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1:1-24]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수치와 멸망을 당케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시편 70편은 시편 40편 13절 이하와 동일한 말씀이므로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이 시편 71편은 다윗이 비교적 젊은 시절에 읊은 시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골리앗을 대항하던 시절에 읊은 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부터 늘 투쟁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서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해 달라는 내용이 중심이 되어 있는 이 시도 역시 예수님의 생애를 예표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탄의 도전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시 71:1-2)
다윗은 일생 동안 항상 안팎으로 원수들에게 도전을 받고 투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목자 생활을 할 때는 맹수와 싸웠고 나중에는 원수들과 싸워 이겼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 17:33-36)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다윗처럼 원수로부터 도전을 받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사탄에게 공격을 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원수에게 도전을 받을 때 세상 사람들에게 피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으로 피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라는 말로써 이 시가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과 도전을 받는 것은 에베소서 6장에 있는 말씀대로 혈과 육이 아니고 정세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로부터서입니다. 가령 유혹을 받는 것도 사탄의 도전이고 병마에 시달리는 것도 역시 사탄의 도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모양으로 원수 사탄의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원수에 대해서 잘 모르면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없습니다. 적을 모르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원수를 아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군병들아" 라는 찬송을 부르듯이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영적인 전쟁인데 항상 원수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전해 옵니다. 때로는 물질로 유혹을 하고 때로는 사람으로 유혹하여 올무에 걸리게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궤계를 잘 모르면 육신적으로 대처를 하기 쉽습니다. 상대방이 내게 성을 내면 나도 덩달아 성을 냅니다. 그것 역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원수에 대해서 잘 알고 그 모든 유혹과 시험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방법은 주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승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있을 때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신 주님께로 피해 버리면 완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록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지만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사탄의 공격을 받으셨지만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이기셨습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시 71:2)
우리들 자신은 비록 의롭지 않지만 주님의 의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의는 조금 차원이 다릅니다. 이 시편71편에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문제가 중점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의를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이 세상에 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과 권위와 진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창조된 것도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렇듯 절대적인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와 사랑의 속성을 아울러 지니고 계시는데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인간 역사 속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이 시편 71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보존되고 유지되어 가는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는 달리 우리 사람들의 의는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의만을 알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의 통로를 막는 사탄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시 71:3-4)
하나님은 천지만물과 인간을 자신의 절대적인 의에 의해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과 힘과 법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의 법칙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만물속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계시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도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에는 죄 없는 의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의가 하나님처럼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사탄이 개입을 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의에서 흘러나오는 힘과 능력에 의해서 만물을 지배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만일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을 의롭게 통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의를 힘입어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의의 통로를 막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마침내 인간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단절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아담은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이 본래 하나님의 의 속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의의 통로가 막혀 버리자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권위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의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에서 단절이 되어 버리고 나니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관계가 없이 완전히 무능한 인간, 죄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죄와 접촉을 하면서 양심이 부끄러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를 꺼리고 담력이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 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며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당하고 힘있게 살아가려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 앞에 자신을 내놓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백할 것은 자백하고 갚아야 할 것은 갚아 철저히 죄를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피를 다시 음미하면서 믿음을 회복하여 신앙이 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항상 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사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로운 관계를 단절해 버리려고 온갖 궤계를 꾸밉니다. 4절에 나타난 악인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는 바로 사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여 쓰시는 일꾼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71:5-6)
이 말씀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라는 말씀과 정반대되는 말 같습니다.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이 택하셨다고 하였는데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 같은 이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5-16)
여기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택함을 받았고 다음에 은혜로 부르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모태로부터 택해졌으니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울이 모태에서부터 택함을 받았지만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는 주님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데반을 죽일 때에 증인이 되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제사장들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굉장히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모태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이고 은혜로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혼돈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바울이 죄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를 안 짓는 완전한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택해 놓았지만 그가 사도직을 행사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서가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 예수님을 핍박하는 과정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기적적으로 알게 되고 그 다음에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계시를 받는 과정이 있은 이후였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사도로 등장을 하는 것이지 모태에서부터 택해졌으니까 죄도 