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 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1-11)
다윗의 믹담시라고 했습니다. 믹담이란 교훈이란 뜻입니다.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있던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 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흑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삼상 24:1-22)
이 사무엘상 24장의 내용을 기초로 해서 다윗이 시를 읊은 것이 시편 57편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주시면 주셨지 자기 손으로 기름 부은 자를 죽이지 않겠다는 것이 다윗의 신 념이었습니다. 그를 죽여 버리면 자기가 왕이 되고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을 터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 낱개 밀에 편히 거하는 영혼
"하나님이여 나를 긍홀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이 시를 지을 당시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취하려는 사울 왕을 피해 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편안히 숨겨 주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당하거나 난관에 봉착할 때에 속마음까지 흔들리고 피할 길을 찾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유대인들에게 수욕과 핍박을 받더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고 아무런 요동이 없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암탉 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신 분이 주님이십 니다. 제가 어릴 적에 시골에서 살았는데 암탉이 병아리를 까서 기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에 알을 20여 개 품고 있다가 병아리를 깝니다. 그 병아리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참 귀엽습니다. 병아리들이 흩어져 있다가 무슨 이상한 소리 만 나면 삐약삐약하며 암탉 날개 밑으로 쑥 들어갔다가 나오곤 합니다. 암탉은 어떤 적이 나타나면 안간힘을 다해 병아리들을 지키기 위해 꼬꼬댁 꼬꼬댁 악을 씁니다. 그게 바로 모성인가 봅니다.
어머니들도 가만히 보면 참으로 희생적입니다. 요즈음이야 그런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자기는 먹지 않고 굶으면서 자식들을 먹이고, 자식들이 병들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간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성애를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 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기 새끼를 위해서는 생명까지 아끼지 않는 그 마음 자체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입니다.
신학적인 술어로는 자연 계시라고 하는데 이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그런 성품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면서도 그냥 자연 현상으로만 돌려 버리고 맙니다. 자연 속에 나타난 그 현상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속성을 표현해 놓으신 것이지요.
이 세상 만물 중에서 사람이 가장 그 속성과 사랑을 잘 표현합니다만 죄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망쳐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느날 본래부터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심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날개와 품 안에 평안히 거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것을 안 사람입니다. 아무리 위태롭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 평안히 있을 수 있었던 다윗은 신앙의 깊은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풍성히 준비하신 주님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요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영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잠시 어머니 얘기를 꺼냈습니다만 어머니는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다 준비합니다. 기저귀, 옷, 먹일 우유 등등 다 준비를 합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간에 자기 아기를 기르는 데 필요한 것을 준비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신앙생활에서 부족한 것이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데 하나님께서 내게는 그런 것을 이루어 주지 않더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찾고 요구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내 육신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 또 무엇을 위해서 이것을 찾고 있는지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많은데 그 필요한 동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가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라고 하였는데 '모든 것' 속에 내 육신도 한 몫 끼어 넣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육신의 것도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동기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조금도 양심에 거리낄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상급이요 방패'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제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하고 불평조로 물어 보았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지금의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 쳐들어 갔는데 그곳에서 엘리에셀이라는 고아를 하나 데리고 와서 키웠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요 세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많은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 많은 재산과 가문을 물려 줄 아들이 하나 있어야겠다 생각하여 다메섹에서 데려온 엘리에셀을 길러서 상속자를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네 후사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에 나가 별들을 보여 주면서 저 뭇별처럼 네 자손의 수가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믿음을 물려 주는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을 아브라함에게서 물려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계통에서 예수님이 오셨 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물려 주는 죄의 조상인데 반해 아브라함은 믿음을 물려 주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 받아 죄인이 되었는데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변하는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만을 물려 준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손이라 하시니까 먼저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을 통해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물려 받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육신의 소욕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인 것입니다. 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얻은 것은 우리에게 해가 됩니다.
