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9편] 고난을 통해 최후 승리자가 되시는 주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 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 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 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지로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시 69:1 –36)


"다윗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입니다. 소산님이란 말은 밑에 보면 백합화 곡조라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극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인데 예수님의 그림자로서의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내용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장인 사울 왕에게 박해를 받고 오랫동안 쫓겨 다닌 경험이 있고 또 자기의 아들 압살롬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멀리 피신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요한복음 1장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 특히 유대 지파에 오셨지만 유대인들이 그 예수님을 미워하여 박해한 사실의 그림자적인 사건입니다. 다윗이 이방 사람을 통해서 받은 괴로움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전쟁을 하기만 하면 항상 이방의 세력을 쳐부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고통을 받은 것은 주로 사울 왕이나 압살롬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들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배반을 하는 일들은 바로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시는 일들의 그림자입니다.

 이 시편 69편은 바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울부짖음과 고통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시 69:1)


 여기에 물들이 영혼 속에 흘러 들어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영혼이라는 것은 물체가 아니고 영인데 물이 그 속에 흘러 들어왔다는 말은 환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사실을 물로써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8:46) 하는 말씀은 예수님의 영혼의 울부짖음과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잠시 동안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서 버려지는 상황 속에서 너무도 고통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시편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내게로 돌이켜 달라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외면하시는 문제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을 때나 하나님께 등을 돌릴 때에 실제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나치게 육신에 속해서 살아갈 때에는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예민하다면 혹시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 성령을 거슬리는 과정 속에서 주님과 멀어지는 일이 없지 않은가 깊이 반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어도 그냥 무심코 지나쳐 버린다면 그때는 비록 별 어려움 없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오히려 큰 문제가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원수들에게 핍박을 받는 문제보다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혹시 사탄으로 말미암아 송사를 당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있을까 하여 마음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 같은 분들도 아주 영적으로 민감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민감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냥 평범하게 지나가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극한 고통 속에서 우리의 대속 제물이 되어주신 주님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시 69:2-4)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의 상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4절 끝에 보면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 하였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취치 아니한 것, 즉 빚진 것도 없고 꾼 것도 없으시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잘못한 것이 없으면서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난을 받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시를 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셨지만 사람의 육신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향해 힘써 기도하셨습니다. "할만하시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시는 속죄 제물의 뜻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 번 제물로 바쳐지는 뜻도 있습니다. 번제로서는 굉장히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렸지만 모든 사람들의 다 짊어지는 대속제물의 무서운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입장이었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자가가 죄 지은 일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억울하게 욕을 당하고 죽어야 한다면 얼마나 속상하고 화가 나겠습니까. 예수님도 육신 적인 입장과 속죄 제물의 입장에서는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신 말씀은 번제물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온전히 받들어서 그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자신이 불 살라 바쳐지는 것이 바로 번제인데 그런 입장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얼마든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도 나타나지만, 주님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으로서 당하시는 고통을 좀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놓은 것이 바로 이 시편의 말씀들입니다. 다윗이 자신이 겪은 경험을 토대로 쓴 시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온 인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는 그 일은 우리들이 도저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미쳐 잘 몰랐던 고통과 극한 어려움이 주님께 계셨다는 것을 이 말씀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능력으로 참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신 사실도 심상치 않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완전한 사람의 육신으로 그 고통을 온전히 맛보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는 주님이 때로 울기도 하시고 탄식도 하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시니까 능력으로 모든 고통을 쉽게 참으실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면 주님의 은혜가 심상치 않게 되어버립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제자들과 함께 고난을 받으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삶 가운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심각한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탄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 시편 말씀이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짐을 지신 주님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시 69:5-6)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이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을 한다면 비록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들의 죄를 주님 자신의 죄짐이라고 여기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주님은 자신이 지으신 죄로 생각을 하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 죄 때문에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로마의 법에 의해서 예수님이 사형을 받았으니까 흉악한 죄인으로 여긴것입니다.

 다윗도 사울과 압살롬에게 쫓겨다닐 때에 그 당시 사람들에게 흉악한 죄를 지은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은근히 인정을 베풀어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여 나중에 자기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 편에 서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실족했던 것입니다.



