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 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시 46:1-11)
이 시편 46편은 히스기야 왕 당시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에 되어진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앗수르의 현재 위치는 이란의 일부와 터키 곧 중동의 북쪽 지역을 말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남쪽에 유다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고 나머지 열 지파는 북쪽 사마리아 지역에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남쪽 유다 나라는 유다 지파인 다윗 왕의 계통이 계속 이어졌지만 북쪽에는 여로보암 왕이 나라를 세우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데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유다나라에 속하게 될 것을 여로보암 왕이 두려워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했던 것입니다. 이때 앗수르는 먼저 북쪽 이스라엘을 완전히 점령하고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히스기야 왕 때 남쪽 유다를 점령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히스기야 왕을 위협하였습니다.
“랍사게가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 함을 듣고 돌아가다가 그 왕이 립나 치는 것을 만나니라 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의 일에 대하여 들은즉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가로되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너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건짐을 얻겠느냐 나의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거하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 신들이 건졌더냐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 하라 하였더라”(사 37:8-13)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 왕에게 “네가 의뢰하는 하나님도 유다 나라를 내게서 구출하지 못할 것이다”며 자기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나타나서 앗수르의 산헤립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히스기야 왕을 위로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 그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한고로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사 37:36-38)
그 결과 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 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또한 산헤립은 돌아가서 자기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편 46편이 이 내용을 주제로 하여 지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의 그림자적인 역사로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이 세상이 하나님을 도전하다가 멸망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피난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이 말씀을 육신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느냐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열한 제자가 다 순교했고 또 사도 바울도 순교를 했고 그 외에 초대 교회에도 스데반을 비롯해 거의 모든 주님의 일꾼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거나 옥사를 하거나 십자가에 못박혔거나 해서 많이 죽었습니다.
참된 신앙 운동이 일어날 때에는 항상 박해가 따랐습니다. 참 신앙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기독교가 부패하거나 세속화될 때에는 핍박이 없었습니다.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스도인이 경건하고 진정한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핍박을 받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피난처”라는 말은 반드시 육신이 보호를 받는다든지 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보존 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보존 받는 것이 피난인 것입니다.
영혼의 피난이지 육신의 피난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께 속한 자가 되면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사탄은 구원받은 사람을 계속 핍박하고 영혼을 공격합니다. 물론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육신적으로 너무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영적인 생활이 약화되고 신앙이 약화되어 힘을 못쓰는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은 우리가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을 확실히 믿는 믿음에 의해서 우리의 믿음이 보존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이 안전하다든지 육신이 건짐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입증이 된 것입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 4:9-13)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동안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는 등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에 고생을 많이 한다 해도 복음 전하는 사역자로서 또 믿는 자로서 사도 바울만큼 고생을 많이 하고 핍박을 많이 받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피난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아도 그의 마음과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하나님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이 하나님 안에 완전히 숨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빌립보 옥중에서 손과 발이 묶여 있을 때도 쇠 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등 육신적으로도 안전하게 지켜주신 일들이 더러 있긴 했습니다만 온갖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의 품안에, 주님의 은혜 속에 깊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공격해도, 아무리 시험해도, 아무리 그를 해롭게 해도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평안하였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0-12)
바울은 궁핍 속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앙으로 걸어간 걸음은 항상 평형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르내림이 너무 많습니다. 물질이 풍부해지면 기분이 좋아서 마음이 올라가고 또 물질이 없고 가난하면 마음이 처져서 내려가고, 평형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마음은 언제나 요동이 없었습니다. 바울에게도 고린도 교인들이 돈을 많이 보내 주어 때론 풍부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바울이 기분이 더 올라가고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가난해서 주리고 목마를 때도 그 마음은 평행선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도 인간의 약점입니다. 또 좋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해서 실의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빠져 감정적으로 격발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주님 안에 마음이 붙어 있는 사람은 너무 감정적으로 격발하고 설치는 데서 보호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절망 속에 빠지지 않는 것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한 피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시 27:1-5)
이 시에서 다윗은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은 피난처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피난처, 마음의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마음이 지켜지고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참으로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환란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마음이 주님 안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의 비결입니다.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 1:17)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다음 단계의 믿음으로 전진해갑니다. 이 세상은 환난과 죄와 유혹과 시련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 안에서 요동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는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이 모자란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걸어가는 길에는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부분의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아야 할 고난이, 교회를 위해서 받아야 할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울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라면 그 지체에 따라서 남겨진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 몸에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으로 알고 채울 수 있으면 주님 안으로 피난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우리 앞에 올 때에 도망쳐버리면 이것은 피난처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으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이 다 내 육체에 채워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내 육체에 채우면 그것이 주님 안에서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보호 받는 것이고 영적인 삶이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고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 보호해주시는 주님의 손길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시 46:2-3)
