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2편] 만왕의 왕, 왕 중의 왕

[시편 72:1-19]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임하리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찌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찌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예수님의 그림자로서의 솔로몬과 다윗


 지금까지의 시편은 거의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이 72편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고 제일 끝에 보면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고 씌여져 있습니다. 솔로몬과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사람으로 봐도 됩니다. 다윗은 위대한 정복자이고 솔로몬은 영광스러운 왕이라는 의미에서 주님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고 나아가 그 주변에 있는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아람 등등의 여러 나라까지 완전히 정복한 점에서 승리의 주님을 상징하고 솔로몬은 승리한 다음에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영광스럽게 다스리시는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두 인물은 다같이 예수님의 그림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완전히 악의 세력을 정복하시며 천년 동안 영광스럽게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판단력과 지혜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시 72:1)


 이 시편 72편은 만왕의 왕, 왕 중의 왕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년간 이 세상에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통치해 가시려면 우선 그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판단력과 의로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상 3:4-12]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이 세상에서 솔로몬처럼 영광스럽고 지혜로운 왕은 없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한 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왕이 재판장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가지고 오는 크고 작은 문제를 판결해주는 일이 왕의 주된 임무였습니다.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하는 것은 그 다음 임무였습니다. 그 전쟁의 임무는 다윗 왕이 이미 다 실행을 했고 이제 솔로몬은 지혜를 가지고 백성들의 문제를 잘 판결해 주게 됩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여자가 한 남편의 아이를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잠버릇이 고약했던지 자기 아이를 한밤에 깔아뭉개 죽게 한 후에 슬그머니 다른 여자의 아이와 바꿔치기를 하여 자기 아이라고 우겨댔습니다. 그래서 그 두 여인밖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 문제를 가지고 솔로몬에게 가서 판결해달라고 하자 솔로몬은 칼을 가지고 아이를 쪼개어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진짜 어머니는 불붙는 사랑으로 그 아이를 죽이지 말고 저 여자에게 주라고 했고 가짜 어머니는 잘 되었다, 너도 못 가지고 나도 못 가지게 나누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미 판결은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판단력을 솔로몬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많은 백성을 잘 판단하고 인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 솔로몬은 영광의 왕으로서의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천년간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실 때에 이 세상 사람들이 전혀 상상도 못할 판단력과 지혜를 가지고 통치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의 생애는 이러한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우신 통치와 완전한 이상 세계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시72:2)


 천년왕국 때는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없는데 어떻게 재판하고 판단할 일이 있겠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의로운 판단이라는 것은 반드시 옳고 그른 일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가령,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의 차별이 있는데 그러한 차별이 없이 고르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판단력입니다. 행정력, 통치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가 되면 참으로 이상적인 공산주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는 원래 유대인이었는데 이 성경 말씀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이 세상에 이상 국가가 건설된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의 사상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메시야의 이상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했던 것입니다. 과연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의 이상의 세계가 올 것인가, 성경을 연구하다 보니까 성경이 자기 마음에 맞질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진 정의감과 성경이 맞질 않았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가령 다윗에게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아말렉을 진멸시키는 일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란 분이 이 세상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셔야 되는데 어째서 이방 사람은 그렇게 잔인하게 진멸시키라고 하는가,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결국은 신은 없다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상 세계를 우리 인간의 힘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카를 마르크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계급 없는 사회, 평등한 이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순을 타파해야 하는데 우선 부르조아 계급을 뒤엎고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모든 권력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돈 많은 사람들, 즉 부르조아 계급을 정복하고 평균된 사회를 만들자면 얼마 동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재적인 정치를 써야 한다고 선언하고 공산주의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의 사상과 이념은 마귀에게 속아 성경을 왜곡시킨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듯 공산주의라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진정한 이상 세계는 주님이 오셔야만 실현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빈부의 차이가 없는 완전한 세상, 의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됩니다.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오순절에 잠깐 나타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


 신약시대에는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에 잠깐 그 이상적인 세계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43-4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성령이 충만하니까 사람들이 성령을 통해서 물질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이가 자기 것을 내놓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유무상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한 일이고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이상의 세계라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강압적이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혁명을 일으켜 부자들과 권력가를 타도하여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의 인도로써 자연히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자발적으로 서로를 섬기며 평균된 세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이상 세계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의 평균된 세계


