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9:1-13]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제목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 여두둔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대상에 보면 음악을 하는 악장들인 아삽, 헤만, 여두둔이라는 세 사람이 나와 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인 여두둔은 다윗 왕 당시에 악장이었습니다. 다윗은 노래 부르고 시를 읊는 악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거기에 따르는 책임자도 여러 사람 데리고 있었습니다.
[역대상 16:6-7]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역대상 16:41-43]
또 저희와 함께 헤만과 여두둔과 그 남아 택함을 받고 녹명된 자를 세워 여호와의 자비하심이 영원함을 인하여 감사하게 하였고
또 저희와 함께 헤만과 여두둔을 세워 나팔과 제금들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악기로 소리를 크게 내게 하였고 또 여두둔의 아들로 문을 지키게 하였더라
이에 뭇 백성은 각각 그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도 자기 집을 위하여 축복하려고 돌아갔더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나팔을 분다든지 노래를 부르는 일에 특별히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주로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여두둔이나 헤만, 아삽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특별한 행사 때에 악기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물론 성가대가 있기는 합니다만 성가대의 유래도 역시 구약성경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가대원들은 하나님 앞에 귀한 직분이라는 것, 귀한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록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근심과 인간의 한계
시편 39편은 38편과 내용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38편에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시편 38:12-14)라고 한 말씀처럼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원수가 조롱하고, 욕하고, 악평을 하더라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왕권을 가지면서도 왕의 권세로 그를 억누른다든지 말로서 변박하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저주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참 회개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39편에서도 문맥상으로 연속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시편 39:1]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여기서 악인은 다윗이 죄 때문에 곤경에 처하자 다윗을 악평하고 공격하는 시므이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윗은 악인이 앞에 있을 때에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고 했는데 악인과 변론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악한 사람 속에 악이 있고 그 속에서 죄가 나오기 때문에 어떤 변론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가끔 말씀으로써 대결하신 때가 많았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과 달리 다윗이나 보통 사람들은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악한 사람을 상대해서 변론을 하면 그 속에서 악이 나옵니다.
[시편 39: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악한 사람을 상대해서는 선한 말도 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악한 사람을 상대하면 선한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악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선은 하나님 앞에 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죄를 지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 원수가 와서 조롱하고 악한 말로 자기를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향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니 속에서 근심이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39:3-4]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자기를 원수시하는 악인을 상대해서 말을 하지 않으니 속에서 악이 생겼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속이 답답하고 견딜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악한 말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속에는 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도 악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지 속에는 악이 생깁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멸망 받을 수밖에 없구나.’하는 것을 다윗은 알게 되었습니다.
[욥기 15:14-16]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 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예수님 외에는 깨끗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자신 속에 악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를 자복해 보았지만, 속에는 악이 있다는 것이 알아졌습니다.
사람 속에 들어온 사탄의 소리
[마태복음 12:34-37]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사람 속에 있는 악이 곧 사탄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는데 사탄이 하와에게 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사탄이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이간 붙이는 말을 하와에게 했을 때 그 말이 사람 속에 있는 악한 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형태가 되어 나옵니다. 전부 사탄이 가져다준 죄의 법칙입니다.
그날 이후로부터 아담의 후손은 누구든지 선한 말이든 악한 말이든 전부 사탄으로부터 온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덕이나 윤리, 어떤 종교의 원리나 철학 등을 죄나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다 죄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종교철학이나 윤리학 등을 공부합니다. 그것은 모두 사람의 이성에서 나오는 사람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 신학이라는 학문은 사람이 신을 연구하는 것인데 사람이 어떻게 신을 연구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가 타락하면서 신학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사람 속에는 근본적으로 악이 있고, 선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참된 선이 아니고 전부 다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이 완전히 개조되어야 합니다. 내부에 혁명이 일어나서 새롭게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깨달아졌을 때, 사람이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도 참된 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참 진리는 없습니다. 참되게 사람을 주께로 이끄는 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칸트, 헤겔 등 많은 철학자가 있고 또 종교인들과 과학자도 많이 있지만 영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보편적으로 어떤 말을 한다든지 사람을 상대해서 말하는 그 모든 말은 이성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6-8)고 했습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리 선한 말이라도, 아무리 진리인 것 같아도 하나님을 도전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소리는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지 생명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어떻게 하면 내 육신의 소리를 적게 하고 내 육신의 활동과 생각을 줄여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한 과정입니다.
