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 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셀라)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 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내가 수양의 향기와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셀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 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1-20)
이 시편 66편은 작자에 대한 언급이 없이 그냥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읊은 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표적인 찬송시입니다.
땅을 약속으로 받은 민족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시 66:1-2)
여기에 '온 땅이여'라고 했는데, 이 땅은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 있고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있는데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이방 세계를 말하고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 일찍 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고 그 땅에서 선민의 역사를 꾸미실 것을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으리라. 나는 너의 상급이다. 라고 여러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할 때는 그 땅이 육지를 뜻하지만 땅이 영적인 의미로 불리워질 때는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어떤 큰 일을 하셨기 때문에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땅이 소리를 발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민족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져 있는 민족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3-15)
지금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 말고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보통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민족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오면 주님이 이름을 두신 곳이 교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이름을 두셨고 신약시대에는 교회 안에 주님이 이름을 두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이 주님의 이름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가져다 붙여 교회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삶들까지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만 실상은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겨졌고 그 이름 아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생명을 얻고 축복을 받듯이 오늘날의 교회도 주님의 이름이 맡겨지고 기름 부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여쭈어 본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고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민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걷게 한 사건이 나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것입니다. 4장에 보면 관원과 장로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히려 너희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교회는 성령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머물러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해도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겨졌고 그 가운데서 역사했기 때문에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찬송할지어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능력과 권능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시 66:3-4)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능력을 행하고 일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도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형성되고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주님의 이름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름 속에 그 사람의 속성과 성격이 나타나듯이 주님의 이름 안에 주님의 성품과 능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교회 안에 주어졌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과 영광이 교회 안에 역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안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광야생활을 할 때 쓴 물을 달게 하고, 만나가 내리고, 메추라기를 보내고, 반석을 치니까 물이 나오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전쟁하여 이기는 모든 일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능력을 행하시고 엄위하신 일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 교회 속에서도 주님의 영광과 능력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곳 一 교회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27-30)
이 열왕기상 8은 전에도 여러 번 상고한 적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듣고 응답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약시대의 성전은 신약시대의 교회의 그림자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에 주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쳤고 기사와 능력을 행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교회가 되려면 주님의 이름이 거기에 맡겨진 사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몇 사람 그저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만 맡겨지는 것입니다. 기름 붓는다는 말은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으면 주님의 이름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맡겨진 그곳을 향해서 기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을 짓고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양과 소를 잡아 제사 드리는 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것을 예수님이 보시고는 내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안에 들어가서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종교적인 관념에서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은 주님이 이름을 두시고 그 이름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시편 저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엄위로운 일, 큰 일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찬양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볼 수 있는 눈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시 66:5-6)
이 구절은 홍해를 건넌 일이나 요단강을 건넌 일을 생각하며 지은 것입니다. 여기 보면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보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보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눈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0-12)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12명을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한 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담할 만한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 우리는 그들과 비교하면 메뚜기 같다, 우리는 도저히 그곳을 점령할 수 없고 오히려 그들에게 사로잡혀 다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 땅을 점령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주장을 하니까 백성들이 그들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번 하나님의 이적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만나를 내려주셨으며, 목 마를 때에 반석을 치니까 반석이 갈라지면서 물이 나와서 먹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모세로 큰 민족을 이루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모세가 기도해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일을 헤아릴 수 있는 영적 분별력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지금 우리 시대에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실질적으로 육신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볼 수 있었고 지금은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임 안에 자꾸 복잡하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들이 생기면 그런 일들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믿음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을 너무 짧은 안목으로 보면 안됩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꾹 참고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이 주어진 뜻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주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일을 죽 지켜본 사람 중의 하나 입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이름이 계시고 그 이름 아래서 되어지고 있는 일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만일 그런 것이 보이지 않으면 저도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주님이 일하신다고 하면 병을 고친다거나 귀신을 쫓는 등의 이적을 떠올리는데 그러한 일을 기대하면 틀림없이 실망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주님의 일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의 영적인 눈에만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은 영적인 통찰력에 의해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가는 것은 신비한 일이고 비밀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적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4-17)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오매불망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렸으나 그 메시아가 오셨 을 때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도 메시아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경이고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행하신 일을 보고 깨닫는 사람은 굉장히 복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요 12:35-38)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빛이 그들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을 동안에 그 빛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너무도 복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을 행하셨는데 그 표적을 보고도 그들은 예수님을 못 믿었습니다.