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8편] 교회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셀라)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나누도다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전능하신 자가 얼왕을 그 중에서 홑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신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거기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이 있도다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 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셀라)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시 68:1-35)


 이 68편은 사무엘하 6장의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땅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삼하 6:12-23)


 다윗 왕은 승리자 예수님의 그림자이고 솔로몬 왕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여호수아는 법궤를 제사장들에게 메게 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지만 사사시대를 거쳐 사울 왕 때까지도 그 땅을 다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 있는 칠족속을 다 멸망시키거나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 때에 와서 가나안 칠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을 완전히 정복하였습니다.



법궤를 옮기며 기뻐 춤추는 다윗


 그런데 다윗이 가나안을 다 정복한 후에 한가지 숙제가 있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이 있는 곳이고 장차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지어야 할 터였습니다. 다윗 왕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을 지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만 하나님께 서는 다윗이 너무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가 없고 네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을 지을 준비만 해놓았고 나중에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받아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의 알맹이는 법궤입니다. 모세가 돌에 새긴 십계명을 시내산에서 받았는데 그것을 보관하는 것이 법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법궤를 만들어 가지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진을 치고 살아갔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에 발을 디디니까 강물이 흐르지 않고 끊어져 쌓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째 돌 때에는 그 성이 무너져승리를 하였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민족 속에 함께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법궤를 옮기려다 한 번 실패했습니다. 이 법궤를 소가 운반하는 수레에 싣고 가다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가 뛰니까 웃사가 손을 들어 법궤를 붙들려다가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법궤가 이방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석달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는데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서 법궤를 기쁜 마음으로 메고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 것이 다윗에게는 굉장히 큰 일이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법궤를 메고 가는데 다윗은 그 앞에서 베옷을 입고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다는 뜻입니다. 춤을 추다보니 옷이 바람에 날리면서 몸이 드러난 모양입니다. 다윗의 부인 미갈은 그것을 흉을 보다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의 그림자 다윗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68:1-2)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다윗 왕 때까지는 그 땅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너무 강하고 수가 많기 때문에 그들을 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 때에 와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그 땅을 정복하는 사실을 여기에 표현해 놓았습니다. 승리자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원수 마귀를 멸망시키려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 세상에 마귀를 멸망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멸망시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마귀를 멸망시킬 힘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승리는 예수님의 승리를 그림자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원수'와 '주를 미워하는 자'는 다윗에게 있어서는 가나안의 칠족속입니다. 가나안의 칠족속은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악한 귀신이 들린 사람과 악한 세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3-45)


 예수님이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마귀를 정복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AD 70년경에 전세계로 흩어져 버리고 성령의 역사는 교회 가운데에 이어져 내려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마귀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린 것을 말합니다. 일곱 마귀가 들어와서 처음 형편보다 더 심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일곱 마귀와 가나안 칠족속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칠족속은 노아 때부터 저주를 받은 사람들인데 마귀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2-16)


 이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족속입니다. 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꽉 차면 그들이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들의 죄가 꽉 차는 것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다 설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가 찰 것을 하나님이 이미 아셨고 그때가 되면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에 들여보내 결국 가나안 족속을 정복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이 일들은 나중에 일어날 일들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다윗 왕이가나안 족속을 정복하는 것처럼 마귀를 정복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마귀를 멸망시키는 역사였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춤추며 뛰논 다윗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시 68:3-4)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 하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처소를 정하시고 그곳에 임하시게 됩니다. 법궤가 옮겨진 예루살렘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법궤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 법궤를 메고 방황하다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 갔지만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두고 법궤를 모실 수 있는 장소가 결정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셔 옮겨가는 일은 굉장히 큰 행사였습니다. 다윗은 그 일이 너무 큰 일이기 때문에 법궤가 가는 앞에서 마치 어린아이가 뛰노는 것처럼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겠습니까?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고 이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법궤를 옮기니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논다 하였는데 의인이 누굽니까? 믿는 사람이 의인이지 않습니까? 다윗의 아내 미갈은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타고 광야에 다닌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시내산에서 법궤를 메고 다닐 때에는 구름 기둥이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구름이 움직이면 법궤도 함께 움직이고 구름이 머물러 있으면 법궤도 그냥 머물러 있습니다. 구름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을 뜻합니다.