영의 생각과 육신의 정욕과의 싸움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 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 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 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 다"(갈 4:21—29)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낳고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낳은 아들입 니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는 이삭도 있고 이스마엘도 있습니다. 이스마엘 즉 육신의 힘은 항상 우리 속에 있는 이삭을 못 살게 괴롭 힙니다. 육신의 생각이 영의 생각을 압박해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모든 것을 원하고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위해 모든 것을 준 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 안에는 온갖 풍성함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 분 중에 노인 한 분이 제게 찾아와 간증을 들려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오래 전에 구원을 받았는데 너무 생활이 어려워 심지어는 자살을 하려고 수면제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감사와 평안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생활 형편이나 환경이 나아져서 그랬나 싶었는데 그것이 아니고 여전히 가난한 상태이지만 마음이 부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실이 알아진 이후에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와 찬 송이 넘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것이 사람을 모질게 훈련시킨 다음에 그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비하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속에서 그런 것 을 참으로 알아 갔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인자와 진리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 57: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이 보내신 인자와 진리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현재는 예수님을 육신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다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인자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굴 속에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인자와 진리가 하늘로서 온다는 시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령한 비밀을 아는 마음에서 읊은 시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귀한 보물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만져 볼 수도 없고 접촉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울부짖는 사자처럼 움킬 자를 찾는 마귀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 57:4)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다"고 하였는데 사자는 마귀를 상징하는 것이고 불사르는 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벧전 1:7)라는 말씀처럼 불 같은 시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완전히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자 즉 마귀들이 우글거리는 속에서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마냥 편안하고 아무 일도 없는 낙원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 재미에 빠져 버리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는 마귀의 꾀임에 속아 교회를 등져 버리게 됩니다. 실지로 그런 분들이 꽤 있습니다.
고난 후의 영광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5)
5절에 와서는 시의 내용이 갑자기 달라지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2장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24)
헬라 사람 몇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를 찾아와서 예수님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많이 행하셨기 때문에 만나뵙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57편 4절까지 다윗이 울부짖는 사자처럼 자신의 목숨을 사냥하는 사울 왕에게 쫓겨 깊은 굴 속에 숨어 있는 죽음과 같은 상태가 나타나 있는데 돌연 5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내용으로 시가 비약이 됩니다. 다윗이 무엇을 여기서 발견했기 때문일까요?
다윗의 죽음과 같은 상태는 결국 하나님이 높이 들려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한 한 방법이었습니다. 다윗도 예수님과 같은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승리자가 되고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고난을 거치지 않는 영광은 없습니다. 고난은 영광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은 예외 없이 다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다 그 후예들이고 그 믿음을 이어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받는 만큼 더 큰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파 놓은 웅덩이에 스스로 빠지는 무리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루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시 57:6)
사탄과 그 후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실상은 사탄 자신이 죽은 것입니다. 사울 왕도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굴 어귀에서 잠이 들었는데 거기서 자기가 죽을 뻔했습니다. 물론 다윗의 충성스러운 마음 때문에 죽지는 않았지만 핍박하고 죽이려는 입장과 쫓겨다니는 사람의 입장이 그 굴 속에서는 정반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과 합해서 적당히 지내려는 마음은 신앙인으로서는 결코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요동치 않는 마음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이 말은 다윗이 모든 어려움을 벗어나서 왕이 되었을 때 한 말이 아닙니다. 여전히 주위 환경은 어렵고 쫓겨다니는 상황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는 확실한 위치에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확실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 온갖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확고한 위치에만 서 있는다면 바로 완전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 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78-79)
이 세상은 캄캄한 흑암의 세상입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누구나 반드시 한번은 캄캄한 밤이 옵니다. 우 는 항상 좋은 일만을 바라지만 좋지 않은 일이 지나가지 않으면 좋 은 일이 없습니다. 완전히 캄캄하고, 죽은 것 같은 밤이 지나면 반 드시 아침이 옵니다. 그것은 어 김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신앙생활 가운데 선한 싸움을 싸워가는 양심의 문제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양심에 괴로움이 생기면 마음이 캄캄해집니다. 그러나 그 캄캄한 것을 경험했던 사람은 반드시 의의 태양이 떠오르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영광이 깨어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한 것입니다.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여 부활의 새 아침이 옵니다. 생명의 세상, 광명의 세상…. 그 결과로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당시에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자기들의 생업마저도 훌훌 던져 버리고 처 자식마저도 뒤로 하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어떠한 심정이었을까요? 완전한 절망과 좌절에 빠져 그 마음이 흑암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캄캄한 밤이 지나가고 광명 한 새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이같은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약속대로 오시자 무섭고 캄캄하기만 했던 밤이 지나가고 제자들에게 광명한 새 아침이 밝아왔듯이 다윗도 답답하고 캄캄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9-11)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이틀이나 더 유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그리로 가면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낮 12시니 사람이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낮은 일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일을 다 끝내기 전까지는 밤이 아니고 낮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을 끝내면 밤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가 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었으나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신 말씀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낮이므로 유대인들이 나를 죽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할 일이 있는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려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자 도마는 예수님 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니 우리들도 같이 죽 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우리들도 같이 죽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 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다음에 캄캄한 죽음의 세상을 한번 만나 봤습니까? 우리가 그 캄캄한 세상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이 육신의 생각이 죽는 것을 경험하고 광명한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예수님 이전의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이러한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온 세계에 널리 퍼질 복음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9-10)
이 말씀은 예언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사 그 캄캄한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하셨는데 지금은 온 세상에 주님의 이름이 퍼졌습니다. 이천 년 동안의 역사가 굽이쳐 오는 동안에 이러한 찬송들이 울려 퍼져 갔습니다. 이 복음이 미치는 곳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이 엄청난 복음의 역사가 온 세계를 두루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으로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20)
예수님이 70명을 전도를 보냈습니다. 앞서 12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냈는데 여기서는 70명을 둘씩 전도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굉장한 보고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항복시켰다는 것입니다. 원래 사탄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 인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 전도를 하시니 사탄이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세상으로 떨어졌습니다.