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 이적은 일차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적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영이 죽어 있었는데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새 생명을 받아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적 중의 이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고 죽을 장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아 그 다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것이 이 일의 그림자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우리의 영혼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고 이 세상에서 우리 마음이 돌아선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이 돌아선 것이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들의 영혼 속에 일어난 큰 이적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영이 죽어 있던 사람이었는데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큰 이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일차적으로 영이 살아나는 이적을 보았고 계속적으로 또 하나님의 역사를 교회 가운데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주님이 이름을 두셔서 그 이름으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 찬송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갈 수 있습니다.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시 66:7)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열방 즉 세상은 하나님이 감찰하십니다. 감찰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엄숙한 눈으로 지켜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증거하라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시 66:8)
하나님께 송축한다는 것은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른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여 들리게 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 속에 이름을 두시고 그들을 구원하고 어떤 일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 삶은 이방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이방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이었던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볼 때에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
저는 주일 학교 교재를 쓰면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가 두 사람을 택해서 여리고를 정탐해 오라고 했는데 여리고에 라합이라는 기생이 있었습니다. 기생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여관집 주인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여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신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육지같이 건너게 하고 지금까지 행하신 여러 일들을 들으면서 간담이 서늘하여 지금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여리고 사람들이 알고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주변 민족들의 주목거리가 된 것처럼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주목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지켜 보는 가운데 온갖 억울한 비난과 핍박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굳굳히 난관을 헤쳐왔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소리 높여 외치는 것입니다.
짓밟히고 억눌려 죽은 것 같더니만 아직도 건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주 특별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꾸준히 주님의 일을 위하여 전진해 나아가는 것은 우리 힘이 아닌 주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정금같이 단련하시는 주님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 다"(시 66:9-12)
이 대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서 걸어가는 광경을 표현한 것이지만 현재 우리 교회가 나아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실족케 하지 않으시고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같이 정금같이 단련하시기 위해서 겪게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이 어려운 짐을 허리에 지고 머리를 짓밟히기도 하며 불과 물을 통과한 후에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고전 10: 1-3)
이스라엘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으며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련을 주신 것은 그들을 정금같이 나오게 단련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산 제사를 드리는 생활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시 66:13)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여러가지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가운데서 번제는 소나 양을 잡아 재가 되도록 불살라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나 화목제를 지낼 때는 고기를 제사장들이 먹는데 번제는 완전히 불살라서 드리기 때문에 제사장이 먹을 수 없습니다. 번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완전히 불살라서 바쳐졌다는 뜻이 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완전히 불살라져서 하나님께 바쳐진 일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이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겠다고 하였는데 구약시대에 주의 집은 성전이고 신약시대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6)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여기에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하였는데 우리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주님께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 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2-1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많은 일이 생겨나는데 그 일을 어떤 한 사람이 다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은사와 믿음의 분량대로 서로 협력하여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요 하나가 되어 주님과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섬김을 받기를 원하고 남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남에게 섬김 받기를 좋아한다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자격은 없지만은 부득이 해서 모임 가운데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해 왔지만 이 일도 성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각자가 자기 맡은 일을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하지 않고 성실히 최선을 다하여 하는 것이 바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일이요. 번제입니다.우리가 자칫 맡은 일에 게으름을 피우기 쉽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현재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하고 있는가 깊이 반성해 봐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해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헌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번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고 하나님이 받으실 수도 없었는데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이들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그것이 바로 번제물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서 우리들이 예수님이 주신 그 새 생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쳐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임 가운데서 성도를 섬긴다든지 모임의 어떤 일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너무 게을러 일이 힘들면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라도 중간에 그만 일이 많습니다.