안 짓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처럼 다윗도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 모태에서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완전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다윗 역시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왕으로 택한 사람이었지만 왕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다윗에게 나타나려면 그의 속에 있는 육신의 힘이 꺾어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의지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도 죄성은 없었지만 잠 잘 때는 자야 하고 먹을 때는 먹어야 하는 육신의 법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죄가 없으셨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서 침례를 받으시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에 일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아셨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미 택해 놓으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고 천당에 간다는 칼빈의 절대예정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 자유 의지를 발휘하여 어느날 진리를 찾을 것을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의를 찾고 마음이 가난해지면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아신다는 뜻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절대 예정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찾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찾을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예지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예지예정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하실 일꾼들을 택하는 예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왕의 직분이나 선지자의 직분 사도의 직분 등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모태에서부터 택해졌다는 말은 사도로 택해졌다는 뜻입니다. 다윗도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가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미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13)
일곱 아들들이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기름 부어서 왕을 세울 만한 택한 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정해 놓으신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 자신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를모태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선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길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시 71:7-8)
다윗의 생애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도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육신의 방법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받은 혈통을 좇아서 다 그 육신의 혈기를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는 다른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세상 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세상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보고 이상한 사람들로 취급하기 때문에 구원은 받았지만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상하게 취급받고 이상하게 보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그것을 싫어합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을 똑같이 가고 싶어합니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무가 되어 그들 속에 함께 섞여 세상적으로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습니다. 어린 소년인데도 양을 치면서 사자나 곰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자나 곰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사탄과 싸워 이기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우리가 그렇게 승리의 생활을 하려고 하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다윗이 물매를 던지니까 골리앗의 이마에 쳐박혔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종횡무진으로 활동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지가 얼마 안되어 몰라서 그렇겠지만 구원받기 전에 하던 일을 그대로 합니다. 무덤 앞에 가서 절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기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빠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찬송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점점 더 힘찬 삶을 살았던 갈렙의 믿음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시 71:9)
[여호수아 14:6-12]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우리 모임에 노인 분들이 활동하시는 회가 있는데 제가 이 말씀을 떠올리면서 갈렙회라는 이름을 지어드렸습니다. 갈렙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 제일 남방 경계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40세였습니다. 그 때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는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사람들은 우리는 그 땅 사람들 앞에 메뚜기같다, 아낙 자손은 키가 크고 장대하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민수기에도 보면 "그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갈렙은 자신이 밟은 땅이 그의 것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할 때에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가 됩니다. 아낙 자손들이 사는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파가 차지한 그 지역을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제일 힘이 세고 키가 큰 사람들이 사는 땅을 달라, 나는 지금 팔십오 세지만 젊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싸움도 잘한다, 내가 이 땅을 정복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갈렙은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갈렙이 나이가 많았지만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한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와서는 완력이나 체력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구원받았을 때는 굉장히 활발하고 용기있고 전도도 잘하고 열심이지만 세월이 오래 가면 육신이 늙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생활도 늙어버립니다. 점점 더 힘찬 신앙생활을 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고 육신이 늙음과 함께 믿음도 늙어버립니다. 물론 열심이라는 것과 신앙생활의 성장이라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에는 대체로 굉장히 열심이 있습니다. 첫사랑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힘이 있다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시험이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꿋꿋이 싸워갈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지 오래된 사람도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냥 주저앉아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혹시 믿음이 늙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라고 하였는데 믿는 마음이 늙지 않은 사람은 버림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승리를 할 수 있는 사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사람,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믿음이 건강한 사람이고 힘 있는 사람입니다.
원수들의 핍박과 조롱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1:10-12)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욕을 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 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8-44)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지나가는 사람도, 제사장들도, 옆에 달린 강도도 입을 삐죽이면서 다 욕을 했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외부적인 조건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주시지 않겠느냐, 그냥 뛰어내리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도와주시지 않고 버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면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운명하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것은 장차 부활하시기 위해서 잠시 버려지는 상태를 말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과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항상 이상히 여김을 받고 도전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죽은 자 같으나 죽지 않고 굳굳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차게 찬송을 부르는 생활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수치와 멸망을 당케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3-14)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더욱 더욱 주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생활 가운데서 힘차게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종종 찬송을 게을리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반성해야 합니다. 주일이나 기타 집회 시간이면 일찍일찍 오셔서 찬송을 배웠으면 합니다.
