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왕에 엎드러지는도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시 45:1-17)
시편 45편은 주로 왕에 대한 찬사를 시로 읊은 것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임하실 때의 환희와 즐거움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시 45:1)
이 시에는 시인의 즐겁고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날 흥분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사람의 마음속에 “좋은 말” 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은 슬픔이 가득하고 환란과 전쟁이 있으며 마음에는 여러가지 사악하고 악한 것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고 생활을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내가 원치 않은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 주님을 향해 입을 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복음을 깨달았을 때에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는 핍박과 고통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마음속에 감사함이 있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완전히 선하거나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는 정말로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 시편 저자는 영광스러운 주님이 임하실 때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환희와 즐거움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다”라는 말은 주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마음껏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글로 지어낸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에서 왕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써놓은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계셨다가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었고 예수님이 하나의 인격체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시편 19편이나 119편 또는 시편 104편 등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내용을 잘 조명하여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신성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 죄인을 사랑하시고 죄인을 구속하기를 원하신 것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인간 속에 오셔서 하신 그 모든 말씀은 굉장한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7-19)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을 충만히 받으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이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포로가 된 자에 게 자유를, 영적으로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헤매이는 인생들에게 이 복음의 길이 알려지면 삶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죄와 여러가지 율법에 눌려 있는 자에게 자유 를 주시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십니다.
주님의 아름다움, 주님의 완전하심,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던 하나님의 한 음성입니다. 그것이 인격체를 통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의 입이 열리실 때마다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풍랑도 잔잔해지고 죽은 생명도 살아나고 하는 그러한 사실은 주님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깊고 요묘한 사상과 뜻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이 이 세상에 이제 필객의 붓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그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여 입만 열면 그러한 마음의 표현이 터져나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앞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왕을 모시는 그 날, 우리가 왕을 맞는 그 날은 온전히 왕을 찬미하는 소리만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에게 복을 주시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시 45:2)
‘왕은 인생보다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과 상반된 말씀이 이사야 52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사 52:13-15)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한 기도가 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영광스러운 분이신데 여기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 소의 복음이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멍에를 매려고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 52:14)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하고, 손으로 치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를 무시하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 생명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 나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실 때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자신들의 깨닫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 순간에는 주님께 감사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주님이 피상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요, 그분이 나의 구주시고 나의 생명이시라는 것을 진실로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의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도중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가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동행을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눈이 가리워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자 그 중에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죽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느냐는 식으로 예수님을 핀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은 선지자였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분이셨는데 그분이 죽었다. 그런데 죽은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하는데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말한 제자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육신의 생각 속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 예수님인 줄 모르고 예수님을 핀잔하는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 속에서 뜻하지 아니한 일들, 원치 않는 일들을 당할 때 우리 눈은 캄캄해 져버리고 예수님은 마냥 멀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예수님께 굴복하지 않을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음부에 가 있는 생명들까지도 주님 앞에는 굴복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우리가 믿는 주님은 영광의 주님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주님을 믿었는데 주님 앞에 사람이 차별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 하느냐”(약 2:7)
예수님의 이름이 지금 이 세상에서 무시되고 천대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어느날 온 세상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이런 것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시 45:2)
예수님이 입을 열기만하면 은혜가 넘쳐 귀머거리도 듣고 소경도 보게 되고 마음에 자유가 오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지니신 만왕의 왕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시 45:3)
"칼을 허리에 찬다’는 말은 예수님이 날카로운 말씀으로 사탄을 무찌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 4:12)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사탄이 운영하고 있고 사탄이 지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칼이 한번 나타납니다. 오로지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최후의 승리자로 나타납니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라는 말씀대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주님만이 사탄으로부터 이 세계를 되찾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시 45:4)
“온유”라는 말은 실행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 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8-29)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온유하시다는 뜻은 주님은 진리 자체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진리를 실행하시려고 오셨고 주님이 온유하시기 때문에 실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유하시기 때문에 요한복음 5장 30절에 보면,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본성, 성격을 예수님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람이 요구하는 것, 사람이 찾는 것,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육신 속에 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의 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사람이시고 또 진정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 안에 사람의 모든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육신의 욕구대로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육신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욕망, 인간의 욕구가 없으면 인간의 대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입장이 되시고 인간의 감정을 아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온유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실천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와 온유를 함께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분입니다.
