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6편]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신앙생활

"하나님이여 나를 긍홀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 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13) 


 '다윗의 믹담시, 영장으로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 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삼상 21:10-15)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 앞에 갔을 때 심히 두려워하여 미친 체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용맹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런 때가 있는가 봅니다. 멀쩡한 사람이 미친 체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아마 그때에는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긴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다윗이 그때에 굉장히 무서워하고 떨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56편에는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송하는 상태에 들어가는 내용이 씌여 있습니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 생겨나는 믿음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1-3) 


 사울 왕에게 쫓겨 원수 나라인 블레셋 지역으로 도망쳤을 때 그 사람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이 사람이 골리앗 대장을 죽였을 때 사람들이 사울 왕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을 죽였다고 말하던 사람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블레셋인들의 원수인 다윗이 이제 가드 왕 아기스 앞으로 잡혀 왔으니까 꼼짝 없이 죽은 상태입니다. 정말 인간적으로는 더 이상 도움을 바랄 수 없는 완전한 절망 상태에 빠졌을 때에 다윗이 이 시를 지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곤경에 빠져 우리 마음 속에 이제는 어찌할 수 없다고 자기를 포기하는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 틀림없이 하나님의 어떤 도우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은 항상 시련과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고 낮아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셨다가 그 다음에 도움을 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물론이지만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누구나 다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 신앙의 선배들의 생활에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도 종종 정말 희망이 없는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가 성경에서 어떤 사실을 깨닫고 문제가 풀렸다는 간증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경우가 다르고 깨닫는 성경 말씀이 달라도 그 형태는 다 똑같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그런 과정입니다. 로마서 6, 7, 8장을 읽어 보면 바울이 신앙생활하는 과정에서 겪은 굉장한 영적 투쟁이 나타납니다. 로마서는 이러한 내용이 체계적으로 교리화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서는 이론적인 교리가 아니고 바울 자신이 겪은 사실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천로역정」같은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존 번연이 자기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경험한 사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그런 불후의 명작을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책을 읽어 보면 한 크리스찬이 구원받고 천국가는 과정에서 여러 번 시험과 위험을 겪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사나운 짐승 옆을 지나가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강물을 건너가는 그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신앙생활을 그대로 그려 놓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천로역정」을 다 한 번씩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책입니다. 존 번연 자신이 구원받고 신앙생활 하는 도중에 옥중 생활을 한 실질적인 체험을 토대로 그런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다윗은 가드의 아기스 왕 앞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미친 체 침을 흘리면서 대문짝에 기대어 그적거리며 광인 흉내를 내어 죽음을 모면했습니다. 다윗 자신의 순간적인 기지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셔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이렇게 죽음을 모면한 후에 '내가 기름부음 받은 자답게 하나님을 담대히 증거하지 못하고 왜 그런 추태를 보이며 미친 체했을까' 하는 자책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이런 시를 쓰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극한 상황은 믿음이 한 단계 올라서는 좋은 기회


 저도 구원받은 이후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조금은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는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구원받은 사람이 많이 일어나서 함께 교제를 가질 수가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 사면초가의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항상 같이 하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을 압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의 일이든지 극한 상황에 빠졌을 때에 거기에서 다시 믿음이 뭔가를 알고 다시 올라설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극한 상황에 빠질 그때가 오히려 믿음의 한 계단 올라서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견디지 못하고 그만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3절에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고 하였는데 두려움이 극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가 아니면 돈이나 명예, 자신의 능력이나 주변 환경을 의지하고 사는가, 주님께서는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꺾어 버리십니다. 우리 마음이 참으로 낮아져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 들어갔을 때에 주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참으로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완전히 주님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구원받은 이후에 아무 것에도 의지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얼마만큼 괴로워하고 고민을 해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을 확실히 경험해 본 사람은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 때에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했는데 믿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두려움과 어려운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곤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찬송한 다윗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


