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4편] 하나님이여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시 54:1-7)


 이 시를 읊은 시대적인 배경은 사무엘상 23장과 26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의 생명을 사냥하는 사울


 시편 54편에 있는 제목대로 십인이 사울에게 다윗이 숨은 것을 고발한 내용입니다. 십 사람들은 열 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대상 4:16). 이 십이라는 지역은 사해 근방 헤브론에서 남동쪽으로 7〜10km쯤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한 쪽은 사막 지대이고 다른 한 쪽은 아주 넓은 들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한 포기의 풀도 보이지 않는 사막이었는데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도 황무지였고 메마른 곳이었습니다. 사해 지역에서 조금 떨어진 남쪽 지역의 황무지에 사는 십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시려는 계획을 사람들이 몰랐고 아직까지는 공식적으로 사울이 왕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그 지역에 갔을 때에 십 사람들이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사울 왕에게 고발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의 군대에 쫓겨 매우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땅을 침범해 들어왔기 때문에 사울 왕은 다윗 쫓기를 그만 두고 블레셋 군대를 치러 갔습니다. 다윗이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블레셋 군대를 통해서 다윗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어떻게 물리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또다시 다윗을 찾아서 이 지역으로 왔습니다. 그러자 십 사람들은 또 사울 왕에게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고했습니다. 산골짜기를 경계로 한 쪽에는 사울의 군대가 진을 쳤고 다른 한 쪽에는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밤이 되자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사람 아브넬이 사울의 진에 들어가 보니 모두들 곤히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깊이 잠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사울을 쳐 죽일 수 있었지만 다윗은 비록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버림받은 바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름부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자기가 직접 쳐서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압의 동생 아브넬이 창을 가지고 단번에 찔러 죽여버리겠다고 하자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인데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사울 왕은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도 마음이 악신에 잡힐 때에는 또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기름 부음과 성령의 은사


 이스라엘 민족은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을 기름 부어 세웠는데 이것은 성령으로 은사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하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실지로 기름을 머리에 붓고 안수하면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되는데 기름 부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전부 다 예표적이고, 그림자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사도들이 안수를 하면 성령을 받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일을 맡기는 은사가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기다림이라"(고전 1:4 — 7)


 여기에 은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또 이 말씀에는 기름 부었다는 것과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는 이중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라는 말은 물질적인 기름을 붓는다는 뜻이 아니고 성령의 기름 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일꾼에게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셔서 일을 시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과 훈련과 시험의 과정


 일단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 즉 은사를 받은 사람은 혹시 어떤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사람이 나서서 그를 처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울 왕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악신의 부림을 받고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직접 그를 해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사무엘상 26장에 사울과 그를 지키는 군대들을 깊이 잠들게 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울 왕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일을 통해서 다윗을 시험하고 훈련시키려는 뜻이었지 다윗이 정말로 사울을 쳐 죽이도록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을 하나님이 직접 처단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처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가 대신 앞장서서 하는 교만한 일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왕의 자질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는 고난의 과정 속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좇고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다윗과 완전히 똑같은 과정은 아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이러한 고난과 훈련과 시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우리들의 이상과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다윗 왕처럼 우리들도 어떤 잘못이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모양의 시련과 고난이 찾아옵니다. 다윗은 나중에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은 사건이 있지만 사울 왕에게는 아무런 잘못을 범한 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사위였습니다만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아지자 사울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 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개선했을 때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로부터 다윗은 억울하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들 개개인이 어떤 기름 부음을 받는 경험이 없어도 이 교회가 세워질 때 기름 부음을 받고 세워졌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교제 안에 확실히만 서 있다면 기름 부음 받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능력과 은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시 54:1) 


 다윗은 왜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했을까요? 다윗이 십 지역의 황무지에 갔을 때 십 사람들이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 왕에게 밀고했습니다. 사울이 수천 명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포위해 잡으려는 상황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죽음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에서 다윗은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 안에서 이같은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사울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사울 다음에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은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은 데 근거한 것입니다.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주시니까 그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져 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기 자신의 힘이나 다른 어떤 세력에 의해 구원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기를 구한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믿음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평소 잘 알고 있는 사도행전 3장 내용도 바로 이러한 예 중의 하나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 라"(행 3:6-16)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았습니다. 이 사람은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큰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그를 구원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교회의 역사


 교회도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야만 이루어집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그 때부터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교회 가운데 주님의 이름을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순절이라는 절기는 교회의 생일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23장에 오순절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절기에는 누룩 넣은 두 떡덩이를 바칩니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홈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레 23:15-18)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 만에 드리는 절기로 오순절에 떡을 드릴 때에는 누룩을 넣어서 만든 떡 두 덩이를 드립니다.