전에 우리가 성동교회에서 모였을 때의 일입니다. 500명 쯤 모였는데 전체가 찬송 연습을 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열심이었습니다. 파트별로 나누어 500여 명이 아주 우렁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어느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누구의 인도로 참석했다가 그 찬송 소리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찬송이 얼마나 힘이 있던지 압도를 당해 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그냥 구원받아 버렸습니다. 찬송은 이렇듯 주님의 이름을 높이 불러 증거하는 힘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자칫 잘못하면 찬송 부르는 것을 가벼이 여겨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서 기도에도 별로 힘을 안 쓰고 따라서 찬송도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그저 마음으로 믿고 신앙생활하면 되지 하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꾸준히 연습하여 잘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한 연습을 평소에 해 놓으면 어떤 때 그것을 하나님이 쓰실 때에는 굉장히 큰 힘이 있게 됩니다. 모두들 게으르지 말고 찬송을 부지런히 배웠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행하는 주님의 능하신 행적一부활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시 71:15-16)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라고 했는데 능하신 행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실행하는 능하신 행적입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나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4-25)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자면 먼저 사탄을 심판해야만 합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탄이 들어와서 그것을 막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사탄이 통치하는 불의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시행이 되려고 하면 사탄을 먼저 때려잡아야 됩니다. 그러면 사탄을 어떻게 때려잡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를 지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사탄의 운명을 지신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사탄을 심판해버렸습니다. 십자가는 사탄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 속에 묻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만약 이천 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예수님이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됩니까? 사탄은 심판되었지만 예수님이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에게 그 의가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사실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 16:9-10)
이 성경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여기서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막혀 있던 하나님의 그 큰 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행사가 이 세상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실생활 속의 훈련을 통해서 배우는 주님의 교훈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7-18)
주님의 말씀은 실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교훈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서당에서 훈장이 학생들을 앞에 놓고 천자문 가르치듯 교훈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이나 집회 시간에 이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은 읽고 들은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주님으로부터 교훈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설교 듣는 시간에 혹 어떤 사람은 무언가 배울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교훈하시는 것은 실제 생활 속에서 고난과 역경의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다윗이 어릴 때부터 목자 생활을 하면서 사자와 곰을 잡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를 교훈해 가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양치는 목자로서 사자와 곰을 때려잡는 그 교훈이 없었으면 나중에 골리앗도 죽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골리앗은 사탄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일하면서 살아가는 실생활 속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교훈을 받아 가는 삶이 있어야 사탄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실제 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가령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돈이 필요하니까 월급을 받기 위해서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매여서 사는 것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돈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동시켜 봉사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직장에 매달려 돈벌이하기 위해서 억지로 일하는 것은 부역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도 자기 마음에 어떤 결정만 확실히 하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활동이 주님을 섬기는 일과 연결이 되면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의 큰 일一성령을 보내사 교회를 세우심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시 71:19)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승천하시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가 세워지는 일이 바로 큰 일입니다.
고난 속에서 발견하는 주님의 크신 은혜와 평안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시 71:20)
우리가 왜 어떤 때는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까요?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사람들은 그저 무사안일하면 평안한 줄 압니다만 그것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깊은 어려움 속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났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기쁨을 참으로 맛볼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복 있는 사람입니다. 즉, 죽음을 맛본 사람은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지로 나중에 부활하여 들림받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 아무렇게나 산 사람과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괴로움을 당한 사람의 영광이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의가 나에게 나타나서 의롭게 내 삶이 형성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만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시행되어야 하는지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어도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죄를 지었으면 두려워할 줄 알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 앞에 자신을 맡겨 죄를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괴로움과 어려움이 뒤따르지만 그것을 반드시 거쳐가야만 참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하는 생활과 진정한 찬송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시 71:21-24)
이 마지막 부분은 전부가 찬송입니다. 핍박과 환란과 고통 속에서 살다가 거기서 자유를 얻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생활이 이루어졌을 때 이렇듯 끝없이 끝없이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핍박과 어려움을 슬쩍 피하면서 그냥 적당히 살아간다면 이러한 감사가 우러날 수 없습니다.
