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3편] 주의 빛과 진리로 나를 인도하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1 -5)


 시편 43편은 부제가 따로 없고 신앙생활에서 마음속에 느끼는 기도를 시로 읊어놓은 것 같습니다.



재판장, 변호인,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사 43:1)


 하나님을 재판장, 변호사 그리고 구원자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먼저 정확한 판결 받기를 원하고 또 변호해주실 것을 바라며 구원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무조건 구원하실 것이 아니라 나를 판단하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판단 아래서 과연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정확하게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보면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지금 주님은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변호사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우리의 재판장이시기도 합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주님은 심판자로 임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그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을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신다고 하신 그 말씀 속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판단 앞에 있지만 믿음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주님의 판단이 잘못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 서 잡힌 여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시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등 모든 군중이 어른으로부터 시작해서 젊은이들까지 양의 가책을 받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공의대로, 정의대로 된다면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송사하는 것은 율법적인 위치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율법적인 위치에서 그 송사자들을 판단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그 말씀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판단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가고 간음한 여자만 남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 8:11)고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판결입니다. 주님은 정의에 입각해서 율법을 가지고 권위 있게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의 죄를 주님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 불쌍한 여인에게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죄인이지만 무죄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불의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을 가진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정죄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세상을 송사하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송사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일이 입을 열어서 이 세상을 향해서 송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신앙생활은 세상을 저항하는 생활입니다. 이 세상 생활을 멀리하는 생활이 경건한 생활이고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육신의 생각을 떠나 세상을 저항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 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


 이 말씀은 부모님께 불효하라거나 부부간에 사랑하지 말라거나 자식을 돌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면 이 육신에 속한 것을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세상을 편들고 그 세상과 짝하여 세상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사탄은 항상 육신의 생각을 이용합니다. 사탄은 이 육신을 통해서 우리를 세상으로 끌고 가 세상과 동화되도록 하고 세상적인 삶을 살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 속 사람은 역시 “하나님의 법을”(롬 7:25) 좋아하고 하나님 섬기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내가 나를 정죄하며 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이 나를 변호해주시는 것을 느끼면서 삽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서 벗어나면 그런 문제가 해소될 수 있습니다만 이 시편을 기록한 사람의 마음과 같이 우리는 주님께 ‘주님이 나를 판단하시되 나를 송사하는 이 마음을 변호해 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시편 말씀은 물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쓴 것이지만 우리가 고백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분 이 아니라’(히 4:15)는 말씀대로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므로 우리는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매우 간사합니다. 간사함은 바로 사탄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견디기 어렵고 시험에 넘어가기 쉬운 것에는 우리가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간사한 접근을 냉정하게 물리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에게 잡혀서 죽는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것을 피하시면 주님이 절대로 죽지 아니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간사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피하라는 말은 베드로가 하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 안에서 사탄이 하는 말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간사한 세상입니다. 처음부터 사탄이 간사한 꾀로 하와를 넘어뜨려 그때부터 그 죄가 이 세상에 퍼져나온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탄의 간사한 꾀에 놀아나고 거기에 끌려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러한 세상을 송사하면서 사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풍속을 좇지 않고 주님의 방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러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주님이 우리 편이 되어서 우리를 옹호하고 우리를 두둔하고 우리를 옳다고 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재판할 때 보면 변호사는 죄인의 편입니다. 변호사는 죄인 편에 서서 어떻게 하든지 죄인의 죄를 가볍게 하고 죄 없음을 주장합니다. 로마서 2장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한다’(롬 2:14-15)고 했는데 여기에서 ‘송사’는 검사의 역할을, ‘변명’은 변호사의 역할을 말합니다. 우리 양심 속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그것을 송사하기도 하지만 그 죄를 적당히 변호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세상을 송사하면서 사는 참 신앙생활이 있다면 주님은 틀림없이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를 변호해주시고 우리를 두둔해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나의 힘 되신 주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시 43:2) 


 시편 22편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22:1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대표이신 주님이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가 고난당하여 부르짖는 부르짖음의 소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의 생활을 하고 간사한 세상에 끌려가지 않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한편이 아니고 세상에 동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우리를 냉대하고 미워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 —19)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현재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구별된 세계 속에 속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억압하고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곤란을 당할 때 마음속에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안 도와주시는가? 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시는가? 왜 우리를 이 어려움 가운데 그대로 두 시는가?’ 등의 의문을 마음속에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화가 나고 속이 상하고 하나님이 마치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고 버리시는 것 같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일어납니다.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시 43:2)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마음의 표현입니 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도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이 나의 힘이시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의 힘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권위의 힘, 지식의 힘, 돈의 힘 등 여러가지 힘이 많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런 세상의 힘이 아닌 주님의 말씀의 힘이 마음속에 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창조 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풍랑이 조용해지고 바람도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핍박을 받고 유혹을 받고 어려움을 당해도 마음속에서 그것을 넉넉히 제압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아무리 악한 무리가 예수님을 욕하고 미워해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사람을 넘어뜨리거나 멸망시켜버리는 것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힘 말고 원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슬퍼하고 괴로워하던 사람이 어떤 말씀으로 변화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성경 말씀의 힘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입니다. 그 생명 자체가 힘이고 생명의 표현이 말씀이고 사랑입니다. 원천적인 힘이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깨달을 때 힘을 받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힘이신데 내가 왜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해야 합니까? 내가 왜 이런 슬픔을 가져야 합니까?’하는 의문이 우리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경험이시고, 현재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진 상황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 84:5-7)


 구원받은 후에도 슬픈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슬픔을 경험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눈물을 흘려 보지 않은 사람은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후 ‘주님을 위해서 죽겠습니다.’라고 결심했지만 내 앞에 죽음이 닥쳐 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고통스러워 주님에 대한 원망도 하게 됩니다.