이것을 이사야서 내용과 연관지어 말한다면,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을 다 점령하고 이제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예루살렘이 점령을 당할 상태일지라도 흔들림 없이 주님을 바라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 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눅 21:25-28)
주님 오시기 직전에 이 세상이 환난의 세상이 되어 일월 성신의 징조가 있고, 또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로 혼란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았으니까 환난 전에 들림을 받는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환난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나 아무리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그 환난의 전초전에 투입이 될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곤란하고 궁핍한 과정을 거치다가 어느날 들림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환난 속에서 주님을 믿고 그 안에서 단련되고 그 안에 마음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같은 운명 속에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나 자매가 당하는 일이나 내가 당하는 일이나 똑같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돌아보고 교제하는 중에 어느날 주님이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지 혼자 잘 살고 내 멋대로 살 때에 그냥 데려간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어떤 환난이 닥쳐와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목적을 두고 창조하신 이 세상이 변동이 일어나고 이 시편 저자의 말대로 바닷물이 요동하고 뛰놀고 넘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주님의 백성에게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과연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사 41:21-24)
우상 섬기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는 얘기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오랫 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암흑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뢰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사 42:14-17)
이제 하나님이 떨치고 일어나셔서 굉장한 힘으로 일을 하신다 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위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흉년이 오고, 지진이 일어나고 천재지변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9-23)
모든 삼라만상이 허무한 데 굴복하여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는데 아담이 타락해서 그 모든 것이 사탄에게 정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한다고 했습니다.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생겨나면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되면 천년왕국인데 그때에 모든 자연계도 회복되므로 모든 피조물들이 그때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신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탄식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을 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육신도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육신이 구원을 받자면 이 육신의 힘이 줄어들어야 되고 육신이 시련을 거쳐야 되고 환난을 거쳐가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아직도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거쳐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속사람이 보존을 받아야 됩니다. 마음이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적든 크든 환난이 있습니다. 그 환난 속에서 우리 영혼의 상태, 우리 믿음의 상태,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얼마나 안정되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은혜 속에 사는 생활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6:4)
여기서 말하는 “시내에서 흐르는 물”은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의미합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 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 47:1 -5)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처음에는 발목에 차고, 다시 무릎에 오릅니다. 다음에 허리에 오르고 나중에는 걸어서는 건널 수 없고 헤엄을 쳐야 하는 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진리와 은혜의 강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았지만 겨우 발목만 적시고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무릎 정도의 은혜 속에 잠기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허리 정도 잠겨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은혜 속에 풍덩 빠져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렇게 천태만상으로 신앙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에 빠져 버리면 자기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육신의 생각이 꺾이고 주님의 은혜로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 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 47:8-9)
그 흘러내리는 강물로 바닷물도 살아나고 고기떼들도 살아난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신 생수가 어디서 흘러나온 것입니까? 하나 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또 계시록에서는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가운데로 흐르더라”(계 22:1—2)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그 강물을 마신 사람들입니다. 그 강물에 우리는 발목을 적시거나 허리를 적시거나 온몸을 적셔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54)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수가 성 우물가에 앉아 계실 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자 여자는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데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14)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물을 맛봤지만 세상 우물물을 또 마십니다. 구원받았으면서도 세상 물을 또 마시기 때문에 아무리 마셔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고 그 안에 잠겨 살 때에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고 하나님께 찬양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여기서 “성”은 예루살렘이고 신약에 와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 성 중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상징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했는데, 시편 57편 8절에 보면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새벽이라는 말은 ‘진작’, ‘일찍’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하나님은 도와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마 6:8)고 했습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떡을 달라면 돌을 주겠느냐”(마 7: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떡을 주시지 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할 때는 잘못 구하지만 하나님이 주실 때에는 우리가 마음이 답답하고 배고픈 상태,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어떤 뜻을 알게 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떡이 되는 것입니다.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나타나시는 주님의 능력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46:6)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성령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이 계시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그 확실한 사실을 꼭 알게 되 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면 마음의 피난처가 생깁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46:7)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 마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그때에 참으로 피난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알고 성령이 계시는 것을 알면 피난처가 확실히 생깁니다. 그러면 그때 마음의 근심에서 놓이게 됩니다. 성령이 계셔서 성령이 자기 일을 하시는데 무슨 염려가 필요합니까?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8 -10)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태연하게 있으라’, ‘안심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뭘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37장에서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큰소리 칠 때에 이스라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또 출애굽기 14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앞에는 홍해가 넘실거리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조용히 기다리는 자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46:1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를 원합니다.