[고린도후서 8:13-15]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 바울 당시에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이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때에 그리스 북쪽 마게도니아 지방의 데살로니가, 빌립보 등지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1-5]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바울이 고린도 지방에 가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굶어 죽을 지경에 처했다고 전하여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1년 전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니아 지방의 데살로니가 교회, 빌립보 교회, 베뢰아 교회 등은 너무너무 가난하여 바울이 거기 가서 차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라고 입을 못 열었는데 마게도니아 지방 신자들이 나중에 그것을 알고 헌금을 했습니다. 이렇게 자발적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희생하면서 남을 돕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산주의 이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카를 마르크스 같은 사람이 잘 모르고 엉뚱하게 해석해서 공산주의 이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도 기독교의 일각에서 산업선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어떤 회사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움직여서 때가 되면 데모를 하며 부추깁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은 가난한 자의 편에서 그들을 도우시는 분인데 부자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이대로 있을 수가 없다면서 혈기를 앞세워 혁명을 일으키도록 선동을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성경의 참뜻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현재는 이 기독교도 안에서 잘못된 사상이 들어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 구원 운동입니다. 기독교는 영혼의 구원 운동이지 결코 사회 구원 운동이 아닌데도 지금 기독교 안에는 사탄의 조종을 받으면서 사회 구원 운동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 마지막 시대의 징조입니다.



복락원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 72:3-4) 


 여기서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준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최초에 에덴 동산은 지구를 대표하는 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탄이 침범해 들어와서 불의의 동산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지구를 대표하는 산에 죄와 불의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불행과 환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에덴 동산은 주님이 재림하시면 완전히 회복이 되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걱정과 염려 없이 의가 넘쳐 흐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구원 못받은 사람들도 천년왕국에 백성으로 참여하지만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천년 왕국에는 대략 이 세상에 살아남은 삼분의 1정도의 사람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성경 이곳 저곳을 살펴보면 세상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는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고 그 밖에도 몇 분지 일이 어떻게 된다는 말씀들이 나오는데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대략 3분지 1정도가 남아서 천년왕국에 들어가 국민 노릇을 하고 아이도 낳고 하는 생활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년왕국은 죄가 없는 세상이고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있는 기간이기 때문에 완전히 하나님의 의가 복구됩니다.

 에덴 동산에 사탄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의가 없어져 버리고 불의한 세상이 되어 인간 세상에 불행이 찾아왔지만 주님이 오시면 그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참으로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해와 달이 필요없는 영원한 천국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시 72:5) 


 천년왕국에도 여전히 해와 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년 왕국 기간이 끝나면 태양도 달도 없어져 버립니다.


"그 성은 해와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 21:23)


 교회가 완성되어 이루어진 새 예루살렘, 영원한 천국에는 해나 달이 비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비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천년간 이 세상을 통치하는 기간 중에는 해와 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계를 향하여 치닫는 지구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저의 날에 의인이 홍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핱을 것이며"(시 72:6-9)


 여기도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천년왕국 때는 정말 농사가 잘 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집니다. 주님이 오신다고 해서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겠느냐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주님이 누구십니까? 주님은 창조주이시잖습니까?

 최근에 다시 부쩍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오래간다면 나중에 오염된 물을 마시다가 죽는 사람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정말 강이나 바다나 호수, 지하수들이 얼마나 오염이 됐는지 모릅니다. 수도물도 끓여 먹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즈음엔 집집마다 거의 에어콘이 다 있는데 이것들도 환경오염의 원인이 된다고 하니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지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곧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에 괜찮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이 앞을 내다보면 정말 캄캄한 세상입니다. 공해 공해하고 별소리를 다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비누 안 쓰는 사람, 합성세제 안 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들이 자꾸 하수구를 통해서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점점 인구는 불어나 오염이 가속화되어만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한계에 도달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시점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비록 환경을 보전하는 문제에 적극 앞장서서 협조하기는 해야겠지만 닥쳐오는 미래를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고 이 세상이 에덴 동산처럼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말은 주님이 오셔서 통치하실 때까지라는 말입니다. 한편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라는 말은 지중해에서부터 사해까지를 뜻합니다. 보통 성경에서 바다까지는 서쪽의 지중해에서 이스라엘의 경계인 사해까지를 일컫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 사이의 땅을 통치했습니다.

 천년왕국 때가 되면 아마 지형이 변해 육지가 한덩어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래 지구는 육지가 다 붙어 있었는데 땅속에 용암이 움직이면서 이 육지가 조금씩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 떨어져 나가고 있는데 이제 주님이 오시면 새로 완전히 조정되어 자연법칙적으로도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적합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온 세상 이방 사람들이 주님을 경배하게 됨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희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시 72:9-10)


 이것은 악의 세력이 멸망받을 것을 말합니다. 다시스는 스페인의 남쪽 해안인데 현재 바르셀로나 올림픽 장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스는 스페인의 굉장히 유서 깊은 항구입니다. 요즘 한국에 소개되는 것을 보니까 역사가 이천년쯤 됩니다. 성경에 보면 솔로몬 왕이 다시스와 무역을 많이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스바와 시바 왕들이라는 것은 사실은 같은 왕입니다. 옛날 솔로몬 왕을 찾아왔던 여왕이 스바 왕입니다. 시바는 에티오피아에 속한 지역을 말합니다. 스바 여왕은 에티오피아 셀라시아 황제의 조상이었습니다. 솔로몬과 스바 여왕이 관계를 맺어 후손이 태어났는데 바로 그가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 황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온 세상 이방의 세계가 그렇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슥 14:16-18)