“공의”는 정의를 말합니다. 주님의 권위는 참 진리를 온유함으로써 완전히 실천하신 절대적인 권위입니다.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시 45:5)는 말씀대로 주님은 이 세상을 승리하시고, 왕으로 오실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현재 현실적으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에 현재 생활 속에서 우리들의 어떤 문제들이 주님의 승리 안으로 이끌려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내 생각을 앞세워나갈 때는 신앙생활이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시 45:5-6)
주님은 사탄을 완전히 이기고 온 세상을 정복하시고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시 45:7)
“왕의 동류”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사람이 왕의 동류입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는 말은 이 세상이 예언이 다 이루어지고, 죄가 끝날 때에 지극히 거룩한 자, 예수님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서 오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래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단 9:25—26)
여기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아니고 선지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진다”는 말은 선지자로서의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침례 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는데 삼십 세가 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도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 안에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성령으로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주님이 기름부음 받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하십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을 그 때부터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었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말이 아니라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직분을 행하기 위해서 기름 붓는다는 뜻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1-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여 만물을 그 손에 주셨다”는 것은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신 그 성령의 기름부음이 만물을 그 손에 주셨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0, 27)
거듭났기 때문에 기름부음 받은 것은 아닙니다. 거듭났지만 성경을 알 수 없고 또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너희 안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거기서 가르침을 받으면 되고 다른 데서 가르침 받을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그 안에 가르침을 받을 것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 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 -3)
“머리”는 예수님이고 “수염”은 곧 신자들입니다. 기름을 가지신 주님이 부활승천하신 다음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거기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교회의 형성은 성령의 기름부음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교회가 주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하신 대로 교회 안에 연결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은 주님께로부터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과 왕노릇한다는 뜻은 기름부음이 있는 그 안에서 우리가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바치는 신부(교회)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시 45:8)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다”는 말은 주님이 왕으로 임하실 때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흔쾌한 기 에서 주님을 영광스럽게 받들어 섬기는 광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몰약, 침향, 육계가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를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이 시편 저자는 주님이 왕으로 임하실 때의 모습을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시 45:9)
솔로몬 왕은 부인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더구나 솔로몬은 이방 여자를 많이 취했습니다. 이런 것은 전부 다 예표적인 것입니다. 후궁들과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있다고 했는데 이 왕후는 하나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교회는 하나뿐입니다. 교회 자체가 주님의 신부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몸이 지체로 합쳐서 주님의 몸이 되는 것이고 주님의 교회,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면 귀비격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 마음을 모을 때에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개개인은 상이 따로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따라서, 얼마나 성령으로 살았느냐에 따라서 따로 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보면,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하나 있고 다음에 ‘예루살렘 여자’라고 나옵니다.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은 신부격인 교회를 말하고 개인을 말할 때는 ‘예루살렘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바울은 “우리가 정결한 처녀로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 중매한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맞기 위해서는 정결한 처녀가 되어 야 하는데 이 “정결하다”는 말은 얼마만큼 주님을 깨끗하게 섬기 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는 것은 정조가 없고 깨끗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 순정을 바치는 것은 세상과 주님을 구별하여 주님께 사랑을 바치는 것입니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 45:10)
재림하시는 왕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왕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신부입니다.
“아비 집”이 이 세상이고 내 육신의 고향입니다. 처녀가 시집을 가면 아비 집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계속 친정 부모를 사랑하고 자꾸 마음에 두고 하면 남편에게 완전히 사랑을 주고 남편과 온전히 한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는 말씀대로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한 몸이 되는 데에 다른 것이 끼면 안됩니다. 성경은 사랑의 최고를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편이고 사랑의 짝인 교회는 신부로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반쯤 사랑하고 세상을 반쯤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내 생명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결단이 한 번 필요합니다. 그런 결단을 내려 참으로 주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이뤄갈 때 어떤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육신적인 행복을 일부러 버린다든지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이상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완전히 주님을 위해서 산 사도 바울은 이방 교회의 표준입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육신의 행복도 다 버리고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법칙을 입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생활에 실질적으로 모범을 보인 사람입니다. 주님의 참 신부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시 45:11)
신부의 아름다움, 주님의 교회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성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고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섬기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독재를 하거나 냉정해서 사랑이 없어도 안됩니다. 사랑 안에서 순종하고 사랑 안에서 인도해가는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12)
두로는 이방민족입니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린다”는 말은 이방인들이 이 안에 들어와서 예물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시 45:13)
“왕의 딸”이라는 말 역시 믿는 신자들을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시 45:14-16)
“왕의 아들들”에 역시 우리도 포함됩니다. “온 세계의 군왕을 삼는다”는 것은 열 고을, 다섯 고을을 차지하는 것과 유사한 말씀입니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시 45:17)
이 시편 45편은 주님이 왕이시고 교회는 그 신부이고 우리 개인은 귀비들이고 혹은 시녀들이기도 하고 혹은 왕의 아들들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전체가 영화롭고 태평스럽고 즐거운 왕궁 생활을 그려 놓았습니다. 어느날 우리가 그 왕궁 안에서 전체적으로는 신부이고 개인적으로는 왕궁 안의 식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지금 현재 우리들이 충실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믿는 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시편 45편은 주로 왕에 대한 찬사를 시로 읊은 것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임하실 때의 환희와 즐거움
