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1편]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시 61:1-8)


 이 시편 61편은 사무엘하 17장에 기록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에 미쳐서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 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며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삼하 17:22-23)

 압살롬이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서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모든 신하와 함께 도망쳐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요단강까지는 50리쯤 됩니다. 요단강은 평지에 있고 예루살렘은 800미터 되는 높은 산 위에 있습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는 이 시편은 그 때 읊어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을 떠나가는 다윗의 심정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1-2)


 다윗은 멀리 땅 끝에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땅은 이스라엘 선민의 땅 가나안 복지를 말하는데 땅 끝에 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다윗 당시는 아직 솔로몬 성전이 지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이미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요 이스라엘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을 압살롬이 점령하여 온갖 악행과 불의한 일을 저지르고 아버지 다윗의 생명까지 노리려 하자 다윗은 자기 신하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서 산을 내려가 요단강을 건너 이방의 세계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는다고 말했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7-12)


 이 시편 139편도 다윗의 시이지만 시편 61편과는 내용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것을 읊고 있습니다. 아무리 멀리 벗어나려고 하더라도 무소부재하신 분을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요단강을 건너 갔을지라도 또 그보다 더 멀리 갔을지라도 그 어느 곳에나 하나님이 계실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국도 굉장히 이스라엘에서는 먼 곳이지만 이곳에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성경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만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나님의 일을 놓고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국한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공간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바다 속 깊이 들어가도 거기에 계시고 하늘 높이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영적으로 보면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선민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전체 선민을 통괄하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인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보면 온 세상 어디에나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을 부르는데 실상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하면 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신약시대에는 교회 안에 계십니다.

 예루살렘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그런 영적인 의미에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계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만 계신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곳-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전이오리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7-29)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천지보다도 크신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이 지은 전에 계시겠습니까만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이 성전을 향해 비는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곳이 성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은 들에도 있고 산에도 있고 바다에도 있고 공중에도 있고 어디나 계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두신 성전, 즉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 모든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으니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영적으로 생각하면 성령이 계시는 교회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성령이 계시는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이요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나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이스라엘 지경 밖으로 나갔을 때 그곳을 땅 끝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엄청나게 먼 곳으로 떠난 것도 아니고 불과 예루살렘에서 50리 정도 밖에 안되는 곳으로 나갔지만 그곳은 땅 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경영이 있는 가나안 땅을 벗어나 버렸기 때문입니디-.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땅 끝에 가서 살 수 있습니다. 교회에 몸은 있지만 마음이 참으로 교회 안에 있지 않고 따로 있는 것은 땅 끝에 가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안식의 처소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데 그곳을 떠나서 땅 끝에 가게 된 다윗은 고통스럽고 슬픈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울부짖은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이시라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1-2)


 여기서 높은 바위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하는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 가 보면 굉장히 큰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회교도들이 회교 사원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 사원 하층에 내려가면 바 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을 사람들이 구경하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실상은 그곳이 옛날 지성소 자리인데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바위라고 하는 것은 감히 사람이 침범할 수 없고, 또 요동하지 않는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의지 하는 높은 바위가 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란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상하 22:1-4)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울과 그의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라는 내용의이 시를 읊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도 반석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그 반석은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바위'는 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을 뜻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구원을 받았을 때에 바위이신 예수님 위에 터를 닦았습니다.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진 교회


