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5편] 악인의 뿔을 꺾으시는 주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정의로 판단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을 높이 들리로다"(시 75:1-10)


 시편 75편은 아삽의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시는 이사야서 36장과 37장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아삽의 후손들이 지은 시를 후대에 편집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사야서 36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 랍사게와 큰 군대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항복을 권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애굽의 도움이나 너희들의 신 여호와를 의뢰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앗수르 군대의 멸망과 히스기야의 기도


[이사야 36:1-22]

히스기야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세탁업자의 터의 대로 윗못 수도구 곁에 서매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니라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의뢰하니 무엇을 의뢰하느냐

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모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 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느냐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지팡이와 일반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려들어가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 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경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나는 네게 말 이천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장관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의뢰하여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컨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의 듣는데서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랍사게가 가로되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외쳐 가로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히스기야가 너희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는 것을 받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붙임이 되지 아니하리라 할찌라도 

히스기야를 청종치 말라 앗수르 왕이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 물을 마실 것이요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찌라도 꾀임을 받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그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하여 대답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때에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고하니라



 이어서 37장은 앗수르 군대가 멸망하는 내용입니다. 앗수르는 북쪽 이스라엘을 이미 정복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포위해 함락시키려고 합니다. 그에 앞서 항복을 권유하는 랍사게의 말을 신하들에게 전해 들은 히스기야 왕은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가면서 신하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 왕의 종들이 하나님을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산헤립을 자기 나라에서 칼에 죽게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어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사야 37:30-35]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가라사대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쳐서 죽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니느웨로 돌아갔고 거기서 자기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게 칼로 살해를 당합니다.

이 시편 75편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거민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신 일을 기념하여 지어진 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시 75:1)


 이 시는 이스라엘이 이처럼 위기에 처해 있다가 하나님의 손길로 구원을 받은 때에 지어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하였는데 주님의 이름은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3-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셨고 영원히 기억할 표호라 하셨습니다. 나중에 솔로몬 대에 이르러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향하여 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간구하는 것을 우리는 열왕기상 8장에서 자세히 상고한 바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주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 선민 이스라엘 민족이었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교회에 이름을 두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신약시대에 주님의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그 성령이 교회 가운데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이 주어진 곳입니다.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이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기사와 능력이 나타나고 그 밖의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주님 자신과 같습니다. 가령,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도 주님의 이름에 의한 기사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보통 일이 아니고 이적과 기사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병 고치거나 방언을 하는 기사는 인식을 하고 있지만 거듭나는 역사, 구원받은 역사가 주님의 기사라는 것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이름이 교회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을 받는 기사와 이적이 지금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간 속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계획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정의로 판단하리니"(시 75:2)


 이 세상 역사는 전부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령,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때를 이미 결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계 9:13-15)


 이 구절은 아마겟돈 전쟁과 관련된 말씀인데 그 년 월 일 시까지도 정해놓으시고 그 때가 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성급하게 하나님보다 앞서 우리 자신이 어떤 일들을 해치워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그 시절이 되기 전에 어떤 일들을 성급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제약 속에서 살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십니다. 현재 우리 인간이 사는 이 지구는 공전과 자전을 계속하면서 시간이 형성되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우주를 초월해 계시니까 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간이 살아가는 이 시간 속에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지금도 지구는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시간 속에서 실천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정 속에서 오시는 메시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택하신 두 족속을 버리셨다 한 것을 네가 생각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여 자기들 앞에서 나라로 인정치 아니하도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주야의 약정이 서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 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진대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렘 33:19-26)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자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구출된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민인데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신다는 실망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결코 너희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야의 약정이라는 것은 지구가 회전하면서 낮과 밤이 이루어지는 자연의 절대적인 법칙을 말합니다. 낮과 밤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정, 법칙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탄생해야 할 메시야, 즉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약정 속에서 오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는 실망스러운 상태 속에서도 그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계획은 살아 있어서 절대적으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 지구가 돌고 돌아 때가 차면 반드시 다윗의 자손 중에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그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때가 있는데 그 때는 지구가 돌아가는 법칙에 근거해서 미리 약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중지되고 자연 법칙이 없어진다면 하나님의 그 계획도 없어지겠지만 지구가 운행되는 한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절망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실망스러울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힘이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하신 일을 절대적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이제 주님의 복된 교회가 완성되면 주님이 오시는데 하나님의 그 계획은 절대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두운 때도 있고 몹시 실망스러울 때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꾸준히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나중에 믿음의 결국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을 당해도 욥과 같은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욥은 열 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재산도 없어져 버리고 자신은 문둥병자처럼 고통을 당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들어가서 저주 받은 사람으로까지 여겨졌지만 입을 벌려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고 믿음의 결국을 보았다고 야고보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약 5:7-11)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 안에서 꾸준히 참고 견디면 그 결과를 우리는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의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지만 며칠 후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그 앗수르 군대가 멸망당할 것을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정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앗수르의 손에서 이스라엘이 구출되는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땅의 기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시 75:3)


 여기에 '땅의 기둥'은 땅의 기초를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무하게 하시며 뒤집어 엎으시고 그 거민을 흩으시리니"(사 24:1)

"두려운 소리를 인하여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사 24:18)