서원한 것을 반드시 갚으라
우리는 주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을 때에라든지 어느날 어떤 말씀을 깨닫고 감사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한 서원이 마음 속에 있다면 그것을 갚으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내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그 일을 이루라는 것이지요.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시 66:14)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여 이번에 저를 돌봐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를 하곤 합니다. 이렇듯 자신이 어려울 때를 당하여 하나님께 입으로 서원한 것을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작정하는 것이나 헌금을 작정하는 것이 다 서원입니다. 종종 헌금을 작정해 놓고도 실천하지 않는 일들이 있는데 부득이 해서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께 자백을 해야 합니다. 만일 작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무관심하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큰 문제 뿐만 아니라 지극히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철저해야 합니다.
"내가 수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시 66:15)
수소와 수양은 바로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의미입니다.
고난 뒤에 오는 찬송과 감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6-17)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참으로 보고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시험과 시련을 참고 견딥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문제가 다 풀리면서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드리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기도의 선행 조건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마음에 죄를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특히 우리들이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해야 할 죄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 간에 원망으로 마음에 담을 쌓고 있으면 기도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다면 먼저 그 형제와 화목하고 난 후에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형제나 자매의 잘못한 문제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피차 간에 마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풀지 않고 큰 소리로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은 다 위선입니다. 형제를 찾아가서 이야기해도 형제가 안 들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내 마음의 문제를 풀고 형제에게 할 도리를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19-20)
이 시를 읊은 시인은 자기는 죄악을 품은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해도 답답하고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와 풀어야 할 문제가 있지 않은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틀림없이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구원 안 받은 세계라도 만일 내 편에서 잘못이 있으면 해결을 해야 합니다. 가령 구원 안 받은 사람에게서 돈을 빌린 뒤 갚지 않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 기도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물질문제가 있겠지만 그 문제 이외에 서로 말로 다투었다든지 오해를 하게 된 일이 있다면 그것도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제가 풀리고 화해가 이루어져야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입으로 하는 기도 뿐만이 아니라 성도들 간의 교제도 기도이므로 교제가 막혀 있다면 기도가 전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편 66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름을 두시고 그 이름으로 역사하시는 영광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찬송의 시입니다. 현재 우리들도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서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볼 수 있다면 담대하고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편 66편은 작자에 대한 언급이 없이 그냥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읊은 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표적인 찬송시입니다.
땅을 약속으로 받은 민족
여기에 '온 땅이여'라고 했는데, 이 땅은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 있고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있는데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이방 세계를 말하고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 일찍 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고 그 땅에서 선민의 역사를 꾸미실 것을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으리라. 나는 너의 상급이다. 라고 여러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할 때는 그 땅이 육지를 뜻하지만 땅이 영적인 의미로 불리워질 때는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어떤 큰 일을 하셨기 때문에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땅이 소리를 발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민족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져 있는 민족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3-15)
지금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 말고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보통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민족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오면 주님이 이름을 두신 곳이 교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이름을 두셨고 신약시대에는 교회 안에 주님이 이름을 두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이 주님의 이름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가져다 붙여 교회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삶들까지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만 실상은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겨졌고 그 이름 아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생명을 얻고 축복을 받듯이 오늘날의 교회도 주님의 이름이 맡겨지고 기름 부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여쭈어 본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고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민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걷게 한 사건이 나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것입니다. 4장에 보면 관원과 장로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히려 너희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교회는 성령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머물러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해도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겨졌고 그 가운데서 역사했기 때문에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찬송할지어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능력과 권능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능력을 행하고 일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도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형성되고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주님의 이름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름 속에 그 사람의 속성과 성격이 나타나듯이 주님의 이름 안에 주님의 성품과 능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교회 안에 주어졌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과 영광이 교회 안에 역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안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광야생활을 할 때 쓴 물을 달게 하고, 만나가 내리고, 메추라기를 보내고, 반석을 치니까 물이 나오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전쟁하여 이기는 모든 일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능력을 행하시고 엄위하신 일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 교회 속에서도 주님의 영광과 능력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곳 一 교회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27-30)