 마태복음 16장에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상은 베드로가 반석이 아니고 예수님이 반석이신데 이것을 천주교에서는 오해하여 베드로가 반석이요 천국 열쇠를 받았 다고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오해하면 이상한 방향으로 벗어나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반석이시란 말은 그 반석 위에 올라가 있으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어도 요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여기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분명히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반석이신 그 예수님 위에 우리가 확실히 서 있으면 어떤 시험이나 환란이 와도 요동하지 않고 안전한데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조그마한 시련과 고난이 불어와도 넘어지고 흔들립니다. 그것은 주님이 신실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믿음의 신실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나도 물 위로 걷게 해달라며 물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몇 발자국은 걸었지만 바람이 불면서 높은 파도가 닥쳤을 때에 마음에 겁이 나고 두려움이 생기자마자 그만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거기가 바다 위라고 하더라도 물 위에 서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냥 나아가면 되는 것인데 그만 파도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파도를 보고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가리켜 세상 파도 즉 세파라고 합니다. 이 세파에 우리들이 시달릴 때에도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는 확실한 믿음만 있으면 이 세파 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면 세파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다윗은 이런 시를 읊어서 우리에게 좋은 교 훈을 남겨주었습니다.



피난처시요 망대이신 주님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시 613)


 남한산성에 가보면 성을 쌓고 그 위에다가 집을 지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망대입니다. 전쟁할 때에 올라오는 적군을 살피는 높은 건축물이 망대인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원수와 사탄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어진 지혜로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고 살필 수 있고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육신적인 힘이나 지혜로는 절대로 세상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수 없습니다. 세상과 사탄을 이기신 승자이신 주님을 확실히 믿고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일이 생기면 당황해서 자신의 지혜와 꾀로 그것을 모면해 보려고 애를 쓰다 보니 원수에게 지게 되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성을 쌓아 놓고 서로 뺏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싸움을 벌이는 서양 활극을 보게 됩니다. 성을 빼앗으려는 편에서는 마구 화살을 쏘아올리며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성 위에서는 돌을 던지기도 하고 활을 쏘기도 하고 칼로 내리치기도 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장면을 봅니다. 옛날에 그렇게 전쟁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다윗은 주님이 성 안에 있으면 어떤 적군도 점령할 수 없다는 이 시를 읊었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비밀입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다음에는 비밀한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알아가면서 우리 마음이 정말 주님 안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영광스러운 교회의 그림자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시 61:4)


 이 말씀과 관련하여 시편 84편을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12)


 시편 84편은 시편 가운데서 가장 교회를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했는데 주의 장막이 신약시대에는 교회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교회가 완전히 완성되면 영원한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과 영광이 충만한 교회


 하나님의 장막은 구약시대에는 가나안 땅 안의 예루살렘 성전이었고 신약시대는 교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져 있는 법궤를 중심으로 성막과 성전이 지어졌고,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역사가 꾸며져 갔습니다. 이 시편 저자인 다윗은 이 하나님의 장막이 너무도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이 세상에서 비할 것이 없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 구약시대에 나타난 모든 역사와 성전은 신약시대에 와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비밀인 영광스런 교회의 그림자였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완성되면 영원한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다윗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만 성막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 있어서 별로 보기가 좋지 않았지만 그 내부는 전부 금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성막을 짓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성막은 예수님의 그림자 입니다.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외적으로 예수님은 볼품이 없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이 거룩한 신성이 있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금은 신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가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몸이고, 이차적으로는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겉으로 보면 육신을 가진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부딛기면서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생기기도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무식한 사람들, 때로는 지난날 개망나니 같은 생활을 했던 사람들도 구원받아 한데 모여 생활하다 보니 육신이 아직 주님 안에서 처리되지 못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과 어려움이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잘 사는 사람들, 학식이 많은 사람들, 흠없는 사람들만 따로 모아 그럴듯하고 재미 있는 사교 의 장소로 꾸며놓은 인위적인 곳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러한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통해서 각자 주님의 말씀을 새록새록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구원받기 전에 일반교회 목사로 목회생활을 할 때에는 상당히 재미있고 인정어린 방법으로 교회를 인도하여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만 구원받은 이후에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 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인도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은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에는 재미난 구석이 없고 멋이 없어 보일지는 몰라 도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거룩하고 아름답게 보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시 속에서 여호와의 장막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과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자칫 우리의 육신적인 안목만을 가지고 잘못 평가하기 쉽습니다. 교회 안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심령이 살아서 움직이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비록 겉으로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구원받은 생명들이 살아 움직이며 교제를 나누며 서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속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영적인 눈이 뜨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 안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리는 마음의 안식과 평안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우리의 신앙생활이 참으로 주의 궁전, 즉 교회 안에서 사는 생활이면 비록 하루를 산다고 할지라도 교회 밖의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는데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진정 주님의 아름다음을 사모하면서 하루 하루가 영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루라도 헛되이 보내버린 날이 있다면 그만큼 큰 것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너무 고달프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이 낙담하고 피곤하여 약화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교회 안에서 육신적으로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 계속되는 것은 우리 육신을 부수고 깨지게 하기 위한 일이요 참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금같이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케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담대하게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움과 신성이 충만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확실히 발견하고 그 안에서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감사와 찬송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시달리며 피곤을 느끼는 것은 육신에 붙어있는 소욕을 때려 부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참고 견디면서 나아가는 사람은 굉장히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기업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시 61:5)