 성경 여러 곳에 땅의 기초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기둥은 건물을 받쳐주는 것인데 만일 기둥이 약하면 건물은 그냥 무너지고 맙니다. 땅도 건물과 마찬가지로 튼튼한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 一 교회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 교회요, 이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집을 받쳐주는 기둥인데 이 진리가 변질되면 교회가 무너져 버립니다. 진리에는 물리적인 진리인 자연법칙과 영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계십니다. 이 모든 자연계는 하나님의 법칙이 꽉 붙잡고 있기 때문에 무너질 수 없습니다. 자연법칙은 이 모든 자연계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인 것입니다. 이 진리가 무너지지 않는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환란


 그러나 "땅과 그 거민은 소멸되리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만 영원히 살고 나머지는 전부 소멸되도록 모든 계획이 짜여져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 끝이 오는데 진리를 떠난 사람들은 그때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치러왔던 앗수르와 산헤립도 결국 멸망당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계획을 무시했기 때문에 멸망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의 그림자로서 이 세상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 창조된 이 세상은 마지막 때에 무너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여 멸망당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는데도 이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전에 어떤 종교인들이 예수님이 몇년 몇월 몇시에 오신다는 그릇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주장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볼 때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때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시는 것은 불변의 사실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의 그릇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재림 자체나 성경의 여러 예언들마저도 무시해 버리는 것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계 13:15-18)


 어떤 신학자들은 계시록에 나타난 666에 대한 기록이 상징적인 것이지 표를 받는다고 지옥에 가는 일이 있을 수 있냐고 그럴싸한 논리로 자기 주장을 펼칩니다. 성경에는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들어가 고통을 받고 또 나중에 영영한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환란을 피하는 길은 거듭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침을 받지 않는 한 그 표를 안 받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이론적으로 말하고 그대로 믿고 주장을 해도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사실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으로 인침(거듭남)을 받으면 설사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꺾여질 뿔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시 75:4)


 오만한 자는 마음이 완악한 자, 곧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하고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계 13:1)


 계시록 13장에 열 뿔 짐승이 나오는데 전에는 이 열 뿔이 유럽의 열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최신 정보와 뉴스를 통해서 새로운 각도에서 이 말씀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장차 전 세계가 열개의 구역(블럭)으로 개편될 것이라는 기사를 접하면서 혹시 열 뿔이 이 열 개의 블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열 뿔 가진 짐승이 나와서 세계를 지배하는 모습이 계시록에 나타나는데 결국 적그리스도가 주축이 되어 형성될 이 거대한 세력도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꺾여지고 말 것입니다.




높아지려는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이 세상 사람들은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은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우주선을 타고 별에 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그것도 역시 이러한 마음의 발로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2-15)


 사탄은 원래 천사였는데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다가 쫓겨난 존재입니다. 이 사탄은 사람들을 부추켜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처럼 숭배하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경계가 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늘 이 경계를 넘어서서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사탄의 마음입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구상의 여러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미국과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을 중심으로 동서 양극 체계를 이루며 서로 대립과 갈등의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은 이 동서 양극 체계가 무너지고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이 동서남북의 구역과 세력을 따라 아직도 나름대로의 삶과 역사를 펼쳐나가고 있지만 끊임없이 그 영역을 벗어나 하늘을 향하여 자신들을 높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사탄의 마음인 동시에 인간의 본능적인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땅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높아지려고 애써도 결코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높아진 것 같지만 결국은 아래로 뚝 떨어져버립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보더라도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초대 이승만 박사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그 다음에 박정희 대통령은 오랫동안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결국 자기 측근의 권총 한 방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5공, 6공의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도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 심판을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인생이 무상하다고나 할까요. 인간은 높아질수록 떨어질 때는 소리가 크게 나는 법입니다.



진정으로 높아지는 길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높아지려는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높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끌어 올려주셔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해 계시는 높고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 순종하여 낮아진 위치에 처할 때 우리는 진정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예수님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사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낮아지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과 영광을 얻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길이야말로 진정으로 높임과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동으로 말미암아 높아지고 싶고 서로 말미암아 높아지고 싶으면, 즉 땅의 경계를 초월해서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가지면 결국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자신을 낮출 때 진정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사탄의 방법대로 살아갑니다. 사탄은 사람의 마음 속에 이생의 자랑, 즉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깁니다.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도 육신 속에는 아직 이 이생의 자랑이 남아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해서 남에게 지기 싫고 남보다 더 높아지고 싶은 마음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받을 심판의 잔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시 75:8)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계 14:10-11)


 마지막에 악인들이 받을 심판이 고난의 잔입니다. 계시록 14장에는 섞은 것이 없는 잔이라고 했고 시편에는 섞은 잔이라고 했는데 그 차이가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잔은 심판의 잔입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0-28)


 세베대의 아내가 자기 아들 야고보와 요한, 둘을 데리고 와서 그 두 사람을 예수님의 좌우편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육신적인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들이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마시려는 그 잔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야만 하는 고난의 잔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마시려는 그 잔이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은 위해서 고난의 잔을 마셨지만 이 세상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는 사람들은 무서운 진노와 심판의 잔을 마시게 됩니다. 그 잔을 마시고 결국에는 불못에 들어가 영영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리의 기둥이 세워지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이루어져 완성이 되면 현재 이 죄악 세상은 완전히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유례없이 많은 지진과 기근과 민족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이 지구의 기둥이 무너져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 진리의 기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리의 기둥이 우리 마음에 서 있으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우리의 이러한 마음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안타깝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라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도다"(시 75:9-10)


 이 야곱의 하나님은 오늘날은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진리로 말미암아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온 세상에 널리 선포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은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겉모습은 질그릇 조각 같을지라도 우리 안에는 참으로 귀한 주님의 생명과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