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4:1-22]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찌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4편에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다가 블레셋 지역으로 갔을 때에 ‘가드 왕’ 아비멜렉의 신하들이 다윗을 아비멜렉에게 고발했습니다. 그들이 아비멜렉 왕에게 다윗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용사이자 이스라엘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고해바치자, 다윗은 미친 체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 왕은 “우리에게 미친 사람이 적어서 이 미친 사람을 내게 데려오느냐”며 다윗을 무시하고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때 다윗이 쫓겨나서 지은 시가 이 시편 34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다윗
[시편 34: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다윗은 위기를 모면하고 하나님을 송축하였습니다. 고난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영광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고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몸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는데 바울은 그로 인해 하나님께 세 번 기도드렸습니다(고린도후서 12:7-8).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린도후서 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바울이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린도후서 12:10)라고 하며 자신이 약한 것이 곧 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은 다윗의 마음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만일 다윗이 아비멜렉 왕 앞에서 용맹을 떨쳤거나 자기의 힘으로 그 어려움을 피했다면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감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하여 미친 체하는 자신을 통해 형편없이 나약하고 자랑할 것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지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27)는 말씀대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버리면 자신에게 있는 장점, 힘, 능력, 그 모든 것이 다 주님 안에 숨어버리고 자신이 드러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발견한 주님의 능력
[시편 34:2]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다윗은 한때 골리앗을 쓰러뜨린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아비멜렉왕 앞에 섰을 때 미친 체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 일을 통해 자기는 형편없이 약하고 의지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골리앗을 죽인 용사이지만 막상 죽음 앞에 섰을 때에 미친 체하지 않으면 안될 약자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약자임을 발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출해 주셨고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처했을 때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님의 능력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알게 된 사실을 자랑했을 때에 자기처럼 곤고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듣고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 어려움을 통해 육신이 깎임으로써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해서 주님을 중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증거할 수 있듯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그 역시 다른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인내로써 견뎌나가고 자신이 약자임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이 그 사람에게 머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종교생활과는 정반대입니다. 종교생활은 인간이 최대한 노력하고, 애쓰는 그 힘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은 점차적으로 약화되고 십자가에 자기 자신이 처리되면서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역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
[시편 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신앙생활에서 마음이 자신 안에 갇혀있게 되면 생각의 시야가 좁아져 캄캄한 지경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광대하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3:17-1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새롭게 알면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마음에 문제를 삼았던 좁은 마음, 답답한 마음이 활짝 열리면서 광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 죄인을 다 용납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해야 했던 그 답답한 마음, 그 고뇌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 다윗은 광대하신 하나님,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답답하고 좁은 세계를 방황만 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그 크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기의 마음도 넓어지게 됩니다.
[시편 34: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구원받은 후에도 생활 환경에 따라 여러가지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때에 항상 주를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편 34:5]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태양계 주변의 별들 중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는 태양뿐입니다. 다른 별들이 빛을 발하는 것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빛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은혜를 힘입으면 밝아집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
이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자체에는 빛이 없습니다. 주님의 빛을 우리가 반사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생명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는 빛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의 은혜, 광채를 입고 영영히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광채를 입고 나니 미친 체했을 때의 그 부끄러움은 사라져 버리고 마음속에 즐거움이 솟는 것입니다.
우리도 구원을 받고 난 후, 구원받기 전에 가졌던 부끄러움이 없어졌습니다.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오는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의 은혜를 힘입으면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신앙생활에서 성장하면 빛이 온 천지를 환하게 밝히는 광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신앙생활
[시편 34:6-7]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죄수로서 변명할 때에 예수님을 확실히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베스도라는 그 지역 분봉왕이 바울에게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사도행전 26:24)고 말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사도행전 26:25)라고 베스도에게 답한 후, 아그립바 왕에게는 “당신뿐만 아니라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사도행전 26:29)라고 말했습니다.
일개 죄수가 왕에게 “결박한 것 외에는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으니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고 베스도처럼 “미쳤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8-10)라고 한 말씀대로 실제로는 정상이 아니거나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미친 체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체해야 했던, 그래서 마음이 곤고할 수밖에 없었던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열왕기하를 보면 엘리사를 잡기 위해 많은 군대가 성 주위를 에워싼 것을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보고,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열왕기하 6:15)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적군보다도 더 많은 천군 천사들이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게하시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눈이 열린 게하시는 ‘불말과 불병 거가 산에 가득한’(열왕기하 6:17) 것을 보게 됩니다. 눈이 열리기 전의 게하시는 자기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자가 함께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우리를 지키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약해지고 두려워지는 것은 영적인 눈이 닫혀 게하시처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처음에는 자신이 처한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나 구원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자, 주님의 사자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계시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본다”는 말은 주님의 은혜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맛보았을 때에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주의 인자하심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영생을 얻은 것은 주님의 사랑을 맛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구원받을 때 맛본 주님의 그 사랑을 계속 먹고 사는 생활입니다.
