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7편]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37:1-40]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이 시는 사울 왕과 다윗과의 대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대립은 사울 왕이 자기 혈통을 통해서 영구히 왕권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다윗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데서 생긴 것입니다.


 시편 37편에는 “땅을 차지한다”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국을 누가 지배하느냐는 문제를 읊은 이 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을 차지하는 문제와 연결 지어서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기준


[시편 37:1-2]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도둑질을 한다든지 강도짓을 하는 사람만이 악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노력과 자기 생각, 자기 힘, 자기가 가진 꾀로 삶을 사는 것이 악인의 삶의 형태입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악인입니다. 아담의 피를 받아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다 악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범한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지만 성경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냐 세상에 속한 자냐 하는 것이 악인의 판별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께 속했으면 의인이고, 구원받지 못하고 사탄에게 속해 있으면 악인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선입니다. 생명과를 먹고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선이고 선악과를 먹은 데서 나오는 선은 악한 인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가 다 선을 논하고 의가 무엇인지를 논합니다. 그러나 그 선과 의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법칙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이 아닙니다. 완전한 선, 참 선은 하나님의 생명뿐입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서 인간이 ‘원수를 사랑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므로 예수님은 어떤 노력이나 결심을 하지 않고도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선한 생명이시니 하나님 안에서는 저절로 선이 나옵니다. 선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악이 없고 선이 저절로 흘러나오면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진정한 선이 없기 때문에 종교를 만들어 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생명, 주님의 생명을 받으면 그 안에서 선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아도 아직 마음에 악이 있고, 아직도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으나 아직 우리 육신 속에 악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과정을 통하여 육신의 생각을 조금씩 약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육신과 싸우는 생활입니다. 육신 속에 남아 있는 악의 요소가 그 힘을 잃어가야 됩니다. 대신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면 남을 사랑하게 되고 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어떤 결심을 해서 행하는 것은 참 선이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과 연합이 되어서 육신의 생각이 약화되면 선이 저절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갈등


 사울 왕은 아무런 어려움이나 훈련 없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양을 치는 목자로서 사자와 싸우기도 하고 이리떼와 싸우기도 하는 가운데서 많은 훈련을 쌓았습니다. 그런 훈련을 통해서 믿음을 쌓아간 것입니다.


 그러한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소년이었지만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승리하자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이목이 다윗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울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 시작합니다. 사울이 왜 악인으로 등장합니까? 자기의 완력과 욕심, 군사의 힘, 왕권을 가지고 다윗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차지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한때는 성령 충만을 받아서 예언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권 때문에 싸움을 하고 욕심 부리고 한 일이 없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도 왕권에 대해서 애착심을 갖거나 기어이 왕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사울에게 쫓겨다니고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 등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과정입니다. 천년왕국 때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그것이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 하려고 가는 그 과정이 우리 구원받은 사람의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 따라서 우리에게 상급이 있고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여 땅을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시편 37편에는 악인의 가는 길과 의인의 가는 길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악인인 사울은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완력을 써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의 삶은 의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자칫 잘못하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기가 쉽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괴로움을 겪을 때는 불평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지 않으신다든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실까 하는 불신감이 생기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쫓겨다니고, 여러 번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사울 왕에 대해서 한 번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다윗이 왕이 되는 자질을 갖추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성실한 신앙생활


[시편 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선’은 성령으로 살아가는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 열매 맺는 삶이 선한 삶입니다.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는 말씀은 성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아무리 작은 약속이라도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행해야 합니다.


 가령 구원받을 때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구원받고 보면 율법에서 해방 받았다고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살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율법의 지배를 받으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생활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무절제하게 사는 생활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사는 생활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거짓말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도 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지는 않지만, 성령이 나를 방탕하게 살도록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생활입니다.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성령의 인도를 못 받는 상태가 있습니다. 육신의 힘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못 받고 구원받았다는 의식만 가지고 삽니다. 죄 지어도 죄가 별로 무섭지 않고 천당은 갈 수 있다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실을 식물로 삼는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성실을 식물로 삼아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작은 일에도 바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면 그것은 서원이니 반드시 지켜야 됩니다. 사람과 약속을 했으면 손해가 날지라도 지켜야 됩니다.