믿음이 좋다, 나쁘다, 믿음이 자랐다, 자라지 못했다 하는 표준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육신에는 사탄의 말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항상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도 육신의 생각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을 상대하면 악이 나오고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게 됩니다. 원수 같은 사람에게 선한 말이 나오기 어렵고 감사한 생각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내 육신 안에는 아직도 옛것이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악인을 상대해서 변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악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속에서 그 악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윗이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 잠시 동안 살다가 사라져버릴 무가치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입을 열면 악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 악은 사람을 악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근본적으로 이 악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합니까? 우리가 화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합니까? 어떤 때는 내 입가에까지 화내는 말이 나오다가도 그 말을 꾹 참습니다. 그러면서 ‘아 내가 잘 참았다’라고 하지만 속에는 여전히 미운 마음과 화가 있고 악이 움직입니다. 우리는 화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고 해서 위안을 받고 자기를 변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원수에게 악한 말을 하는 것을 참고 더 나아가서 시므이 같은 원수가 자기를 저주할 때에 자기 부하가 그를 죽이려고 하자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윗의 마음속에서도 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곧 심판받을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손 넓이만한 인생
[시편 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나의 사는 날이 손 넓이만 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활동 무대가 손 넓이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로서는 꽤나 많이 활동하고, 많은 일을 하고, 노력을 하고 무엇을 안다고 하지만 아는 것도, 활동하는 것도 손바닥 속에 있는 것뿐이고, 생명도 짧고 마음도 좁고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허무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앎으로써 다윗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재발견을 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자기를 안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시면서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10)고 할 때에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애굽기 3:11)라고 하며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전에 모세는 자기 완력으로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다음 날 두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그 싸움을 말리려고 했을 때 그들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우리도 죽이려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말 때문에 모세가 애굽인을 죽인 사실이 폭로되어 바로 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도망쳤습니다(출애굽기 2:12-15).
처음에 모세는 왕궁에서 자라 완력과 권위로 자신 있게 자기 민족을 위해서 일하려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디안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모세는 약해질 대로 완전히 약해져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모세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너는 내 민족을 구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나 같은 것이 어떻게 그 일을 합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내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서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을 텐데 뭐라고 대답하리이까?”(출애굽기 3:13)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 3:14)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허무한 존재입니다. 자기 인생이 아무 가치가 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믿음이 생겨납니다. 자기를 믿을 만한 것이 없어지니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자기가 비워지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힘도 없고, 죽은 인생이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이 시편 말씀에서 다윗은 자기 존재의 허무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인생은 손 넓이만하다”는 말은 생각하는 범위도 좁고, 모든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 속에 들어 있는 보배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질그릇인데 그 안에 보배를 담았습니다. 보배를 담으면 보배그릇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담는 대로 그 그릇이 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든든하지 못하고 귀하지도 않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가 성령이십니다. 그 보배가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금 그릇이면 속에 있는 보배가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릇의 가치가 적으면 적을수록 안에 있는 보배가 더 큰 가치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천하고 낮으면 낮을수록, 가치가 없으면 없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더 영광스럽게 보이고 더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철학, 학문은 전부 다 사람 자체를 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 자체를 떠받드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가 실존주의 철학을 부르짖을 때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을 떠받드는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성경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으로서 인간은 스스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참 인간의 실존이 거기에서 발견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을 하나님 이상으로 높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하나님 이상으로 높여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점점 깎아내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사상이 생겨나게 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그런 사상에 빠져 들어 내가 위대해지고, 내가 훌륭해지고 내가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의 은혜가 가리워져버립니다.
