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7:1-1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시편 27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던 때에 지은 시라고 생각됩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
[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다 놓아도 볼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좋은 것을 볼 수 있고 빛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시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물리적인 생명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오는 생명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알아볼 수 있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알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또 성령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빛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자체가 빛을 나타낼 수 있고 빛을 알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느낌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시련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빛이시고 생명이시고 구원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시련과 어둠을 이겨갈 수 있었습니다.
[시편 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구원받은 것을 다른 말로 눈이 뜨였다고 표현합니다. 눈이 뜨였다는 것은 영적인 안목이 밝아졌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없었을 때는 눈이 어두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지만 눈을 뜨고 나니까 유대인들 중에 지도자, 학자, 서기관들까지도 잘 모르는 얘기를 했습니다. 생명을 받고 눈을 뜬 것입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어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27:2-3]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다윗은 결코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라고 말한 것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소원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다윗 왕에게는 단 하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이 너무 많고 욕심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7)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이 바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육신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라는 것과 육신이 요구하는 것이 서로 싸우기 때문에 이것도 저것도 못 하는 상태가 됩니다.
내적으로는 좀 더 신앙생활을 잘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생활을 하고 싶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 사람, 육신에는 다른 법이 있어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지만, 육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치 않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한 가지만 바라보고 구할 때 그 일이 주님의 뜻에 합당하면 그것은 꼭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윗의 소원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소원과 똑같은 소원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소원은 이루어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었으나 신약 시대에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너희가 하나님의 집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외형적인 건물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사도행전 17:24)라고 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겠느냐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손으로 지은 집, 손으로 지은 성전은 참 성전이 아닙니다. 참 성전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상징입니다. 그 실체는 신약시대의 교회입니다. 구약의 솔로몬 성전처럼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하며 사랑하고 서로 돕는 곳입니다.
[히브리서 3:1-4]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구약시대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신약시대의 성전인 교회도 지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약시대의 참 교회의 그림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사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이 다윗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큰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굉장히 축복된 삶입니다.
주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성품
다윗은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의로우신 분이고 영광이 가득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 전부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겸한 분인데 겉으로 보이는 육신은 사람이지만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사도행전 14:9-1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2:8-10]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볼품이 없었지만 성전 내부가 금으로 꾸며진 것처럼 예수님 안에는 신성이 충만했습니다. 사랑과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이 가득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으로 인간 세상에 나타나신 것처럼 지금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대신 예수님의 모든 성품이 교회 안에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부요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로새서 2:3)고 했습니다. 감취어진 하나님의 지혜와 모든 보화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한다고 했습니다.
발람의 축복의 노래一여호와의 전의 아름다움
[민수기 24:3-8]
그가 노래를 지어 가로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 나라가 진흥하리로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에 장막을 쳤는데 모압 왕 아각이라는 사람이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에게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모압 왕의 청을 들어 발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하러 나귀를 타고 가는데 나귀가 말을 했습니다. 그런 이후로부터 발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려고 입을 열면 축복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그 당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속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계시니까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떻게 보든지 간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이스라엘의 장막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교회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 계셔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생명에 접해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표현입니다.
[시편 84:1-10]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시편 84편에는 ‘고라 자손의 시’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궁전,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교회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신부를 얻기 위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이고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 신부는 교회입니다. 완성된 교회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아름다운 보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귀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포도나무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원줄기이고 거기에 가지들이 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 농부입니다. 포도나무는 사람이 길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길러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일이 생기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일을 해결해보려고 노력도 해봅니다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있습니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시편 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원수는 어떤 때는 핍박, 어떤 때는 시련, 어떤 때는 질병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해도 마음이 초막 안에 있으면 지킴을 받습니다. 집 안에 있으면 화살을 모면할 수 있지만 집을 떠나면 원수의 화살에 맞는 것입니다.
