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6편] 나를 시험하사 내 뜻과 마음을 단련하소서

[시편 26:1-12]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 26편은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기면서 생활하던 것을 회상하면서 지은 시이며 기도입니다. 





너희도 온전하라


[시편 26: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는 죄를 지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으로서 완전하게 행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 같은 이도 역시 구원받은 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자기가 잘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할 수가 있느냐고 자문했을 때 온전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들이면 아버지의 생명을 타고 났으므로 아버지의 성격을 닮습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시다는 것은 사랑하시는 데 온전하시다는 뜻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태복음 5:44-45)라고 했습니다. 원수도 사랑하실 만큼 사랑이 온전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말씀을 깨닫고 거듭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만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아들은 구원받은 이후 믿음이 장성한 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은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성장해야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를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 세상의 자연적인 모든 현상에서 악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악인에게조차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다윗도 사울 왕을 미워하거나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시편 26:1)라고 했습니다. 만일 다윗의 마음에 요동이 있었다면 다윗은 사울왕을 해쳤을 것입니다. 다윗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 수단과 방법으로 일을 개척해 가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삶의 과정은 단련 받는 과정이고 장차 이스라엘의 왕의 자격을 갖추는 시험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겨다니고 위협받는 시련을 잘 견디어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본래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세상에 오셔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신 것은 구원자로서, 구주로서 시련과 단련을 받는 과정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시험으로 단련 받은 다윗


[시편 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자기가 영광을 누리거나 권리 행사를 하거나 존경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2:9-10]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구원의 주로서 온전하게 되셔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능력으로 구원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하시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나타내셔서 그 사랑이 역사하는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이 세상 모든 만물 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성령으로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세상에 오시기까지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는 길을 닦아야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사랑의 실제적인 행위입니다. 그 사랑의 실질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실 때에 실제로 사랑을 깨닫게 되고 사랑 자체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육신 속에 나타난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자체가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받은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바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 모든 인생에게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하고 교제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서로 사랑하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으면 예수님 자신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계시지만 그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 죄인들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된 것은 어떤 권위나 권력으로서가 아닙니다. 왕은 권위를 자랑하고 권력을 이용하는 권세자가 아니라 사랑으로서 인도해가는 구원자입니다. 다윗도 먼저 많은 시련과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 훈련이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는 과정이었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면서도 마음에 원한을 품지 않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죽일 마음을 갖지 않는 훈련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서, 구주로서,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시련이나 고난이 있는 것은 믿음을 성장시키고 사랑하는 삶을 이루어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단련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나면 자기에게 섭섭하게 하는 것, 기분 나쁘게 하는 것, 억울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용서해 줄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믿고 사는 생활


[시편 26: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시편 25:5-6]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다윗은 벌 주고 심판하는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인자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구원받았어도 하나님이 무섭다는 관념으로 사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참사랑이시라고 여기고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무섭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활발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 안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마음이 자유롭고 신앙생활이 활발합니다.


 하나님을 무섭게만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전전긍긍하면서 마음에 자유가 없습니다. 종의 의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갈라디아서 4:6-7]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종은 열심으로 일하면서도 항상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고 자유가 없습니다. 아들은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 잘못한 것이 있어도 담대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종처럼 사는 신앙생활은 율법 아래 사는 생활이고, 아들처럼 사는 신앙생활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고 언제나 감사한 분이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라고 했는데 진리 중에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참된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3:9]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세상 사는 동안에는 의식주 세 가지가 인간 생활 속에 빠뜨릴 수 없는 필수조건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흔들리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견고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서 마음을 굳게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시련이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사탄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의 훈련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게 되는 그 은혜로써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 중에 행한다는 말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은혜가 넘치면 넘칠수록 참되게 산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구원받은 사람 중에도 남에게 선생되기를 좋아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기에게는 지혜나 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지혜의 온유함이란 온유한 행실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지혜로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지혜입니다.



[마태복음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예수님이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 불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알아주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알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태복음 11:29)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3:14-16]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서 가르치려는 것은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리를 거스리는 거짓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생 되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음과 생활이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입으로만 가르치는 것은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이러한 마음가짐과 생활이 뒤따를 때에 참 지혜로써 가르칠 수 있습니다. 비록 가르치지는 않을지라도 나름대로 교회 안에서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봉사하고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에는 항상 진리 가운데서 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왕 노릇하실 때에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현재의 생활도 훈련 받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해서 훈련받는 과정이 있었던 것처럼 현재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시련받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는 마음, 또 화평하는 마음을 길러가야 됩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악인과 함께하지 않음


[시편 26: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허망한 것입니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라고 했습니다. 가령 사람을 사귈 때에 너무 이 세상에 욕심이 많거나 허망한 것을 찾는 사람이면 그에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마음에 방패를 두고 접촉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26: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행악자의 집회’의 대표적인 예로 고라 자손들의 집회를 들 수 있습니다. 고라 자손들이 모세를 대적하기 위해서 집회를 가졌다가 멸망당한 적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씻기심을 받음


[시편 26: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자,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자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답하셨습니다(요한복음 13:4-10).


 여기 26편 말씀에는 손을 씻는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는 말씀이 있고 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에베소서 5:26)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주의 단”은 제단 곧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곳을 말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삶


[시편 26:8-9]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모세가 회막 성전을 완성했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고(출애굽기 40:34), 또 솔로몬이 성전을 완전히 지었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열왕기상 8:11).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또 한번 주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지은 장막 성전과 솔로몬 성전에도 영광이 가득했었는데 그것은 교회가 완성되는 과정입니다. 성전이 완성되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 완성되는 것이고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완성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지치고 힘들지라도 주님이 함께 역사하시는 데에 긍지를 갖고 끝까지 견뎌나가야 할 것입니다. 왕 노릇하기 위해 다윗처럼 단련을 받으면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면 그만큼 더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시련 속에서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면서 주님을 의지해 살아가는 삶을 배워 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