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시 60:1-12)
시편 60편은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영장으로 수산에듯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인을 죽인 때에"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편 60편이 씌어진 배경
사무엘하 8장을 읽어보면 이 시가 씌어진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파하였다 함을 듣고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로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파함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텍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흡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 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상하 8:9-14)
다윗 왕은 그때에 북쪽 시리아 군대와 그 지역에 있는 여러 나라를 쳐서 정복하여 아주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 땅 사해 동쪽에 있는 나라로 현재는 요르단이라는 나라의 남쪽입니다. 에돔은 본래 야곱의 형 에서를 말합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에돔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나중에 모압과 암몬, 즉 롯의 딸이 낳은 두 아들의 후손들과 합하여 지금은 요르단이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에 가서 시리아(아람) 군대와 싸우고 있었는데 그 틈을 타서 에돔이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의 후 방(남쪽)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다윗이 북쪽 시리아(아람) 군대를 쳐서 대승을 하자 승리에 도 취되어 마음이 들뜨고 높아져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여러 대장들 중에서 특별히 요압을 보내어 에돔 족속을 무찌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60편의 부제를 보면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인을 죽인 때에라고 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8장에는 일만 팔천을 죽였다고 하여 두 기록 사이에 육천 명의 오차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은 요압이 일차로 일만 이천 명을 죽이고 나중에 육천 명을 죽였는데, 다윗이 이 시편 60편을 지은 것은 일만 이천 명을 죽였을 당시였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8장은 이 모든 사건이 종결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일만 팔천 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의 기록이 어떤 부분은 서로 차이가 있거나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같은 복음서라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단편적으로 볼 때 차이가 있는 것을 잘 종합해 보면 완전한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갑자기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타나서 나를 따라오라 하시니까 그들이 따라갔다고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1장 35절 이하를 읽어보아야 그 자초지종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안드레는 다시 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서 소개를 합니다.
그 다음에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듣고 믿게 되는데 그 자체가 구원받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면 맞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나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모르면 성경이 모순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어떤 잘 못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 배경을 자세히 모르면 시편 60편과 사무엘하 8장의 기록에 6천 명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성경이 잘못 기록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육신을 의지하는 자를 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시 60:1-2)
이 말씀은 조금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땅이 갈라져서 고라 자손을 삼킨 사건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실지로 땅이 갈라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압이 처음에 군대를 거느리고 에돔을 치러 돌아왔을 때는, 북쪽에서 아람 군대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힘으로 그런 줄 알고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에돔 따위는 문제가 없다고 자만하다가 그만 패배하여 군대들이 뿔뿔이 도망을 치는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이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 흩으시고 분노하사 땅을 진동시키고 갈라지게 하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군대들이 패하여 지리멸렬하게 흩어져 도망하는 것을 마치 땅의 기초가 무너져 갈라지는 것처럼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틈을 기워 달라는 말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군대를 모아 전쟁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이 북쪽에서 승리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 아람 군대를 쳐부술 수 있도록 도와 주신 것이지 자신들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 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요압처럼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한번 꺾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에돔에게 완전히 짓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을 수 없는 육신의 의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입니다. 가령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여 어떤 좋은 성과가 나타났을 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나 열심으로 그런 일을 해 냈다고 자만하기 쉽습니다. 만일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하나님 앞에 절대로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이 가지지 못한 어떤 능력이나 재주로 어떤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이지 하나님의 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은 일은 하나님께서는 계산에 넣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을 못 받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말했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까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바둥거리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나 그러한 자신에게 죄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어떤 재주나 재능이 있으면 그것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자신의 힘만으로 일을 잘 해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더라도 육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완전히 죽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육신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옛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대해 완전히 죽은 자로 여길 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실패를 맛보게 하십니다. 요압이 에돔 군대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시기 위한 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채찍一진노의 포도주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시 60:3)
포도주는 신약적으로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또 한편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서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섞이지 않는 포도주로 마시운다는 말씀이 몇 차례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계 16:19)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았다는 것은 피 흘리고 심판 받는 광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람을 완전히 쳐 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약한 군대인 에돔에게 완전히 패했을 때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포도주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비틀거리게 했고 힘을 못쓰게 했고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좋은 일이 있을 때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이 무슨 공을 세웠다든지 좀 잘한 일이 있어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때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서 마치 자신이 무엇이 된 것처럼 착각하면 그 다음에 채찍이 따릅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한 다윗의 겸허한 자세
다윗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용감하게 나아가 골리앗 대장을 쳐 죽였고 나중에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지만 다윗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름 부어 능력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을것입니다.
