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2:1-1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시편 32편은 ‘다윗의 마스길’이라는 부제가 있는데, ‘마스길’은 관주에 ‘교훈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회개하고 자백한 내용을 교훈으로 읊은 시입니다.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긴 다윗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죄를 짓고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었을 때 통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지만 그 죄가 사함 받았다는 마음의 확신을 갖고 이 시를 읊었습니다.
다윗이 여러 환난 속에서 읊은 시의 내용을 보면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환난을 당했을 때나 죄를 지었을 때나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를 풀었습니다. 또 좋은 일이 있어도 인간적으로만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모든 문제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음이 약해져서 자기 방법대로만 일을 처리하려고 하다가 낭패를 당하고 실망을 느끼는 수가 많습니다. 또 좋은 일이 있어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더욱이 죄를 범했을 때에는 믿음이 약해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실망하여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경우에라도 그 문제를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회로 삼고, 깊은 의미를 깨닫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을 예수님의 그림자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4:7-8]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시편 32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32:1-2]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구원받은 후에 지은 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를 지은 사람과 죄 짓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로마서 5:20)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일부러 죄 지을 필요는 없지만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보다 훨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는데 ‘ 간사하다’는 말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난 후, 참으로 마음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자백하고 다음에 또 죄를 범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지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면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확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토설하라
[시편 32:3-4]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토설은 자백입니다. 큰 죄나 작은 죄나 마음에 어떤 작은 거리낌이라도 있으면 그 말을 들어줄 만한 형제 자매 앞에 토설하여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51:1-5]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시이고 시편 32편은 다윗이 마음속에 확실히 용서 받은 사실을 두고 감사해서 쓴 시입니다.
[요한일서 1:5-9]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말씀하셨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형제를 대할 때 몹시 마음에 거리낌이 있어 서로 외면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마음 속에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이가 막혀 있고 주님과도 막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죄를 짓고 양심의 괴로움이 있는 것도 어두움이지만, 마땅히 빛 가운데서 교제를 해야 할 사람이 교제가 잘 되지 않고 마음에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어두움입니다.
그런 어두움을 해결하는 길은 토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제입니다. 자기의 답답한 문제를 다 얘기할 수 있는 것이 빛 가운데 자기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둡던 마음이 깨끗하게 해결되어 버립니다.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구원받을 때에 영원히 죄가 용서되었는데 여기에 또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 죄를 주님께 자백했을 때 예수님의 피가 역사하심으로써 마음의 문제가 해결됨을 뜻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어떤 죄를 짓게 되면 현재는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들림 받은 후에는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죄를 자백하여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대로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일평생 동안 예수님의 피의 역사와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만 잠깐 그 은혜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평생 그 피로 말미암아 감사함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여 죄를 지었는데 나중에 밧세바로부터서 아기를 가졌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다윗은 그때부터 마음에 고통이 시작되어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전장에 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잘 대접하고 집에 가서 자기 부인과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아에게 밧세바와 동침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아는 우직한 사람이라 동료들이 전장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데 자신만 편안히 집에서 잘 수 없다며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이라는 대장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라고 하여 우리아는 결국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윗은 마음의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너무 근심하면 뼈가 마른다는 말처럼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토설했기 때문에 용서받았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시편 32: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야로 일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인을 부르시면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고 물으셨는데 하나님은 이미 다 아셨지만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을 쳐죽인 그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마음에 고통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고통이 없다면 그 사람의 양심은 화인을 맞은 것입니다.
우리 영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에 대해서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강한 책망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망을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한 책망이 있어도 회개치 않고, 고백하지 않으면 성령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토지를 팔 때에 성령의 음성을 무시했습니 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전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둘 때 그들도 전재산을 팔았지만 그 대금의 일부는 숨기고 마치 전부를 바친 것처럼 속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소멸한 것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 바로 성령의 책망이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양심의 고통을 지나쳐 버리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죽어버립니다.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은 약속입니다. 성경 안에는 많은 약속이 있는데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구원받은 다음에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대언해주시는 대언자가 계시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대언자의 대언과 내 자백이 연결되면 교제가 회복되고 나중에 심판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언제나 죄를 자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마음에 해결이 안 되거든 형제 자매를 찾아가서 자기의 죄를 토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하면 그 죄를 사해 주신다는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의 자백一주님을 만나는 길
[시편 32: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죄를 깨달을 때”가 “주를 만날 기회”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도 죄를 짓고 나면 주님과 나 사이에 죄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죄를 깊이 깨닫고 자백하는 것이 주님을 만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는 말은 죄를 짓는 우리의 약점,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이 충분히 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혹 어떤 시험을 당하거나 죄를 짓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약한 것을 주님이 지금도 충분히 아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고 했습니다. ‘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죄를 지을 때도 있고, 죄 지은 것을 사함 받을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시험에 걸리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하나 죄를 지어서 마음이 고통스러울 바로 그때 주님께 나아가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주님, 사랑의 주님, 나를 위해서 체휼하시는 주님께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다 아뢰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했듯이 무엇이든지 주님께 자백하고 상의하면 주님이 모든 문제를 맡아서 해결해 주십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에베소서 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우리들이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자백하고 토설하는 그때가 바로 주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갈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
[시편 32: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다윗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피해서 숨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죄 지은 사람이지만 주님 품 안에서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더라도 주님의 품에서 쉴 곳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오도록 하기 위해서 길이 되어 주신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사탄은 사람들이 죄 짓도록 만들고,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참소합니다. 욥기를 보면 사탄이 욥을 참소한 내용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욥의 자녀들이 죽고 재산이 없어졌습니다. 다음에는 욥이 문둥병자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기왓장을 가지고 몸을 긁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탄의 참소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면 사탄이 참소하는 것과 성령의 손이 누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혼돈하기 쉽습니다.