시편 70편은 시편 40편 13절 이하와 동일한 말씀이므로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이 시편 71편은 다윗이 비교적 젊은 시절에 읊은 시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골리앗을 대항하던 시절에 읊은 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부터 늘 투쟁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서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해 달라는 내용이 중심이 되어 있는 이 시도 역시 예수님의 생애를 예표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탄의 도전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다윗은 일생 동안 항상 안팎으로 원수들에게 도전을 받고 투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목자 생활을 할 때는 맹수와 싸웠고 나중에는 원수들과 싸워 이겼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 17:33-36)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다윗처럼 원수로부터 도전을 받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사탄에게 공격을 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원수에게 도전을 받을 때 세상 사람들에게 피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으로 피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라는 말로써 이 시가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과 도전을 받는 것은 에베소서 6장에 있는 말씀대로 혈과 육이 아니고 정세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로부터서입니다. 가령 유혹을 받는 것도 사탄의 도전이고 병마에 시달리는 것도 역시 사탄의 도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모양으로 원수 사탄의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원수에 대해서 잘 모르면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없습니다. 적을 모르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원수를 아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군병들아" 라는 찬송을 부르듯이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영적인 전쟁인데 항상 원수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전해 옵니다. 때로는 물질로 유혹을 하고 때로는 사람으로 유혹하여 올무에 걸리게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궤계를 잘 모르면 육신적으로 대처를 하기 쉽습니다. 상대방이 내게 성을 내면 나도 덩달아 성을 냅니다. 그것 역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원수에 대해서 잘 알고 그 모든 유혹과 시험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방법은 주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승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있을 때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신 주님께로 피해 버리면 완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록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지만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사탄의 공격을 받으셨지만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이기셨습니다.
우리들 자신은 비록 의롭지 않지만 주님의 의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의는 조금 차원이 다릅니다. 이 시편71편에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문제가 중점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의를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이 세상에 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과 권위와 진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창조된 것도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렇듯 절대적인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와 사랑의 속성을 아울러 지니고 계시는데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인간 역사 속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이 시편 71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보존되고 유지되어 가는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는 달리 우리 사람들의 의는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의만을 알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의 통로를 막는 사탄
하나님은 천지만물과 인간을 자신의 절대적인 의에 의해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과 힘과 법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의 법칙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만물속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계시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도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에는 죄 없는 의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의가 하나님처럼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사탄이 개입을 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의에서 흘러나오는 힘과 능력에 의해서 만물을 지배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만일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을 의롭게 통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의를 힘입어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의의 통로를 막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마침내 인간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단절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아담은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이 본래 하나님의 의 속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의의 통로가 막혀 버리자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권위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의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에서 단절이 되어 버리고 나니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관계가 없이 완전히 무능한 인간, 죄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죄와 접촉을 하면서 양심이 부끄러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를 꺼리고 담력이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 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며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당하고 힘있게 살아가려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 앞에 자신을 내놓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백할 것은 자백하고 갚아야 할 것은 갚아 철저히 죄를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피를 다시 음미하면서 믿음을 회복하여 신앙이 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항상 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사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로운 관계를 단절해 버리려고 온갖 궤계를 꾸밉니다. 4절에 나타난 악인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는 바로 사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여 쓰시는 일꾼
라는 말씀과 정반대되는 말 같습니다.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이 택하셨다고 하였는데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 같은 이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5-16)
여기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택함을 받았고 다음에 은혜로 부르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모태로부터 택해졌으니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울이 모태에서부터 택함을 받았지만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는 주님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데반을 죽일 때에 증인이 되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제사장들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굉장히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모태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이고 은혜로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혼돈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바울이 죄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를 안 짓는 완전한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택해 놓았지만 그가 사도직을 행사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서가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 예수님을 핍박하는 과정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기적적으로 알게 되고 그 다음에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계시를 받는 과정이 있은 이후였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사도로 등장을 하는 것이지 모태에서부터 택해졌으니까 죄도 안 