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8: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시편 28편에는 다윗의 시라는 부제가 있는데 아마 다윗이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공격받을 때에 지은 것 같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시편 28: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다윗이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라고 부르짖는 것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말할 때에는 예수님께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반석이시자 머리이십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집을 잘 짓느냐 못 짓느냐가 아니라 집을 어디에다 세우느냐는 집 터에 관한 말씀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집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사람들은 모래 위에다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반석이나 모래나 그 성분은 돌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모래는 어떤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공로와 노력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불법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안 듣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면 다 허물어지고 맙니다. 다윗이 반석을 향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가 반석 즉 예수님만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과의 대화
[시편 28:4-5]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바위는 바로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집을 뜻합니다. 다윗이 “나를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라고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주님이 응답해주시지 않으면 자신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곧 죽은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는 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주님과 자기 사이에 대화가 끊임없이 계속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 보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요한일서 5:1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주님과 나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고 신앙생활이 중단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12-1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구원받은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육신의 무덤 속에 죽은 상태, 갇혀 있는 상태로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과 접촉하며 살아도 그 삶의 목적은 뚜렷해야 합니다. 세상 방법대로만 살면 그 삶은 완전히 세상에 속한 삶, 세상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 것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부활의 생활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망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사망의 지배 아래 있던 영혼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베드로전서 1:3)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죄가 해결됨과 동시에 부활의 생명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 예수님과 함께 장례 지냈다는 뜻으로 물속으로 내려가고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뜻으로 물에서 올라옵니다. 그것이 곧 구원의 내용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받았어도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육신을 따라 살면 그것은 죽은 생활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이 죽음으로써, 부활한 생명이 활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죽을 육신에 끌려다니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사이에 대화가 있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대화는 기도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이 있고 찬송을 부르면 마음에 감사가 있고, 교제를 통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부르짖을 때에 만일 주님이 잠잠하시면 자신은 주님과 대화가 끊어지고 무덤에 내려가는 자 곧 죽은 자와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들으시는 기도
[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구약성경에서 여호와라고 하면 신약에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됩니다.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성경 구절 외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그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다는 말은 주님이 분명히 들으시고 기억해 두셨다가 때가 되면 그것을 이루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는 기도는 여러 가지입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서로 의논하고 얘기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과 서로 의논하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형제간에 전혀 대화가 없다는 것은 주님과의 사이에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는 거짓된 것입니다.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기도가 가능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원하지 않는 마음은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시편 88:4-11]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사망자 중에 던지운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데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주님을 증거할 수 없고, 주님께 찬송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무덤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기사를 행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무덤 속에 들어간 자와 마찬가지로 주님과 관계 없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비참한 상태입니다.
소돔 고모라 성과 관계되는 네 부류의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첫번째는 아브라함이고 두번째는 롯과 그의 두 딸이고 세번째는 롯의 처이고 마지막 네번째는 소돔 성에 사는 죄인들입니다.
소돔 성에 사는 죄인들은 불로 멸망당했습니다. 그 소돔 성은 장차 불바다가 될 이 세상을 말합니다. 불바다가 될 세상에서 멸망당할 사람들은 구원 못 받은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소돔 성이 멸망할 것을 하나님이 미리 말씀 해주셔서 알았고 소돔 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해서 사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언제나 마음이 하늘에 있는 사람,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소돔 성 안의 롯은 마음이 상해 있었습니다. 비록 소돔 성에 살았지만 그 마음 속에 세상의 죄를 개탄하는 양심이 있었습니다.
롯이 천사에게 손목이 잡혀 성 밖으로 나가고 산 위에까지 가는 것은 들림 받는 모습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부류 중에 롯의 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신앙생활이 완전히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이 심판 받아 소금 기둥이 된 것 입니다. 신앙생활이 완전히 죽은 사람,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은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육신의 심판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성소를 향한 기도
[시편 28: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열왕기상 8:27-29]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솔로몬은 ‘이 전은 주의 이름을 주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쫓아내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마태복음 21:13)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라고 말한 것은 성소를 향해서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손을 드는 것은 기도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함께 교제하는 모임이 교회이므로 교회가 기도하는 집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건물로 지은 성전은 그림자입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성전은 예수님의 육신을 말하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교회가 성전입니다. 기도가 교회 활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
[시편 28:3]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구원받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는 자유 안에서 활기차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율법에 끌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유 안에서 활발하게 사는 사람이 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끌려가는 사람은 마음에 불만이 있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에 자유가 없는 사람은 끌려다니는 마음을 없이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됩니다.
[시편 28:4-5]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로마서 10:2-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의에는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자기 의는 자기가 행한 일을 말하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다고 한 그 열심은 자기의 의대로 행한 것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인의 제사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농사지은 열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받아주시지 않은 것은 그 제물이 가인의 노력과 의로 드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22-23 )고 하신 말씀처럼 자기가 행한 일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도둑질이나 간음을 범하는 것 등 눈에 보이는 죄만을 큰 죄로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큰 죄는 하나님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큰 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성령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찬송
[시편 28: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찬송을 불렀다고 했습니다(시편 106:12). 다윗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시편 28:7-8]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첫째 예수님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여호와는 산성이시라고 했습니다.
[시편 133:1-2]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아론의 수염에 흘러 옷깃까지 내린다는 것은 주님의 몸, 교회에 성령이 내린다는 뜻입니다.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 속에 많은 사탄의 장난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도전하고 참 교회 운동을 도전하는 거짓된 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했고 교회를 부패하게 했습니다.