이 시에는 시인의 즐겁고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날 흥분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사람의 마음속에 “좋은 말” 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은 슬픔이 가득하고 환란과 전쟁이 있으며 마음에는 여러가지 사악하고 악한 것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고 생활을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내가 원치 않은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 주님을 향해 입을 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복음을 깨달았을 때에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는 핍박과 고통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마음속에 감사함이 있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완전히 선하거나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는 정말로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 시편 저자는 영광스러운 주님이 임하실 때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환희와 즐거움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다”라는 말은 주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마음껏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글로 지어낸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에서 왕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써놓은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계셨다가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었고 예수님이 하나의 인격체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시편 19편이나 119편 또는 시편 104편 등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내용을 잘 조명하여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신성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 죄인을 사랑하시고 죄인을 구속하기를 원하신 것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인간 속에 오셔서 하신 그 모든 말씀은 굉장한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7-19)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을 충만히 받으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이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포로가 된 자에 게 자유를, 영적으로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헤매이는 인생들에게 이 복음의 길이 알려지면 삶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죄와 여러가지 율법에 눌려 있는 자에게 자유 를 주시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십니다.
주님의 아름다움, 주님의 완전하심,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던 하나님의 한 음성입니다. 그것이 인격체를 통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의 입이 열리실 때마다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풍랑도 잔잔해지고 죽은 생명도 살아나고 하는 그러한 사실은 주님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깊고 요묘한 사상과 뜻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이 이 세상에 이제 필객의 붓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그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여 입만 열면 그러한 마음의 표현이 터져나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앞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왕을 모시는 그 날, 우리가 왕을 맞는 그 날은 온전히 왕을 찬미하는 소리만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에게 복을 주시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과 상반된 말씀이 이사야 52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사 52:13-15)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한 기도가 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영광스러운 분이신데 여기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 소의 복음이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멍에를 매려고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 52:14)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하고, 손으로 치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를 무시하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 생명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 나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실 때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자신들의 깨닫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 순간에는 주님께 감사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주님이 피상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요, 그분이 나의 구주시고 나의 생명이시라는 것을 진실로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의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도중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가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동행을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눈이 가리워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자 그 중에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죽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느냐는 식으로 예수님을 핀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은 선지자였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분이셨는데 그분이 죽었다. 그런데 죽은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하는데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말한 제자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육신의 생각 속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 예수님인 줄 모르고 예수님을 핀잔하는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 속에서 뜻하지 아니한 일들, 원치 않는 일들을 당할 때 우리 눈은 캄캄해 져버리고 예수님은 마냥 멀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예수님께 굴복하지 않을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음부에 가 있는 생명들까지도 주님 앞에는 굴복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우리가 믿는 주님은 영광의 주님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주님을 믿었는데 주님 앞에 사람이 차별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 하느냐”(약 2:7)
예수님의 이름이 지금 이 세상에서 무시되고 천대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어느날 온 세상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이런 것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을 열기만하면 은혜가 넘쳐 귀머거리도 듣고 소경도 보게 되고 마음에 자유가 오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지니신 만왕의 왕
"칼을 허리에 찬다’는 말은 예수님이 날카로운 말씀으로 사탄을 무찌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 4:12)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사탄이 운영하고 있고 사탄이 지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칼이 한번 나타납니다. 오로지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최후의 승리자로 나타납니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라는 말씀대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주님만이 사탄으로부터 이 세계를 되찾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말은 실행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 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8-29)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온유하시다는 뜻은 주님은 진리 자체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진리를 실행하시려고 오셨고 주님이 온유하시기 때문에 실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유하시기 때문에 요한복음 5장 30절에 보면,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본성, 성격을 예수님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람이 요구하는 것, 사람이 찾는 것,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육신 속에 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의 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사람이시고 또 진정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 안에 사람의 모든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육신의 욕구대로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육신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욕망, 인간의 욕구가 없으면 인간의 대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입장이 되시고 인간의 감정을 아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온유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실천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와 온유를 함께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분입니다.