[시편 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이것이 성실입니다. 성실함이 없으면 하나님도 나를 믿어주지 아니하시고 사람도 나를 믿어주지 않습니다.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정확해야 됩니다. 남에게 빚진 돈을 갚을 생각도 안 하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경제 문제가 정확하게 훈련이 되면 다른 생활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불성실하게 살 때는 신앙생활이 잘 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아주 성실해야 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시편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돈 아니면 명예나 지위를 얻게 될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내가 이 사실을 몰랐으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언제나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고 마음이 든든하고 항상 주님을 기뻐합니다. 그러한 기쁨은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러 가지 괴로움과 시련이 지나가지만, 차츰차츰 세상의 것은 가치가 없고, 헛된 것임을 알아가면서 마음이 점점 주님을 기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지 않는 사람은 자꾸 마음이 세상에 부딪힙니다.



 어떤 시련이 시발점이 되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세상의 기쁨들이 차츰 물러가면서 그 자리에 주님이 내 기쁨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고 찾아야 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괴로움이 심할 때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거치면서 세상에 대한 실망을 느끼고 차츰차츰 세상이 내 마음의 자리에서 물러가야만 주님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7: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고 말씀하셨지만 우리 자신에게는 빛이 없습니다. 시편에 보면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편 36:9)라고 했습니다.


 빛은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광명 속에서 그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노력이나 힘으로 살고 자기가 어떤 의나, 선을 만들어 내려고 하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의가 나타나는 생활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공의가 정오의 빛과 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편 37:7-9]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면서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고 쫓겨다녔습니다. 그래도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잠잠했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그 땅을 차지할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자기 힘과 능력을 믿고 사울 왕과 싸웠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왕의 자격이 없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권력을 가지고 남을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가나안의 칠 족속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다윗 왕 때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다윗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운 진짜 왕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불평 없이 이겨낸 다윗과 같이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왕으로 살 그리스도인들은 불평하고 원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시편 37:10-11]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세상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착취도 하고 거짓말도 하여 권력, 명예, 금전을 얻고자 합니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땅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자신이 불가능할 때에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나 방법이 아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시편 37:12-18]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신다”고 했는데 누가 완전한 자입니까?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될 수 없고, 하나님은 원수도 사랑하시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내 자신은 불의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주님을 믿을 때에 온전한 데 도달합니다. 내 개인의 온전이 아니고 믿음으로 주님 안에 들어가서 주님의 것이 내 것이 되어버리는 그 온전을 말합니다.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는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삶이 하나님이 아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5:4-5]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의 계통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계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시는 가운데서 살았고 죽었습니다. 그중에는 에녹 같은 사람도 있었고, 노아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아간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가운데서 그 삶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고 멋대로 사는 것,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이 나를 기억하시는 것과 연결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생애는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과도 같습니다. 교회의 역사 또한 하나님의 기억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개인도 주님을 믿지 않을 때는 주님과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내 믿음이 주님의 기억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삶은 주님이 나를 기억하시는 가운데 사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든 삶은 영원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됩니다. 내 삶이 주님의 기억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문제입니다. 주님은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마태복음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0:29)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지 않느냐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은 주님의 기억 속에 사는 삶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의인은 은혜를 베풀지니


[시편 37:19-21]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어린 양의 기름 같다”는 말은, 레위기 1장에 번제물의 피가 뿌려지고 그 기름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불살라 바쳐진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그 번제물이시며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악인은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죄를 예수님이 갚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빚을 갚은 것입니다. 악인은 그 빚을 갚지 않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사랑의 빚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빚을 갚으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시편 37:22-24]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에베소서 2:10)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6)라고 하신대로 교회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없습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것은 복 받을 기회입니다. 기회가 오거든 절대로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구원 안 받은 세상 사람에게도 이 원리는 해당이 될 것입니다. 남을 도우면서 사는 사람은 자손들이 잘못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남을 도와야 할 때가 오거든 절대로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땅을 차지하러 가는 길


[시편 37:27-29]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남을 돕고 남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사는 삶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려고 가는 길입니다. 구원받은 이후 생활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해 가는 길, 땅을 차지하러 가는 길에 들어선 생활입니다. 그 삶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빚을 갚으면서 손을 펴서 항상 남을 도와주는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야고보서 1:27)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육백 명의 생명을 자신이 책임지고 또 가는 곳마다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계속 도왔습니다. 그것이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왕이 되기 위한 준비입니다.



[시편 37:30-34]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자연계는 법칙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자연계가 유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영혼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 37:35-36]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 사람의 생애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듯이 헛된 것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시편 37:37]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이 성경을 통해서 아브라함, 다니엘, 다윗, 사도 바울 등 충성스러운 신앙인들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바울 같은 사람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그가 장차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시편 37:38-40]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주님이 오시면 악인들은 멸망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때에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