 또 "광야에서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하였는데 이 대로는 물론 영적으로는 마음을 뜻합니다.

 지금까지는 법궤와 함께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모든 승리가 이루어지면서 예루살렘에 법궤를 모시게 됩니다.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실입니다. 법궤가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 것처럼 신약시대에는 오순절 날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형성되고 거기에 주님의 이름과 말씀이 맡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법궤이신 예수님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바로 예수님을 의미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의 육신이 바로 법궤입니다. 법궤 속에는 십계명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십계명을 완성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근본 뜻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고 원수를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져서 예수님이 법궤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오셨고 그 때에 비로소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이 교회의 머리로 오신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은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써 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예표합니다. 예루살렘에 성령이 오시면서부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되고 그 때부터 주님께서 몸된 교회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새로운 성전인 교회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주님의 몸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고 주님 자체가 법궤였습니다. 주님이 이제는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머리를 두시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오순절 성령 강림의 예표)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초대 교회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의 칭송을 받으니 주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우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행 4:28-35)


 오순절 이전과 그 이후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순절 전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하여 조용히 숨어 있었는데 오순절부터는 매우 담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전까지는 진정한 찬송과 감사가 없습니다. 오순절 이전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었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큰 기쁨과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아직 그들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그들의 입에는 찬송이 넘치고 주님을 증거하는 큰 담력이 생겨났습니다.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항상 물질에 짓눌려서 살던 이들이 완전히 물질의 힘에서 벗어나서 물질을 지배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협박하며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너희가 이 예수의 이름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것은 바로 성령이 오심으로서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로 등장을 하실 것을 예표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거기서부터 온 이방 세계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교회가 성전이라면 그 성전의 제일 중심에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이시요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진정한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이 맡겨지고 말씀이 열려져 갑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도 참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지고 주님의 일이 이루어져 가는 일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 안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너무도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도 다윗 왕 당시에 와서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시는 이 일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기뻐하며 춤추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너무 큰 은혜 아래 살기 때문에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새 계명(초대 교회 유무 상통의 역사)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시 68:5-6)


 이 말씀은 오순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순절에 성도들은 각자의 재산을 팔아서 과부들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비로소 이 땅 위에 새 계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새 계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임한 그 결과로 억지가 아니라 진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할 때 일차적으로 구원받는 역사 그리고 방언을 하고 이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일들을 주로 말합니다. 물론 구원받는 역사나 여러 가지 기사 이적이 나타나는 일들도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성령의 역사의 본질적인 측면은 사랑의 역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일들이 성령의 역사의 본질적인 측면입니다. 단지 구원을 받고 기사 이적을 행하는 것만으로 그쳐버리면 주님의 근본적인 목적은 딴전으로 숨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에 현저하게 나타난 일이 바로 아무도 자기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자가 없었던 사건입니다.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이 몽땅 다 주님의 것이 되어버렸으니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가치관이 완전히 변해버린 그 속에 사랑이 역사했습니다. 유무상통할 수 있는 생활이 나타난 것은 성령의 역사의 한 모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병 고치고 기사 이적을 행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이 역사하시어 하나님의 근본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창조하시려고 이 광대한 역사를 꾸며 가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고 전개되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오셔셔 사람들에게 실천하신 분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도 이 땅 위에 그 사랑을 실천해 가는 사랑의 생명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의 표현인 사랑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이 사랑의 역사가 성도들의 유무상통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역사의 가장 참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요 고독한 자를 한 가족으로 만드신다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수금된 자를 이끌어 형통케 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죄사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이치를 몰랐습니다. 죄의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는 인간들에게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짐을 다 담당하시고 쉬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알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예수님을 떠나서 우리들 자신에게는 전혀 사랑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 비결