 저도 구원받은 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감사의 눈물과 슬픈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종교 재판을 받으라는 소환장을 받았을 때는 제 마음이 불안하여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펴면 눈물이 흘러나와 성경이 젖었습니다. 눈물이 성경에 뚝뚝 떨어져 성경을 못 읽은 적이 있습니다. 또 잘못 산 것을 뉘우치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편 84편의 말씀대로 그 눈물 골짜기를 생명수가 흐르는 골짜기로 변하게 하십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으로 인도 받는 삶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시편 저자는 1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판단하셔서 거짓된 세상을 향해 도전하고 저항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자기를 변호해 주시고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그 힘이 너무 벅차기 때문에 좌절하고 눈물 흘리고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 시편 저자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캄캄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거기에 주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길 원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과 8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빛이 하나님 편에 서는 은혜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9)


 이 말씀 속에 “말씀”이라는 단어와 “생명 ”, “빛 ”이라는 단어가 연결됩니다. 태초에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말씀은 빛이라는 뜻이고 말씀은 생명이라는 뜻이고 말씀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은혜”라는 말이 있고 “진리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편을 기록할 때는 캄캄하고 슬프고 괴로운 마음속에 빛과 진리를 보내서 자기를 그 깊은 어둠의 골짜기에서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겪을 때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그 어려움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간구하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기도 하고 이렇게 해보기도 하고 저렇게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 캄캄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이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방법대로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만 더 어둡고 복잡하고 고통스러워집니다.

 창세기에 있는 야곱의 생애를 통해 저도 상당히 배우는 게 많습니다. 야곱은 선민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 때부터 그에게 전수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형성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끝에 가서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개인이었고 또 이삭도 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이르러서는 개인이 아닌 민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이름이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뀌었는데 이스라엘은 야곱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힘으로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에게 주는 축복도 빼앗고 라반의 집에 가서 자기 외삼촌을 속여 재물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한테 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얍복강 여울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그런 야곱의 생각이 꺾어져 버렸습니다.

 야곱의 생각이 꺾였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 나타내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걸어가는 신앙생활의 경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우리 방법대로 합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승리는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축복과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기 때문에 축복과 약속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흘러가는 거기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희생하고 함께 하면 우리 개인에게 어느 날 상이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잘해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성취해 가십니다. 거기에 내 자신이 따르면 내게는 복이 있고 상이 주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 힘으로 이룰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눈물의 골짜기와 같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더라도 우리가 빛과 진리로써 인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참’입니다. ‘참’으로 인도를 받아야지 거짓으로 인도를 받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시련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참된 소리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이간 붙이는 소리, 잘못된 소리만 들려옵니다. 그것이 육신의 마음입니다. 신앙생활은 육신을 부수는 생활입니다. 이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우리가 캄캄한 길을 걷고 있는 듯해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진리의 인도를 받는 길입니다. 빛으로 인도 받는 길입니다. 빛은 생명의 역사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마음에 빛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말씀이 마음에 비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 생활이 고되고 모임 생활이 심히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마음에 불만이 있고 항상 마음속에 뭔가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거짓은 그러한 기회를 틈타 들려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것은 마음속에 정말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게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와서 물었을 때 ‘죽을까 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한 대답을 하자 사탄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 말에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때 거짓된 소리가 살짝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저자는 주님께 ‘어두운 마음을 빛과 진리로 인도해주십시오.’라고 원했습니다. 빛이 아닌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모임에 있다가 거짓된 소리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마음에 문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평소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가 그 문제를 부채질해주는 어떤 거짓된 소리가 들어올 때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찬송하리로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43:4) 


 빛과 진리로 인도를 해주면 그 가는 곳이 어딥니까?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불평과 불만이 정리되어버리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가 하나님의 단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했습니다. 그 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 맨 처음 드리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번제는 ‘불사르어 드린다’는 뜻입니 다. 번제는 사람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케 하고 하나님을 완전히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번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옳은 일을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 편에 서서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안에 속죄제, 번제, 화목제 등 다섯 가지 제사가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제일 첫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하나님이 참 기뻐하십니다. 그 아들이 제물로 드려진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영이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이 살아서 세상과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육신은 여전히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과 연합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인도를 받고 십자가의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육신의 힘이 꺾여지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두번째 얻은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참으로 발견했을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단에 나아가 찬양하게 됩니다. 그때 감사함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슬픔의 골짜기를 다녔고 캄캄한 골짜기를 헤맸고 어려운 지경을 다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럴 때 간사한 사탄의 유혹을 받고 참 진리로 인도받지 아니하면 곁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바른 진리로 인도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거기서 주님을 쳐다보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5)


 이에 관한 말씀이 로마서 7장, 8장에 쓰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24)


 시편에 있는 말씀대로 낙망하고 슬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25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는 말씀으로 문제가 해결되어버립니다. 육신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죄의 법을 섬기면서 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고 살지만 정죄가 없습니다. 삼천 년 전에 벌써 성경에서는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상황을 그대로 시로 읊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시련이 있고 고민이 있거든 끝까지 참고 바른 길로만 가십시오. 그러면 어느날 목적지에 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