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0편]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시편 30:1-12]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시편 30편은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지어서 낙성식을 한 일은 없지만 후대인들이 성전 낙성식 때 부른 다윗의 시입니다. 역대상 22장의 말씀은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번제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은 다윗 왕


[역대상 22:1]

다윗이 가로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모든 가나안 족속을 정복시킨 후 다윗왕은 마음이 높아져 승전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고 승리를 거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처럼 수를 계산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명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다윗왕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역대상 21:9-17]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이르시되

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혹 삼년 기근일찌, 혹 네가 석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찌,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찌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해서 마지막에 다윗 왕은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오르난의 타작 마당은 나중에 솔로몬 왕이 짓는 성전의 터가 됩니다. 장차 성전 지을 자리에 소를 잡아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리신 재앙이 중단되었습니다.


 시편 30편은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지어질 성전을 보며 읊은 것 같습니다.



[역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이스라엘을 계수하는 일, 곧 인구 수를 세는 일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어 하나님께서 삼일 동안 이스라엘 사람 칠만 명이 온역으로 죽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인구를 조사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된 것은 다윗이,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고 가나안을 정복한 것이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자 그 마음이 교만해져서 마치 자기의 힘이나 백성들에 의해서 승리한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 것입니다.


 백성들의 숫자가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었으므로 다윗이 의지하는 그 힘을 꺾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결국 칠만 명의 백성들이 죽었지만 다윗이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시편 30: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성경에 징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받는 징계가 있고 또 원수로 말미암아 당하는 징계가 있습니다. 원수로 말미암는 징계는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5:5)는 말씀처럼 원수로 말미암아 조롱을 받는 것입니다.





번제의 제물 되신 예수님


[시편 30: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백성 전체에게 내리는 징벌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써 중단되고 속죄된 것을 구원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편 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번제와 연결된 문제입니다. 다윗은 제사로 자기 죄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자기의 영혼마저도 음부에 내려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읊었습니다.



[시편 30: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리시던 벌을 중단하신 것은 번제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이 거기에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보면 주님의 이름이 나타난 곳이 성전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써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에 주님의 이름이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번제가 드려지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이 바로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축복과 은혜가 내리는 것입니다.


 번제의 제물은 예수님뿐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졌고 하나님의 뜻이 막혔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들로서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는 제물을 준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완전히 만족하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 아들이 제물 되신 것으로 기뻐하시고 완전히 만족하셨습니다. 그것이 번제입니다.


 비록 다윗이 죄를 지었지만, 그 모든 문제가 번제를 드리는 제사로 말미암아 해결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은 후일 솔로몬 때 건축될 성전 낙성식을 바라보며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고난 뒤에 오는 영원한 은총


[시편 30:5]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삼일 간 무덤 속에 계셨습니다. 그 노염은 잠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짓거나 죄를 짓지 않아도 징계받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징계라는 과정을 통해서 거룩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깨끗해지는 과정을 거쳐 주님의 신부로서 자격을 온전히 갖추게 됩니다.


 세상에 살 동안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지만, 우리가 말씀을 그냥 믿는 것만 아니라 그 말씀이 실질적으로 육신에 체험이 되어야 됩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과정에는 어려움이 따르고 많은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정결해지는 과정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 그다음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선물은 영원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라는 말씀에서 평생이라는 말은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의 죄로 말미암아 삼 일 동안 칠만 명이 죽었지만, 번제가 드려졌을 때 그 번제물을 통해서 내리는 은총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 미래의 죄까지 사함 받았지만 구원받고 나서도 죄를 짓게 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짓는 죄는 반드시 그 죗값을 지불하는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으로 단련 받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이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시련과 고난이 있습니다.



[시편 30:5]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저녁과 아침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녁은 밤을 말하는데 어두움과 슬픔이 있습니다. 반면 아침에는 기쁨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마음속의 해가 져버리면 어두움이 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에베소서 4:26)라는 말씀이 있는데 해가 져서 어둡다는 것은 성령의 빛이 마음에서 멀어졌다는 뜻입니다. 저녁에 울음이 깃들고 슬프고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죄를 지을 때는 마음이 답답하여 눈물도 흘리며 고통스러워합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답답해하며 괴로워하는 것도 신앙생활의 과정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자칫 양심이 마비되어 정말 버림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어두울 때면 그 문제를 주님께 모두 드러내놓고 기도해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침이 또 찾아옵니다.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