 예수님은 자신의 몸된 교회 가운데서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이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반드시 십자가가 있는 곳에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이 침례받으실 때에 물 속에 들어가신 것은 십자가 곧 죽음을 의미하고 물에서 올라오신 것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성령이 오순절에 오실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반드시 십자가 즉 죽음을 통과한 후에 나타나십니다. 우리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을 경험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이 강하게 살아있으면 성령께 이끌릴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제각기 육신적인 생각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육신을 가진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함께 살아가는 교회 가운데 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주님이 주시는 여러가지 훈련을 통해서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마음을 쳐부시는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라 하였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7-39)


 메마른 땅, 곧 사막에 있다는 것은 결국 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물은 여기서 성령을 의미합니다. 목마른 사람은 사막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막에는 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생수는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몹시 피곤하고 거칠고 무언가 불만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성격 탓이나 생활의 어려움 때문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넘치질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비록 성격이 못생겼다 하더라도 성령만 오시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삶의 의미를 모르고 답답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고 참으로 기쁘고 충만한 상태를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구원받았을 때에 잠깐 성령의 충만을 맛보고는 점차 생활 속에서 그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이 나를 점령하고 내가 성령 안에 거하면서 사는 비결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생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히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5-8)


 우리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많은 것은 내 힘으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자기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사니까 너무너무 피곤합니다. 믿음이 없이 자기 힘으로 사니 메마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되어 있는데도 구원받았을 때의 그 믿음 외에 믿음으로 사는 믿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지만 믿음으로 사는 또 다른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힘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경험, 즉 자신의 육신이 처리되는 과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심판과 공의의 무서운 하나님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시 68:6)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주님을 거역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근 이천 년 동안 완전히 사막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셀 라)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시 68:7-8)


 다윗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했던 때의 일들을 생각하며 이 말을 하였습니다.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산 사면에 지경을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고하니라"(출 19:16-25)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산 밑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십계명과 제사법과 민법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그때 시내산 경계를 정해놓고 누구든지 한 발자국이라도 침범해 들어오면 하나님이 돌격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굉장히 무서운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은 심판과 공의의 무서운 하나님이십니다. 천둥이 치고 불이 붙고 큰 소낙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위엄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처음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분입니다.

 이것을 회상하면서 다윗은 시를 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때 주신 율법이 장차 법궤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을 주시기 위해 나타난 하나님은 이처럼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2-35)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음성을 시내산에서 듣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민족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양심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구약의 율법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무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은혜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우리 양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 되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아 우리 영혼이 죄에서 해방되고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출발을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 줄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구원을 좀 늦게 받을 걸 그랬다고 말합니다. 구원이 자기 마음대로 받고 싶으면 받고 받기 싫으면 안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영광스러운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읊었습니다.



주님의 승리를 공포하는 교회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시 68:9-11)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다윗으로 하여금 완전히 정복하게 하시고 거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하여 살도록 축복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남자가 소식을 공포하지 않고 여자가 공포를 한다고 했을까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남성으로 표현이 되고 이스라엘 민족은 여성으로 표현이 됩니다. 한편 예수님도 남성으로 표현이 되고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여성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다 여성의 위치에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을 주셨다 하였는데 머리되신 주님께로부터 말씀을 받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주님이 마귀에게 승리하셨다는 것을 세상에 공포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이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마침내 주님이 오셔서 마귀의 머리를 밟아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완전히 승리하사 부활 승천하셨는데 이 주님의 승리를 공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2-56)


 여기에 부활과 들림받을 것을 말하면서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했기 때문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제발 믿어 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당당히 공포를 하는 것입니다. 사탄과 죄와 사망에게 승리하신 주님을 따르라, 주님을 믿으라고 공포하는 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길거리에 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고함을 쳐댑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우리는 물론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지만 좀 당당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닭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성령이 오신 이후로 많은 청중 앞에서서 아주 담대하게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그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있게 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비결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시 68:12)


 여러 군대의 왕들은 마귀를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막 5:8—9)


 다윗왕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그 가나안 칠족속 군대의 왕들이 도망을 치고 다윗이 승리한 것은 예수님이 마귀에게 승리하시는 일의 그림자였습니다.