본래 사탄은 루시퍼라는 천사였습니다. 사탄은 이제 공중 권세를 잃어 버리고 그 다음에는 무저갱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에는 지옥으로 갑니다. 단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이 사실은 하나의 그림자적인 역사입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사탄이 떨어지고 이제는 주님의 진리와 은혜가 공중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이름이 땅에 기록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기록되게 된 것입 다. 다윗의 고난과 영광은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이루어질 일이 그의 시 속에 예언적으로 표현된 것입 니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캄캄한 밤이 아침으로 변하면서 이 인류의 역사 속에는 복음이 세계에 두루 퍼지면서 많은 사람의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 중에 우리들도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라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1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어떠한 방해가 있을지라도 실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들은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이나 시련을 만나면 마음이 약해지고 낙담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가는 한 과정이고 우리도 그 영광에 담대하게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영광을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이 필수적인 과정에 우리가 함께 동참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이 세상은 더욱 각박하고 사탄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주변에 훨씬 더 세차게 시련이 불어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수록 우리들에게 주어진 영광도 더욱 크다는 것을 생각하며 이 큰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다윗의 믹담시라고 했습니다. 믹담이란 교훈이란 뜻입니다.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있던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 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흑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삼상 24:1-22)
이 사무엘상 24장의 내용을 기초로 해서 다윗이 시를 읊은 것이 시편 57편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주시면 주셨지 자기 손으로 기름 부은 자를 죽이지 않겠다는 것이 다윗의 신 념이었습니다. 그를 죽여 버리면 자기가 왕이 되고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을 터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 낱개 밀에 편히 거하는 영혼
이 시를 지을 당시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취하려는 사울 왕을 피해 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편안히 숨겨 주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당하거나 난관에 봉착할 때에 속마음까지 흔들리고 피할 길을 찾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유대인들에게 수욕과 핍박을 받더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고 아무런 요동이 없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암탉 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신 분이 주님이십 니다. 제가 어릴 적에 시골에서 살았는데 암탉이 병아리를 까서 기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에 알을 20여 개 품고 있다가 병아리를 깝니다. 그 병아리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참 귀엽습니다. 병아리들이 흩어져 있다가 무슨 이상한 소리 만 나면 삐약삐약하며 암탉 날개 밑으로 쑥 들어갔다가 나오곤 합니다. 암탉은 어떤 적이 나타나면 안간힘을 다해 병아리들을 지키기 위해 꼬꼬댁 꼬꼬댁 악을 씁니다. 그게 바로 모성인가 봅니다.
어머니들도 가만히 보면 참으로 희생적입니다. 요즈음이야 그런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자기는 먹지 않고 굶으면서 자식들을 먹이고, 자식들이 병들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간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성애를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 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기 새끼를 위해서는 생명까지 아끼지 않는 그 마음 자체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입니다.
신학적인 술어로는 자연 계시라고 하는데 이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그런 성품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면서도 그냥 자연 현상으로만 돌려 버리고 맙니다. 자연 속에 나타난 그 현상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속성을 표현해 놓으신 것이지요.
