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1:1-24]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시편 31편은 사무엘상 23장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3:6-13]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다윗이 그일라에 온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 오리라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그일라라는 곳에 갔는데 사울 왕이 그것을 알고 다윗을 사로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과연 사울이 자기를 잡으려고 그일라로 내려올 것인지 또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울의 손에 넘겨줄 것 인지를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울이 그를 잡으러 내려올 것이고,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에게 그를 내어줄 것’이라고 응답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육백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했습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시편 3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께 피한다’는 말은 다윗의 곤경에 처해 있는 마음이 하나님께 피함으로써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위험을 피했지만 그 사실보다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을 당하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의 방법이나 수단으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노출시켜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자기 방법이나 생각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나서 구원이 되기 때문에 다윗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거기에 하나님께서 의로움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해 참고 계시던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에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낸 의로움을 믿는 사람들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나는 데서 자신이 건져지는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
[시편 31:2]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다윗의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편 31: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무엇을 반석으로 삼느냐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태복음 7:2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반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고 안식처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하더라도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은 없더라도 영혼을 구원해 주신 주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확실히 믿으면 주님이 우리의 반석이 되십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없으면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바다에서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다윗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편 31:3),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소서”(시편 23:3)라고 한 것은 다윗이 당하는 일이 자기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주님의 이름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자신의 삶의 전부로 여기고 또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생각할 때에 나는 누구의 이름으로 사느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던 날부터 개인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는 삶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어 주님이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은 주님의 백성, 주님의 몸,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안에 들어와서 주님의 생명,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49:10-12]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세상에 속해 있던 내가 주님께 속량받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듯이 믿음 여하에 따라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이 가치가 달라질 수 있고 주님의 것으로 구속될 수 있습니다.
만일 다윗의 삶이 자기 개인을 위한 삶이었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했고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맡기는 믿음
[시편 31:4]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정보를 얻은 사울 왕은 군대를 모아 다윗을 잡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윗을 잡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총동원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갈 이 시대에도 사탄이 우리를 사로잡기 위해 그물을 쳐놓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그물에 걸리지 않게 하는 지침서가 성경입니다. 성경이나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모임 생활을 충실히 하면 그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제 속에 있지 않고 개인주의가 되다 보면 사탄에게 노출되어 사로잡히게 됩니다.
[시편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육신을 부탁하지 않고 영혼을 부탁한 기도를 보면 다윗의 마음이 영적인 일에 온통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 내 영과 같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죄를 지어 성령이 근심하면 영도 불안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마음이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영과 혼이 흠 없이 보존되는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심판을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들림받은 이후에 영과 혼이 흠 없이 보존되었는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심판이 있다고 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지으면 양심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영을 주님께 맡겨서 주님이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시편 31:6-7]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영혼이 환난 중에 있는 것은 육신의 생각이 영혼을 압박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는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로마서 7:22-2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고 했는데 그 고통의 주체는 영입니다.
다윗도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라고 했습니다. 영혼이 환난 중에 있지만 자신은 그것을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주님께 맡기는 믿음이 올 때에는 그 영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시편 31:8-9]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환난 중에 있는 영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눈”은 바로 영의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속에 있는 영이 빛이 없고 어두우면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영의 환난입니다. 영이 육신 때문에 압박을 받는 것입니다.
다윗이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라고 한 것은 다윗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육신의 압박을 받는 상태에 있었음을 뜻합니다.
자기 죄를 드러내는 영혼의 절규
[시편 31:10-12]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다윗은 자기의 영혼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의 절규를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영혼이 답답하고 괴로우면 하나님을 찾게 되고 주님을 찾게 됩니다. 자기가 낮아진 상태에서 영혼의 절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로부터 어떤 빛을 받을 수 있고 좋은 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가령 화가 나거나 남이 미워질 때에 주님을 향해서 ‘주님, 저는 이런 인간입니다’ 하고 자기를 주님 앞에 내놓는 절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자신이 잘했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기면 근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기 죄를 들추었습니다. 자기의 내적인 문제를 살피면서 자기 속에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윗의 영혼이 절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려면 우리 속에도 죄를 인정하는 영혼의 절규가 있어야 합니다.
[시편 31:13-14]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이것은 참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화 내고 속상해 하는 것은 대부분 그 일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는 맞지 않지만 만일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생각대로 안되더라도 자기를 포기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믿음이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주는 나의 재산이요 즐거움이라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는 소출이 없고 밭에는 식물이 없고 우리에는 양이 없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도 원수가 있고 두려웠지만 ‘주께 의지하고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심각한 고통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시편 31:15]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다윗은 아직 왕이 되진 않았지만 사무엘을 통해 이미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그들에게 증거하고 하나님의 싸움을 대신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왕노릇하는 세상입니다. 사탄의 손에 이끌려가는 세상입니다. 우리도 사탄의 손에 잡혀서 사느냐 아니면 주의 손에 이끌려 사느냐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12)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완성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을 향해 좇아간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
[시편 31:16-18]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쫓겨다니며 걱정하고 나그네 생활하던 다윗은 마음 속에 굉장한 보물창고를 발견했습니다.
