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0편] 감사의 산 제사로 그리스도의 심판을 예비하라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숫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1-23)



하나님의 계획과 시온의 영광


이 시편 50편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온 세상을 불러서 심판한다는 말씀을 예언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님이 재림하여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심판하시는 광경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31-41)


그런데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시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시온은 바로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시50:2)


 예수님이 이 예루살렘에서 골고다의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또 성령이 처음에 임하셔서 교회가 세워진 곳도 예루살렘의 감람산입니다. 과거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을 통일하였고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BC 600년경에 한번 멸망하였고 다시 AD 70년경에 멸망했습니다. 앞으로 예루살렘이 환란의 날을 한번 더 맞이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과 대조적으로 사탄의 도성은 바벨론입니다. 현재 이라크의 바그다드라는 곳이 과거 바벨탑을 쌓았던 곳인데 그 곳은 이 세상의 멸망받을 도시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계시록 18장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도해 가신 목적지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던 지성소 자리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자리입니다.

 이제 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교회를 말합니다. 실제로 이 땅 위에 예루살렘이 있지만 새 예루살렘은 교회가 완성이 되면 성도들이 들림을 받고 나중에 다시 지상에 내려오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고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됩니다. 그 때는 예루살렘이 온 세계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고 통치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 이 빛을 발하는 것을 영적인 뜻으로 표현한다면 교회가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옵 1:21)


 현재 요르단에는 산악 족속이 많은데 이들은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입니다. 이 에돔은 특별히 심판을 받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완악한 에돔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게 정복되었을 때 이를 즐거워하였고, 유다 백성들을 학대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옵 1:17)라고 했듯이 시온산인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은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비록 이 자그마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았을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그 때가 오면 온전히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곳이 되어 거기서 주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심판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시 50:3)


“하나님이 임하사”라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출애굽기 20장을 연상하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을 때에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아담이나 노아, 에녹 같은 이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았지만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가운데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2-35)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의 하나님은 굉장히 두려운 하나님이시요 엄위로운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그 산에 불이 있고 진동하며 우뢰 소리가 나자 이스라엘 민족이 너무 겁이 나서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 대신 그 소리를 듣고 전달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으로 매우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불이 붙고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과 엄위로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 속에 나타나셔서 세상 사람들이 평안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기록된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했다는 것은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시내산에서처럼 직접 나타나면 우리는 죽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의 시대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용서를 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 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시 50:4-5)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다가 다시 재림하시는데 그 때의 예수님은 이 천 년 전에 오셨던 것과는 달리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시게 됩니다. 이 천 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고난의 예수님이십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9-16)


 사도 요한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밧모 섬에서 계시로 보았습니다. 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이천 년 전의 예수님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입니다. 권위가 있고 눈이 불꽃 같다고 했습니다. 빛난 주석 같고 모든 세상을 아무리 밟아도 상하지 않는 발을 가지고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심판대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시 50:4)

 여기서 윗 하늘은 성도들이 가 있는 하늘이고 아래 땅은 죄인들이 있는 세상입니다. 이 윗 하늘과 아래 땅에 각각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한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충실하게 잘하면 윗 하늘에서 상을 받고 잘못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한편에는 양들을 판단하는 말씀이 있고 또 한편에는 염소를 판단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모든 사람을 모으고 심판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지옥 가는 심판은 아니지만 심판 받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들림 받은 이후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윗 하늘에 서 상과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 받는 기간에 우리가 잘못 산 데 대한 대가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흠없는 신부가 되기 위해서 깨끗지 못한 것을 다 제해내는 과정이 들림 받은 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심판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래 땅에서는 이 죄악 세상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 가운데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땅에서 맞이할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시 50: 5-6)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제사로 언약한 자들이 성도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들을 모으십니다. 그 때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완전히 바로잡는 일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공의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참 제물이신 예수님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숫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7-14)


 이스라엘 민족은 양이나 소나 비둘기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진정한 제물이 되실 것을 예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양이나 소나 비둘기 따위의 제물을 바치라고 한 것은 교훈을 위해 예표적으로 명령을 한 것이지 그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양을 잡았는데 유월절은 그 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 제물의 참 주인공이 예수님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이고 여전히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립니다.

 참 제물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을 되풀이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이 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이나 소를 잡는 다는 것은 일종의 의식인데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양을 잡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피 냄새를 맡는 것도 아니고 고기를 잡수시는 것도 아닙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데만 뜻이 있는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은 형식에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나 양을 잡아 제사 드리는 그 제물 때문에 책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14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한 내용입니다. 감사의 제사는 수은제인데 이것을 예언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제물이 되어 주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고 죄사함을 받았으니 진정한 감사가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감사가 있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산 제사와 감사의 생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 -2)


 여기서 “거룩한 산 제사”가 무엇입니까? 몸을 가지고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피 흘려서 죽는 그런 제사가 아니고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은 생각의 지배를 받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활동하면 산 제사가 되고 하나님의 뜻과 대치되는 활동을 하면 산 제사가 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양심과 심령 속에 성령이 계시고 십자가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 말씀대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법이 내 안에 있으나 육신 속에 한 다른 법이 있어 나를 사로잡아 자꾸 죄의 길로 걸어가게 하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이 몸을 사로잡아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제물이 되는 생활을 하려고 하니까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생활의 투쟁이 시작됩니다. 신앙생활의 투쟁은 몇 단계가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죄와 씨름하다가 예수님의 피를 발견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 다음 구원을 받고 난 후에 내 육신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죄와 싸우는 과정이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이 몸을 죄에게 바치면 죄의 종이 되고 의에게 바치면 의의 종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장에 가면 율법의 문제가 나옵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겨하되 육신은 죄의 법을 섬깁니다.