죄를 짓거나 어떤 일을 당해도 우리는 교회 안에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보호 받습니다. 죄를 짓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와 신자 사이에 문제가 생겨도 교회를 등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모든 담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신앙생활은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빌레몬서 1:6)는 말씀처럼 믿음의 교제 속에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가 끊어져 버리면 신앙생활이 되지 않고 사탄이 쏜 화살에 쓰러집니다.
그러나 핍박을 받든지 시련을 받든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함께 움직이는 그 안에 있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호를 받습니다.
[야고보서 5:13-16]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고난을 당했을 때 자기 방법대로 애쓰거나 노력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또 좋은 일, 즐거운 일이 생겼을 때 육신적으로 자랑하거나 떠들지 말고 하나님께 찬송 드리라고 했습니다.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서로 죄를 고하라고 한 것은 기도하는데 죄가 있으면 그 기도가 소용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하여 서로 간에 막힌 담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 교제가 되고 교통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6-1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란 말이 반석이라는 의미이지만 베드로 자신이 반석이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반석입니다. 반석은 예수님이시지 사람이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살기만 하면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선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마태복음 7:26)과는 다릅니다. 환난이 일어나거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성도들이 서로 섬기면서 사랑을 같이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역사인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좇는 삶
[시편 27:7]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뜻 없는 소리는 없다”(고린도전서 14:10)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마음 속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해서 항상 불평하는 소리만 나오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다는 소리가 나오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소리는 마음의 소원의 표현입니다. 자기 양심 속에서 항상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님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있습니다. “내 얼굴을 찾으라”고 하실 때에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는 그 얼굴을 찾는지 아니면 다른 얼굴을 찾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시편 27: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다윗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104:28-29]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자연에도 하나님의 법칙이 있습니다. 자연 법칙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소짓는 얼굴, 자비하신 얼굴, 하나님의 사랑의 얼굴이 나타날 때에 모든 동물과 만상이 힘을 얻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얼굴을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두려워 떤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마음이 어두워지고 캄캄해질 때가 있어요. 그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잊어버린 때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의 한 표현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무섭게 보이지만 어떤 말씀을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감사하고 사랑이 많으신 얼굴로 마음에 비췹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마음에 어떻게 비취느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레미아 33: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워 성을 돌아보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얼굴을 가리웠다’는 말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니까 바벨론(사탄)에게 잡혀간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있는 어머니는 혹시 위험에 빠질까 넘어질까 항상 아이를 주목합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 앞에 있으면 안전하게 보호 받습니다.
우리가 자유 의사를 가지고 세상에 살지만 우리 마음 속은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것을 찾거나 세상의 것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은 복을 받는 것이고 사랑을 받는 것이고, 은혜를 입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뉘우치고 교제를 다시 회복하여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입니다.
[시편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세상이 개인주의와 물질 숭배에 빠지게 되면서 부모도 자식을 버리게 되는 경우가 나타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영접하신다는 뜻입니다.
주의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시편 27:11]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마태복음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주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주의 길은 십자가의 도를 의미하며 좁은 문이 십자가입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찬이 죄짐을 짊어지고 가다가 구렁텅이에도 빠지고 위험에도 처하는 여러 과정을 거쳐 도달한 곳이 십자가입니다. 크리스챤은 십자가 문 밑에서 죄짐을 떨쳐버리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문은 다시 태어나는 문입니다. 죄짐을 짊어진 죄인은 십자가 아래에서 죽었다가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시편 27:12]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사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히브리서 2:14)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사망의 권세는 사탄에게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4-37]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을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너희가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악을 토하는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힘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말은 자신의 행위를 대표하고 삶을 좌우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말을 경건하게 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말할지라도 말하는 데 주의하는 것은 신앙이 성장했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말은 인격의 한 표현이므로 신앙생활이 건전하게 되어간다면 함부로 말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27:13-14]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새 생명을 얻어 죽은 자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교회 가운데 산 돌로 함께 지어져 가는 거룩한 생명체들입니다. 이 주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위로부터 무궁무진하게 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너무도 영광스러움을 느낍니다. 산 자들인 우리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떤 핍박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더욱 큰 영광을 예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알 때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게 됩니다. 고난과 핍박의 훈련 과정을 겪으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발견한 다윗의 이 간증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큰 교훈을 던져줍니다.