[요한복음 6:53-5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의 살과 피인 참된 양식과 음료를 먹는 생활은 곧 구원받을 때에 맛본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그 은혜 속에 사는 삶을 말합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처리되어야 할 육신 때문임을 아는 것이 곧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며 주님의 살과 피를 다시 먹는 것입니다. 더욱 깊이 주님의 은혜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십자가입니다.
시련과 곤경에 빠졌을 때가 주님의 은혜를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평안할 때는 오히려 영적인 양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시편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에서 ‘사자’는 사탄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근신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사자 즉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경외함을 배우는 길
[시편 34: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다윗은 이론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광대하신 사랑, 하나님의 큰 은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고 하나님만을 자랑하게 되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에 “소자들아 내게 와서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있을 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참고 이겨나가면 나중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시련을 견뎌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부정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인정치 않고,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시편 34:12-13]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찌어다
성도들을 가르치려면 혀를 악에서 금하며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해야 합니다. 이 말은 거짓말하거나 남을 속이지 말고 원망이나 불평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곧 진리를 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잠언 21:23)는 말씀에서도 보면 입과 혀를 지킴으로써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10:7-8]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말을 잘못하여 남의 마음을 해치고 남의 심령을 무너뜨리고 약화시키는 일들이 있습니다. 말을 주의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입니다.
[시편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
여기서 선과 악은 도덕적인 선이나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 악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곧 선입니다.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가정에서 부모가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기를 원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서로 화목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요한일서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생명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반영되는 무리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곳입니다. 이 사랑의 실현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원하십니다.
성도들 간에 마음이 나누어지고 사랑이 깨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요한일서 4:20)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요한일서 3:11-14]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생명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보면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퍼져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무리 안에서 실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배우라고 했을 때에 혀나 입술을 조심해야 하고 화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곤경에 빠져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이 직접 눈에 보이게 나타나서 돕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눈은 의를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여호와의 눈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선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두루두루 살피십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서로 원망하고 화목하지 못하고 화평을 깨버리면 성령이 탄식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간에 화목하고 사랑할 때면 참으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 주님이 근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알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의인의 삶
[시편 34:16-19]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의인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한복음 16:10)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의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건지셔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으므로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길을 가면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4:20-21]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당시에는 로마의 형법에 따라 십자가에 달려 목숨이 끊어지지 않으면 뼈를 부숴 생명이 끊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 이미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에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은 데 대한 영적인 뜻은 교회가 사탄에 의해서 공격을 당해도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립될 뿐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뼈가 꺾이는 것은 교회가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립됩니다.
“악이 악인을 죽인다”는 것은 어떤 악이라도 자기에게 해가 될 뿐 유익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4:22)는 말씀은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예수님이 이미 죄를 다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다윗의 시를 통해서 형편없고 보잘것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크고 한량없는 은혜를 경험할 때 다윗이 체험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약하고 허물이 많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남을 인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시편 34편에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다가 블레셋 지역으로 갔을 때에 ‘가드 왕’ 아비멜렉의 신하들이 다윗을 아비멜렉에게 고발했습니다. 그들이 아비멜렉 왕에게 다윗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용사이자 이스라엘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고해바치자, 다윗은 미친 체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 왕은 “우리에게 미친 사람이 적어서 이 미친 사람을 내게 데려오느냐”며 다윗을 무시하고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때 다윗이 쫓겨나서 지은 시가 이 시편 34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다윗
다윗은 위기를 모면하고 하나님을 송축하였습니다. 고난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영광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고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몸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는데 바울은 그로 인해 하나님께 세 번 기도드렸습니다(고린도후서 12:7-8).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린도후서 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바울이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린도후서 12:10)라고 하며 자신이 약한 것이 곧 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은 다윗의 마음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만일 다윗이 아비멜렉 왕 앞에서 용맹을 떨쳤거나 자기의 힘으로 그 어려움을 피했다면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감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하여 미친 체하는 자신을 통해 형편없이 나약하고 자랑할 것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지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27)는 말씀대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버리면 자신에게 있는 장점, 힘, 능력, 그 모든 것이 다 주님 안에 숨어버리고 자신이 드러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발견한 주님의 능력
다윗은 한때 골리앗을 쓰러뜨린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아비멜렉왕 앞에 섰을 때 미친 체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 일을 통해 자기는 형편없이 약하고 의지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골리앗을 죽인 용사이지만 막상 죽음 앞에 섰을 때에 미친 체하지 않으면 안될 약자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약자임을 발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출해 주셨고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처했을 때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님의 능력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알게 된 사실을 자랑했을 때에 자기처럼 곤고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듣고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 어려움을 통해 육신이 깎임으로써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해서 주님을 중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증거할 수 있듯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그 역시 다른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인내로써 견뎌나가고 자신이 약자임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이 그 사람에게 머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종교생활과는 정반대입니다. 종교생활은 인간이 최대한 노력하고, 애쓰는 그 힘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은 점차적으로 약화되고 십자가에 자기 자신이 처리되면서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역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
신앙생활에서 마음이 자신 안에 갇혀있게 되면 생각의 시야가 좁아져 캄캄한 지경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광대하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새롭게 알면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마음에 문제를 삼았던 좁은 마음, 답답한 마음이 활짝 열리면서 광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 죄인을 다 용납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해야 했던 그 답답한 마음, 그 고뇌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 다윗은 광대하신 하나님,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답답하고 좁은 세계를 방황만 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그 크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기의 마음도 넓어지게 됩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생활 환경에 따라 여러가지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때에 항상 주를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태양계 주변의 별들 중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는 태양뿐입니다. 다른 별들이 빛을 발하는 것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빛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은혜를 힘입으면 밝아집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자체에는 빛이 없습니다. 주님의 빛을 우리가 반사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생명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는 빛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의 은혜, 광채를 입고 영영히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광채를 입고 나니 미친 체했을 때의 그 부끄러움은 사라져 버리고 마음속에 즐거움이 솟는 것입니다.