이 열왕기상 8은 전에도 여러 번 상고한 적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듣고 응답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약시대의 성전은 신약시대의 교회의 그림자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에 주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쳤고 기사와 능력을 행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교회가 되려면 주님의 이름이 거기에 맡겨진 사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몇 사람 그저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만 맡겨지는 것입니다. 기름 붓는다는 말은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으면 주님의 이름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맡겨진 그곳을 향해서 기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을 짓고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양과 소를 잡아 제사 드리는 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것을 예수님이 보시고는 내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안에 들어가서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종교적인 관념에서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은 주님이 이름을 두시고 그 이름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시편 저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엄위로운 일, 큰 일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찬양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볼 수 있는 눈
이 구절은 홍해를 건넌 일이나 요단강을 건넌 일을 생각하며 지은 것입니다. 여기 보면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보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보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눈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0-12)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12명을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한 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담할 만한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 우리는 그들과 비교하면 메뚜기 같다, 우리는 도저히 그곳을 점령할 수 없고 오히려 그들에게 사로잡혀 다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 땅을 점령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주장을 하니까 백성들이 그들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번 하나님의 이적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만나를 내려주셨으며, 목 마를 때에 반석을 치니까 반석이 갈라지면서 물이 나와서 먹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모세로 큰 민족을 이루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모세가 기도해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일을 헤아릴 수 있는 영적 분별력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지금 우리 시대에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실질적으로 육신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볼 수 있었고 지금은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임 안에 자꾸 복잡하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들이 생기면 그런 일들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믿음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을 너무 짧은 안목으로 보면 안됩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꾹 참고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이 주어진 뜻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주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일을 죽 지켜본 사람 중의 하나 입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이름이 계시고 그 이름 아래서 되어지고 있는 일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만일 그런 것이 보이지 않으면 저도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주님이 일하신다고 하면 병을 고친다거나 귀신을 쫓는 등의 이적을 떠올리는데 그러한 일을 기대하면 틀림없이 실망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주님의 일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의 영적인 눈에만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은 영적인 통찰력에 의해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가는 것은 신비한 일이고 비밀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적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4-17)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오매불망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렸으나 그 메시아가 오셨 을 때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도 메시아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경이고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행하신 일을 보고 깨닫는 사람은 굉장히 복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요 12:35-38)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빛이 그들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을 동안에 그 빛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너무도 복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을 행하셨는데 그 표적을 보고도 그들은 예수님을 못 믿었습니다.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 이적은 일차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적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영이 죽어 있었는데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새 생명을 받아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적 중의 이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고 죽을 장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아 그 다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것이 이 일의 그림자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우리의 영혼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고 이 세상에서 우리 마음이 돌아선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이 돌아선 것이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들의 영혼 속에 일어난 큰 이적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영이 죽어 있던 사람이었는데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큰 이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일차적으로 영이 살아나는 이적을 보았고 계속적으로 또 하나님의 역사를 교회 가운데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주님이 이름을 두셔서 그 이름으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 찬송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열방 즉 세상은 하나님이 감찰하십니다. 감찰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엄숙한 눈으로 지켜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증거하라
하나님께 송축한다는 것은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른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여 들리게 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 속에 이름을 두시고 그들을 구원하고 어떤 일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 삶은 이방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이방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이었던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볼 때에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
저는 주일 학교 교재를 쓰면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가 두 사람을 택해서 여리고를 정탐해 오라고 했는데 여리고에 라합이라는 기생이 있었습니다. 기생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여관집 주인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여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신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육지같이 건너게 하고 지금까지 행하신 여러 일들을 들으면서 간담이 서늘하여 지금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여리고 사람들이 알고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주변 민족들의 주목거리가 된 것처럼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주목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지켜 보는 가운데 온갖 억울한 비난과 핍박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굳굳히 난관을 헤쳐왔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소리 높여 외치는 것입니다.