다윗도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은 것을 보면 보통 사람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책망했을 때 겸손하게 그것을 시인하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왕들 은 선지자가 와서 자신들의 죄를 책망하면 악한 감정을 품고 그를 옥에 가두거나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와서 자기의 죄를 책망할 때 그 자리에서 거꾸러져 통곡을 하면서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다윗의 그런 점이 보통 사람보다 위대한 점입니다. 전쟁에서 큰 승리를 한 것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매를 맞을 때에 그것이 자기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겸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요압이 패배했지만 결국 책임자는 다윗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가장 어려운 문제가 그런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꾸만 옹호하려고 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해 가는 가운데 어떠한 일을 조금만 잘해도 자신이 잘한 것처럼 나타내려고 하고 자신이 잘못 한 것은 남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자신을 변명하고 옹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면에 있어서 다윗을 본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 잘못해서 매를 맞을지라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깃발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시 60:4)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낮추고 꺾으시지만 그 일을 통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는 다시 그에게 일을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요압이 주를 경외하지 않고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만만하게 싸우다가 패배했지만 그 다음에 마음이 낮아져서 잘못을 깨닫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와 승리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길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어 달게 하신다고 하였는데 출애굽기 17장에 이 '기'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 어 있습니다.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홀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 17:8-16)
이스라엘은 아말렉 군대를 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아말렉 군대를 쳐서 완전히 멸망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고 손이 내려가면 졌습니다. 나중에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을 때에는 완전히 이겼습니다. 이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모세는 전쟁을 치른 후에 단을 쌓고 그 단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닛시'란 말은 '하나님은 나의 기'라는 뜻입니다.
그때 거기에다가 기를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그 단 이름이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신 승리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승리의 깃발이 그 단에 씌어졌다는 말은 앞으로 그 기가 있는 한은 아말렉에게 완전히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그 후에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왕으로부터 모든 어린아이와 양과 소까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몽땅 진멸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죽이긴 했지만 살진 양과 소를 살리고 아각 왕도 죽이지 않고 데려왔습니다. 끝까지 아말렉을 진멸해야 한다는 여호와의 기가 있는데 그 승리의 표시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배반했기 때문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윗이 아말렉을 완전히 망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기를 들고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가 세워진 성읍-진리를 전파하는 교회
진리를 위해서 기를 달게 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면 거기에는 언제든지 승리가 있습니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 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사 62:10-12)
여기에 보면 성 위에 높이 기를 세워 놓고 그 기를 보고 멀리서 사람들이 찾아 오도록 길을 예비하라 하였습니다. 큰 길을 닦고 돌을 제하여 길을 예비하라 하였습니다. 이 승리의 깃발이 서 있는 성문을 향해서 사람들이 모여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는 승리를 상징하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를 쳐부수고 승리한 것이 바로 기입니다. 그 기는 진리의 내용이고 승리의 증거물입니다. 이 진리를 증거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멀리 있는 백성들까지도 모여듭니다. 그래서 그 기가 꽂혀 있는 성읍은 구원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구속함을 받은 백성이요 찾은 바 된 백성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바로 기가 세워진 성읍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듣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기에서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하셨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자신의 잘못을 충분히 알았을 때 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겸손하고 낮아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기를 달게 하셨습니다.
점점 형식화되어 버린 십자가의 의미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기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십자가의 의미가 점점 형식화되어 버렸습니다. 십자군 전쟁 때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들고 전쟁을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예배당들의 모습을 보면 종각이 삐쭉 올라가고 그 위에 십자가를 달아 놓았는데 사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양신 숭배와 연결됩니다. 십자군 전쟁 때는 십자가가 달린 창을 가지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찔러 죽였는데 사실 그 배후에는 사탄의 꾀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철저하게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는 생명의 역사 속에 있는 것이지 이 사실을 겉으로 유형화하여 종교적인 상징물로 만들어놓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상징물 자체를 무슨 진리나 힘이 있는 것처럼 신성시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십자가의 도 一 진리의 기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사도 바울도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종각 위에 십자가를 매달아 놓고 자랑하라거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 속에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마음 속에 십자가가 있으니까 이 세상에 속한 어떤 좋은 것들도 그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음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즐거운 것을 향해서 가려고 하지만 십자가 밑에서 다 죽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기입니다. 그 기가 있기 때문에 사탄이 바울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주님의 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언제나 승리의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시 60:5-6)
이제 다윗은 믿음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큰 승리를 거두어서 높아졌던 그 마음이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통해서 낮아졌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해 주시는 능력이 임했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낮아졌을 때에 이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들로 승리하게 하실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이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시면 "내가 뛰놀리라"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 춤을 추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신다는 말은 이것이 과장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춤을 추면서 이제 다윗을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승리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혹시 승리에 도취되어 자기가 무엇을 잘한 것처럼 교만할 때는 성령이 심히 근심을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사 낮추시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지로 낮아지면 하나님이 춤을 추면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때 인색한 마음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거나 받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덜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4-6)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굉장히 기뻐하시면서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편의 내용입니다.