 이 세상에는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가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빛으로 살아갑니다. 자기의 빛은 자기의 영광과 능력과 힘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빛이고 어떤 사람은 권력이 빛이고 어떤 사람은 학문이 빛입니다. 그러다가 돈이나 명예나 학문이나 권력이나 이 모든 것이 참으로 자기 인생을 밝혀주지 못하고 참된 의미가 없음을 깨달으면 마음이 캄캄해집니다. 그것이 빛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50:11]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찌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다는 것은 인간의 문명을 말합니다. 인간이 불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 앞길이 환하게 빛나고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캄캄해져버립니다. 아무것에도 참된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하고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31:6-7]

에브라임산 위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때는 캄캄한 밤이 왔지만, 지금은 아침이 와서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에게 미쳤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을지라도 반드시 나중에는 그들을 회복시키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또 로마 군대에 멸망 받고 약 이천 년 동안 세계에 흩어졌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버려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회복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들에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나님의 백성이면 가끔씩 우리들에게 캄캄하고 고통스러운 때가 올지라도 반드시 아침이 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히 버리시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 어두움이 있지만 반드시 다음에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다윗


[시편 30: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다윗이 지은 죄의 내용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형통할 때는 자기가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자신 있다. 나는 요동치 않는다. 나는 패하지 않는다”는 자신만만한 말을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30: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라고 한 것은 다윗이 전쟁에 이기고 가나안 칠족속을 정복하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렇게 하셨는데 다윗은 ‘내가 튼튼하다. 내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워버리니까 자랑스럽던 생각은 사라지고 근심이 가득찬 것입니다.



[시편 104:18-29]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이 모든 자연계가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생명을 공급하시고 모든 질서를 유지해가십니다. 주께서 낯을 가리우면 이 대자연계도 떨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 빛에 의해서 식물이 공급되고 모든 질서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교만한 마음으로 “나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깜박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얼굴을 가리우시고 그 결과 다윗이 근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의 의미


[시편 30:8-10]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다윗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온 그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자기의 권위를 자랑하거나 영광을 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고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즐거움을 얻고 자기를 나타내고 칭찬받고 영광 받으려는 마음을 가집니다. 왕 노릇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속성입니다. 사탄이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천사장 루시퍼는 하나님처럼 지극히 높게 되고 하나님처럼 영광을 얻으려 하다가 타락하여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은 피 흘려 죽는다는 말입니다. 죽어서 흙이 되어버리면 하나님께 찬송 드리지 못합니다. 이 육신은 생명을 떠나버리면 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찬양드리기 위해서 살아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뭔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확인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구원받는 순간에는 모두가 막연하게나마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마음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에 그러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자기가 왕 노릇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겨서 모든 삶을 그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다윗도 잠깐 그런 생각이 들어 자기가 요동치 않는다고 자기 힘을 과시하다가 잠시 사탄에게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번제를 통해서 다윗은 자기에게 주어진 왕위와 자기가 살아 있는 의미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증거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역시 찬송하는 생활이고 전쟁하는 생활입니다. 찬송하는 생활이 곧 사탄을 이기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는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탄과 싸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다윗은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가는 것이 다윗의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본연의 자세를 깨달은 것입니다.





마음의 베옷을 입는 자세一회개와 자백


[시편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라는 말씀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 부녀들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그들은 기쁘고 즐거워했습니다.


 다윗이 번제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바로 부활의 생활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흘러 기쁜 시절이 다시 찾아와서 하나님 앞에 그가 회개했습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모든 백성들이 속에 베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속에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1:20-21]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두로와 시돈은 이방이고 고라신과 벳새다는 북쪽 갈릴리입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그 많은 권능을 행하셨으면 그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옷을 입고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강퍅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참으로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상주가 베옷 입는 풍속도 이와 비슷합니다. 상주가 삼베옷을 입는 것은 부모님께 불효한 죄인으로서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역대상 21장 16절에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죄를 깊이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지으면 마음의 베옷을 입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그 베옷을 벗겨주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이런 사실을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죄를 지었을 때도 마음의 베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기쁨의 띠를 띠게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35-37]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띠를 띤다는 말은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것은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진정한 회개가 있으면 기쁨의 띠를 띠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띠는 영광스러운 띠입니다. 주님을 찬송하기 위해 그 띠를 띠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주님을 참으로 섬기려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고 온전하게 매는 띠를 띠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지은 자리에 하나님의 성전이 이루어지고 번제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교만한 생각도 들고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뉘우치고 베옷을 입으면 성전과 연결이 됩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마음이 있으면 이미 주님이 번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의 허물이나 하나님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번제물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낮은 마음, 회개하는 마음이 제물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