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9편] 주의 양은 주의 음성을 듣나니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 (셀라)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셀라)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0)



성령을 통한 환난의 극복


‘고라 자손의 시,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이 시편 49편은 물질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서 읊은 시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뭔가를 깨닫고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시 49:1)고 하면서 온 세상 무지한 인생들을 향해서 외치는 힘찬 간증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있게 이 세상을 향해서 외칠 수 있는 그러한 지혜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물질이나 세상에 매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있고 담대하게 이러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시 49:2-3)


 이 고라 자손은 뭔가 마음속에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가치있고 참된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으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시 49:4)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된 지혜를 발견한 이 시편 저자는 수금을 타면서 자기가 깨달은 오묘한 사실을 노래로 읊어가면서 비유적인 말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시 49:5)


 이 세상은 죄 때문에 환난이 극에 달해 있지만 이 시편 저자는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 때문에 모든 환난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근원적으로 아담이 타락하여 사탄이 죄를 이 세상 속으로 가져 들어왔기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여러가지 환난은 그 근원이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환난이 가득하고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죄를 해결하고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환난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죄사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생활 주변에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환난이 닥치고 두려움이 있을 때에 그것을 걱정하는 마음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느날 우리가 그러한 두려움이나 걱정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마음의 완전한 승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계셔서

 그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바울 서신이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신앙생활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산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으로 빌립보에 갔을 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역으로 지금은 그리스 북쪽에 속한 곳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옥사장이 회개를 하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옥중에 갇혀 있었지만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큰소리로 찬송을 불렀을 때 옥문이 열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이라고 했는데 이 세상은 죄악 세상이고 우리는 이 죄악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이 환난이 우리 주변을 둘러쌉니다. 이 환난의 날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성령으로 인도를 받는 자신있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시 49:6-8)


 물질을 의지하는 이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은 것이 힘이고 명예이고 자랑입니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는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모든 가치를 물질에다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많이 바치면 복을 받고 영생 복락을 얻는다는 식의 종교들이 많습니다. 중세 암흑기의 로마 키톨릭도 돈 문제로 크게 부패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을 짓기 위해서 속죄권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속죄권을 돈으로 사면 죄가 사해진다고 하여 돈을 거두어서 큰 건물을 지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육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물질을 귀하게 여기고 자꾸만 이 세상과 눈에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려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는 육신의 소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물질 문제와 싸움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물질을 많이 바치면 믿음이 좋다거나 헌금을 많이 하면 신앙이 높아 보이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물건을 많이 바치면 좋아하시고 적게 바치면 싫어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질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세상으로 자꾸 끌어당기니까 이러한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 시편 49편 7절에 보면 “속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천주교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속전을 바쳤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천국과 지옥 이외에도 연옥이 있다고 합니다. 연옥은 불구덩이 가운데는 아니지만 그 가장자리의 뜨거운 곳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못 살다가 죽어서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이 속전을 바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속전을 바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속전은 반 세겔이었습니다.

 그러면 속전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 2장 6절에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속전은 예수님의 그림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죄를 속량하는 속전의 값으로 자신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물질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마술하는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성령을 받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때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라고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물 교환으로 돈을 주고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철두철미하게 은혜 그 자체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구원도, 속죄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 돈 주고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이 세상 부귀와 영광, 물질을 사랑하는 육신의 마음과 정욕을 때려 부수는 문제이지 하나님 의 은혜를 값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보혈의 힘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금이나 은과, 예수님의 피를 비교했을 때 정말 어느 것이 여러분 마음에 귀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까? 성경 말씀을 안다면 이론 으로는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가운데 이 성경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구원받고 감사를 드렸지만 얼마 지나고 나면 그 마음이 바뀌어져 버립니다. 몇 푼 안되는 물질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을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그 마음속에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 받은 구원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참 신앙생활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평생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은 힘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이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해서 금이나 은 같은 돈가지고는 절대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금은 보석이 많더라도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세상에 속하여 신앙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아마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한 종류는 구원받은 것이 가짜일 것이고, 다른 한 종류는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완전히 육신으로 돌아가서 구원받은 사실을 잊어버린 상태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로다”(시 51:12-13)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죄를 짓거나 마음이 세상에 속해 버리면 구원의 즐거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져 버리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성도들의 사이에 교제가 끊어지고 주님과의 사이에도 교제가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구원 안 받은 사람과 똑같은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언제 구원받았다하는 희미한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한 마음도 사라집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하고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이 빛 가운데 행한다는 말은 죄를 자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의 죄를 자백하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사귐이 있고 막혔던 것이 허물어지면서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됩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된다는 것은 자신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사해진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미 이 천년 전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해 주신 것을 알았었지만 가물가물하게 옛날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것이 다시 떠오르면서 마음 가운데 감사하게 되는 것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덕스럽지 못한 성적인 죄라든지 하는 것은 공중 앞에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만 어떤 물질적인 문제나 인간 관계에 관한 문제 같으면 자백을 통해 마음에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하여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은 것을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있게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지로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데 있어서 금과 은과 물질이 나를 힘있게 하느냐 아니면 주님의 보혈의 힘이 나를 힘있게 하느냐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구체적으로 잘 따져보지 않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물질이나 돈이 많으면 힘있고 용기있게 생활할 것같이 생각되지만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비록 지금은 가난하더라도 마음은 힘차고 용기있게 활발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시 49:9-10)


