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2편] 내 영혼이 여호와를 바라고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1-11)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고라 자손의 교훈이라고 한 것은 다윗이 고라 자손에 관한 시를 읊었다는 뜻입니다. 고라 자손은 모세 당시 모세를 반역하다가 죽은 자들입니다. 고라 자손이 여기에 등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레위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는 성전 안에서 일하고 노래 부르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대하 20:19)


 고라 자손들은 요즈음의 성가대와 비슷한, 노래를 전담하는 일들을 맡았습니다. 이 고라 자손은 모세와 아론을 반역하다가 갈라 진 땅 속으로 삼켜진 일도 있었고, 불에 타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윗 왕 시절에는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반역한 아들 압살롬을 피해서 예루살렘을 등지고 요단 강을 건너갔던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서 요단 강까지는 약 50리 정도 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 되는 산 언덕에 있고 요단 강은 북쪽 갈릴리부터 사해까지 내려오는 강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가르쳐줍니다. 예루살렘에는 아직 솔로몬 성전이 없었지만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운반해서 모셔 놓았기 때문에 거기가 성소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법궤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법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있습니다. 신약시대로 말하면 말씀이 육신으로 되어 오신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시내산입니다. 법궤가 만들어진 후에 성전이 생겼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타나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가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랑의 법칙이 돌에 새겨져 나타나고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육신 속에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예수님의 육신 안에 계시고 그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 세상에 알려져야 했는데 구약시대에는 돌비에 나타났고, 계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말씀이 계명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직접 육신이신 예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고 몸소 나타내시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한 육체 속에 말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시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고 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깨달을 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새겨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육신에 가로막혀 완전한 사랑을 못하지만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말씀이시기도 하고 성령이시기도 하고 주님 자체이시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신비롭고 놀라운 영적 사실입니다.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예루살렘을 떠나서 법궤를 메고 가다가 법궤를 움직이면 안된다고 해서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다윗이 요단 강 건너까지 도망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그 법궤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 42편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곳을 향한 다윗의 간절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라 자손을 시켜 노래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이 시편 42편을 비롯한 몇 장은 고라 자손의 노래가 계속 나옵니다. 성경은 그 역사적인 배경을 알면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뜻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법궤가 있는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 이러한 내용의 시를 쓴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법궤와 밀접한 관계에서 진행됩니다. 가령 사무엘 상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법궤를 빼앗겨 버리는 내용이 있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블레셋 사람에게 큰 재앙이 내리고 벌이 내리고 사람이 죽고 질병이 일어나는 일이 발생합니다.

 법궤가 온 이후로 블레셋 사람들의 우상이 넘어져 목이 부러지기도 하고 법궤가 움직이는 곳마다 재앙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 이스라엘로 보냈습니다. 처음 3개월 동안 그 법궤는 이스라엘에 사는 이방인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에 큰 축복이 내렸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다시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게 됩니다. 블레셋에서 법궤를 보낼 때는 법궤를 멜 수 있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수레에 실어왔지만 이스라엘 땅에 왔을 때에는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이 메어서 운반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할 때 다윗은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이 너무 기뻐서 사람들 앞에서 뛰며 춤을 추면서 그 법궤를 모셔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지금 그 법궤를 예루살렘에 두고 멀리 피난을 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시로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라고 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이 시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아들에게서 쫓겨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예레미아서 2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바알신을 섬기며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다윗 왕의 상황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윗은 육신적인 실수에 의해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을 찾는 그 마음의 상태가 사슴이 갈급하게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 것을 저버리고 이방 신을  찾아 헤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 받았다는 것은 일단 구원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들 개개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신을 찾아 헤매는 민족이 되었을 때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우리가 비록 생활해나가다 죄를 짓더라도 근본적으로 우리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사모하는 그 마음에서 떠나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됩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2-3)


다윗은 고생을 면하자는 마음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있는 그 고생스러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멀리 두고 떠나 있는 것이 슬픈 일이고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도망나와 요단 강을 건너 지금 이방 지역 에 있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면 이방 지역입니다. 그러니 원수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조롱하고 비웃고 욕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는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처럼 마음속에 다른 것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찾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고 마태복음 6장 24절에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병행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하나도 안 짓는 거룩한 생활을 하지는 못하지만 평소에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간절히 찾고 사모하고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다”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집 안에서 사귀는 것,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물리적인 성전, 집이 하나님의 성전이고 신약시대에 오면 교회가 성전입니다. 제물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님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서 12장 1절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고 신약시대는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은 성전 안에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계시는 곳이 교회이고 성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교회와 관계없거나 교회에 대한 마음이 떠나 있는 상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교제하는 그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적인 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형제나 자매가 서로 약점을 보완해주고 도와주고 함께 고난에 참예하고 교회가 가는 방향에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사랑입니다.