참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3-6)


 세례 요한은 옥에 있으면서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이 진짜 메시야인지를 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침례를 줄 때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거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라"는 계시까지 받은 사람인데도 어떻게 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을 품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세례 요한도 역시 육신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잠시 예수님에 대해서 착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메시야라면 헤롯과 같은 악한 왕을 쳐부셔버리고 또 로마의 세력을 둘러엎고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이상적인 국가로만들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그렇지가 않으니 순간적으로 착각을 해서 사실을 확인해보려고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니면 제자들에게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을 좀더 확실히 알고 따라가도록 소개하기 위해서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메시야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정한 메시야의 사명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큰 능력으로 로마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해버리는, 보통 유대인들 이 생각하는 그런 메시야관을 교정을 해 주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넘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진짜 메시야라면 이렇게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실족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다윗이 사울 왕에게 억울하게 쫓겨다니고 친 아들에게까지 배반을 당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담하여 실족했습니다.

 사울 왕 때에 다윗을 따르는 사람이 6백여 명밖에 없었고 또 압살롬이 반기를 들었을 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 가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병고침을 받고 이적을 보며 예수님이 메시야이기를 바랐지만 바로 그 예수님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수천 명, 수만 명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나중에 가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치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올 인함이니이 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1-19)


 예수님의 기도 중에 요한복음 17장의 이 기도는 굉장히 뜻이 깊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을 얼핏 보면 제자들이 굉장한 위기에 처한 것 같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왕이라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되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때는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이므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성령이마음에 계시는데도 그 성령의 인도를 모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 넘어져서 곁길로 가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12제자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70인을 두 사람씩 짝을 지워서 전도여행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들 이외에도 제자들의 숫자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쳐다보며 살던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리자 어떤 심정이 되었을까요? 그들은 아직 부활을 안 믿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해도 그 말을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도 안 믿었습니다. 부활도 모르고 성령도 오시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들이 바라보고 따라다니던 그 예수님이 죽어버렸습니다. 매우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때가 굉장한 위기상황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는데 그만 죽어버리자 이제 무슨 희망이 있겠냐고 뿔뿔히 흩어져 버릴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그동안 성령이 인도하시는 사실이 무엇인지 계속 설교를 듣고서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견디지 못하고 떠나가 버리는 사람, 실족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와 지켰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기도를 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이 온전히 보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실 때까지의 공백 기간에 제자들이 온전히 보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실 때까지 공백 기간에도 제자들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이 기도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바로 이 예수님의 기도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유월절의 참 주인이신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시 69:7-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는 말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 2:13)


 유대인들은 아무리 멀리 가 있어도 유월절이 되면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1년 동안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대속 제물을 바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오순절에 중동이나 유럽 등지의 멀리 있는 사람들도 예루살렘을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멀리서 오면서 양을 끌고 올 수 없으니까 예루살렘에와서 양을 사고, 성전세를 바치는데 성전에서 통용되는 돈을 바꾸어 바쳤습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계에서 한 곳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달리 유대인들이 모이는 장소는 회당입니다. 사실 지금의 예배당은 유대인들의 회당과 비슷한 장소인데 이것을 성전이라고 생각하면 망발입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전을 사모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는데 그때 예수님도 갈릴리에서부터 오셔서 거기에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참 제물이 되실 유월절 어린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시려고 오셨는데 유대인들은 건물인 성전을 사모하고 진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무시해 버렸습니다. 성전을 양과 소와 비둘기를 사고 파는 시장 바닥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뒷돈을 주고 장사를 하는데 목이 좋아야 장사가 잘 되니까 나중에는 성전 안에까지 들어와서 사고 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을 가지고 양과 소를 쫓아내버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어버리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을 만든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는 망각해버리고 돈에만 눈이 어두워 있는 사람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홀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하신 주님


"내가 곡하고 금식하므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시 69:10-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겟세마네 동산에서만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종종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고 어떤 때는 예루살렘을 내다보시며 우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3년 동안 공생애의 면모를 우리는 다는 모릅니다.

