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8:1-22]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 38편의 제목에 보면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지은 죄 때문에 징계를 받는 상황에서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올린 내용 같습니다.
다윗은 죄에 대해서 민감했고 죄를 짓고 난 다음에 그 죄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죄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육신을 지닌 인간인 이상 죄를 짓게 되는데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떻게 죄 문제를 처리하고 회개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의에 기초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철저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 받고 나서도 간혹 죄를 짓게 되는데 그 죄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신앙생활이 발전할 수 있고 더 깊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본래 자기 의가 있는데 구원받을 때에도 자기 의가 많은 사람은 구원을 받기 힘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죄 때문에 마음에 고통을 당하고 뉘우치는 것이 있어야만 새로운 신앙 세계로 들어가고 발전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절망에 빠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자책하다가 신앙생활마저 중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죄를 철저하게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가장 표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내리는 주의 징계
[시편 38:1-3]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죄를 지었을 때 어떤 경우에는 징계가 있습니다. 병이 들거나 마음에 고통이 따르는 등 여러 가지 주위 환경에서 일어나는 징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나님의 진노는 아닙니다.
[히브리서 12:5-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노여워서 내리는 징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심판입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부모가 매를 드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 교육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징계는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7-8,10]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는 그의 믿음의 생활을 본 상태로 복귀시키고, 하나님을 더 믿고 의지하는 상태로 이끌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징계가 없으면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죄에 대해서 깊이 통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죄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이 수술이 되고 치료가 되려면 징계를 받고 마음에서 깊이 뉘우치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보다 하나님을 한층 더 아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시편 38:4-5]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실제 다윗의 육신이 병이 들고 다쳐서 상처가 썩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죄를 지은 아픈 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린도후서 7:9-11]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린도 교회 안에 죄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성장하지 못하고 미숙한 상태에서 바울파니 베드로파니 아볼로파니 하면서 서로 싸우고 이권 다툼하고 음란한 죄를 짓고 우상 숭배하는 등 여러 가지 죄가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을 비판하는 말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그러한 죄들에 대해 바울이 편지한 내용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5:9-13]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바울의 편지를 읽고 고린도 교인들은 마음이 낮아져서 크게 근심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2:10-11) 고 했습니다.
7장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10)는 말씀이 있습니다.
근심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적인 근심이 있습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은 죄사함 받았을 때의 그 구원받는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구원되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을 더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열심을 내게 되어 여러 가지 열매를 맺는 일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실망한다든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세상 근심을 하면 믿음에서 떠나 신앙생활이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사망에 이르는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지은 죄에 대해 자신을 징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된 것을 고쳐주시고 치료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근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고, 회개를 이루는 근심입니다.
구원받았어도 육신의 힘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살다 보면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때 믿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근심하고 회개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 없이 걱정하고 근심하게 될 때는 실망해버립니다. 사람이 실망하는 것은 사탄이 노리는 것입니다. 실망이 커지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철저히 회개를 하고 돌아서면 이전보다 더 큰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대신 회개치 않고 실망에 빠지면 하나님께로부터 스스로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망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간음죄를 범하고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서 죽게 하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그 죄 때문에 징계를 받고 징계로 말미암아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회개
진정한 회개는 믿음의 터 위에서 하는 것입니다. 실망하여 낙담해버리고 절망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 잘못을 고쳐주신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깊이 뉘우치고 근심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고 절망 상태에 빠지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탕자의 비유를 보면 재산도 다 잃어버리고 만신창이가 된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그 탕자를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상처 받고 마음 아파할 때 하나님은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탕자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아픔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시편 38:6-9]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피곤하고 심히 상했으며 마음이 불안해서 신음하지만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죄 지은 마음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소원을 주님 앞에 두는 것입니다. 다윗은 죄로 인해 떨리고 상처받고 고통스러운 것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고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데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앞에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중한 죄를 지었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죄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자백입니다. 