이 시편 46편은 히스기야 왕 당시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에 되어진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앗수르의 현재 위치는 이란의 일부와 터키 곧 중동의 북쪽 지역을 말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남쪽에 유다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고 나머지 열 지파는 북쪽 사마리아 지역에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남쪽 유다 나라는 유다 지파인 다윗 왕의 계통이 계속 이어졌지만 북쪽에는 여로보암 왕이 나라를 세우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데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유다나라에 속하게 될 것을 여로보암 왕이 두려워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했던 것입니다. 이때 앗수르는 먼저 북쪽 이스라엘을 완전히 점령하고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히스기야 왕 때 남쪽 유다를 점령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히스기야 왕을 위협하였습니다.
“랍사게가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 함을 듣고 돌아가다가 그 왕이 립나 치는 것을 만나니라 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의 일에 대하여 들은즉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가로되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너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건짐을 얻겠느냐 나의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거하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 신들이 건졌더냐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 하라 하였더라”(사 37:8-13)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 왕에게 “네가 의뢰하는 하나님도 유다 나라를 내게서 구출하지 못할 것이다”며 자기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나타나서 앗수르의 산헤립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히스기야 왕을 위로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 그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한고로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사 37:36-38)
그 결과 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 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또한 산헤립은 돌아가서 자기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편 46편이 이 내용을 주제로 하여 지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의 그림자적인 역사로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이 세상이 하나님을 도전하다가 멸망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피난처
이 말씀을 육신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느냐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열한 제자가 다 순교했고 또 사도 바울도 순교를 했고 그 외에 초대 교회에도 스데반을 비롯해 거의 모든 주님의 일꾼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거나 옥사를 하거나 십자가에 못박혔거나 해서 많이 죽었습니다.
참된 신앙 운동이 일어날 때에는 항상 박해가 따랐습니다. 참 신앙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기독교가 부패하거나 세속화될 때에는 핍박이 없었습니다.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스도인이 경건하고 진정한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핍박을 받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피난처”라는 말은 반드시 육신이 보호를 받는다든지 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보존 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보존 받는 것이 피난인 것입니다.
영혼의 피난이지 육신의 피난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께 속한 자가 되면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사탄은 구원받은 사람을 계속 핍박하고 영혼을 공격합니다. 물론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육신적으로 너무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영적인 생활이 약화되고 신앙이 약화되어 힘을 못쓰는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은 우리가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을 확실히 믿는 믿음에 의해서 우리의 믿음이 보존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이 안전하다든지 육신이 건짐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입증이 된 것입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 4:9-13)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동안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는 등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에 고생을 많이 한다 해도 복음 전하는 사역자로서 또 믿는 자로서 사도 바울만큼 고생을 많이 하고 핍박을 많이 받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피난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아도 그의 마음과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하나님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이 하나님 안에 완전히 숨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빌립보 옥중에서 손과 발이 묶여 있을 때도 쇠 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등 육신적으로도 안전하게 지켜주신 일들이 더러 있긴 했습니다만 온갖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의 품안에, 주님의 은혜 속에 깊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공격해도, 아무리 시험해도, 아무리 그를 해롭게 해도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평안하였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0-12)
바울은 궁핍 속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앙으로 걸어간 걸음은 항상 평형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르내림이 너무 많습니다. 물질이 풍부해지면 기분이 좋아서 마음이 올라가고 또 물질이 없고 가난하면 마음이 처져서 내려가고, 평형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마음은 언제나 요동이 없었습니다. 바울에게도 고린도 교인들이 돈을 많이 보내 주어 때론 풍부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바울이 기분이 더 올라가고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가난해서 주리고 목마를 때도 그 마음은 평행선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도 인간의 약점입니다. 또 좋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해서 실의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빠져 감정적으로 격발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주님 안에 마음이 붙어 있는 사람은 너무 감정적으로 격발하고 설치는 데서 보호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절망 속에 빠지지 않는 것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한 피난
이 시에서 다윗은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은 피난처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피난처, 마음의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마음이 지켜지고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참으로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환란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마음이 주님 안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의 비결입니다.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 1:17)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다음 단계의 믿음으로 전진해갑니다. 이 세상은 환난과 죄와 유혹과 시련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 안에서 요동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는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이 모자란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걸어가는 길에는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부분의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아야 할 고난이, 교회를 위해서 받아야 할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울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라면 그 지체에 따라서 남겨진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 몸에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으로 알고 채울 수 있으면 주님 안으로 피난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우리 앞에 올 때에 도망쳐버리면 이것은 피난처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으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이 다 내 육체에 채워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내 육체에 채우면 그것이 주님 안에서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보호 받는 것이고 영적인 삶이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고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 보호해주시는 주님의 손길