 그때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므로 온 세상 이방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경배하는 일들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 왕들의 섬김을 받으실 주님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시 72:11)


 솔로몬 왕 당시에도 현실적으로 다윗이 그 이웃 나라들을 다 정복해 놓았기 때문에 에돔, 모압, 암몬 왕 등등 그 주변의 왕들이 조공을 바쳤습니다. 다윗 때부터 조공을 바치기 시작하여 솔로몬 왕대에 이른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온 세계의 왕들이 예수님을 섬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온 세계 왕은 사실은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할 그리스도인들 一 신앙생활의 상급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 21:24)


 여기에 땅의 왕들이라고 했는데 이 왕들은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던 자들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이 땅 위에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천년왕국 때 받을 상급이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은 열 고을 차지해서 다스리고 어떤 사람 은 다섯 고을 차지해서 다스리고 어떤 사람은 두 고을을 차지해서 다스립니다. 우리가 주님께 자신을 참으로 드려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생활,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한다면 틀림없이 왕권에 동참을 합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므나 비유에 이 고을을 차지하는 영광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상을 잃어버리는 사람들一세상에서 왕 노릇 하려는 마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너희는 현재 이 세상에 왕노릇하려고 한다고 편지하였는데 현재 우리 육신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왕 노릇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고 싶고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왕노릇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8-9)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서 왕 노릇을 다 해버리면 천년왕국에 가서는 아무런 상급이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설교하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어떤 때는 칭찬도 하고 대접도 하는데 이것도 잘못되면 왕 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발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앞으로 주님이 오시면 왕 노릇할 때가 오는데 그때를 위해서 지금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향해서 종 노릇하며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현재 참으로 남을 잘 섬기면 천년왕국 때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한 말씀으로 알고는 있어도 실천이 잘 되지 않습니다. 마구 화를 내는 기질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상을 현실적으로 즉각적으로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자기 상을 이미 받아 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큰 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6:1-5]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칭찬받고 대접받고 인정받으면 그것으로 그만 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9-12)



모든 것을 후히 갚아 주실 주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참으로 왕 노릇을 하려면 비록 억울하고 애매하게 고난받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합니다.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시 72:12-14)


 이 성경 말씀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사회정의를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자선사업과 윤리·도덕의 차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 다 갚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핍박을 받거나 욕을 먹더라도 주님은 나중에 다 갚아주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갚음을 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에게 어떤 좋은 일을 했다고 해도 갚음을 받고 보상을 얻는 따위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는 원치 않으나 어쩔 수 없이 돌아오는 것은 할 수 없지만 당장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큰 상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여기에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라는 말은 피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주님이 그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귀히 여기십니다.



천년왕국의 풍성한 열매와 부


[시편 72:15-17]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여기 이 말씀 속에 '저'는 솔로몬 왕으로 예표되는 주님을 말하고 '저희'는 백성들을 말합니다. 백성들이 주님을 찬송하고 산꼭대기의 땅에도 곡식과 열매가 풍성한 것은 바로 천년왕국의 상태를 말합니다. 천년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풍성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습니다.

 현재는 주님 대신 주님의 이름으로 보혜사이신 성령이 와 계시니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우리가 입술로만 말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참으로 깨닫고 나면 함부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원리와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기도를 남발하는 데서 신앙이 미신적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주님은 뛰어난 이름을 받으사 그 이름이 온 세상 위에 높이 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주님의 몸이요 주님의 신부요 성전인 교회는 주님이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주님이 이름을 두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굉장히 큰 일입니다. 주님이 이름 두신 교회에 현재 우리가 있다는 것은 너무너무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온 세계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지만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에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거기에 주님이 이름을 두셨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면 교회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데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 걸으니 사람들이 놀라자 베드로가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주님의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 교회에 주어진 주님의 이름이 능력으로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교회 가운데 주님의 이름이 오셨다는 것을 잘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주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나님의 가정인 교회에 주님의 이름을 두신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므로 주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내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영원히 찬송하라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시 72:18-19) 


 우리는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 속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잘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을 장자가 안 죽고 살아남은 것,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것처럼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주님의 기사가 아닙니까? 현재 우리가 구원받고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기사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것이 큰 기사이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인데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참으로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기사가 연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전부가 기사인 것입니다. 그 기사 속에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그것을 잘 모르고 그냥 내 열심과 능력으로만 살아가려고 합니다.

 나중에 우리가 천년왕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기사가 완전히 나타납니다. 사탄에게 넘어가서 더럽고 추악한 죄악 세상이 되었던 것이 완전히 회복되어 에덴 동산이 되고 그 평화로운 세계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기사입니까?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높이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윗의 시 속에다 솔로몬의 기도를 포함을 시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