이 보배가 보배로서 나타나려고 하면 질그릇이 깨져버려야 됩니다. 이 질그릇 속에 보배가 있는데 이 질그릇이 보배를 막고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의 군사들이 항아리 속에 등불을 숨겨 가지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명 군사들은 전부 항아리 하나씩 가지고 그 안에는 빛을 가졌습니다. 수많은 미디안 군사들이 머문 곳에 밤중에 가서 그 항아리를 일제히 던지니 빛이 한꺼번에 드러나 미디안 군사들이 놀라서 자기편들끼리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말씀은 질그릇이 깨져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하나님께 능력이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질그릇이 아니고 금 그릇이면 능력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자신의 천한 것, 우리 자신의 약하고 무능한 것, 우리 자신의 악한 것을 알게 될 때 부활의 생명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는 이유는 그런 시련 속에서 자기의 약점, 자기의 무능함, 자기의 악함이 노출되고 그런 자신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로 건너갈 때 예수님이 너무 피곤해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죽을까 겁을 내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졌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마가복음 4:40)고 했습니다. 그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건이 없었으면 그들이 자신은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자기들은 믿음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에게 찾아오는 작은 문제에도 시달리고 괴로워할 때 우리의 삶이 죽은 인생이나 마찬가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랬을 때에 자기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주님을 믿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약점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
[시편 39:6-7]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분주하고 복잡하고 바쁜 세월을 보낸다고 하지만 신문에 나타나는 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 얽혀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별로 가치 없는 자기를 매우 가치 있는 것처럼 떠받들고 살아갑니다.
허무한 인생 속에 진리로 채운다면 참으로 좋은 것이 있게 됩니다. 그림자가 비쥐었으나 가버리면 아무것도 없듯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지만 그림자처럼 없어지게 됩니다. 거기에서 바라볼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참 주님을 믿고 사는 생활이 뭔지 다윗처럼 자기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윗은 죄 안 지으려고 노력도 해보고, 변론하지 않으려고 참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무가치한 것, 자기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믿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시편 39:8-9]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다윗은 자기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해주신 것 입니다. 시므이 같은 사람이 자기를 저주할 때에 입을 다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인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악한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39:10-11]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징계하시는 그 손길이 너무 고통스러워 징계를 멈추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화내는 것을 참고, 말을 하지 않는 노력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징계의 손길을 늦춰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이 죄 때문에 받는 징계의 고통이 심하여 그 누리던 영화가 좀먹듯이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완전히 멸망하면 온 이방 세계에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욕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므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참된 회개와 희망
[시편 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죄 때문에 쫓기는 인생입니다. 다윗은 흉악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안정된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리저리 헤매는 나그네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당장 왕위를 잃어버렸다든지 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 마음의 상태가 안정되지 않고 죄 때문에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는 외로운 인생이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오는 심각한 내적 갈등을 말합니다.