 성령으로 움직이는 사랑은 교회 안에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참 교제를 말합니다. 법궤를 떠나 있는 다윗은 이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찬송하는 기쁨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롭고 슬프겠습니까?

 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이 교회 자체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실지로 사랑의 역사가 이루어져 갑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 면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 욕심이 많고 미워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자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다만 육신적인 마음, 개인적인 생각에 집착되어 있는 마음이 이 안에서 시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부수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가 가는 이 방향에서 마음이 편할 수가 없고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어느 정도 부서진 사람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바라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도와 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낙망하거나 불안해합니까? 우리가 어떤 원리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섬기는 것이 무엇이며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는 아는데 마음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실망할 때도 있고 낙망할 때도 있고 두 가지 마음이 있지 않아요? 하나님을 바라면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얼굴을 누가 볼 수 있습니까?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 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7-29)


 “주께서 낯을 숨긴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국민학교 1학년 아이가 처음에 학교 갔다와서 책가방 내려놓고 엄마를 불러 봅니다. 이 방 저 방 찾아도 엄마가 없으면 시무룩해지다가 엄마가 나타나면 얼굴이 확 펴집니다.

 우리 마음이 어느 때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즐겁고 평안하다가 어떤 때는 캄캄하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이 얼굴을 숨겨버리신 것 같습니다. 실지로 하나님은 얼굴을 숨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뿐입니다. 비행기를 타보면 그걸 실감합니다. 구름 밑은 어두컴컴하지만 구름을 뚫고 올라가 보면 태양은 언제나 밝은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가 가리워지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가리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리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조금이라도 식어지면 걱정, 근심, 괴로움 그 모든 것이 나와서 가로막는 것입니다. 구름 위로 올라가면 태양은 언제나 빛을 비추고 있듯이 내가 어떤 환경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바라기만 하면 하나님은 고통, 괴로움 등 모든 것을 없애고 일어나게 해주십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시 42:6-7)


 헐몬 산은 굉장히 높습니다. 그 산에 쌓인 차디찬 눈이 녹아 흘러내려와서 큰 폭포를 형성하고 그 폭포의 물이 흘러내려 요단 강이 넘칩니다.

 다윗은 지금 멀리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 강을 건너가 있습니다. 요단 강물이 넘치는 것을 자신의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비유했습니다. 사람들의 욕설, 자기를 대항하는 소리, 이러한 것이 헐몬 산에서 차디찬 물이 범람하여 마치 자기가 그 물에 빠져 죽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바다가 우는 것과 같은 엄청난 환난 속에서도 다윗은 주님을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믿는 마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찬송이 내게 있어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


 낮에는 하나님이 햇빛을 주셔서 따뜻한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찬송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어려운 환난 속에서도 언제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자기 주위 환경 때문에 완전히 낙망하고 쓰러져서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시 42:9-10) 


 다윗이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원수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들이 “너는 이제 하나님의 법궤와는 상관이 없다. 이제는 네 하나님이 없어져버렸다.”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들이 다윗에게는 칼로 뼈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했습니다.

 우리가 한때는 전도도 하러 다니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간증도 하고 모임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면 조롱을 받고 어디 가서 구원받았다는 간증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그 예루살렘에 가시면서 죽을 줄 아셨지만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오셨을 때 베드로가 담대하게 서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옥에 갇혔습니다. 옥에 갇혀도 천사가 와서 건져 내기도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는 전하지 말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들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 듣는 것이 옳으냐?”며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약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법궤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요단 강을 다시 건너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까마득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11)라고 말했습니다.

 “얼굴을 도우신다”는 말은 웃음 꽃이 피고, 빛이 나고 실망이 가시고 평화가 다시 돌아오는 그런 얼굴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태연한 마음, 태연한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한 것처럼 우리 얼굴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랄 때 담대하고 평화로운 얼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 모임도 한심하고 희망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세상은 가면 갈수록 점점 어려워집니다. 모임도 가면 갈수록 태산같이 자꾸만 문제가 생기고 편할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한 엄청난 홍수가 우리 주변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는 마음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