승리의 노래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나중에 이루어질 역사에 대한 예언입니다. 세겜은 나중에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 시대에 가서 북쪽 열 지파의 중심지가 됩니다.그때에 여로보암 왕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기게 하여 북쪽 열 지파를 예루살렘에 못 가게 만드는 일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그대로 예루살렘을 지키며 다윗의 계통을 이어나갑니다.
한편 숙곳은 요단 강 동편에 있는 지역인데 그곳은 본래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측량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두 지파 반이 거기 남아 그곳을 확보한다는 뜻입니다.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시 60:7)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땅으로 갓 지파가 차지했던 곳입니다. 므낫세 반 지파도 요단강 동편 윗쪽 땅을 차지했습니다. 에브라함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서도 세력이 큰 지파였는데 요단강 서편 예루살렘 바로 위쪽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머리의 보호자'라는 말은 '투구'라는 뜻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는 분열왕국 시대에 이스라엘 10지파가 르호보암을 대적하여 북쪽에 나라를 세웠을 때도 베냐민 지파와 함께 끝까지 남아 다윗의 위를 이어갔습니다.
"흘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이 유다를 통해서 예수님이 오시게 됩니다. 홀은 왕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왕의 지팡이입니다.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시 60:8)
하나님께서는 모압이 내 목욕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압을 쳐서 정복을 한다는 뜻입니다. 모압을 완전히 정복하여 목욕탕에서 편안하게 몸을 담그고 쉬듯이 한시름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에돔을 완전히 정복하여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으므로 신을 던져버리고 주저앉아 쉬듯이 된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하였는데 이스라엘과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원수 블레셋도 모압과 암몬처럼 쳐 부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의 개가를 부를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놀라 외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이 낮아지고 낮아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겨다 준 승리의 개가입니다. 하나님이 낮아진 사람에게는 춤을 추면서 이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스스로 높여 하나님을 뒷편으로 밀어내고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런 가치가 없고 죽은 것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을 믿고 학식이 많은 사람은 학식을 믿고 재주가 있는 사람은 재주를 믿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십니다. 한때 교만하여져서 잘못을 저지르고 징계를 받고 채찍을 맞았지만 그들이 낮아지고 낮아졌을 때에는 춤을 추며 기뻐하시면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알에서 갓 부화한 병아리를 보면 금방 낳자마자 무엇을 쪼아 먹습니다. 다른 짐승들은 갓난아기 때 엄마 젖을 빨아먹지만 빙 아리는 낳자마자 자기 입으로 먹이를 쪼아 먹습니다. 엄마 젖을 빨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암탉이 날개 아래 품고 먹을 것을 넣어주면 꼭꼭꼭 하고 먹지만 병아리는 독립적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의 갓난아기가 병아리처럼 낳자마자 빨딱 일어나서 음식을 집어먹고 옷도 스스로 입고 하면 어머니가 어떻겠어요? 어머니는 아이를 키울 때에 똥 오줌을 싸도 하나도 귀찮지 않습니다. 아기를 위해서 하는 어떤 고생도 더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그게 바로 모성애라는 것이지요. 구원 받은 우리들도 하나님께는 어린 자식과 같습니다. 이 어린 자식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 하시 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무엇을 잘 하겠다고 하면 그것을 과연 기쁘게 여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주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고 자 하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각양 좋은 것들을 우리들에 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들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전혀 원치 않으십니다. 낮아지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결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올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시 60:9-12)
하나님께서는 자기 힘으로 전쟁하는 사람과는 동행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버리신 것처럼 같이 가지 않으십니다. 자기 힘만 믿고 싸우려는 교만한 때에는 하나님이 같이 하시지 않으니까 아무리 힘이 있더라도 못 이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에 있을 때에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은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완전히 승리하시고 기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낮아지기만 하면 주님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이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시편 60편은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영장으로 수산에듯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인을 죽인 때에"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편 60편이 씌어진 배경
사무엘하 8장을 읽어보면 이 시가 씌어진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파하였다 함을 듣고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로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파함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텍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흡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 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상하 8:9-14)