사탄에게 참소를 당하면 성경 말씀이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하기 쉽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눌리는 것, 성령의 책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이 겸손해지고 낮아져서 죄를 토설함으로써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죄 외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시편 32: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다윗은 죄를 짓고 그 문제로 고민하다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죄를 범한 사람들에 게 교훈이 되는 말씀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시편 51:11-13]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다시 한번 용서받았다는 믿음을 가질 때에 구원의 즐거움은 회복됩니다.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라고 한 말씀대로 자기가 용서받고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면서도 전도하면 구원받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전도하는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경 말씀이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혹 어떤 경우에는 구원 못 받은 사람이 설교할 때도 구원받은 사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구원받습니다.
죄사함 받은 은혜로 사는 신앙생활
[시편 32: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갈과 굴레”는 율법입니다. 구원 못 받은 사람은 율법을 가지고 죄를 깨닫도록 해야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육신의 마음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고 자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말과 노새와 같다는 말입니다. 육신적인 마음이 있을 때에는 항상 성령의 능력이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잘 받지 못합니다.
[유다서 1:12]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성령과 전혀 관계 없는 죄 덩어리의 육신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사람의 육신은 짐승의 육신이나 똑같습니다. 말이나 노새는 입에 자갈을 매워서 끌고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끌고 가기가 힘듭니다. 그 자갈이 율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육신의 상태는 율법으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다음에는 성령으로 인도되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죄를 자백하면 성령이 이끌어가십니다. 죄를 자백하지 않는 마음, 죄를 죄로 생각지 않는 완악한 마음은 말이나 노새 같은 마음입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도무지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말과 노새 같은 육신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32: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사탄이 끌고 가는 세상은 슬픔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시편 32: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죄사함 받은 사람들이 의인들이고, 마음이 정직한 자가 의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든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언제나 그 마음을 받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우리 시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들이 많을지라도 우리는 죄 사함 받은 그 은혜를 간직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이 죄 사함 받은 그 감격으로 기뻐하고 은혜를 전했듯이 우리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시편 32편은 ‘다윗의 마스길’이라는 부제가 있는데, ‘마스길’은 관주에 ‘교훈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회개하고 자백한 내용을 교훈으로 읊은 시입니다.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긴 다윗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죄를 짓고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었을 때 통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지만 그 죄가 사함 받았다는 마음의 확신을 갖고 이 시를 읊었습니다.
다윗이 여러 환난 속에서 읊은 시의 내용을 보면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환난을 당했을 때나 죄를 지었을 때나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를 풀었습니다. 또 좋은 일이 있어도 인간적으로만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모든 문제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음이 약해져서 자기 방법대로만 일을 처리하려고 하다가 낭패를 당하고 실망을 느끼는 수가 많습니다. 또 좋은 일이 있어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더욱이 죄를 범했을 때에는 믿음이 약해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실망하여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경우에라도 그 문제를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회로 삼고, 깊은 의미를 깨닫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을 예수님의 그림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32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구원받은 후에 지은 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를 지은 사람과 죄 짓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로마서 5:20)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일부러 죄 지을 필요는 없지만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보다 훨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는데 ‘ 간사하다’는 말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난 후, 참으로 마음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자백하고 다음에 또 죄를 범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지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면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확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토설하라
토설은 자백입니다. 큰 죄나 작은 죄나 마음에 어떤 작은 거리낌이라도 있으면 그 말을 들어줄 만한 형제 자매 앞에 토설하여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시이고 시편 32편은 다윗이 마음속에 확실히 용서 받은 사실을 두고 감사해서 쓴 시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말씀하셨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대할 때 몹시 마음에 거리낌이 있어 서로 외면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마음 속에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이가 막혀 있고 주님과도 막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죄를 짓고 양심의 괴로움이 있는 것도 어두움이지만, 마땅히 빛 가운데서 교제를 해야 할 사람이 교제가 잘 되지 않고 마음에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어두움입니다.
그런 어두움을 해결하는 길은 토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제입니다. 자기의 답답한 문제를 다 얘기할 수 있는 것이 빛 가운데 자기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둡던 마음이 깨끗하게 해결되어 버립니다.