짓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처럼 다윗도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 모태에서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완전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다윗 역시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왕으로 택한 사람이었지만 왕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다윗에게 나타나려면 그의 속에 있는 육신의 힘이 꺾어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의지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도 죄성은 없었지만 잠 잘 때는 자야 하고 먹을 때는 먹어야 하는 육신의 법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죄가 없으셨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서 침례를 받으시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에 일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아셨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미 택해 놓으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고 천당에 간다는 칼빈의 절대예정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 자유 의지를 발휘하여 어느날 진리를 찾을 것을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의를 찾고 마음이 가난해지면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아신다는 뜻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절대 예정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찾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찾을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예지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예지예정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하실 일꾼들을 택하는 예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왕의 직분이나 선지자의 직분 사도의 직분 등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모태에서부터 택해졌다는 말은 사도로 택해졌다는 뜻입니다. 다윗도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가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미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13)
일곱 아들들이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기름 부어서 왕을 세울 만한 택한 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정해 놓으신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 자신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를모태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선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길
다윗의 생애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도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육신의 방법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받은 혈통을 좇아서 다 그 육신의 혈기를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는 다른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세상 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세상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보고 이상한 사람들로 취급하기 때문에 구원은 받았지만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상하게 취급받고 이상하게 보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그것을 싫어합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을 똑같이 가고 싶어합니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무가 되어 그들 속에 함께 섞여 세상적으로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습니다. 어린 소년인데도 양을 치면서 사자나 곰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자나 곰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사탄과 싸워 이기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우리가 그렇게 승리의 생활을 하려고 하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다윗이 물매를 던지니까 골리앗의 이마에 쳐박혔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종횡무진으로 활동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지가 얼마 안되어 몰라서 그렇겠지만 구원받기 전에 하던 일을 그대로 합니다. 무덤 앞에 가서 절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기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빠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찬송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점점 더 힘찬 삶을 살았던 갈렙의 믿음
우리 모임에 노인 분들이 활동하시는 회가 있는데 제가 이 말씀을 떠올리면서 갈렙회라는 이름을 지어드렸습니다. 갈렙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 제일 남방 경계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40세였습니다. 그 때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는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사람들은 우리는 그 땅 사람들 앞에 메뚜기같다, 아낙 자손은 키가 크고 장대하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민수기에도 보면 "그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갈렙은 자신이 밟은 땅이 그의 것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할 때에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가 됩니다. 아낙 자손들이 사는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파가 차지한 그 지역을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제일 힘이 세고 키가 큰 사람들이 사는 땅을 달라, 나는 지금 팔십오 세지만 젊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싸움도 잘한다, 내가 이 땅을 정복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갈렙은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갈렙이 나이가 많았지만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한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와서는 완력이나 체력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구원받았을 때는 굉장히 활발하고 용기있고 전도도 잘하고 열심이지만 세월이 오래 가면 육신이 늙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생활도 늙어버립니다. 점점 더 힘찬 신앙생활을 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고 육신이 늙음과 함께 믿음도 늙어버립니다. 물론 열심이라는 것과 신앙생활의 성장이라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에는 대체로 굉장히 열심이 있습니다. 첫사랑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힘이 있다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시험이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꿋꿋이 싸워갈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지 오래된 사람도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냥 주저앉아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혹시 믿음이 늙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라고 하였는데 믿는 마음이 늙지 않은 사람은 버림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승리를 할 수 있는 사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사람,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믿음이 건강한 사람이고 힘 있는 사람입니다.
원수들의 핍박과 조롱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욕을 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 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8-44)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지나가는 사람도, 제사장들도, 옆에 달린 강도도 입을 삐죽이면서 다 욕을 했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외부적인 조건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주시지 않겠느냐, 그냥 뛰어내리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도와주시지 않고 버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면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운명하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것은 장차 부활하시기 위해서 잠시 버려지는 상태를 말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과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항상 이상히 여김을 받고 도전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죽은 자 같으나 죽지 않고 굳굳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차게 찬송을 부르는 생활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더욱 더욱 주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생활 가운데서 힘차게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종종 찬송을 게을리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반성해야 합니다. 주일이나 기타 집회 시간이면 일찍일찍 오셔서 찬송을 배웠으면 합니다.