시편 27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던 때에 지은 시라고 생각됩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
“여호와는 나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다 놓아도 볼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좋은 것을 볼 수 있고 빛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시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물리적인 생명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오는 생명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알아볼 수 있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알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또 성령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빛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자체가 빛을 나타낼 수 있고 빛을 알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느낌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시련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빛이시고 생명이시고 구원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시련과 어둠을 이겨갈 수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것을 다른 말로 눈이 뜨였다고 표현합니다. 눈이 뜨였다는 것은 영적인 안목이 밝아졌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없었을 때는 눈이 어두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지만 눈을 뜨고 나니까 유대인들 중에 지도자, 학자, 서기관들까지도 잘 모르는 얘기를 했습니다. 생명을 받고 눈을 뜬 것입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어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결코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라고 말한 것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소원
다윗 왕에게는 단 하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이 너무 많고 욕심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7)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이 바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육신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라는 것과 육신이 요구하는 것이 서로 싸우기 때문에 이것도 저것도 못 하는 상태가 됩니다.
내적으로는 좀 더 신앙생활을 잘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생활을 하고 싶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 사람, 육신에는 다른 법이 있어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지만, 육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치 않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한 가지만 바라보고 구할 때 그 일이 주님의 뜻에 합당하면 그것은 꼭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윗의 소원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소원과 똑같은 소원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소원은 이루어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었으나 신약 시대에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너희가 하나님의 집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외형적인 건물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사도행전 17:24)라고 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겠느냐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손으로 지은 집, 손으로 지은 성전은 참 성전이 아닙니다. 참 성전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상징입니다. 그 실체는 신약시대의 교회입니다. 구약의 솔로몬 성전처럼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하며 사랑하고 서로 돕는 곳입니다.
구약시대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신약시대의 성전인 교회도 지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약시대의 참 교회의 그림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사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이 다윗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큰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굉장히 축복된 삶입니다.
주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성품
다윗은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의로우신 분이고 영광이 가득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 전부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겸한 분인데 겉으로 보이는 육신은 사람이지만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사도행전 14:9-1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볼품이 없었지만 성전 내부가 금으로 꾸며진 것처럼 예수님 안에는 신성이 충만했습니다. 사랑과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이 가득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으로 인간 세상에 나타나신 것처럼 지금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대신 예수님의 모든 성품이 교회 안에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부요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로새서 2:3)고 했습니다. 감취어진 하나님의 지혜와 모든 보화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한다고 했습니다.
발람의 축복의 노래一여호와의 전의 아름다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에 장막을 쳤는데 모압 왕 아각이라는 사람이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에게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모압 왕의 청을 들어 발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하러 나귀를 타고 가는데 나귀가 말을 했습니다. 그런 이후로부터 발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려고 입을 열면 축복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그 당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속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계시니까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떻게 보든지 간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이스라엘의 장막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교회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 계셔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생명에 접해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표현입니다.
이 시편 84편에는 ‘고라 자손의 시’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궁전,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교회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신부를 얻기 위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이고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 신부는 교회입니다. 완성된 교회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아름다운 보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귀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원줄기이고 거기에 가지들이 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 농부입니다. 포도나무는 사람이 길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길러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일이 생기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일을 해결해보려고 노력도 해봅니다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있습니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원수는 어떤 때는 핍박, 어떤 때는 시련, 어떤 때는 질병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해도 마음이 초막 안에 있으면 지킴을 받습니다. 집 안에 있으면 화살을 모면할 수 있지만 집을 떠나면 원수의 화살에 맞는 것입니다.