 싸움이 아주 심각한 상태에 들어가면 나중에 가서 육신이 꺾여 버리는 단계에 들어갑니다. 그것이 안식이라는 것인데 그 후에도 또 시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은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똑같지 않고 단계가 다 다른 것입니다.

 빌립보서 말씀대로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보다는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감사가 없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 감사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죄 많은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때 죄 많은 여인이 나와서 마구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옛날에는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습니다. 그래서 손님이 집안에 들어가면 주인이 먼저 물을 떠다 놓고 발을 씻어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교만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들어가셔도 발을 씻겨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 많은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 털로 씻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선지자였으면 이 여자가 어떤 여인인 줄 알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아시고 “이 여자는 더 많은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더 많이 감사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어떤 행위보다 더 중요합니다. 감사가 없으면 행위는 억지가 됩니다. 부족한 존재지만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감사한 것입니다. 물론 진정한 감사가 있는 사람은 그 감사가 행위로서 나타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드리는 산 제사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6-13)


 여기에 교회가 형성되어 가는데 있어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내가 할 일이 뭔지 그 일을 충실히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말만 앞세워 실천이 없는 것은 산 제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스리 거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섬 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봉사하는 일이면 봉사하는 일로 각각 자기 할 일을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감사한 사람은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람들이 보든 말든 하나님 앞에서 얼마만큼 진실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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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14)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 앞에 무슨 서원한 일이 있습니까? ‘주님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까 앞으로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것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마음에 서원이 스쳐갑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잘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면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을 바치면서 살아갔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생활, 친족을 떠나 보내는 생활, 이스마엘을 떠나 보내는 생활 그것이 자신을 바치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속한 좋지 않은 습관이 있으면 단호히 버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실천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신앙생활에는 축복이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것은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은 나머지 사람들이 환란의 때에 주님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환난에서 건지시고 그들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러가지 환난을 당하게 되는데 그 때 주님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악인들에 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재앙이 임합니다.



악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재앙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잠 1:24-30)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사람, 주님의 책망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이 환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은 대답하지 아니하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시 50:16-17)


 마지막 시대의 적그리스도 운동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적그리스도 운동도 말로는 하나님의 율례와 언약을 이야기하고 성경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성경 읽고 하나님의 율례를 입으로 전하고 하나님의 언약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지만 참으로 구원을 못 받았다면 그 사람은 악인에 속합니다. 입으로 성경을 말하고 하나님의 율례를 전한다고 해서 다 선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도 성경을 전했지만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어떤 이들은 이 성경을 가지고 사회구원운동을 전합니 다. 자기의 이권 때문에 신앙을 앞세우는 일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사람들에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든다”고 책망하신 일이 있습니다. 혹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자기 이권을 취득하기 위해 성경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도적이나 다름없습니다.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시 50:18-20)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바댜서를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헜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옵 1:10-14)


 오바댜서는 에돔에 대해 말씀하신 오바댜의 묵시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손이었습니다. 이 에돔 족속들은 느브가넷살 왕이 와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에 매우 기뻐하고 같이 도와서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유다 자손들이 이집트로 도망가려고 하면 붙잡아다가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오바댜서는 하나님께서 형제를 약탈한 에돔 족속을 향하여 원수를 갚으신 것을 묵시로 나타내셨습니다. 9절에 보면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져 줍니다. 이 에돔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확실하게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혹시 죄를 짓고 잘못되더라도 비판하거나 욕을 해서는 안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잘못되어 실패했을 때에 잘 되었다고 좋아해서도 안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전부 다 쌍둥이입니다. 예수님의 같은 피로 형제된 사람인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 속에서 세상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죄도 짓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 다 주님 앞에 함께 서게 됩니다.

 혹시 우리를 대적하고, 원수시하더라도 비판하거나 욕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 속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이면 어떤 문제를 가지고 법정에 가면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차라리 손해를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악하게 하더라도 그 상대방이 구원받은 사람이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는 말씀도 있듯이 우리는 에돔 족속같이 하면 안됩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니까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사람처럼 무시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3-4)


 하나님이 왜 가만히 계십니까? 사람 같으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즉각 벌을 줄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시니까 하나님도 별 수 없다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자기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고 무신론을 주장해도 넉넉히 참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참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죄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벌 주신다면 아무도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마음이 넓으시고 고마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등등이 참으로 엉망진창인데도 그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시지 않으십니까?



고난에 감사함으로 동참하는 생활

 앞서 읽었던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이 시편 50편 21절에 있는 말씀대로 왼편에 있는 자들의 죄를 목전에서 차례차례 베푸는 광경이 나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셨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2-45)


 주님이 그들의 죄를 하나하나 이야기할 때 그들은 “언제 우리가 주님을 공양치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동냥을 주는 일이나 고아원이나 양로원과 같은 자선사업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는 주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 일하고 핍박 받고 옥에 갇히는 것은 주님의 제자에 관한 일입니다.

 현재 교회가 가는 길에는 여러가지 고난이 따르는데 이 고난에 함께 동참하며 성도를 서로 섬기는 일에 마음을 하나로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일은 주님을 공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2-23)


 우리는 형편없는 죄인인 우리들을 용납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실 감사한 마음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지만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손해가 오면 은혜는 그만 어디 가 버리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님의 그 큰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시련과 시험이 닥친다 하더라도 굳굳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