“공의”는 정의를 말합니다. 주님의 권위는 참 진리를 온유함으로써 완전히 실천하신 절대적인 권위입니다.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시 45:5)는 말씀대로 주님은 이 세상을 승리하시고, 왕으로 오실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현재 현실적으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에 현재 생활 속에서 우리들의 어떤 문제들이 주님의 승리 안으로 이끌려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내 생각을 앞세워나갈 때는 신앙생활이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탄을 완전히 이기고 온 세상을 정복하시고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왕의 동류”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사람이 왕의 동류입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는 말은 이 세상이 예언이 다 이루어지고, 죄가 끝날 때에 지극히 거룩한 자, 예수님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서 오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래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단 9:25—26)
여기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아니고 선지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진다”는 말은 선지자로서의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침례 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는데 삼십 세가 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도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 안에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성령으로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주님이 기름부음 받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하십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을 그 때부터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었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말이 아니라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직분을 행하기 위해서 기름 붓는다는 뜻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1-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여 만물을 그 손에 주셨다”는 것은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신 그 성령의 기름부음이 만물을 그 손에 주셨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0, 27)
거듭났기 때문에 기름부음 받은 것은 아닙니다. 거듭났지만 성경을 알 수 없고 또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너희 안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거기서 가르침을 받으면 되고 다른 데서 가르침 받을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그 안에 가르침을 받을 것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머리”는 예수님이고 “수염”은 곧 신자들입니다. 기름을 가지신 주님이 부활승천하신 다음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거기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교회의 형성은 성령의 기름부음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교회가 주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하신 대로 교회 안에 연결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은 주님께로부터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과 왕노릇한다는 뜻은 기름부음이 있는 그 안에서 우리가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바치는 신부(교회)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다”는 말은 주님이 왕으로 임하실 때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흔쾌한 기 에서 주님을 영광스럽게 받들어 섬기는 광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몰약, 침향, 육계가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를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이 시편 저자는 주님이 왕으로 임하실 때의 모습을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부인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더구나 솔로몬은 이방 여자를 많이 취했습니다. 이런 것은 전부 다 예표적인 것입니다. 후궁들과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있다고 했는데 이 왕후는 하나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교회는 하나뿐입니다. 교회 자체가 주님의 신부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몸이 지체로 합쳐서 주님의 몸이 되는 것이고 주님의 교회,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면 귀비격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 마음을 모을 때에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개개인은 상이 따로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따라서, 얼마나 성령으로 살았느냐에 따라서 따로 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보면,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하나 있고 다음에 ‘예루살렘 여자’라고 나옵니다.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은 신부격인 교회를 말하고 개인을 말할 때는 ‘예루살렘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바울은 “우리가 정결한 처녀로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 중매한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맞기 위해서는 정결한 처녀가 되어 야 하는데 이 “정결하다”는 말은 얼마만큼 주님을 깨끗하게 섬기 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는 것은 정조가 없고 깨끗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 순정을 바치는 것은 세상과 주님을 구별하여 주님께 사랑을 바치는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왕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왕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신부입니다.
“아비 집”이 이 세상이고 내 육신의 고향입니다. 처녀가 시집을 가면 아비 집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계속 친정 부모를 사랑하고 자꾸 마음에 두고 하면 남편에게 완전히 사랑을 주고 남편과 온전히 한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는 말씀대로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한 몸이 되는 데에 다른 것이 끼면 안됩니다. 성경은 사랑의 최고를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편이고 사랑의 짝인 교회는 신부로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반쯤 사랑하고 세상을 반쯤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내 생명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결단이 한 번 필요합니다. 그런 결단을 내려 참으로 주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이뤄갈 때 어떤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육신적인 행복을 일부러 버린다든지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이상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완전히 주님을 위해서 산 사도 바울은 이방 교회의 표준입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육신의 행복도 다 버리고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법칙을 입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생활에 실질적으로 모범을 보인 사람입니다. 주님의 참 신부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부의 아름다움, 주님의 교회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성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고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섬기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독재를 하거나 냉정해서 사랑이 없어도 안됩니다. 사랑 안에서 순종하고 사랑 안에서 인도해가는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로는 이방민족입니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린다”는 말은 이방인들이 이 안에 들어와서 예물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왕의 딸”이라는 말 역시 믿는 신자들을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시 45:14-16)
“왕의 아들들”에 역시 우리도 포함됩니다. “온 세계의 군왕을 삼는다”는 것은 열 고을, 다섯 고을을 차지하는 것과 유사한 말씀입니다.
이 시편 45편은 주님이 왕이시고 교회는 그 신부이고 우리 개인은 귀비들이고 혹은 시녀들이기도 하고 혹은 왕의 아들들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전체가 영화롭고 태평스럽고 즐거운 왕궁 생활을 그려 놓았습니다. 어느날 우리가 그 왕궁 안에서 전체적으로는 신부이고 개인적으로는 왕궁 안의 식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지금 현재 우리들이 충실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믿는 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