죄를 짓거나 어떤 일을 당해도 우리는 교회 안에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보호 받습니다. 죄를 짓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와 신자 사이에 문제가 생겨도 교회를 등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모든 담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신앙생활은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빌레몬서 1:6)는 말씀처럼 믿음의 교제 속에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가 끊어져 버리면 신앙생활이 되지 않고 사탄이 쏜 화살에 쓰러집니다.
그러나 핍박을 받든지 시련을 받든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함께 움직이는 그 안에 있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호를 받습니다.
고난을 당했을 때 자기 방법대로 애쓰거나 노력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또 좋은 일, 즐거운 일이 생겼을 때 육신적으로 자랑하거나 떠들지 말고 하나님께 찬송 드리라고 했습니다.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서로 죄를 고하라고 한 것은 기도하는데 죄가 있으면 그 기도가 소용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하여 서로 간에 막힌 담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 교제가 되고 교통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란 말이 반석이라는 의미이지만 베드로 자신이 반석이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반석입니다. 반석은 예수님이시지 사람이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살기만 하면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선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마태복음 7:26)과는 다릅니다. 환난이 일어나거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성도들이 서로 섬기면서 사랑을 같이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역사인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좇는 삶
“뜻 없는 소리는 없다”(고린도전서 14:10)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마음 속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해서 항상 불평하는 소리만 나오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다는 소리가 나오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소리는 마음의 소원의 표현입니다. 자기 양심 속에서 항상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있습니다. “내 얼굴을 찾으라”고 하실 때에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는 그 얼굴을 찾는지 아니면 다른 얼굴을 찾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연에도 하나님의 법칙이 있습니다. 자연 법칙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소짓는 얼굴, 자비하신 얼굴, 하나님의 사랑의 얼굴이 나타날 때에 모든 동물과 만상이 힘을 얻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얼굴을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두려워 떤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마음이 어두워지고 캄캄해질 때가 있어요. 그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잊어버린 때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의 한 표현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무섭게 보이지만 어떤 말씀을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감사하고 사랑이 많으신 얼굴로 마음에 비췹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마음에 어떻게 비취느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워 성을 돌아보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얼굴을 가리웠다’는 말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니까 바벨론(사탄)에게 잡혀간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있는 어머니는 혹시 위험에 빠질까 넘어질까 항상 아이를 주목합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 앞에 있으면 안전하게 보호 받습니다.
우리가 자유 의사를 가지고 세상에 살지만 우리 마음 속은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것을 찾거나 세상의 것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은 복을 받는 것이고 사랑을 받는 것이고, 은혜를 입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뉘우치고 교제를 다시 회복하여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이 개인주의와 물질 숭배에 빠지게 되면서 부모도 자식을 버리게 되는 경우가 나타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영접하신다는 뜻입니다.
주의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주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주의 길은 십자가의 도를 의미하며 좁은 문이 십자가입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찬이 죄짐을 짊어지고 가다가 구렁텅이에도 빠지고 위험에도 처하는 여러 과정을 거쳐 도달한 곳이 십자가입니다. 크리스챤은 십자가 문 밑에서 죄짐을 떨쳐버리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문은 다시 태어나는 문입니다. 죄짐을 짊어진 죄인은 십자가 아래에서 죽었다가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히브리서 2:14)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사망의 권세는 사탄에게 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을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너희가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악을 토하는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힘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말은 자신의 행위를 대표하고 삶을 좌우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말을 경건하게 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말할지라도 말하는 데 주의하는 것은 신앙이 성장했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말은 인격의 한 표현이므로 신앙생활이 건전하게 되어간다면 함부로 말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새 생명을 얻어 죽은 자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교회 가운데 산 돌로 함께 지어져 가는 거룩한 생명체들입니다. 이 주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위로부터 무궁무진하게 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너무도 영광스러움을 느낍니다. 산 자들인 우리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떤 핍박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더욱 큰 영광을 예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알 때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게 됩니다. 고난과 핍박의 훈련 과정을 겪으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발견한 다윗의 이 간증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큰 교훈을 던져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