다윗 왕은 그때에 북쪽 시리아 군대와 그 지역에 있는 여러 나라를 쳐서 정복하여 아주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 땅 사해 동쪽에 있는 나라로 현재는 요르단이라는 나라의 남쪽입니다. 에돔은 본래 야곱의 형 에서를 말합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에돔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나중에 모압과 암몬, 즉 롯의 딸이 낳은 두 아들의 후손들과 합하여 지금은 요르단이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에 가서 시리아(아람) 군대와 싸우고 있었는데 그 틈을 타서 에돔이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의 후 방(남쪽)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다윗이 북쪽 시리아(아람) 군대를 쳐서 대승을 하자 승리에 도 취되어 마음이 들뜨고 높아져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여러 대장들 중에서 특별히 요압을 보내어 에돔 족속을 무찌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60편의 부제를 보면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인을 죽인 때에라고 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8장에는 일만 팔천을 죽였다고 하여 두 기록 사이에 육천 명의 오차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은 요압이 일차로 일만 이천 명을 죽이고 나중에 육천 명을 죽였는데, 다윗이 이 시편 60편을 지은 것은 일만 이천 명을 죽였을 당시였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8장은 이 모든 사건이 종결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일만 팔천 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의 기록이 어떤 부분은 서로 차이가 있거나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같은 복음서라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단편적으로 볼 때 차이가 있는 것을 잘 종합해 보면 완전한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갑자기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타나서 나를 따라오라 하시니까 그들이 따라갔다고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1장 35절 이하를 읽어보아야 그 자초지종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안드레는 다시 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서 소개를 합니다.
그 다음에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듣고 믿게 되는데 그 자체가 구원받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면 맞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나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모르면 성경이 모순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어떤 잘 못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 배경을 자세히 모르면 시편 60편과 사무엘하 8장의 기록에 6천 명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성경이 잘못 기록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육신을 의지하는 자를 꺾으시는 하나님
이 말씀은 조금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땅이 갈라져서 고라 자손을 삼킨 사건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실지로 땅이 갈라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압이 처음에 군대를 거느리고 에돔을 치러 돌아왔을 때는, 북쪽에서 아람 군대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힘으로 그런 줄 알고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에돔 따위는 문제가 없다고 자만하다가 그만 패배하여 군대들이 뿔뿔이 도망을 치는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이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 흩으시고 분노하사 땅을 진동시키고 갈라지게 하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군대들이 패하여 지리멸렬하게 흩어져 도망하는 것을 마치 땅의 기초가 무너져 갈라지는 것처럼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틈을 기워 달라는 말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군대를 모아 전쟁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이 북쪽에서 승리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 아람 군대를 쳐부술 수 있도록 도와 주신 것이지 자신들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 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요압처럼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한번 꺾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에돔에게 완전히 짓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을 수 없는 육신의 의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입니다. 가령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여 어떤 좋은 성과가 나타났을 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나 열심으로 그런 일을 해 냈다고 자만하기 쉽습니다. 만일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하나님 앞에 절대로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이 가지지 못한 어떤 능력이나 재주로 어떤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이지 하나님의 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은 일은 하나님께서는 계산에 넣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을 못 받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말했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까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바둥거리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나 그러한 자신에게 죄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어떤 재주나 재능이 있으면 그것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자신의 힘만으로 일을 잘 해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더라도 육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완전히 죽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육신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옛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대해 완전히 죽은 자로 여길 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실패를 맛보게 하십니다. 요압이 에돔 군대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시기 위한 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채찍一진노의 포도주
포도주는 신약적으로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또 한편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서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섞이지 않는 포도주로 마시운다는 말씀이 몇 차례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계 16:19)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았다는 것은 피 흘리고 심판 받는 광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람을 완전히 쳐 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약한 군대인 에돔에게 완전히 패했을 때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포도주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비틀거리게 했고 힘을 못쓰게 했고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좋은 일이 있을 때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이 무슨 공을 세웠다든지 좀 잘한 일이 있어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때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서 마치 자신이 무엇이 된 것처럼 착각하면 그 다음에 채찍이 따릅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한 다윗의 겸허한 자세
다윗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용감하게 나아가 골리앗 대장을 쳐 죽였고 나중에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지만 다윗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름 부어 능력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을것입니다.
