가는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의 표적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 무슨 표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어가는 모습들을 보고 마음이 찔리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표적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긍지를 가지고 꿋꿋이 환란과 핍박을 견디고 믿음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도 수없이 많은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복음의 역사를 지켜오고 교제의 터전을 넓혀 왔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표적인 것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견디기 힘든 상황 속 에서도 굳건히 믿음을 지켜가는 그런 사실이 주님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다음에는 그러한 표적이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들은 어떠한 어려움과 핍박과 환란이 있어도 희망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머지않은 장래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영접해 주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예루살렘의 완전한 회복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시 74:10-11)


 여기서 '언제까지'라고 했는데 이 시점은 이방의 때가 끝이 나는 때를 말합니다. 이 이방의 때는 주님이 오심으로서 끝이 납니다. 물론 70년 만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돌아옵니다만 그것은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습니다.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짓고 성전을 회복하기는 해도 또 다시 페르샤에게 멸망당하고 또 로마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됩니다. 이방의 때가 자꾸자꾸 이어져 나가서 예수님이 재림하셔야만 이방의 때가 끝이 납니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에 가보면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아직 회교의 알 아크샤 사원과 오말 사원이라는 두 사원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이방의 때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예루살렘에 이방 종교가 많고 또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살고 있습니다. 구 예루살렘 성 안에 가보면 일부 지역은 유대인 지역이고 일부 지역은 아랍 사람들의 구역입니다. 그 밀집 지역에서 아랍 사람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총을 휴대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밉지만 공격은 할 수 없어 마음에 분함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예수님이 오시면 완전히 정리되고 이상적인 국가가 거기에 형성될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시어 이방의 때가 끝이 나고 완전히 이스라엘 시대가 올 때를 말합니다.



마귀의 머리를 부수어 버리신 주님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시 74:12-14)


 이 부분은 하나님이 과거에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회상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던 일을 말합니다.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는 것은 애굽의 바로 왕의 군대를 물 속에 장례지낸 것 을 말합니다. 마귀의 상징인 용은 바로 왕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잡으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물 속에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홍해를 건너고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 일로 말미암아 용, 즉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고 우리를 구속하신 사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장대에 달린 뱀처럼 마귀의 운명이 되어 죽으신 것입니다. 예 수님이 마귀의 운명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마귀의 머리를 부수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다는 것은 신약으로 보면 예수님이 마귀를 십자가에서 멸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 영혼을 붙들고 있던 마귀가 죽는다는 뜻입니다. 용, 즉 마귀의 머리가 깨지면서 우리는 마귀에게서 풀려버리는데 그것이 우리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우리의 영이 마귀의 지배 아래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육신 안에 아직도 죄의 힘이 남아 있어 구원받고 새 생명과 다투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가 내 영을 잡고 있을 때의 내 영은 죽은 영이었지만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음과 동시에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오고 우리는 마귀에게서 풀려나버리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아주 실제적인 사실입니다. 실제로 용, 즉 마귀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놓이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 바로의 군대가 뒤따라 왔지만 불 기둥이 가로막아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이스라엘 사람이 다 건너고 난 다음에 모세가 돌아서서 지팡이를 드니 물이 합쳐져 바로의 군대가 몽땅 다 죽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세력이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셨다 하였는데 악어도 역시 마귀의 상징입니다.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다 하였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수를 공급받는 생활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시 74:15)


 이스라엘 민족은 물이 없을 때 모세가 반석을 치니까 물이 나와서 마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중에 말씀을 깨달아가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시험이나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 마음은 답답하고 고통스럽지만 어떤 말씀을 통해서 그 문제가 풀리면 목이 마를 때 생수를 마신 것처럼 마음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말합니다.

 우리는 단번에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계속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죽음은 현재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육신이 깨어지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육신은 항상 주님으로부터의 공급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는 받았어도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딛히면 마음이 암담하고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과 우리 사이에 육신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내 영과 주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데 이것이 주님의 말씀으로 깨어지면 주님께로부터 오는 시원한 물을 마시게 됩니다. 새로운 은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이 주님의 말씀으로 깨어지면서 우리의 영이 주님과 일치가 되어버립니다. 내 육신의 생각이 부수어져서 주님으로부터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육신을 죽이는 장소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했는데 십자가는 육신을 죽이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 생각과 내 모든 인간적인 육신의 요소가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가령 우리가 어떤 형제와 형제 사이에 문제가 생겨 마음이 불쾌하고 그 형제가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생각해 보면, 왜 내가 아직도 형제를 미워하고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안 순간입니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깨달음이 오는 그것이 바로 바위를 깨어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육신의 생각, 세상을 사랑하는 생각을 십자가에서 깨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둘째 경험


 한편,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라는 말은 요단 강물이 말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법궤를 맨 사람이 강물에 들어서자 강물이 멀리서부터 정지해 버리고 아래는 물이 내려가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 건너가고 난 다음에 그 법궤를 멘 사람들이 나오고서야 물이 다시 흘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이처럼 요단강을 건너는 일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구원을 말하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신앙 생활의 둘째 경험을 말합니다. 둘째 경험은 개인에게도 해당되지만 전체적으로는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 나라를 형성하는 그것이 바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바로 광야 생활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다음에는 광야 생활을 해 가는데 우리 육신과의 싸움이 바로 광야 생활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면 육신과 싸우는 그 문제가 풀어져버리면 안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경계선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시 74:16-18)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을 지으시고 땅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이스라엘 민족의 경계는 남쪽으로는 홍해이고 동쪽으로는 요단강입니다. 그 경계를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경계가 있듯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이에 경계가 있어 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과 일체 접촉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음에 경계를 두고 사는 것이 바로 거룩한 생활입니다. 세상 친구와 사귈지라도 그의 유혹에 내가 넘어가지 않고 그를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지라도 그 일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는 경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생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0|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 5:9-13)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하되 마음에는 항상 경계를 두어야 합니다. 이방 사람과 경계입니다. 그 경계를 안두면 이방의 우상이 들어오게 됩니다. 거룩한 생활이란 이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면서도 마음에 경계를 두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려는 순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지계석입니다. 



시절을 좇아 열매 맺기 위한 훈련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다고 하였는데 우리 신앙생활 속에는 어떤 때는 추울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더울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우리 신앙생활의 계절을 쫓아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항상 봄철만 있고 시원한 가을철만 있으면 신앙의 단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경계를 정해서 우리가 주님께 시련과 훈련을 받음으로써 열매를 맺는 정말 아름다운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들짐승—그리스도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시 74:19)


 성경에서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주의 멧비둘기는 정처없이 잃어진 비둘기, 즉 예루살렘을 멀리 떠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 현재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비둘기입니다. 이 비둘기의 생명을 짐승에게 주지 말라 하였는데 이 들짐승은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짐승이 나오는 느브갓네살 왕이나 페르시아 왕, 알렉산더 대왕, 로마의 세력이 짐승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방의 시대에 그 짐승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이 오시면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혀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게 되고 주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이 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멀리 내다보면서 이 시를 읊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돌아보소서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혹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화가 항상 상달하나이다"(시 74:20-23)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돌아보아 달라는 기도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기도가 응답이 되어 환란 속에 성령이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짐승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고 이 땅 위에 이상적인 나라가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시대가 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