죄를 해결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자백이 있어야 됩니다. 물론 대인 관계에서 어떤 죄를 지었다면 그 사람 앞에도 자백이 있어야 됩니다. 죄를 철저하게 다루지 않으면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이라든지 은혜를 모르고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38:10-14]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라는 말씀은 마음이 어두워졌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될 때에 주님과 같이 죽겠다고 하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고 제자들도 다 떠나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죄를 짓고 징계를 받아 고통 속에 있을 때 친척이든 친구든 아무도 그를 동정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징계받아서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에 사랑하는 자도 멀리 가버렸고, 친구도 멀리 있었고, 가까이 와서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마음이 매우 외로워지고 와서 누가 무슨 말을 해줘도 잘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뚜렷이 알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멀리하고 원수들이 공박하더라도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회개
다윗이 죄를 짓고 위경에 빠졌을 때 다윗을 죽이려는 자가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6:5-8]
다윗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사울의 집 족속, 베냐민 지파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평소에 다윗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본래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었는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 왕도 죽고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기 때문에 다윗이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왕이 되었습니다. 시므이는 그 때문에 다윗에게 원한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이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사울의 모든 족속의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다”고 저주했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다윗이 피를 흘린 자이기 때문에 화를 자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16:9-12]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다윗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 왕이 곤경에 처했을 때 시므이가 다윗을 향해 저주하므로 아비새라는 장군이 시므이의 머리를 베어오겠다고 하자 다윗이 냉정하게 “스루야의 이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아비새 장군은 다윗을 위해서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인데 왜 상관이 없겠습니까? 여기서 다윗이 상관없다고 한 뜻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이니 너는 관계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명령만 내리면 시므이는 당장 죽었겠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죄의 대가가 어떤 사람을 통해서 어떤 모양으로 오더라도 달게 받았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낮아진 다윗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 다윗의 태도가 가장 정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를 알기 때문에 시므이가 어떤 저주를 해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 저주의 말도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자기가 아무 할 말이 없고 입을 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회개입니다.
[로마서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는데 “모든 입을 막는다”는 말은 세상이 나중에 심판을 받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입을 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 참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달은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회개하는 태도를 우리가 본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람 중에는 다윗만큼 죄를 철저히 회개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침상이 다 젖도록 눈물을 흘렸고, 진정으로 자기 죄를 깊이 뉘우쳤기 때문에 원수가 저주를 해도 달게 받았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는 다윗의 그 마음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죄를 지었을 때 크게 뉘우치고 마음이 낮아지고 어떤 저주나 징계라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치유될 수 있고 주님의 축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죄를 짓고도 치료받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 38:15-22]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다윗은 원수들이 조롱하고 저주하고 자기 생명을 빼앗을 듯 달려들어도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이 자기를 치료해주시는 것만 바라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신앙입니다. 다윗 자신은 왕권을 아들에게 빼앗겨도 상관이 없지만 다윗이 실족할 때에 원수들이 망자존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다윗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지경에서도 자기 자신을 염려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넘어지고 저주를 받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왕권을 빼앗겨도 상관없지만 원수가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서 기세등등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생겨날까 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참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므로 그의 영광이 어떻게 회복되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죄 가운데 빠지고 거의 넘어지는 상태에 빠져도 철저하게 믿음을 가진 것은 ‘주 나의 구원이시여’라는 사실입니다. 이 구원은 거듭나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에는 시험받을 때 받는 구원도 있고, 유혹을 받을 때 받는 구원도 있고, 죄를 지은 이후에 받는 구원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온전히 구원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나 모든 일에서 완전히 구원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항상 살아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구원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시험에 빠지고 죄를 지었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괴로움이 생겼으면 그것으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차츰차츰 그 죄에 대해 잊혀져 가는 것이 구원인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죄도 주님이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마음에 편안함을 얻고 지나가야 됩니다. 이미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는 것 때문에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짓고도 다 용서받은 것으로 알고 무심히 지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미래의 죄까지 용서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짓는 죄 때문에 지옥 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번에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구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은 죄를 뉘우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는 나의 구원이십니다”라고 한 다윗처럼 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 38편의 제목에 보면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지은 죄 때문에 징계를 받는 상황에서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올린 내용 같습니다.