다윗도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은 것을 보면 보통 사람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책망했을 때 겸손하게 그것을 시인하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왕들 은 선지자가 와서 자신들의 죄를 책망하면 악한 감정을 품고 그를 옥에 가두거나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와서 자기의 죄를 책망할 때 그 자리에서 거꾸러져 통곡을 하면서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다윗의 그런 점이 보통 사람보다 위대한 점입니다. 전쟁에서 큰 승리를 한 것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매를 맞을 때에 그것이 자기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겸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요압이 패배했지만 결국 책임자는 다윗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가장 어려운 문제가 그런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꾸만 옹호하려고 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해 가는 가운데 어떠한 일을 조금만 잘해도 자신이 잘한 것처럼 나타내려고 하고 자신이 잘못 한 것은 남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자신을 변명하고 옹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면에 있어서 다윗을 본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 잘못해서 매를 맞을지라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깃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낮추고 꺾으시지만 그 일을 통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는 다시 그에게 일을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요압이 주를 경외하지 않고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만만하게 싸우다가 패배했지만 그 다음에 마음이 낮아져서 잘못을 깨닫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와 승리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길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어 달게 하신다고 하였는데 출애굽기 17장에 이 '기'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 어 있습니다.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홀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 17:8-16)
이스라엘은 아말렉 군대를 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아말렉 군대를 쳐서 완전히 멸망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고 손이 내려가면 졌습니다. 나중에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을 때에는 완전히 이겼습니다. 이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모세는 전쟁을 치른 후에 단을 쌓고 그 단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닛시'란 말은 '하나님은 나의 기'라는 뜻입니다.
그때 거기에다가 기를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그 단 이름이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신 승리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승리의 깃발이 그 단에 씌어졌다는 말은 앞으로 그 기가 있는 한은 아말렉에게 완전히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그 후에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왕으로부터 모든 어린아이와 양과 소까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몽땅 진멸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죽이긴 했지만 살진 양과 소를 살리고 아각 왕도 죽이지 않고 데려왔습니다. 끝까지 아말렉을 진멸해야 한다는 여호와의 기가 있는데 그 승리의 표시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배반했기 때문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윗이 아말렉을 완전히 망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기를 들고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가 세워진 성읍-진리를 전파하는 교회
진리를 위해서 기를 달게 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면 거기에는 언제든지 승리가 있습니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 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사 62:10-12)
여기에 보면 성 위에 높이 기를 세워 놓고 그 기를 보고 멀리서 사람들이 찾아 오도록 길을 예비하라 하였습니다. 큰 길을 닦고 돌을 제하여 길을 예비하라 하였습니다. 이 승리의 깃발이 서 있는 성문을 향해서 사람들이 모여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는 승리를 상징하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를 쳐부수고 승리한 것이 바로 기입니다. 그 기는 진리의 내용이고 승리의 증거물입니다. 이 진리를 증거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멀리 있는 백성들까지도 모여듭니다. 그래서 그 기가 꽂혀 있는 성읍은 구원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구속함을 받은 백성이요 찾은 바 된 백성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바로 기가 세워진 성읍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듣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기에서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하셨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자신의 잘못을 충분히 알았을 때 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겸손하고 낮아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기를 달게 하셨습니다.
점점 형식화되어 버린 십자가의 의미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기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십자가의 의미가 점점 형식화되어 버렸습니다. 십자군 전쟁 때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들고 전쟁을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예배당들의 모습을 보면 종각이 삐쭉 올라가고 그 위에 십자가를 달아 놓았는데 사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양신 숭배와 연결됩니다. 십자군 전쟁 때는 십자가가 달린 창을 가지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찔러 죽였는데 사실 그 배후에는 사탄의 꾀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철저하게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는 생명의 역사 속에 있는 것이지 이 사실을 겉으로 유형화하여 종교적인 상징물로 만들어놓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상징물 자체를 무슨 진리나 힘이 있는 것처럼 신성시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십자가의 도 一 진리의 기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사도 바울도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종각 위에 십자가를 매달아 놓고 자랑하라거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 속에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마음 속에 십자가가 있으니까 이 세상에 속한 어떤 좋은 것들도 그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음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즐거운 것을 향해서 가려고 하지만 십자가 밑에서 다 죽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기입니다. 그 기가 있기 때문에 사탄이 바울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주님의 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언제나 승리의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제 다윗은 믿음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큰 승리를 거두어서 높아졌던 그 마음이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통해서 낮아졌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해 주시는 능력이 임했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낮아졌을 때에 이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들로 승리하게 하실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이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시면 "내가 뛰놀리라"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 춤을 추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신다는 말은 이것이 과장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춤을 추면서 이제 다윗을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승리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혹시 승리에 도취되어 자기가 무엇을 잘한 것처럼 교만할 때는 성령이 심히 근심을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사 낮추시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지로 낮아지면 하나님이 춤을 추면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때 인색한 마음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거나 받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덜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4-6)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굉장히 기뻐하시면서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편의 내용입니다.