 집에 가만히 있는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눈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가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하여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온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비류들이 다 가로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삼상 30:16-25)


 네게브 사막 밑에 아말렉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이 사는 동네에 와서 사람들과 물건을 다 탈취해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사울 왕의 전쟁에 가담을 하러 가다가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자기의 군대를 거느리고 아말렉을 추적하여 탈취당한 것들을 전부 되찾았습니다. 치러갈 때에 이백여 명이 피곤하여 미처 못 따라가고 도중에 머물렀는데 나중에 다윗이 돌아와 탈취물을 나눌 때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 악한 사람들이 낙오자들이나 집에 머물렀던 사람들에게는 탈취물을 주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말하기를 "우리는 다 같은 민족이요 형제 자매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전쟁에 나가서 우리가 이긴 것은 우리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 것이므로 우리들의 공로인 것처럼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골고루 다 나누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이것이 이스라엘의 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집에 거한 여자로 탈취물을 나눈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면서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잘못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열심으로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도 다 상급이 돌아온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 자신이 바쳐진 사람은 영적인 싸움을 잘 싸우고 열매를 맺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주님이 나누어 주신 탈취물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네 은을 은행에 맡기라"하였는데 은행은 바로 교회를 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적 싸움을 잘못싸웠어도 자신을 교회에 맡겨 교회와 함께 살아간 사람이라면 은혜에 함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열 고을 차지하고 다섯 고을 차지하고 두 고을을 차지하는 구별은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가 힘이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교회를 이탈하는 일들이 종종 생겨납니다.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눈다"는 말씀 속에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받는 데 동참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개인적인 측면에 집착하여 자기 자신을 너무 앞세우면 신앙생활이 빗나갈 가능성이 많은 것입 니다. 교회에는 성령이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지 인간의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나 열심에 의해서 교회가 이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살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뜻과 힘으로 했다면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했어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나도 자신을 판단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시 68:13)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너희가 양우리에 누울 때에"라고 하였는데 양우리 역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양이 우리 안에 누워 있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둘기 같다고 하였습니다.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비둘기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깨끗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비둘기의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것 같다 하였는데 여기서 은은 믿음으로 구속받는 것을 의미하고 금은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다는 표현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에 탄생한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주님의 시각에서 묘사한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주님의 양떼가 되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단장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볼 때는 비둘기같이 아름답고 순결하고 영광스러운 면이 안보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해도 조금만 자극을 주면 쓴 뿌리가 돋아나는 성격을 가진 우리들이 아닙니까. 조금만 비위가 상해도 서로 다투고 화를 내기도 하는 그런 것들이 뭐가 그리 아름답고 영광스럽다고 표현한 것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6-17)


육신적인 시각으로 보면 결함 투성이인 사람들의 육신밖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육신적인 시각에서는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육체대로 보지 않는다면 굉장히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는 우리를 육신대로 보지 않으시고 아름답게 보시는 것입니다.



완성될 교회의 참 아름다움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민 23:8-10)


 발락이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불러가지고 뇌물을 주며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해 달라고 하니까 발람이 많은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갔지만 막상 입을 열면 저주가 아닌 축복이 흘러 나왔습니다.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나를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이 백성이 암사자같이 일어나고 수사자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민 23:18-24)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패역을 많이 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고 이방의 세계를 향하여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십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교회를 그렇게 보십니다.