다윗은 죄에 대해서 민감했고 죄를 짓고 난 다음에 그 죄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죄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육신을 지닌 인간인 이상 죄를 짓게 되는데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떻게 죄 문제를 처리하고 회개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의에 기초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철저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 받고 나서도 간혹 죄를 짓게 되는데 그 죄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신앙생활이 발전할 수 있고 더 깊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본래 자기 의가 있는데 구원받을 때에도 자기 의가 많은 사람은 구원을 받기 힘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죄 때문에 마음에 고통을 당하고 뉘우치는 것이 있어야만 새로운 신앙 세계로 들어가고 발전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절망에 빠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자책하다가 신앙생활마저 중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죄를 철저하게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가장 표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내리는 주의 징계
죄를 지었을 때 어떤 경우에는 징계가 있습니다. 병이 들거나 마음에 고통이 따르는 등 여러 가지 주위 환경에서 일어나는 징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나님의 진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노여워서 내리는 징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심판입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부모가 매를 드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 교육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징계는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는 그의 믿음의 생활을 본 상태로 복귀시키고, 하나님을 더 믿고 의지하는 상태로 이끌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징계가 없으면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죄에 대해서 깊이 통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죄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이 수술이 되고 치료가 되려면 징계를 받고 마음에서 깊이 뉘우치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보다 하나님을 한층 더 아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실제 다윗의 육신이 병이 들고 다쳐서 상처가 썩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죄를 지은 아픈 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죄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성장하지 못하고 미숙한 상태에서 바울파니 베드로파니 아볼로파니 하면서 서로 싸우고 이권 다툼하고 음란한 죄를 짓고 우상 숭배하는 등 여러 가지 죄가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을 비판하는 말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그러한 죄들에 대해 바울이 편지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고 고린도 교인들은 마음이 낮아져서 크게 근심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2:10-11) 고 했습니다.
7장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10)는 말씀이 있습니다.
근심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적인 근심이 있습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은 죄사함 받았을 때의 그 구원받는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구원되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을 더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열심을 내게 되어 여러 가지 열매를 맺는 일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실망한다든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세상 근심을 하면 믿음에서 떠나 신앙생활이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사망에 이르는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지은 죄에 대해 자신을 징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된 것을 고쳐주시고 치료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근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고, 회개를 이루는 근심입니다.
구원받았어도 육신의 힘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살다 보면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때 믿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근심하고 회개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 없이 걱정하고 근심하게 될 때는 실망해버립니다. 사람이 실망하는 것은 사탄이 노리는 것입니다. 실망이 커지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철저히 회개를 하고 돌아서면 이전보다 더 큰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대신 회개치 않고 실망에 빠지면 하나님께로부터 스스로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망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간음죄를 범하고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서 죽게 하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그 죄 때문에 징계를 받고 징계로 말미암아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회개
진정한 회개는 믿음의 터 위에서 하는 것입니다. 실망하여 낙담해버리고 절망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 잘못을 고쳐주신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깊이 뉘우치고 근심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고 절망 상태에 빠지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탕자의 비유를 보면 재산도 다 잃어버리고 만신창이가 된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그 탕자를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상처 받고 마음 아파할 때 하나님은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탕자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아픔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피곤하고 심히 상했으며 마음이 불안해서 신음하지만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죄 지은 마음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소원을 주님 앞에 두는 것입니다. 다윗은 죄로 인해 떨리고 상처받고 고통스러운 것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고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데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앞에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중한 죄를 지었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죄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자백입니다. 죄를 해결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자백이 있어야 됩니다. 물론 대인 관계에서 어떤 죄를 지었다면 그 사람 앞에도 자백이 있어야 됩니다. 죄를 철저하게 다루지 않으면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이라든지 은혜를 모르고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라는 말씀은 마음이 어두워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될 때에 주님과 같이 죽겠다고 하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고 제자들도 다 떠나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죄를 짓고 징계를 받아 고통 속에 있을 때 친척이든 친구든 아무도 그를 동정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징계받아서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에 사랑하는 자도 멀리 가버렸고, 친구도 멀리 있었고, 가까이 와서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마음이 매우 외로워지고 와서 누가 무슨 말을 해줘도 잘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뚜렷이 알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멀리하고 원수들이 공박하더라도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회개
다윗이 죄를 짓고 위경에 빠졌을 때 다윗을 죽이려는 자가 있었습니다.