 그런데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소제는 곡물을 가지고 제사 지내는 것인데 예수님이 완전히 부수어진 곡식처럼 하나님께 소제물이 되신 것을 의미 합니다.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레 2:11)


 소제물은 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든 것인데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누룩은 죄를, 꿀은 인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은 육신을 가지셨지만 우리처럼 육신 때문에 인정에 매이거나 죄를 짓는 일이 없으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정이 많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러한 인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인정이 전혀 개입이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음의 길을 가시는 것을 만류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했을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정을 완전히 배제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 육신 속의 인정을 따라 살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인정은 완전히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꿀은 그러한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의미하는 누룩과 마찬가지로 섞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순절에 드리는 떡 두 덩어리는 누룩을 넣어서 드리라고 했습니까? 그 두 덩이 떡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오순절은 교회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아도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성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죄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내리시고 거기에 주님의 이름을 두셨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당시 오순절에 120명이 처음에 성령을 받고 그 중에 베드로가 대표자가 되어 주님의 이름을 두신 교회가 세워지고 그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대가 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도 주님이 이름을 두신 교회 가운데 성령이 계셔서 그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회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앉은뱅이를 고친 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부터는 주님은 실지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교회 속에 주님의 이름을 두시고 성령이 오셔서 그 이름을 나타내시고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7-29)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것은 하나님이 그 조그마한 성전 안에 계실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그곳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두신 그 곳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백성들의 기도가 상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틀 판단하소서"(시 54:1)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너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1-5)


 원래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로 바울이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가르쳤던 곳입니다(행 18장). 나중에 바울이 그곳을 떠난 후에 고린도 교회 사람들 사이에 여러 패가 나누어져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판단한 데서 이러한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던 사람도 아니고 아볼로처럼 말을 시원하게 잘 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무시하는 사람이 생겨나 베드로파다 아볼로파다 하여 분당을 짓는가 하면 바울을 두둔하는 바울파, 아무데도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속한다는 그리스도파, 이렇게 여러 갈래로 교회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고 나중에 주님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판단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과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올바른 판단 앞에서 사는 삶


 바울이 궁지에 몰렸듯이 다윗도 궁지에 몰려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실적인 왕은 사울이고 그 사울을 따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장차 다윗이 왕이 되면 그 사람들이 다윗의 신하가 될 사람들이고 다윗이 통치할 국민이 될 사람들인데도 다윗이 기름 부은 자가 된 것을 전혀 판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 주어 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 되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 때 다윗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잘못 판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힘으로 자기를 판단하시는 것이 문제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판단을 너무 많이 의식하며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하여 나쁘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마음 속에 화가 치밀고 힘이 빠져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판단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다윗은 참으로 억울한 상황하에서도 주님이 모든 것을 판단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볼 때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주님이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상 주실 것은 상주시고 벌 주실 것은 벌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주님의 판단과 평가 앞에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쁘게 여겨도 주님이 옳다고 인정하면 자신있고 힘차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사람을 의식하여 의기소침하고 잘못 평가하는 말 한 마디에 그만 김이 빠져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시 54:2-3)


 사울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방 사람도 아닌데 여기서 왜 외인이라고 표현을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서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외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그들이 외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도 않고 경건한 마음도 없이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 삽니다. 십 사람들은 유대 지파이고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자기 육신의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외인이라는 뜻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그를 따르고 항상 쫓기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하나님의 계획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완전히 쳐서 이스라엘이 그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약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약속은 결국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계통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다윗이 쓴 이 시편 22편을 읽어보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완전히 예수님의 심정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읊었습니다. 다윗은 완전히 하나님의 약속 안에 거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은 틀림이 없고 먼 훗날에 자기 후손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한편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자기 육신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사울처럼 외인 노릇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생각대로 않고 육신의 생각대로만 살면 외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하시나이다"(시 54:4)


 우리 생활 주변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험이 닥쳐 올 때에 누구에게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합니까? 항상 육신적인 안정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고 은밀한 품에 숨어 있으면 아무리 큰 어려움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폭풍우가 몰아치고 바람이 부는데 절벽 위에 한 마리의 새가 가만히 들어 앉아 바위 속에다가 집을 짓고 있는 것과 같은 평안한 상태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시련과 고난의 폭풍이 몰아치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이 조금도 요동치 않는 평안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은밀한 곳에 나를 숨겨 두는 비밀한 장소입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지켜 주셨습니다. 다윗을 덮치려고 하는 그 순간에 사자가 와서 블레셋이 쳐들어온다고 하여 군사를 돌이켜 가버린 일, 사울이 다시 찾아왔을 때 물병을 가지고 와도 모를 정도로 사울을 깊이 잠들게 한 일도 다윗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구약시대에 나타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영적인 사실로서 신앙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니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시 54:5)


 다윗은 자기 손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 왕을 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왜 기도는 이렇게 했을까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19-20)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니 사람이 친히 갚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기도 속에 바로 이런 말이 들어 있습니다. 다윗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았던 사울에게 직접 원수 갚을 수 없다는 의미 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에 감사하며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나이다"(시 54:6)


하나님의 이름을 떠나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선이요 뜻이기 때문에 그 이름에 다윗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힘이나 노력으로 하지 않고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고자 하였습니다.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시 54:7)


 실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는 것을 목도하였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다윗의 시편을 상고하면서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생활을 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