[시편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하나님의 창고 아래 엄청난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서워 떤다는 말이 아닙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느 날 우리 각자에게도 발견될 수 있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상고하며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느 날 주께서 베푸신 그 은혜가 발견됩니다.
시련 속에 있다가도 어떤 말씀을 깨닫게 되면 마음의 변화가 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세상 아무리 좋은 것과도 절대 바꿀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은 뭔가 발견되어서 그렇습니다.
그 보물 창고가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 그 엄청난 은혜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입니다.
[시편 31:20]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약할 때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면서 별별 생각이 다 나게 됩니다. 신앙생활 과정에도 보면 사람들로부터 많은 얘기들이 들려옵니다. 그것이 전부 구설의 다툼이고 사람의 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꾀던 뱀의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에게 꾀가 생긴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다”(전도서 7:29)고 했습니다.
사람의 꾀가 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것이 아니라 꾀를 부려 그 꾀로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그러한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성경 말씀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새겨지지 않고 자꾸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욥이 시험당할 때 욥은 방문한 세 친구로부터 이런저런 말로 공격당합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나오는데 엘리후는 성령의 그림자입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을 때에 비로소 욥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바른 답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주님 앞에 묵상하면서 조용히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사람에게 먼저 쫓아가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물론 교제하는 중에도 풀릴 수가 있습니다만 분명히 주께서는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신앙생활 속에서 조금씩 알아갈 수 있어야 됩니다.
[시편 31: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에베소서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구원받는 문제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문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12)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은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막연하게 성경을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고 순종하면서 알아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빌립보서 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님과 자신 사이에 진지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평소에 지니고 어떤 일에 부딪혀도 마음을 쏟아서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그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바울이 말한 대로 이 기도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살다가 일 생기면 당황해서 주님을 찾는 것은 미신과 같습니다.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는 주님
[시편 31:22]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우리도 가령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보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어려움을 당하면 실망스러운 말을 입으로 뱉게 됩니다. 그러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곤란한 일이 있어도 주님 앞에 조용히 반성해야지 사람들에게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31:23-24]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다윗은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려움 끝에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꿋꿋이 참으면서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꾸준히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성실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실한 자를 보호하십니다.
시편 31편은 사무엘상 23장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그일라라는 곳에 갔는데 사울 왕이 그것을 알고 다윗을 사로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과연 사울이 자기를 잡으려고 그일라로 내려올 것인지 또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울의 손에 넘겨줄 것 인지를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울이 그를 잡으러 내려올 것이고,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에게 그를 내어줄 것’이라고 응답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육백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했습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께 피한다’는 말은 다윗의 곤경에 처해 있는 마음이 하나님께 피함으로써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위험을 피했지만 그 사실보다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을 당하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의 방법이나 수단으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노출시켜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자기 방법이나 생각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나서 구원이 되기 때문에 다윗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거기에 하나님께서 의로움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해 참고 계시던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에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낸 의로움을 믿는 사람들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나는 데서 자신이 건져지는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
다윗의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무엇을 반석으로 삼느냐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태복음 7:2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반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고 안식처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하더라도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은 없더라도 영혼을 구원해 주신 주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확실히 믿으면 주님이 우리의 반석이 되십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없으면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바다에서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다윗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편 31:3),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소서”(시편 23:3)라고 한 것은 다윗이 당하는 일이 자기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주님의 이름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자신의 삶의 전부로 여기고 또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생각할 때에 나는 누구의 이름으로 사느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던 날부터 개인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는 삶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어 주님이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은 주님의 백성, 주님의 몸,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안에 들어와서 주님의 생명,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던 내가 주님께 속량받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듯이 믿음 여하에 따라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이 가치가 달라질 수 있고 주님의 것으로 구속될 수 있습니다.