다윗은 죄도 크게 지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중에 그 마음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시편 39: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나그네 인생이니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징계가 물러가고 주님이 구원해주셔서 회복되어 사는 날까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이렇게 명백한 소망이 있고, 참된 회개가 있고, 기도가 있는 것은 참 보기 드뭅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서 마음이 가라앉고 절망에 빠지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죄를 지은 인간이지만 이것이 회복이 되어서 건강한 상태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하고 또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사람을 징계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자체가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아애가 3:25-39]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찌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찌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의 직접적인 원인이 옆 사람에게 있고, 또 세상에 있고, 어떤 물질 문제에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내게 오는 어떤 시련입니다.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라고 했는데 자기를 때리려고 하거든 “얼마든지 때리라”고 하여 수욕으로 배불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면 영원히 버림을 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근심하고 괴로워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 어떤 죄를 지었을 때 하시는 그 징계도 하나님의 본심은 아닙니다. 사랑이십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해야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만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고 치유될 수 있으며 활발하게 주님을 섬기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종의 미를 거두면서 사는 동안에 주님을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실망에 빠져 살다가 주님을 만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낙오된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 깨어 있지 않는 상태,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 있어야 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치료하고 정상인으로 활발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지만 주님의 징계를 받고 치료된 상태에서 활발하게 주님을 섬기다가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언제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수도 있고 죄도 짓고 합니다. 또한 거기에서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있고 치료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주님이 대변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변하시는 주님과 내 마음이 연결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활발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목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 여두둔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대상에 보면 음악을 하는 악장들인 아삽, 헤만, 여두둔이라는 세 사람이 나와 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인 여두둔은 다윗 왕 당시에 악장이었습니다. 다윗은 노래 부르고 시를 읊는 악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거기에 따르는 책임자도 여러 사람 데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나팔을 분다든지 노래를 부르는 일에 특별히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주로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여두둔이나 헤만, 아삽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특별한 행사 때에 악기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물론 성가대가 있기는 합니다만 성가대의 유래도 역시 구약성경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가대원들은 하나님 앞에 귀한 직분이라는 것, 귀한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록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근심과 인간의 한계
시편 39편은 38편과 내용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38편에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시편 38:12-14)라고 한 말씀처럼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원수가 조롱하고, 욕하고, 악평을 하더라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왕권을 가지면서도 왕의 권세로 그를 억누른다든지 말로서 변박하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저주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참 회개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39편에서도 문맥상으로 연속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다윗이 죄 때문에 곤경에 처하자 다윗을 악평하고 공격하는 시므이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윗은 악인이 앞에 있을 때에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고 했는데 악인과 변론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악한 사람 속에 악이 있고 그 속에서 죄가 나오기 때문에 어떤 변론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가끔 말씀으로써 대결하신 때가 많았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과 달리 다윗이나 보통 사람들은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악한 사람을 상대해서 변론을 하면 그 속에서 악이 나옵니다.
악한 사람을 상대해서는 선한 말도 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악한 사람을 상대하면 선한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악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선은 하나님 앞에 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죄를 지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 원수가 와서 조롱하고 악한 말로 자기를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향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니 속에서 근심이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자기를 원수시하는 악인을 상대해서 말을 하지 않으니 속에서 악이 생겼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속이 답답하고 견딜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악한 말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속에는 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도 악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지 속에는 악이 생깁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멸망 받을 수밖에 없구나.’하는 것을 다윗은 알게 되었습니다.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예수님 외에는 깨끗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자신 속에 악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를 자복해 보았지만, 속에는 악이 있다는 것이 알아졌습니다.
사람 속에 들어온 사탄의 소리
사람 속에 있는 악이 곧 사탄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는데 사탄이 하와에게 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사탄이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이간 붙이는 말을 하와에게 했을 때 그 말이 사람 속에 있는 악한 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형태가 되어 나옵니다. 전부 사탄이 가져다준 죄의 법칙입니다.
그날 이후로부터 아담의 후손은 누구든지 선한 말이든 악한 말이든 전부 사탄으로부터 온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덕이나 윤리, 어떤 종교의 원리나 철학 등을 죄나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다 죄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종교철학이나 윤리학 등을 공부합니다. 그것은 모두 사람의 이성에서 나오는 사람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 신학이라는 학문은 사람이 신을 연구하는 것인데 사람이 어떻게 신을 연구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가 타락하면서 신학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사람 속에는 근본적으로 악이 있고, 선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참된 선이 아니고 전부 다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이 완전히 개조되어야 합니다. 내부에 혁명이 일어나서 새롭게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깨달아졌을 때, 사람이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도 참된 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참 진리는 없습니다. 참되게 사람을 주께로 이끄는 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칸트, 헤겔 등 많은 철학자가 있고 또 종교인들과 과학자도 많이 있지만 영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보편적으로 어떤 말을 한다든지 사람을 상대해서 말하는 그 모든 말은 이성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6-8)고 했습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리 선한 말이라도, 아무리 진리인 것 같아도 하나님을 도전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소리는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지 생명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어떻게 하면 내 육신의 소리를 적게 하고 내 육신의 활동과 생각을 줄여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한 과정입니다.