구원받을 때에 영원히 죄가 용서되었는데 여기에 또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 죄를 주님께 자백했을 때 예수님의 피가 역사하심으로써 마음의 문제가 해결됨을 뜻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어떤 죄를 짓게 되면 현재는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들림 받은 후에는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죄를 자백하여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대로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일평생 동안 예수님의 피의 역사와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만 잠깐 그 은혜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평생 그 피로 말미암아 감사함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여 죄를 지었는데 나중에 밧세바로부터서 아기를 가졌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다윗은 그때부터 마음에 고통이 시작되어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전장에 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잘 대접하고 집에 가서 자기 부인과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아에게 밧세바와 동침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아는 우직한 사람이라 동료들이 전장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데 자신만 편안히 집에서 잘 수 없다며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이라는 대장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라고 하여 우리아는 결국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윗은 마음의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너무 근심하면 뼈가 마른다는 말처럼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토설했기 때문에 용서받았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야로 일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인을 부르시면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고 물으셨는데 하나님은 이미 다 아셨지만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을 쳐죽인 그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마음에 고통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고통이 없다면 그 사람의 양심은 화인을 맞은 것입니다.
우리 영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에 대해서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강한 책망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망을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한 책망이 있어도 회개치 않고, 고백하지 않으면 성령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토지를 팔 때에 성령의 음성을 무시했습니 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전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둘 때 그들도 전재산을 팔았지만 그 대금의 일부는 숨기고 마치 전부를 바친 것처럼 속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소멸한 것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 바로 성령의 책망이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양심의 고통을 지나쳐 버리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죽어버립니다.
이 말씀은 약속입니다. 성경 안에는 많은 약속이 있는데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대언해주시는 대언자가 계시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대언자의 대언과 내 자백이 연결되면 교제가 회복되고 나중에 심판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언제나 죄를 자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마음에 해결이 안 되거든 형제 자매를 찾아가서 자기의 죄를 토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하면 그 죄를 사해 주신다는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의 자백一주님을 만나는 길
“죄를 깨달을 때”가 “주를 만날 기회”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도 죄를 짓고 나면 주님과 나 사이에 죄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죄를 깊이 깨닫고 자백하는 것이 주님을 만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는 말은 죄를 짓는 우리의 약점,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이 충분히 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혹 어떤 시험을 당하거나 죄를 짓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약한 것을 주님이 지금도 충분히 아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고 했습니다. ‘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죄를 지을 때도 있고, 죄 지은 것을 사함 받을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시험에 걸리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하나 죄를 지어서 마음이 고통스러울 바로 그때 주님께 나아가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주님, 사랑의 주님, 나를 위해서 체휼하시는 주님께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다 아뢰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했듯이 무엇이든지 주님께 자백하고 상의하면 주님이 모든 문제를 맡아서 해결해 주십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들이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자백하고 토설하는 그때가 바로 주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갈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
다윗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피해서 숨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죄 지은 사람이지만 주님 품 안에서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더라도 주님의 품에서 쉴 곳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오도록 하기 위해서 길이 되어 주신 분이십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죄 짓도록 만들고,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참소합니다. 욥기를 보면 사탄이 욥을 참소한 내용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욥의 자녀들이 죽고 재산이 없어졌습니다. 다음에는 욥이 문둥병자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기왓장을 가지고 몸을 긁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탄의 참소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면 사탄이 참소하는 것과 성령의 손이 누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혼돈하기 쉽습니다.
사탄에게 참소를 당하면 성경 말씀이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하기 쉽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눌리는 것, 성령의 책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이 겸손해지고 낮아져서 죄를 토설함으로써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죄 외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그 문제로 고민하다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죄를 범한 사람들에 게 교훈이 되는 말씀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다시 한번 용서받았다는 믿음을 가질 때에 구원의 즐거움은 회복됩니다.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라고 한 말씀대로 자기가 용서받고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면서도 전도하면 구원받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전도하는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경 말씀이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혹 어떤 경우에는 구원 못 받은 사람이 설교할 때도 구원받은 사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구원받습니다.
죄사함 받은 은혜로 사는 신앙생활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갈과 굴레”는 율법입니다. 구원 못 받은 사람은 율법을 가지고 죄를 깨닫도록 해야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육신의 마음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고 자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말과 노새와 같다는 말입니다. 육신적인 마음이 있을 때에는 항상 성령의 능력이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잘 받지 못합니다.
성령과 전혀 관계 없는 죄 덩어리의 육신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은 짐승의 육신이나 똑같습니다. 말이나 노새는 입에 자갈을 매워서 끌고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끌고 가기가 힘듭니다. 그 자갈이 율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육신의 상태는 율법으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다음에는 성령으로 인도되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죄를 자백하면 성령이 이끌어가십니다. 죄를 자백하지 않는 마음, 죄를 죄로 생각지 않는 완악한 마음은 말이나 노새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도무지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말과 노새 같은 육신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탄이 끌고 가는 세상은 슬픔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죄사함 받은 사람들이 의인들이고, 마음이 정직한 자가 의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든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언제나 그 마음을 받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우리 시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들이 많을지라도 우리는 죄 사함 받은 그 은혜를 간직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이 죄 사함 받은 그 감격으로 기뻐하고 은혜를 전했듯이 우리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