 다윗은 더할 나위 없이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사울 왕에게 쫓겨서 이방으로 갔는데 이방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고 죽이려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을지라"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회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6)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대부분 돈을 의지해서 삽니다. 돈만 있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그래서 히브리서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돈으로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당하는 여러가지 시련 가운데 돈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물질, 즉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풍부한 돈이 있어야 할 그 자리를 하나님 자신이 메꾸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리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는 이 말씀은 하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롯이 시날 사람에게 잡혀갔는데 그를 다시 아브라함이 구출해 왔습니다. 그때 소돔 왕이 '사람은 내게 돌리고 물건은 네가 가지라'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이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아브라함은 소돔 왕이 주는 것을 거절했는데 소돔 왕은 사탄의 그림자입니다. 이 세상은 사탄의 세상이고 사탄이 통치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내게 경배하면 세상을 네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방법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절 한 번 하면 이 세상을 다 차지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절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사탄의 종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모든 것을 다 차지 하게 됩니다. 사탄은 그렇게 꾀가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 가슴 속에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돈이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많든 적든 항상 돈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곳은 돈이 있을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나님이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곤경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미친 척하였는데 뭣 때문에 이렇게 했을까.'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떤 곤경에 빠져 있다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으면 그 말씀을 찬송하게 됩니다.



찬송은 승리의 근원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였더라"(대하 20:21-23)


 이 말씀은 유다 여호사밧 왕 당시에 되어진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암몬과 모압 자손이 유다를 공격해 왔을 때에 백성들은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말을 듣고 용기를 얻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적군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때 노래 부르는 사람에게 입힌 예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어떤 사명을 입혀 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이같은 기사와 이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성찬식을 마치고 나서 바로 죽음이 앞에 닥쳤지만 찬송을 부르면서 갔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 부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자백해야 하겠지만 하나님 앞에 항상 울면서 사는 생활을 원치 않으십니다. 자식이 얼굴을 늘 찌푸리며 살아가는 것을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식들이 활발하게 웃으며 사는 것을 부모가 보면 참 기특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도 항상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찬송은 참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집회 때 열심히 마음을 합하여 우렁차게 찬송을 부르면 안 믿는 사람들이나 일반 교회 교인들이 들어와 보고 마음에 어떤 감동을 받습니다. 찬송 부를 때 즉시 코러스가 되어 4부 합창으로 우렁차게 부르면 그 분위기에 압도당합니다.

 우리는 찬송부를 때 힘차고 활발하게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원수를 물리치는 무기가 되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제가 국내나 해외의 전도집회에 참석해 보면 처음 나오는 분들을 위해 '예수 앞에 나아와 죄사함을 받으라'는 내용의 찬송들을 많이 부릅니다. 그것도 좋겠지만 사실 찬송은 사람을 향해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찬송은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불러져야 합니다.

 여호사밧 왕 때에 찬송을 불렀더니 원수를 이겼더라는 말씀처럼 찬송은 원수를 이기는 무기가 됩니다. 우리 마음에도 원수가 파고 들어오는데 그 원수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무엇입니까? 얼굴을 찡그리며 주께 밤낮 기도해 보았자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찬송 부르면 사탄이 물러갑니다.



믿음을 통해서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됨


 시편 56편 4절에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는 말씀에서 보면 다윗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찬송을 하게 되면서 혈육 있는 인간을 비웃을 수 있고 인간과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고 내 가슴 속에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참으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멀리 둥둥 떠가는 구름처럼 그냥 내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이 현실 속에서 직접으로 내게 비를 내리고 빛을 주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이 내 삶의 현실이 될 수 있고, 단 비를 내려서 나를 적셔 주시는 하나님이 되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려움과 고난 속에 있다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주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때에 비로소 주님은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이신 것을 실지로 알게 됩니다. 다윗이 그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죄 없이 핍박을 받으신 예수님의 그림자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시 56:5-6)