 예수님이 혼자 산에 가셔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신 기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런 눈물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심정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먹고 마시면서 같이 잠도 잤지만, 예수님은 항상 혼자이셨습니다. 많은 무리 속에 함께 계셔도 혼자이신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예수님의 심령에 동참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아버지 하나님과만 통하셨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전혀 그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얼마나 외롭고 답답하셨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고 청각장애우를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실 때는 예수님을 쫄쫄 따라 다녔지만 정작 그러한 이적들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어리석은 무리들을 떨치고 멀리 떠나버릴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하셨어도 그들은 받아주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면서 죽이려 했습니다. 주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심한 통곡과 기도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입장과 사정을 온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관원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듯 이 다윗도 하나님의 기름부은 왕이었지만 쫓겨다니면서 비웃음을 당했습니다. 성문에 앉은 자들은 관리를 말합니다.



사정을 온전히 들어주실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69:13)


 이 말씀은 온 세상이 다 자신을 비웃고 배척해도 하나님께서는 받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0-27)


 온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세례 요한까지도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가버나움 지방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적을 많이 행하셨어도 믿지 않고 오히려 배척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소원을 들어주시고 열납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이 자신을 받아주시고 간구를 들어주시면 그것으로 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소원을 하나님께 고한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하여 욕하면 얼마나 씁쓸해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사정 얘기를 하면서 억울해 못 견딥니다.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시 69:14-15)


 이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와 똑같은 내용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 69:16-20)


 다윗도 그랬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길 자나 안위할 자를 찾지 못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 죄의 대가를 철저히 지불하신 주님


"저희가 쓸개를 나에게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21)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마 27:32 — 36)


 이 쓸개 탄 포도주는 진정제였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에서 피가 쏟아지는 그 고통이 너무너무 심한데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면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맛을 보시고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철저하게 우리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자신이 다 맛보시고 경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우리 죄의 대가를 대충 지불하시는 것이 아니고 철저한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지불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목마르다고 하시니까스폰지 같은 것에 초를 적셔가지고 장대에 달아 마시우게 했으나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원수 사탄과 그 세력을 멸하게 하소서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시 69:22-2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는데 여기 다윗의 시를 보면 원수를 철저히 갚아 달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사탄과 그의 세력을 철저하게 멸해 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탄을 철저하게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신을 찌른 자들까지도 용서하셨지만 사탄은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는 우리들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시 69:26)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칠 수 없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그를 비난하고 욕하고 치는 일이 있는데 우리는 결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천 년 동안이나 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를 하나님이 치셔서 이천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가는 곳마다 칼이 따라 다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해서 안되듯이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큰 실수나 잘못을 해서 징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3-4)


 이 성경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참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지은 시입니다. 그처럼 흉악한 죄를 지었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만 죄를 지었다고 하니 얼핏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철면피 같은 소리로 들립니다. 나는 주님 앞에만 죄를 지었다고 해 놓고 한 술 더 떠서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의롭다고 하고 순전하다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아주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 판단을 정확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자가 예수님께 끌려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서 잡혀온 그 여자는 그 여자를 끌고 온 사람들에게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돌을 들어 그 여자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신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는지은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에 사람은 누구나 죄를 가졌기에 돌을 들어 칠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죄를 지어도 하나님 앞에 지은 것이지 사람들에게 지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이 그 여자를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만 그 여자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절대로 우리 자신이 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같은 죄인인데 돌을 들어 누구를 칠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그 사람이 하나님께 징계와 심판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비판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시 69:26-28)


예수님을 완전히 배척한 사람들은 생명책에서 도말이 됩니다.



주님의 재림과 이스라엘의 회복


 29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온유한 자가 이룰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지어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시 69:29-36)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찬송 드리는 것이 소 잡아 제사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듣고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구원의 역사가 지나가고 이 천지 만물이 다 회복이 됩니다.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 요 바다와 그중에 모든 동물도 그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 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롬 11:11-12)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회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다윗은 주님의 최후 승리를 내다 보면서 이 시의 끝을 맺습니다. 이 마지막 승리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온 천하 만물이 완전히 회복이 되고 현실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회복되고 예루살렘이 복구됩니다. 이 시편 69편은 주님의 환란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 온 천지 만물이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이 영광받으시는 일까지를 읊은 방대한 스케일의 시입니다. 다윗의 시는 사람들이 읊은 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윗의 이 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놀라운 생애와 역사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