 소크라테스나 헤겔, 칸트 같은 철학자들이나 석가모니, 공자, 맹자, 박태선 같은 종교가들 그리고 아인쉬타인, 드골, 아이젠하워, 맥아더, 스탈린, 모택동 같은 유명한 사람들도 다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나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다 죽음 앞에서는 똑같이 평등하게 되어 버립니다. 가졌던 재물도 남의 것이 되고 자기와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영원히 누리리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가치관을 알지 못합니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시 49:11)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묵묵히 자신을 주님께 드려서 살아가는 그 삶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삶입니까? ‘나는 부자도 아니고 세상에 이름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내 가슴 속에는 뭔가 하나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비웃을 수 있는 힘이 있구나’하면서 현재 살아가는 이 삶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승리의 삶이요,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이 시편 저자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졌기에 망정이지 우리가 거리에 나가 못깨달은 사람은 짐승과 같다고 하면 욕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시 49:13)


 어리석은 것이지만 후세 사람들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 우매한 말들을 성현들의 말이라고 하여 그 말을 많이 배워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지식인이 되려고 애씁니다. 그것이 바로 그 말을 칭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장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 —25)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 썩어질 씨가 이 세상 사람들의 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학문이나 말은 무엇이든지 썩어지는 것입니다. 썩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학생이면 학교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성적도 내야 하겠지만 어느날 성경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열매를 계속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성경 읽는 것은 뒷전에 두고 세상 책을 더 많이 읽는다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소리는 이성에서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이성의 소리에 쾌감을 느끼고 마음이 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희 말을 칭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이성의 소리가 아니고 영의 소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에서 칭찬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읽으면 꺼끌꺼끌한 말이 자꾸 나옵니다. 그래서 단단한 음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칸트나 헤겔,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들의 말은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고 사람들의 마음을 어떤 세계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들에게 참으로 영적인 것은 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들을 좇다 보니 기독교에도 스콜라 신학이라 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스콜라 신학은 기독교 진리가 철학과 타협을 해서 생겨난 철학적인 신학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을 철학적으로 연구를 하는 풍조가 생겨나자 기독교가 복음에서 떠나 딴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타락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의 작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성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지식으로 추구해 가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순종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재미가 없고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성경을 그냥 읽지 말고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읽으면서 기억나는 것이나 뭔가 깨달은 것을 기록해 가면서 읽으면 성경 읽는 것이 조금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성경을 풀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따르는 생활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시 49:14)


 이 14절 말씀과 관련하여 베드로후서 2장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벧후 2:11-12)


 여기서 저희는 이단자들, 곧 육체를 따라서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질만 알고 세상 부귀 영광만 아는 사람들의 말을 칭찬하는 그런 사람들이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고 사망이 저희 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망이 목자가 되어 사망에게 인도를 받고 이끌려 가는 양떼입니다. 주님이 목자이신 참 양떼와는 정반대되는 입장입니다.

 요한복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하셨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음성을 따라가는 그 길은 영생의 길이요 영광스러운 생명의 길입니다.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시 49:14-15)


 여기서 아침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예수님이 오시면 비록 가난하고 이 세상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 같지만 앞에 기록한 멸망받을 저희들과는 정반대로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망의 목자에게 끌려 갈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 비록 가난하고 돈 없고, 세력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소망을 가진 이들을 비교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주님의 양제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나를 영접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냥 막연하게 이러한 말씀을 읽고 좋구나 생각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보이는 현실에다가만 가치를 두고 거기에 모든 마음이 끌려서 살아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질에 끌리는 사람은 그 은과 금과 세상 세력이 자기의 목자로 서 자기를 끌고 갑니다. 결국 그것이 사망이 자기 목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 세상 권세, 물질, 영광이 자기의 목자였고 그 길로 따라가다 보니까 나중에 사망이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로서는 주님이 목자이시라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요10: 1—6)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의 음성을 따라가면서 사는 삶이냐 아니면 다른 음성을 따라서 사느냐 생각해 봐야 됩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때는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개개인의 이름을 아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무리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저는 목장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진짜 목자는 다 양의 이름을 지어놓고 그 이름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양들이 무리를 지어가지고 목자를 따라다니지 않고 떨어지면 잃어버린 양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님께 순종하고 따라가는 그 생활도 중요하지만 무리 속에 주님께 순종하고 따라가는 생활도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긍지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시 49:16-17)


 이 세상 사람들이 부귀와 영광을 누리고 잘 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못 내려간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죽는 그 순간부터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원 못 받은 사람은 음부와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반면 구원받고 세상에서 욕먹고 핍박 받고 천대 받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죽는 순간부터 영광이 따릅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삶의 가치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8-20)


 이 세상 사람들을 보면 행사를 야단스럽게 치릅니다. 성경에 보면 생일 잔치를 거창하게 치르면서 사람을 죽인 이들이 많습니다. 헤롯도 생일 잔치를 거창하게 하다가 세례 요한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생일 잔치를 하면서 사람들 불러 놓고 자기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 자기를 축하하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스스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빌라도와 같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재판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재판하는 위치에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이사의 법정에 섰을 때 유대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를 변명 했습니다. 베스도 각하가 바울에게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하자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행 26:25)라고 대답했고, 아그립바 왕에게는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실지로 우리는 대통령 앞이나 법관 앞에 가서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무시해 버리고 권세나 돈 있는 사람 앞에 가서 비굴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들이 복음 전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인사도 차리고 정당하게 대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법의 질서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윤리나 도덕을 존중히 여기고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정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눈 앞에 어떤 위대한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나 지식 높은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나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을 지니고 있다는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존심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시험과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오직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만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