짓밟히고 억눌려 죽은 것 같더니만 아직도 건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주 특별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꾸준히 주님의 일을 위하여 전진해 나아가는 것은 우리 힘이 아닌 주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정금같이 단련하시는 주님
이 대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서 걸어가는 광경을 표현한 것이지만 현재 우리 교회가 나아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실족케 하지 않으시고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같이 정금같이 단련하시기 위해서 겪게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이 어려운 짐을 허리에 지고 머리를 짓밟히기도 하며 불과 물을 통과한 후에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고전 10: 1-3)
이스라엘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으며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련을 주신 것은 그들을 정금같이 나오게 단련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산 제사를 드리는 생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여러가지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가운데서 번제는 소나 양을 잡아 재가 되도록 불살라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나 화목제를 지낼 때는 고기를 제사장들이 먹는데 번제는 완전히 불살라서 드리기 때문에 제사장이 먹을 수 없습니다. 번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완전히 불살라서 바쳐졌다는 뜻이 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완전히 불살라져서 하나님께 바쳐진 일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이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겠다고 하였는데 구약시대에 주의 집은 성전이고 신약시대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6)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여기에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하였는데 우리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주님께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 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2-1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많은 일이 생겨나는데 그 일을 어떤 한 사람이 다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은사와 믿음의 분량대로 서로 협력하여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요 하나가 되어 주님과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섬김을 받기를 원하고 남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남에게 섬김 받기를 좋아한다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자격은 없지만은 부득이 해서 모임 가운데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해 왔지만 이 일도 성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각자가 자기 맡은 일을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하지 않고 성실히 최선을 다하여 하는 것이 바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일이요. 번제입니다.우리가 자칫 맡은 일에 게으름을 피우기 쉽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현재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하고 있는가 깊이 반성해 봐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해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헌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번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고 하나님이 받으실 수도 없었는데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이들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그것이 바로 번제물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서 우리들이 예수님이 주신 그 새 생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쳐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임 가운데서 성도를 섬긴다든지 모임의 어떤 일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너무 게을러 일이 힘들면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라도 중간에 그만 일이 많습니다.
서원한 것을 반드시 갚으라
우리는 주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을 때에라든지 어느날 어떤 말씀을 깨닫고 감사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한 서원이 마음 속에 있다면 그것을 갚으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내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그 일을 이루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여 이번에 저를 돌봐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를 하곤 합니다. 이렇듯 자신이 어려울 때를 당하여 하나님께 입으로 서원한 것을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작정하는 것이나 헌금을 작정하는 것이 다 서원입니다. 종종 헌금을 작정해 놓고도 실천하지 않는 일들이 있는데 부득이 해서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께 자백을 해야 합니다. 만일 작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무관심하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큰 문제 뿐만 아니라 지극히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철저해야 합니다.
수소와 수양은 바로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의미입니다.
고난 뒤에 오는 찬송과 감사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참으로 보고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시험과 시련을 참고 견딥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문제가 다 풀리면서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드리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기도의 선행 조건
마음에 죄를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특히 우리들이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해야 할 죄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 간에 원망으로 마음에 담을 쌓고 있으면 기도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다면 먼저 그 형제와 화목하고 난 후에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형제나 자매의 잘못한 문제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피차 간에 마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풀지 않고 큰 소리로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은 다 위선입니다. 형제를 찾아가서 이야기해도 형제가 안 들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내 마음의 문제를 풀고 형제에게 할 도리를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를 읊은 시인은 자기는 죄악을 품은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해도 답답하고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와 풀어야 할 문제가 있지 않은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틀림없이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구원 안 받은 세계라도 만일 내 편에서 잘못이 있으면 해결을 해야 합니다. 가령 구원 안 받은 사람에게서 돈을 빌린 뒤 갚지 않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 기도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물질문제가 있겠지만 그 문제 이외에 서로 말로 다투었다든지 오해를 하게 된 일이 있다면 그것도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제가 풀리고 화해가 이루어져야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입으로 하는 기도 뿐만이 아니라 성도들 간의 교제도 기도이므로 교제가 막혀 있다면 기도가 전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편 66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름을 두시고 그 이름으로 역사하시는 영광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찬송의 시입니다. 현재 우리들도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서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볼 수 있다면 담대하고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