 우리 개개인을 보면 비록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실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적인 면이 나타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어가는 교회를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육신이고 성령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 흠 투성이인 우리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불러모아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 가는 그 안에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그 부분이 참으로 아름답고 하나님이 자랑하실 수 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서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계시록 1장에 보면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 보석으로 꾸며진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새 예루살렘이 바로 하나님이 목적을 두고 이루어 가시는 아름다운 교회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육신에서 비롯되는 찌꺼기는 하나님이 나중에 하나도 남김없이 제하여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마귀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시 68:14-16)


 이스라엘에 가면 북쪽에 헐몬산이 있습니다. 헐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골란고원이 있고 골란고원 앞쪽 고원지대에 목축을 할 수 있는 넓은 곳이 있습니다. 현재 그곳은 북쪽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이 있고 골란고원 저 너머에 요르단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이곳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항상 침범했던 지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높은 지역을 양 무리를 치는 곳으로 삼으셨는데 원수들이 늘 양무리를 습격하여 죽이고 빼앗아가려 했습니다. 양 무리를 치는 바산의 높은 산은 하나님의 산인데 이 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이사야서 14장을 읽어보면 이 마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 14:12-14)


 여기에 보면 마귀가 북쪽 제일 높은 데 올라서 내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로 본다면 바산 지역, 헐몬산 지역의 높은 데서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면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이스라엘과 세상을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바산의 높은 곳은 하나님의 처소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곳입니다. 이 원수의 무리들이 그 높은 곳을 침범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마귀가 이 세상을 침범하려는 것을 그림자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물리치고 승리하셨습니다.



마귀에게 승리하신 주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주님의 승리는 높은 곳에 있는 사탄, 즉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있는 곳은 가나안 땅을 경계로 예루살렘이 중심이 된 해발 800미터 되는 산이었습니다. 그 산 위에 세워진 성전 안에 법궤가 모셔지고 그 성전을 중심 으로 이스라엘 땅 전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 떼들이 그것을 시기하여 양무리를 집어 삼키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인 교회가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기 때문에마귀 떼들은 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핍박을 해 댑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은 언제나 승리자가 되십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시 68:17)


 시내산 성소가 있고 예루살렘 성소가 있는데 이 둘은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시내산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입니다. 시내산에 계시는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 성소에 계시는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권위가 나타납니다.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큰 권위를 나타냅니다.



부활 승천하사 성령을 이 땅에 보내서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 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시 68:18)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면 이루어질 일을 말하고 있는데 에베소서 4장 말씀을 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7-13)


 7절에 각 사람에게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 하였는데 이 말씀은 11절에 연결됩니다. 8절에는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는데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았다"는 말은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승천하시면서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 죄인으로 살고 있던 우리를 주님의 포로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포로로 주님이 마귀에게 승리하여 개선하시는 데 동참을 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땅을 완전히 정복을 하고 법궤를 옮기는 일이 바로 그러한 과정입니다.

 다윗이 승리한 후에 법궤를 앞세우고 예루살렘을 향해가는 그 상태를 개선 장군에 비유한 것입니다. 바로 그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주셔서 지상에 교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심으로써 법궤이신 주님이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이룩하는 엄청난 사실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주님의 포로가 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들에게 선물을 주셔서 교회를 세우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주님이 주신 선물인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세워집니다. 교회는 성령이 임해서 그 은사를 받은 사람에의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덮어놓고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물을 주셔야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선물을 주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으신다고 되어있는 것은 주님이 많은 포로를 사로잡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주셔서 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는 것은 바로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써 법궤이신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도 오순절에서 시작된 일의 연장이고 우리 시대의 교회도 은사를 받은 사실이 있어야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편에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주님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 68:19)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라 하였는데 이 말씀의 뜻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제사장이 하는 일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모든 죄와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고 고하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우리들의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대제사장으로 계시는데 우리의 죄와 걱정, 근심, 약점들을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 대변하십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신앙생활은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나를 위해 내 짐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대언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사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뿐만 아니라 지금도 나를 위해서 살아계시는 내 짐을 지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문제를 짊어지고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일 죄나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 것이 있으면 주님께 고하여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이 은혜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처지나 상태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주님께담대히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이사야서 46장을 한 번 찾아봅시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사 46:4)