이 세상 만물 중에서 사람이 가장 그 속성과 사랑을 잘 표현합니다만 죄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망쳐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느날 본래부터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심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날개와 품 안에 평안히 거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것을 안 사람입니다. 아무리 위태롭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 평안히 있을 수 있었던 다윗은 신앙의 깊은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풍성히 준비하신 주님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요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영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잠시 어머니 얘기를 꺼냈습니다만 어머니는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다 준비합니다. 기저귀, 옷, 먹일 우유 등등 다 준비를 합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간에 자기 아기를 기르는 데 필요한 것을 준비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신앙생활에서 부족한 것이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데 하나님께서 내게는 그런 것을 이루어 주지 않더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찾고 요구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내 육신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 또 무엇을 위해서 이것을 찾고 있는지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많은데 그 필요한 동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가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라고 하였는데 '모든 것' 속에 내 육신도 한 몫 끼어 넣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육신의 것도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동기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조금도 양심에 거리낄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상급이요 방패'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제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하고 불평조로 물어 보았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지금의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 쳐들어 갔는데 그곳에서 엘리에셀이라는 고아를 하나 데리고 와서 키웠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요 세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많은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 많은 재산과 가문을 물려 줄 아들이 하나 있어야겠다 생각하여 다메섹에서 데려온 엘리에셀을 길러서 상속자를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네 후사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에 나가 별들을 보여 주면서 저 뭇별처럼 네 자손의 수가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믿음을 물려 주는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을 아브라함에게서 물려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계통에서 예수님이 오셨 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물려 주는 죄의 조상인데 반해 아브라함은 믿음을 물려 주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 받아 죄인이 되었는데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변하는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만을 물려 준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손이라 하시니까 먼저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을 통해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물려 받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육신의 소욕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인 것입니다. 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얻은 것은 우리에게 해가 됩니다.
영의 생각과 육신의 정욕과의 싸움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 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 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 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 다"(갈 4:21—29)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낳고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낳은 아들입 니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는 이삭도 있고 이스마엘도 있습니다. 이스마엘 즉 육신의 힘은 항상 우리 속에 있는 이삭을 못 살게 괴롭 힙니다. 육신의 생각이 영의 생각을 압박해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모든 것을 원하고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위해 모든 것을 준 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 안에는 온갖 풍성함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 분 중에 노인 한 분이 제게 찾아와 간증을 들려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오래 전에 구원을 받았는데 너무 생활이 어려워 심지어는 자살을 하려고 수면제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감사와 평안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생활 형편이나 환경이 나아져서 그랬나 싶었는데 그것이 아니고 여전히 가난한 상태이지만 마음이 부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실이 알아진 이후에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와 찬 송이 넘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것이 사람을 모질게 훈련시킨 다음에 그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비하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속에서 그런 것 을 참으로 알아 갔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인자와 진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이 보내신 인자와 진리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현재는 예수님을 육신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다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인자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굴 속에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인자와 진리가 하늘로서 온다는 시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령한 비밀을 아는 마음에서 읊은 시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귀한 보물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만져 볼 수도 없고 접촉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울부짖는 사자처럼 움킬 자를 찾는 마귀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다"고 하였는데 사자는 마귀를 상징하는 것이고 불사르는 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벧전 1:7)라는 말씀처럼 불 같은 시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완전히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자 즉 마귀들이 우글거리는 속에서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마냥 편안하고 아무 일도 없는 낙원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 재미에 빠져 버리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는 마귀의 꾀임에 속아 교회를 등져 버리게 됩니다. 실지로 그런 분들이 꽤 있습니다.
고난 후의 영광
5절에 와서는 시의 내용이 갑자기 달라지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2장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24)
헬라 사람 몇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를 찾아와서 예수님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많이 행하셨기 때문에 만나뵙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57편 4절까지 다윗이 울부짖는 사자처럼 자신의 목숨을 사냥하는 사울 왕에게 쫓겨 깊은 굴 속에 숨어 있는 죽음과 같은 상태가 나타나 있는데 돌연 5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내용으로 시가 비약이 됩니다. 다윗이 무엇을 여기서 발견했기 때문일까요?