만일 다윗의 삶이 자기 개인을 위한 삶이었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했고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맡기는 믿음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정보를 얻은 사울 왕은 군대를 모아 다윗을 잡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윗을 잡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총동원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갈 이 시대에도 사탄이 우리를 사로잡기 위해 그물을 쳐놓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그물에 걸리지 않게 하는 지침서가 성경입니다. 성경이나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모임 생활을 충실히 하면 그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제 속에 있지 않고 개인주의가 되다 보면 사탄에게 노출되어 사로잡히게 됩니다.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육신을 부탁하지 않고 영혼을 부탁한 기도를 보면 다윗의 마음이 영적인 일에 온통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 내 영과 같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죄를 지어 성령이 근심하면 영도 불안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마음이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영과 혼이 흠 없이 보존되는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심판을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들림받은 이후에 영과 혼이 흠 없이 보존되었는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심판이 있다고 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지으면 양심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영을 주님께 맡겨서 주님이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영혼이 환난 중에 있는 것은 육신의 생각이 영혼을 압박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는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로마서 7:22-2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고 했는데 그 고통의 주체는 영입니다.
다윗도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라고 했습니다. 영혼이 환난 중에 있지만 자신은 그것을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주님께 맡기는 믿음이 올 때에는 그 영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영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눈”은 바로 영의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속에 있는 영이 빛이 없고 어두우면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영의 환난입니다. 영이 육신 때문에 압박을 받는 것입니다.
다윗이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라고 한 것은 다윗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육신의 압박을 받는 상태에 있었음을 뜻합니다.
자기 죄를 드러내는 영혼의 절규
다윗은 자기의 영혼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의 절규를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영혼이 답답하고 괴로우면 하나님을 찾게 되고 주님을 찾게 됩니다. 자기가 낮아진 상태에서 영혼의 절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로부터 어떤 빛을 받을 수 있고 좋은 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가령 화가 나거나 남이 미워질 때에 주님을 향해서 ‘주님, 저는 이런 인간입니다’ 하고 자기를 주님 앞에 내놓는 절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자신이 잘했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기면 근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기 죄를 들추었습니다. 자기의 내적인 문제를 살피면서 자기 속에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윗의 영혼이 절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려면 우리 속에도 죄를 인정하는 영혼의 절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화 내고 속상해 하는 것은 대부분 그 일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는 맞지 않지만 만일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생각대로 안되더라도 자기를 포기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믿음이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주는 나의 재산이요 즐거움이라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는 소출이 없고 밭에는 식물이 없고 우리에는 양이 없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도 원수가 있고 두려웠지만 ‘주께 의지하고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심각한 고통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직 왕이 되진 않았지만 사무엘을 통해 이미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그들에게 증거하고 하나님의 싸움을 대신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왕노릇하는 세상입니다. 사탄의 손에 이끌려가는 세상입니다. 우리도 사탄의 손에 잡혀서 사느냐 아니면 주의 손에 이끌려 사느냐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12)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완성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을 향해 좇아간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
쫓겨다니며 걱정하고 나그네 생활하던 다윗은 마음 속에 굉장한 보물창고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창고 아래 엄청난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서워 떤다는 말이 아닙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느 날 우리 각자에게도 발견될 수 있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상고하며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느 날 주께서 베푸신 그 은혜가 발견됩니다.
시련 속에 있다가도 어떤 말씀을 깨닫게 되면 마음의 변화가 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세상 아무리 좋은 것과도 절대 바꿀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은 뭔가 발견되어서 그렇습니다.
그 보물 창고가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 그 엄청난 은혜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약할 때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면서 별별 생각이 다 나게 됩니다. 신앙생활 과정에도 보면 사람들로부터 많은 얘기들이 들려옵니다. 그것이 전부 구설의 다툼이고 사람의 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꾀던 뱀의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에게 꾀가 생긴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다”(전도서 7:29)고 했습니다.
사람의 꾀가 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것이 아니라 꾀를 부려 그 꾀로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그러한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성경 말씀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새겨지지 않고 자꾸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욥이 시험당할 때 욥은 방문한 세 친구로부터 이런저런 말로 공격당합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나오는데 엘리후는 성령의 그림자입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을 때에 비로소 욥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바른 답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주님 앞에 묵상하면서 조용히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사람에게 먼저 쫓아가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물론 교제하는 중에도 풀릴 수가 있습니다만 분명히 주께서는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신앙생활 속에서 조금씩 알아갈 수 있어야 됩니다.
구원받는 문제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문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12)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은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막연하게 성경을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고 순종하면서 알아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주님과 자신 사이에 진지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평소에 지니고 어떤 일에 부딪혀도 마음을 쏟아서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그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바울이 말한 대로 이 기도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살다가 일 생기면 당황해서 주님을 찾는 것은 미신과 같습니다.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는 주님
우리도 가령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보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어려움을 당하면 실망스러운 말을 입으로 뱉게 됩니다. 그러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곤란한 일이 있어도 주님 앞에 조용히 반성해야지 사람들에게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려움 끝에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꿋꿋이 참으면서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꾸준히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성실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실한 자를 보호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