전에 우리가 성동교회에서 모였을 때의 일입니다. 500명 쯤 모였는데 전체가 찬송 연습을 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열심이었습니다. 파트별로 나누어 500여 명이 아주 우렁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어느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누구의 인도로 참석했다가 그 찬송 소리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찬송이 얼마나 힘이 있던지 압도를 당해 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그냥 구원받아 버렸습니다. 찬송은 이렇듯 주님의 이름을 높이 불러 증거하는 힘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자칫 잘못하면 찬송 부르는 것을 가벼이 여겨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서 기도에도 별로 힘을 안 쓰고 따라서 찬송도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그저 마음으로 믿고 신앙생활하면 되지 하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꾸준히 연습하여 잘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한 연습을 평소에 해 놓으면 어떤 때 그것을 하나님이 쓰실 때에는 굉장히 큰 힘이 있게 됩니다. 모두들 게으르지 말고 찬송을 부지런히 배웠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행하는 주님의 능하신 행적一부활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라고 했는데 능하신 행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실행하는 능하신 행적입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나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4-25)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자면 먼저 사탄을 심판해야만 합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탄이 들어와서 그것을 막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사탄이 통치하는 불의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시행이 되려고 하면 사탄을 먼저 때려잡아야 됩니다. 그러면 사탄을 어떻게 때려잡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를 지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사탄의 운명을 지신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사탄을 심판해버렸습니다. 십자가는 사탄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 속에 묻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만약 이천 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예수님이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됩니까? 사탄은 심판되었지만 예수님이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에게 그 의가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사실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 16:9-10)
이 성경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여기서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막혀 있던 하나님의 그 큰 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행사가 이 세상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실생활 속의 훈련을 통해서 배우는 주님의 교훈
주님의 말씀은 실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교훈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서당에서 훈장이 학생들을 앞에 놓고 천자문 가르치듯 교훈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이나 집회 시간에 이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은 읽고 들은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주님으로부터 교훈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설교 듣는 시간에 혹 어떤 사람은 무언가 배울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교훈하시는 것은 실제 생활 속에서 고난과 역경의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다윗이 어릴 때부터 목자 생활을 하면서 사자와 곰을 잡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를 교훈해 가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양치는 목자로서 사자와 곰을 때려잡는 그 교훈이 없었으면 나중에 골리앗도 죽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골리앗은 사탄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일하면서 살아가는 실생활 속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교훈을 받아 가는 삶이 있어야 사탄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실제 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가령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돈이 필요하니까 월급을 받기 위해서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매여서 사는 것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돈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동시켜 봉사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직장에 매달려 돈벌이하기 위해서 억지로 일하는 것은 부역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도 자기 마음에 어떤 결정만 확실히 하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활동이 주님을 섬기는 일과 연결이 되면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의 큰 일一성령을 보내사 교회를 세우심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승천하시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가 세워지는 일이 바로 큰 일입니다.
고난 속에서 발견하는 주님의 크신 은혜와 평안
우리가 왜 어떤 때는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까요?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사람들은 그저 무사안일하면 평안한 줄 압니다만 그것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깊은 어려움 속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났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기쁨을 참으로 맛볼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복 있는 사람입니다. 즉, 죽음을 맛본 사람은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지로 나중에 부활하여 들림받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 아무렇게나 산 사람과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괴로움을 당한 사람의 영광이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의가 나에게 나타나서 의롭게 내 삶이 형성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만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시행되어야 하는지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어도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죄를 지었으면 두려워할 줄 알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 앞에 자신을 맡겨 죄를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괴로움과 어려움이 뒤따르지만 그것을 반드시 거쳐가야만 참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하는 생활과 진정한 찬송
이 마지막 부분은 전부가 찬송입니다. 핍박과 환란과 고통 속에서 살다가 거기서 자유를 얻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생활이 이루어졌을 때 이렇듯 끝없이 끝없이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핍박과 어려움을 슬쩍 피하면서 그냥 적당히 살아간다면 이러한 감사가 우러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