다윗의 죽음과 같은 상태는 결국 하나님이 높이 들려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한 한 방법이었습니다. 다윗도 예수님과 같은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승리자가 되고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고난을 거치지 않는 영광은 없습니다. 고난은 영광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은 예외 없이 다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다 그 후예들이고 그 믿음을 이어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받는 만큼 더 큰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파 놓은 웅덩이에 스스로 빠지는 무리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루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시 57:6)
사탄과 그 후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실상은 사탄 자신이 죽은 것입니다. 사울 왕도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굴 어귀에서 잠이 들었는데 거기서 자기가 죽을 뻔했습니다. 물론 다윗의 충성스러운 마음 때문에 죽지는 않았지만 핍박하고 죽이려는 입장과 쫓겨다니는 사람의 입장이 그 굴 속에서는 정반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과 합해서 적당히 지내려는 마음은 신앙인으로서는 결코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요동치 않는 마음
이 말은 다윗이 모든 어려움을 벗어나서 왕이 되었을 때 한 말이 아닙니다. 여전히 주위 환경은 어렵고 쫓겨다니는 상황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는 확실한 위치에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확실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 온갖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확고한 위치에만 서 있는다면 바로 완전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 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78-79)
이 세상은 캄캄한 흑암의 세상입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누구나 반드시 한번은 캄캄한 밤이 옵니다. 우 는 항상 좋은 일만을 바라지만 좋지 않은 일이 지나가지 않으면 좋 은 일이 없습니다. 완전히 캄캄하고, 죽은 것 같은 밤이 지나면 반 드시 아침이 옵니다. 그것은 어 김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신앙생활 가운데 선한 싸움을 싸워가는 양심의 문제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양심에 괴로움이 생기면 마음이 캄캄해집니다. 그러나 그 캄캄한 것을 경험했던 사람은 반드시 의의 태양이 떠오르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영광이 깨어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한 것입니다.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여 부활의 새 아침이 옵니다. 생명의 세상, 광명의 세상…. 그 결과로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당시에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자기들의 생업마저도 훌훌 던져 버리고 처 자식마저도 뒤로 하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어떠한 심정이었을까요? 완전한 절망과 좌절에 빠져 그 마음이 흑암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캄캄한 밤이 지나가고 광명 한 새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이같은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약속대로 오시자 무섭고 캄캄하기만 했던 밤이 지나가고 제자들에게 광명한 새 아침이 밝아왔듯이 다윗도 답답하고 캄캄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9-11)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이틀이나 더 유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그리로 가면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낮 12시니 사람이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낮은 일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일을 다 끝내기 전까지는 밤이 아니고 낮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을 끝내면 밤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가 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었으나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신 말씀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낮이므로 유대인들이 나를 죽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할 일이 있는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려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자 도마는 예수님 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니 우리들도 같이 죽 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우리들도 같이 죽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 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다음에 캄캄한 죽음의 세상을 한번 만나 봤습니까? 우리가 그 캄캄한 세상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이 육신의 생각이 죽는 것을 경험하고 광명한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예수님 이전의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이러한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온 세계에 널리 퍼질 복음
이 말씀은 예언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사 그 캄캄한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하셨는데 지금은 온 세상에 주님의 이름이 퍼졌습니다. 이천 년 동안의 역사가 굽이쳐 오는 동안에 이러한 찬송들이 울려 퍼져 갔습니다. 이 복음이 미치는 곳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이 엄청난 복음의 역사가 온 세계를 두루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으로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20)
예수님이 70명을 전도를 보냈습니다. 앞서 12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냈는데 여기서는 70명을 둘씩 전도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굉장한 보고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항복시켰다는 것입니다. 원래 사탄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 인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 전도를 하시니 사탄이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세상으로 떨어졌습니다.
본래 사탄은 루시퍼라는 천사였습니다. 사탄은 이제 공중 권세를 잃어 버리고 그 다음에는 무저갱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에는 지옥으로 갑니다. 단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이 사실은 하나의 그림자적인 역사입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사탄이 떨어지고 이제는 주님의 진리와 은혜가 공중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이름이 땅에 기록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기록되게 된 것입 다. 다윗의 고난과 영광은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이루어질 일이 그의 시 속에 예언적으로 표현된 것입 니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캄캄한 밤이 아침으로 변하면서 이 인류의 역사 속에는 복음이 세계에 두루 퍼지면서 많은 사람의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 중에 우리들도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어떠한 방해가 있을지라도 실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들은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이나 시련을 만나면 마음이 약해지고 낙담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가는 한 과정이고 우리도 그 영광에 담대하게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영광을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이 필수적인 과정에 우리가 함께 동참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이 세상은 더욱 각박하고 사탄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주변에 훨씬 더 세차게 시련이 불어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수록 우리들에게 주어진 영광도 더욱 크다는 것을 생각하며 이 큰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