승리의 노래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나중에 이루어질 역사에 대한 예언입니다. 세겜은 나중에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 시대에 가서 북쪽 열 지파의 중심지가 됩니다.그때에 여로보암 왕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기게 하여 북쪽 열 지파를 예루살렘에 못 가게 만드는 일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그대로 예루살렘을 지키며 다윗의 계통을 이어나갑니다.
한편 숙곳은 요단 강 동편에 있는 지역인데 그곳은 본래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측량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두 지파 반이 거기 남아 그곳을 확보한다는 뜻입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땅으로 갓 지파가 차지했던 곳입니다. 므낫세 반 지파도 요단강 동편 윗쪽 땅을 차지했습니다. 에브라함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서도 세력이 큰 지파였는데 요단강 서편 예루살렘 바로 위쪽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머리의 보호자'라는 말은 '투구'라는 뜻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는 분열왕국 시대에 이스라엘 10지파가 르호보암을 대적하여 북쪽에 나라를 세웠을 때도 베냐민 지파와 함께 끝까지 남아 다윗의 위를 이어갔습니다.
"흘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이 유다를 통해서 예수님이 오시게 됩니다. 홀은 왕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왕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이 내 목욕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압을 쳐서 정복을 한다는 뜻입니다. 모압을 완전히 정복하여 목욕탕에서 편안하게 몸을 담그고 쉬듯이 한시름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에돔을 완전히 정복하여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으므로 신을 던져버리고 주저앉아 쉬듯이 된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하였는데 이스라엘과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원수 블레셋도 모압과 암몬처럼 쳐 부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의 개가를 부를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놀라 외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이 낮아지고 낮아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겨다 준 승리의 개가입니다. 하나님이 낮아진 사람에게는 춤을 추면서 이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스스로 높여 하나님을 뒷편으로 밀어내고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런 가치가 없고 죽은 것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을 믿고 학식이 많은 사람은 학식을 믿고 재주가 있는 사람은 재주를 믿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십니다. 한때 교만하여져서 잘못을 저지르고 징계를 받고 채찍을 맞았지만 그들이 낮아지고 낮아졌을 때에는 춤을 추며 기뻐하시면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알에서 갓 부화한 병아리를 보면 금방 낳자마자 무엇을 쪼아 먹습니다. 다른 짐승들은 갓난아기 때 엄마 젖을 빨아먹지만 빙 아리는 낳자마자 자기 입으로 먹이를 쪼아 먹습니다. 엄마 젖을 빨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암탉이 날개 아래 품고 먹을 것을 넣어주면 꼭꼭꼭 하고 먹지만 병아리는 독립적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의 갓난아기가 병아리처럼 낳자마자 빨딱 일어나서 음식을 집어먹고 옷도 스스로 입고 하면 어머니가 어떻겠어요? 어머니는 아이를 키울 때에 똥 오줌을 싸도 하나도 귀찮지 않습니다. 아기를 위해서 하는 어떤 고생도 더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그게 바로 모성애라는 것이지요. 구원 받은 우리들도 하나님께는 어린 자식과 같습니다. 이 어린 자식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 하시 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무엇을 잘 하겠다고 하면 그것을 과연 기쁘게 여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주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고 자 하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각양 좋은 것들을 우리들에 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들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전혀 원치 않으십니다. 낮아지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결
하나님께서는 자기 힘으로 전쟁하는 사람과는 동행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버리신 것처럼 같이 가지 않으십니다. 자기 힘만 믿고 싸우려는 교만한 때에는 하나님이 같이 하시지 않으니까 아무리 힘이 있더라도 못 이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에 있을 때에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은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완전히 승리하시고 기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낮아지기만 하면 주님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이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