믿음이 좋다, 나쁘다, 믿음이 자랐다, 자라지 못했다 하는 표준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육신에는 사탄의 말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항상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도 육신의 생각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을 상대하면 악이 나오고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게 됩니다. 원수 같은 사람에게 선한 말이 나오기 어렵고 감사한 생각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내 육신 안에는 아직도 옛것이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악인을 상대해서 변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악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속에서 그 악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윗이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 잠시 동안 살다가 사라져버릴 무가치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입을 열면 악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 악은 사람을 악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근본적으로 이 악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합니까? 우리가 화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합니까? 어떤 때는 내 입가에까지 화내는 말이 나오다가도 그 말을 꾹 참습니다. 그러면서 ‘아 내가 잘 참았다’라고 하지만 속에는 여전히 미운 마음과 화가 있고 악이 움직입니다. 우리는 화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고 해서 위안을 받고 자기를 변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원수에게 악한 말을 하는 것을 참고 더 나아가서 시므이 같은 원수가 자기를 저주할 때에 자기 부하가 그를 죽이려고 하자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윗의 마음속에서도 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곧 심판받을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손 넓이만한 인생
“나의 사는 날이 손 넓이만 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활동 무대가 손 넓이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로서는 꽤나 많이 활동하고, 많은 일을 하고, 노력을 하고 무엇을 안다고 하지만 아는 것도, 활동하는 것도 손바닥 속에 있는 것뿐이고, 생명도 짧고 마음도 좁고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허무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앎으로써 다윗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재발견을 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자기를 안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시면서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10)고 할 때에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애굽기 3:11)라고 하며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전에 모세는 자기 완력으로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다음 날 두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그 싸움을 말리려고 했을 때 그들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우리도 죽이려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말 때문에 모세가 애굽인을 죽인 사실이 폭로되어 바로 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도망쳤습니다(출애굽기 2:12-15).
처음에 모세는 왕궁에서 자라 완력과 권위로 자신 있게 자기 민족을 위해서 일하려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디안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모세는 약해질 대로 완전히 약해져서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모세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너는 내 민족을 구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나 같은 것이 어떻게 그 일을 합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내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서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을 텐데 뭐라고 대답하리이까?”(출애굽기 3:13)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 3:14)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허무한 존재입니다. 자기 인생이 아무 가치가 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믿음이 생겨납니다. 자기를 믿을 만한 것이 없어지니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자기가 비워지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힘도 없고, 죽은 인생이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이 시편 말씀에서 다윗은 자기 존재의 허무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인생은 손 넓이만하다”는 말은 생각하는 범위도 좁고, 모든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 속에 들어 있는 보배
우리는 질그릇인데 그 안에 보배를 담았습니다. 보배를 담으면 보배그릇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담는 대로 그 그릇이 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든든하지 못하고 귀하지도 않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가 성령이십니다. 그 보배가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금 그릇이면 속에 있는 보배가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릇의 가치가 적으면 적을수록 안에 있는 보배가 더 큰 가치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천하고 낮으면 낮을수록, 가치가 없으면 없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더 영광스럽게 보이고 더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철학, 학문은 전부 다 사람 자체를 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 자체를 떠받드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가 실존주의 철학을 부르짖을 때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을 떠받드는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성경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으로서 인간은 스스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참 인간의 실존이 거기에서 발견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을 하나님 이상으로 높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하나님 이상으로 높여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점점 깎아내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사상이 생겨나게 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그런 사상에 빠져 들어 내가 위대해지고, 내가 훌륭해지고 내가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의 은혜가 가리워져버립니다.