사울의 집 족속, 베냐민 지파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평소에 다윗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본래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었는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 왕도 죽고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기 때문에 다윗이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왕이 되었습니다. 시므이는 그 때문에 다윗에게 원한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이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사울의 모든 족속의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다”고 저주했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다윗이 피를 흘린 자이기 때문에 화를 자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 왕이 곤경에 처했을 때 시므이가 다윗을 향해 저주하므로 아비새라는 장군이 시므이의 머리를 베어오겠다고 하자 다윗이 냉정하게 “스루야의 이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아비새 장군은 다윗을 위해서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인데 왜 상관이 없겠습니까? 여기서 다윗이 상관없다고 한 뜻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이니 너는 관계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명령만 내리면 시므이는 당장 죽었겠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죄의 대가가 어떤 사람을 통해서 어떤 모양으로 오더라도 달게 받았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낮아진 다윗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 다윗의 태도가 가장 정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를 알기 때문에 시므이가 어떤 저주를 해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 저주의 말도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자기가 아무 할 말이 없고 입을 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회개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는데 “모든 입을 막는다”는 말은 세상이 나중에 심판을 받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입을 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 참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달은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회개하는 태도를 우리가 본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람 중에는 다윗만큼 죄를 철저히 회개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침상이 다 젖도록 눈물을 흘렸고, 진정으로 자기 죄를 깊이 뉘우쳤기 때문에 원수가 저주를 해도 달게 받았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는 다윗의 그 마음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죄를 지었을 때 크게 뉘우치고 마음이 낮아지고 어떤 저주나 징계라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치유될 수 있고 주님의 축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죄를 짓고도 치료받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주 나의 구원이시여
다윗은 원수들이 조롱하고 저주하고 자기 생명을 빼앗을 듯 달려들어도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이 자기를 치료해주시는 것만 바라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신앙입니다. 다윗 자신은 왕권을 아들에게 빼앗겨도 상관이 없지만 다윗이 실족할 때에 원수들이 망자존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다윗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지경에서도 자기 자신을 염려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넘어지고 저주를 받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왕권을 빼앗겨도 상관없지만 원수가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서 기세등등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생겨날까 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참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므로 그의 영광이 어떻게 회복되느냐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죄 가운데 빠지고 거의 넘어지는 상태에 빠져도 철저하게 믿음을 가진 것은 ‘주 나의 구원이시여’라는 사실입니다. 이 구원은 거듭나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에는 시험받을 때 받는 구원도 있고, 유혹을 받을 때 받는 구원도 있고, 죄를 지은 이후에 받는 구원도 있습니다.
“온전히 구원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나 모든 일에서 완전히 구원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항상 살아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구원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시험에 빠지고 죄를 지었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괴로움이 생겼으면 그것으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차츰차츰 그 죄에 대해 잊혀져 가는 것이 구원인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죄도 주님이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마음에 편안함을 얻고 지나가야 됩니다. 이미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는 것 때문에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짓고도 다 용서받은 것으로 알고 무심히 지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미래의 죄까지 용서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짓는 죄 때문에 지옥 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번에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구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은 죄를 뉘우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는 나의 구원이십니다”라고 한 다윗처럼 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