우리도 구원을 받고 난 후, 구원받기 전에 가졌던 부끄러움이 없어졌습니다.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오는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의 은혜를 힘입으면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신앙생활에서 성장하면 빛이 온 천지를 환하게 밝히는 광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신앙생활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죄수로서 변명할 때에 예수님을 확실히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베스도라는 그 지역 분봉왕이 바울에게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사도행전 26:24)고 말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사도행전 26:25)라고 베스도에게 답한 후, 아그립바 왕에게는 “당신뿐만 아니라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사도행전 26:29)라고 말했습니다.
일개 죄수가 왕에게 “결박한 것 외에는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으니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고 베스도처럼 “미쳤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8-10)라고 한 말씀대로 실제로는 정상이 아니거나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미친 체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체해야 했던, 그래서 마음이 곤고할 수밖에 없었던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열왕기하를 보면 엘리사를 잡기 위해 많은 군대가 성 주위를 에워싼 것을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보고,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열왕기하 6:15)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적군보다도 더 많은 천군 천사들이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게하시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눈이 열린 게하시는 ‘불말과 불병 거가 산에 가득한’(열왕기하 6:17) 것을 보게 됩니다. 눈이 열리기 전의 게하시는 자기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자가 함께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우리를 지키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약해지고 두려워지는 것은 영적인 눈이 닫혀 게하시처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처음에는 자신이 처한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나 구원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자, 주님의 사자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계시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본다”는 말은 주님의 은혜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맛보았을 때에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영생을 얻은 것은 주님의 사랑을 맛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구원받을 때 맛본 주님의 그 사랑을 계속 먹고 사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인 참된 양식과 음료를 먹는 생활은 곧 구원받을 때에 맛본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그 은혜 속에 사는 삶을 말합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처리되어야 할 육신 때문임을 아는 것이 곧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며 주님의 살과 피를 다시 먹는 것입니다. 더욱 깊이 주님의 은혜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십자가입니다.
시련과 곤경에 빠졌을 때가 주님의 은혜를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평안할 때는 오히려 영적인 양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자’는 사탄을 말합니다.
근신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사자 즉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경외함을 배우는 길
다윗은 이론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광대하신 사랑, 하나님의 큰 은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고 하나님만을 자랑하게 되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에 “소자들아 내게 와서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있을 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참고 이겨나가면 나중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시련을 견뎌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부정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인정치 않고,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을 가르치려면 혀를 악에서 금하며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해야 합니다. 이 말은 거짓말하거나 남을 속이지 말고 원망이나 불평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곧 진리를 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잠언 21:23)는 말씀에서도 보면 입과 혀를 지킴으로써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한다고 했습니다.
말을 잘못하여 남의 마음을 해치고 남의 심령을 무너뜨리고 약화시키는 일들이 있습니다. 말을 주의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선과 악은 도덕적인 선이나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 악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곧 선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기를 원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서로 화목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생명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반영되는 무리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곳입니다. 이 사랑의 실현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원하십니다.
성도들 간에 마음이 나누어지고 사랑이 깨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요한일서 4:20)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생명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보면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퍼져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무리 안에서 실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배우라고 했을 때에 혀나 입술을 조심해야 하고 화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곤경에 빠져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이 직접 눈에 보이게 나타나서 돕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눈은 의를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선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두루두루 살피십니다.
서로 원망하고 화목하지 못하고 화평을 깨버리면 성령이 탄식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간에 화목하고 사랑할 때면 참으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 주님이 근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알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의인의 삶
의인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한복음 16:10)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의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건지셔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으므로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길을 가면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당시에는 로마의 형법에 따라 십자가에 달려 목숨이 끊어지지 않으면 뼈를 부숴 생명이 끊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 이미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에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은 데 대한 영적인 뜻은 교회가 사탄에 의해서 공격을 당해도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립될 뿐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뼈가 꺾이는 것은 교회가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립됩니다.
“악이 악인을 죽인다”는 것은 어떤 악이라도 자기에게 해가 될 뿐 유익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4:22)는 말씀은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예수님이 이미 죄를 다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다윗의 시를 통해서 형편없고 보잘것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크고 한량없는 은혜를 경험할 때 다윗이 체험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약하고 허물이 많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남을 인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