 이때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로 인해 죄를 짓기 이전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무 잘못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 왕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오해하고 그의 말을 완전히 곡해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점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인물입니다. 잘못이나 불의한 것이 조금도 없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죽이려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 직접 나타나셨는데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오해를 하고 잡아 죽이려 하는 것을 다윗 역시 그림자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시 56:7)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그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고 교만한 것을 낮추어 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우리를 낱낱이 계수하시는 주님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이것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유리함이 나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창 4:16)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가인이 유리하는 것과 다윗이 유리하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는 관계 없이 유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의 유리함은 주께서 계수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비록 사울 왕에게 쫓겨 가드에 가서 아기스 왕에게 붙잡히는 등 이리저리 쫓기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유리하면서 다니는 것을 다 보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기를 엄마가 지켜보다 위험한 지경에 빠지면 건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의 행보가 어머니의 눈에는 다 계수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비록 여기저기 유리하면서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항상 지켜주시니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적으로 유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윗이 말한 대로 그런 상태에 있더라도 주님은 낱낱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8-31)


 우리의 기거 동작과 행위, 아무리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세신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진실된 눈물을 반드시 기억하시는 주님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이 눈물을 많이 흘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었을 때에도 침상이 젖도록 울었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원수 앞에서 미친 척하고 불안해 하면서 순간이나마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이 떠나 있었던 것 때문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구원받은 이후에 몇 번이나 주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까? 그 눈물은 굉장히 가치 있는 눈물입니다. '내 눈물을 주의 병 안에 담아 달라'는 말은 기억해 달라는 말입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눈물 흘리는 것을 좋아하시지는 않지만 진실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값지게 여기십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갔을 때 우셨고 또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우 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과는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히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심한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 예수님처럼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 흘리는 것을 못 본 체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도 구원받은 이후에 너무 두렵고 무서워 성경 읽을 때 눈물 때문에 성경이 젖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성경의 어떤 말씀에서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 그 눈물이 기쁨으로 변한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과정에서 흘리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 등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그냥 땅에 흘려져 없어져 버리는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눈물은 주님의 기억 속에 있습니다. 병에 담으셔서 하나님의 기억에 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거기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비록 다윗이 한 말이지만 주님의 그림자로서 한 기도요 우리 믿는 사람의 대표로서 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눈물의 골짜기에서 찬송의 언덕으로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9-10)


 시편 56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서 시작하여 찬송으로 끝을 맺습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찬송도 부를 줄 압니다. 눈물 흘릴 만큼 고통스러운 가운데 참된 찬송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항상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렇게 양극이 있습니다. 깊은 눈물의 골짜기에서 찬송의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 84:5-7)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중에 어떤 때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눈물 골짜기로 다니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런 생애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환히 뚫린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을 완전히 평정한 굉장한 왕이요 용사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윗만큼 많은 찬송을 부른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시편 대다수가 다윗의 찬송입니다. 눈물이 있는 그곳에서 그는 찬송을 부르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을 보통 때 읽어도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지만 어떤 문제 가운데서 말씀이 떠오르면 힘이 솟아나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11)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아기스 왕이든 사울 왕이든 다윗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아직도 어렵고 쫓기는 신세인 것은 여전하지만 그의 믿음에 따라서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의 서원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 (시 56:12)


 서원은 하나님께 뭔가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수은제 라든지 감사제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 앞에 서원이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신 데 대해 내 안에서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 응답 속에는 지금부터는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서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러한 서원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구체적인 서원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구원을 받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서원이 생겨납니다. 참으로 감사한 마음과 찬송이 하나님 앞에 표현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신앙생활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3)


진리가 우리에게는 생명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다윗은 고통스럽고 두렵고 캄캄한 골짜기에 있다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눈을 떴는데 이제 하나님 앞, 곧 생명의 빛에 다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십자가의 고통과 사망의 골짜기에서 부활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렇게 죽음과 부활을 맛보고 사는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 마다 죽노라"고 하였는데 날마다 죽으면 날마다 부활의 생명을 맛보는 것입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여러가지 시련과 모든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후에 주님이 주신 부활의 새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 정한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여기에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은 장차 부활하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생활 속에서 죽음과 고난을 맛보는 일, 즉 주님의 죽으 심을 본받아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참예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의 표준적인 신앙생활은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부활의 새 생명을 얻는 힘찬 생활입니다. 다윗처럼 고난 속에서 두려워하다가 나중에 약속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죽음을 이기는 힘찬 생명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