 주님은 우리를 어린아이일 때에만 품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품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구원받은 지 오래되고 자기 딴에는 신앙이 자랐다 하더라도 주님이 보실 때는 마냥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의 문제를 부모가 다 책임을 지고 안아 주시듯이 우리들의 어떤 문제도 주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수 마귀를 멸하시러 오신 주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시 68:20-21)


 이 말씀은 창세기 3장 15절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예수님은 원수 마귀의 머리를 밟아 멸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높은 자를 낮추고 낮은 자를 높이사 평균케 하시는 주님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시 68: 22)


 이스라엘에서 바산은 북쪽의 높은 곳이고 사해는 제일 낮은 곳입니다. 사해는 보통 바다보다 수면이 훨씬 낮습니다. 물이 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지만 다 증발해버립니다. 사해는 물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흘러나오지는 않습니다. 바산이라는 높은 산과 사해 사이에 이스라엘 나라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희를 바산 높은 곳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한다"는 말은 마귀처럼 높아지고 기고만장한 사람들을 주님이 끌어내려서 낮추시고 한편 아주 철저하게 낮아진 사람은 반대로 끌어올려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주 안에서 다 평균케 하려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은 높은 곳에서 내려앉고 낮은 사람은 낮은 데서 끌어올려집니다. 그래서 성경에 높은 형제는 낮아짐을 자랑하고 낮은 형제는 높음을 자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원수를 갚으시는 주님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시 68: 23)


 이것은 주님의 승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의 피를 개가 핥은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왕상 21:18-19)


 이세벨의 말을 듣고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이 결국 자기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 개가 그의 피를 핥았습니다.



성소에 행차하시는 주님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시 68:24)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행차하는데 뒤에는 악사들이 따르고 나팔을 불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성소에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셨을 때에 교회가 형성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이 교회의 머리로 행차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실을 여기서 아주 영광스럽게 표현한 것입니다.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시 68:25-26)


 이 행사가 얼마나 엄청나고 큰 행사인지 다윗은 너무도 즐겁고 기뻐서 왕의 체면도 다 잊어버리고 베옷을 입고 막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삼하 6:12—15)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유무상통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거기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이 있도다"(시 68:27)


 여기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은 높은 사람들이지만 스불론과 납달리의 방백은 천대받은 지역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오순절에 와서는 다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함께 참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완전한 승리에 대한 예언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 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셀라)"(시 68:28-32)


 이 28절부터 32절까지는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입니다. 교회가 완성되고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시점에 주님이 재림하시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먼저 십자가에서 승리를 하시고 그 승리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이라는 높은 데 계시는 것이 아니고 땅에 있는 성전인 교회 안에 계시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때에 온 세상을 통치하시게 되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슥 14:16-21)


 스가랴 14장은 아마겟돈 전쟁이 끝이 나고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루어질 천년왕국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것이 천년 왕국인데,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아마겟돈 전쟁에서 살아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며 초막절을 지키게 됩니다.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사탄은 완전히 가두어져 버립니다. 완전한 주님의 승리가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그때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복구되어서 예수님이 그곳에서 통치하십니다.

 갈밭의 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수송아지는 이방세계를 말하고 은 조각은 이방 신을 말하는데 이들을 꾸짖고 발 아래 밟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전쟁을 즐기던 백성을 흩으시고 완전히 승리하십니다.



성소 안에 이름을 두고 행하시는 주님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시 68:33-35)


 본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신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이제 교회 안에 오셨습니다. 옛적에는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오셨고 지금은 교회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다 하였는데 이스라엘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위엄이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성소에서 나타납니다. 이 성소에서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는 하나님을 찬송하라 하였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교회 안에 오셨고 교회가 하나님의 성소가 되어 거기에 주님이 이름을 두시고 큰일을 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이 그 성소 안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