 여기서 기업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왕권을 주셔서 이스라엘 민족 위에 그 왕권을 행사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지위를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서원 을 들으시고 이러한 지위를 주셨습니다. 다윗의 서원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마음에 결정한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에게 기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나를 하나님께 드리니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해 주십시오 하는 이해타산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서원이 아닙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기로 결정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 말한 대로 주님의 큰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그 엄청난 사랑이 자신을 권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 바로 진정한 서원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돌아올지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육신적으로 욕이 돌아오고 궁핍이 돌아오고 세상에서 버림 받는 일이 돌아올지라도 주님을 섬기면서 살겠다고 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 서원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기업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기업을 주신다는 것은 일을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 기업을 주셨다는 것이 왕권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 이해타산만을 밝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어떻게 나에게 해 주실 것을 바라는 이해타산은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신앙생활이 전혀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나실인의 서원이 있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서원한 사람들입니다. 신약시대 같으면 바울이나 바울과 함께 일하던 디모데 같은 사람들이 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할 일이 주어지고 그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교회의 일원으로서 서원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는 이 길에 나도 함께 동참하겠다고 하는 단호한 결정이 마음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서원입니다. 서원을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계승된 다윗의 왕권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시 61:6)


 이 말씀에는 예언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윗 왕은 장수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여러 대에 미치는 장수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다윗의 왕권이 예수님에게까지 계승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예수님은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 예언의 말씀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나시기 천년 전에 먼저 있었던 다윗 왕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서원을 해서 받은 그 왕권이 예수님께 이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왕 노릇하는 그런 왕권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왕권에 동참하여 함께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그 왕권이 우리에게 확립이 된 것입니다.



충만하신 은혜와 진리로 교회 가운데서 일하시는 주님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시 61:7)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그림자인 다윗 자신과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충만한 은혜와 진리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넉넉히 완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집회를 가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설교를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충만한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그런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은혜와 진리가 나타나기 때문에 항상 새 생명이 탄생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원을 이루어가는 삶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시 61:8)


 다윗은 구약시대의 사람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그가 읊은 이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신약시대에 주님의 몸된 교회로 연결이 됩니다. 지금 다윗은 비록 죽었지만 주님의 이름은 교회 안에서 계속 찬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주님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한다는 말은 분명히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다윗의 간구가 주님을 통해서 주님의 몸인 교회에 이루어져 영원히 그 이름이 찬양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살아 있을 동안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원 한 것을 행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서원은 그의 죽음으로서 끝난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이어져 지금도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서 맡아 가지고 오신 일을 실천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주님과 함께 이 복음에 참여해서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마음을 가지고 날마다 서원을 이루어가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그 서원을 이루어 가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유명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면 나름대로 깊이가 있고 감동을 받기는 하지만 이 다윗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의미를 지니는 시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시편의 내용을 참으로 깊이 되새겨 깨닫게 되면 감동을 받을 뿐 만 아니라 실로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함께 이루어져 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