이 보배가 보배로서 나타나려고 하면 질그릇이 깨져버려야 됩니다. 이 질그릇 속에 보배가 있는데 이 질그릇이 보배를 막고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의 군사들이 항아리 속에 등불을 숨겨 가지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명 군사들은 전부 항아리 하나씩 가지고 그 안에는 빛을 가졌습니다. 수많은 미디안 군사들이 머문 곳에 밤중에 가서 그 항아리를 일제히 던지니 빛이 한꺼번에 드러나 미디안 군사들이 놀라서 자기편들끼리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말씀은 질그릇이 깨져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하나님께 능력이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질그릇이 아니고 금 그릇이면 능력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자신의 천한 것, 우리 자신의 약하고 무능한 것, 우리 자신의 악한 것을 알게 될 때 부활의 생명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는 이유는 그런 시련 속에서 자기의 약점, 자기의 무능함, 자기의 악함이 노출되고 그런 자신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로 건너갈 때 예수님이 너무 피곤해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죽을까 겁을 내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졌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마가복음 4:40)고 했습니다. 그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건이 없었으면 그들이 자신은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자기들은 믿음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에게 찾아오는 작은 문제에도 시달리고 괴로워할 때 우리의 삶이 죽은 인생이나 마찬가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랬을 때에 자기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주님을 믿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약점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분주하고 복잡하고 바쁜 세월을 보낸다고 하지만 신문에 나타나는 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 얽혀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별로 가치 없는 자기를 매우 가치 있는 것처럼 떠받들고 살아갑니다.
허무한 인생 속에 진리로 채운다면 참으로 좋은 것이 있게 됩니다. 그림자가 비쥐었으나 가버리면 아무것도 없듯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지만 그림자처럼 없어지게 됩니다. 거기에서 바라볼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참 주님을 믿고 사는 생활이 뭔지 다윗처럼 자기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윗은 죄 안 지으려고 노력도 해보고, 변론하지 않으려고 참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무가치한 것, 자기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믿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해주신 것 입니다. 시므이 같은 사람이 자기를 저주할 때에 입을 다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인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악한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징계하시는 그 손길이 너무 고통스러워 징계를 멈추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화내는 것을 참고, 말을 하지 않는 노력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징계의 손길을 늦춰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이 죄 때문에 받는 징계의 고통이 심하여 그 누리던 영화가 좀먹듯이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완전히 멸망하면 온 이방 세계에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욕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므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참된 회개와 희망
죄 때문에 쫓기는 인생입니다. 다윗은 흉악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안정된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리저리 헤매는 나그네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당장 왕위를 잃어버렸다든지 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 마음의 상태가 안정되지 않고 죄 때문에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는 외로운 인생이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오는 심각한 내적 갈등을 말합니다.
다윗은 죄도 크게 지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중에 그 마음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나그네 인생이니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징계가 물러가고 주님이 구원해주셔서 회복되어 사는 날까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이렇게 명백한 소망이 있고, 참된 회개가 있고, 기도가 있는 것은 참 보기 드뭅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서 마음이 가라앉고 절망에 빠지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죄를 지은 인간이지만 이것이 회복이 되어서 건강한 상태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하고 또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사람을 징계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자체가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의 직접적인 원인이 옆 사람에게 있고, 또 세상에 있고, 어떤 물질 문제에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내게 오는 어떤 시련입니다.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라고 했는데 자기를 때리려고 하거든 “얼마든지 때리라”고 하여 수욕으로 배불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면 영원히 버림을 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근심하고 괴로워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 어떤 죄를 지었을 때 하시는 그 징계도 하나님의 본심은 아닙니다. 사랑이십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해야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만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고 치유될 수 있으며 활발하게 주님을 섬기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종의 미를 거두면서 사는 동안에 주님을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실망에 빠져 살다가 주님을 만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낙오된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 깨어 있지 않는 상태,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 있어야 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치료하고 정상인으로 활발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지만 주님의 징계를 받고 치료된 상태에서 활발하게 주님을 섬기다가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언제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수도 있고 죄도 짓고 합니다. 또한 거기에서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있고 치료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주님이 대변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변하시는 주님과 내 마음이 연결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활발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