이것을 이사야서 내용과 연관지어 말한다면,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을 다 점령하고 이제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예루살렘이 점령을 당할 상태일지라도 흔들림 없이 주님을 바라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 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눅 21:25-28)
주님 오시기 직전에 이 세상이 환난의 세상이 되어 일월 성신의 징조가 있고, 또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로 혼란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았으니까 환난 전에 들림을 받는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환난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나 아무리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그 환난의 전초전에 투입이 될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곤란하고 궁핍한 과정을 거치다가 어느날 들림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환난 속에서 주님을 믿고 그 안에서 단련되고 그 안에 마음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같은 운명 속에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나 자매가 당하는 일이나 내가 당하는 일이나 똑같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돌아보고 교제하는 중에 어느날 주님이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지 혼자 잘 살고 내 멋대로 살 때에 그냥 데려간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어떤 환난이 닥쳐와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목적을 두고 창조하신 이 세상이 변동이 일어나고 이 시편 저자의 말대로 바닷물이 요동하고 뛰놀고 넘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주님의 백성에게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과연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사 41:21-24)
우상 섬기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는 얘기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오랫 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암흑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조각한 우상을 의뢰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사 42:14-17)
이제 하나님이 떨치고 일어나셔서 굉장한 힘으로 일을 하신다 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위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흉년이 오고, 지진이 일어나고 천재지변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9-23)
모든 삼라만상이 허무한 데 굴복하여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는데 아담이 타락해서 그 모든 것이 사탄에게 정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한다고 했습니다.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생겨나면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되면 천년왕국인데 그때에 모든 자연계도 회복되므로 모든 피조물들이 그때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신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탄식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을 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육신도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육신이 구원을 받자면 이 육신의 힘이 줄어들어야 되고 육신이 시련을 거쳐야 되고 환난을 거쳐가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아직도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거쳐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속사람이 보존을 받아야 됩니다. 마음이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적든 크든 환난이 있습니다. 그 환난 속에서 우리 영혼의 상태, 우리 믿음의 상태,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얼마나 안정되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은혜 속에 사는 생활
여기서 말하는 “시내에서 흐르는 물”은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의미합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 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 47:1 -5)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처음에는 발목에 차고, 다시 무릎에 오릅니다. 다음에 허리에 오르고 나중에는 걸어서는 건널 수 없고 헤엄을 쳐야 하는 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진리와 은혜의 강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았지만 겨우 발목만 적시고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무릎 정도의 은혜 속에 잠기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허리 정도 잠겨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은혜 속에 풍덩 빠져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렇게 천태만상으로 신앙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에 빠져 버리면 자기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육신의 생각이 꺾이고 주님의 은혜로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 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 47:8-9)
그 흘러내리는 강물로 바닷물도 살아나고 고기떼들도 살아난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신 생수가 어디서 흘러나온 것입니까? 하나 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또 계시록에서는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가운데로 흐르더라”(계 22:1—2)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그 강물을 마신 사람들입니다. 그 강물에 우리는 발목을 적시거나 허리를 적시거나 온몸을 적셔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54)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수가 성 우물가에 앉아 계실 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자 여자는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데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14)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물을 맛봤지만 세상 우물물을 또 마십니다. 구원받았으면서도 세상 물을 또 마시기 때문에 아무리 마셔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고 그 안에 잠겨 살 때에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고 하나님께 찬양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성”은 예루살렘이고 신약에 와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 성 중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상징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했는데, 시편 57편 8절에 보면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새벽이라는 말은 ‘진작’, ‘일찍’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하나님은 도와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마 6:8)고 했습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떡을 달라면 돌을 주겠느냐”(마 7: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떡을 주시지 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할 때는 잘못 구하지만 하나님이 주실 때에는 우리가 마음이 답답하고 배고픈 상태,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어떤 뜻을 알게 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떡이 되는 것입니다.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나타나시는 주님의 능력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성령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이 계시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그 확실한 사실을 꼭 알게 되 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면 마음의 피난처가 생깁니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 마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그때에 참으로 피난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알고 성령이 계시는 것을 알면 피난처가 확실히 생깁니다. 그러면 그때 마음의 근심에서 놓이게 됩니다. 성령이 계셔서 성령이 자기 일을 하시는데 무슨 염려가 필요합니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태연하게 있으라’, ‘안심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뭘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37장에서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큰소리 칠 때에 이스라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또 출애굽기 14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앞에는 홍해가 넘실거리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조용히 기다리는 자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