중세 암흑시대 때는 천주교 일색이었으나 재침례파 둥 복음의 선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참 교회 운동, 주님이 머리되신 교회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6:14-17]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아람 군대와 사마리아 군대가 싸우기만 하면 엘리사가 미리 알고 다 방비를 해버리니 상대가 안됐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사들이 엘리사가 사는 곳을 포위했습니다. 이를 본 엘리사의 종이 엘리사에게 큰일났다고 하니 엘리사가 걱정 말라고 하고 그 종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종의 눈을 여시매 그 종의 눈에 불말과 불병거 등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호와는 기름 부으신 자의 산성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큰 시련과 순교할 지경에까지 이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이 그르치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시편 28: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다윗의 이 기도는 교회를 위한 기도로 주님이 목자가 되어서 영원토록 인도해주시기를 바라는 다윗의 진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편 28편에는 다윗의 시라는 부제가 있는데 아마 다윗이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공격받을 때에 지은 것 같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다윗이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라고 부르짖는 것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말할 때에는 예수님께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반석이시자 머리이십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잘 짓느냐 못 짓느냐가 아니라 집을 어디에다 세우느냐는 집 터에 관한 말씀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집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래 위에다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반석이나 모래나 그 성분은 돌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모래는 어떤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공로와 노력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불법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안 듣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면 다 허물어지고 맙니다. 다윗이 반석을 향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가 반석 즉 예수님만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과의 대화
바위는 바로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집을 뜻합니다. 다윗이 “나를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라고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주님이 응답해주시지 않으면 자신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곧 죽은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는 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주님과 자기 사이에 대화가 끊임없이 계속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 보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요한일서 5:1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주님과 나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고 신앙생활이 중단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구원받은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육신의 무덤 속에 죽은 상태, 갇혀 있는 상태로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과 접촉하며 살아도 그 삶의 목적은 뚜렷해야 합니다. 세상 방법대로만 살면 그 삶은 완전히 세상에 속한 삶, 세상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 것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부활의 생활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망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사망의 지배 아래 있던 영혼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베드로전서 1:3)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죄가 해결됨과 동시에 부활의 생명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 예수님과 함께 장례 지냈다는 뜻으로 물속으로 내려가고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뜻으로 물에서 올라옵니다. 그것이 곧 구원의 내용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받았어도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육신을 따라 살면 그것은 죽은 생활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이 죽음으로써, 부활한 생명이 활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죽을 육신에 끌려다니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사이에 대화가 있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대화는 기도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이 있고 찬송을 부르면 마음에 감사가 있고, 교제를 통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부르짖을 때에 만일 주님이 잠잠하시면 자신은 주님과 대화가 끊어지고 무덤에 내려가는 자 곧 죽은 자와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들으시는 기도
구약성경에서 여호와라고 하면 신약에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됩니다.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성경 구절 외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그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다는 말은 주님이 분명히 들으시고 기억해 두셨다가 때가 되면 그것을 이루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는 기도는 여러 가지입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서로 의논하고 얘기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과 서로 의논하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형제간에 전혀 대화가 없다는 것은 주님과의 사이에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는 거짓된 것입니다.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기도가 가능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원하지 않는 마음은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주님을 증거할 수 없고, 주님께 찬송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무덤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기사를 행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무덤 속에 들어간 자와 마찬가지로 주님과 관계 없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비참한 상태입니다.
소돔 고모라 성과 관계되는 네 부류의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첫번째는 아브라함이고 두번째는 롯과 그의 두 딸이고 세번째는 롯의 처이고 마지막 네번째는 소돔 성에 사는 죄인들입니다.
소돔 성에 사는 죄인들은 불로 멸망당했습니다. 그 소돔 성은 장차 불바다가 될 이 세상을 말합니다. 불바다가 될 세상에서 멸망당할 사람들은 구원 못 받은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소돔 성이 멸망할 것을 하나님이 미리 말씀 해주셔서 알았고 소돔 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해서 사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언제나 마음이 하늘에 있는 사람,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소돔 성 안의 롯은 마음이 상해 있었습니다. 비록 소돔 성에 살았지만 그 마음 속에 세상의 죄를 개탄하는 양심이 있었습니다.
롯이 천사에게 손목이 잡혀 성 밖으로 나가고 산 위에까지 가는 것은 들림 받는 모습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부류 중에 롯의 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신앙생활이 완전히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이 심판 받아 소금 기둥이 된 것 입니다. 신앙생활이 완전히 죽은 사람,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은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육신의 심판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성소를 향한 기도
솔로몬은 ‘이 전은 주의 이름을 주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쫓아내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마태복음 21:13)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라고 말한 것은 성소를 향해서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손을 드는 것은 기도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함께 교제하는 모임이 교회이므로 교회가 기도하는 집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건물로 지은 성전은 그림자입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성전은 예수님의 육신을 말하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교회가 성전입니다. 기도가 교회 활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
구원받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는 자유 안에서 활기차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율법에 끌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유 안에서 활발하게 사는 사람이 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끌려가는 사람은 마음에 불만이 있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에 자유가 없는 사람은 끌려다니는 마음을 없이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됩니다.
의에는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자기 의는 자기가 행한 일을 말하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다고 한 그 열심은 자기의 의대로 행한 것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인의 제사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농사지은 열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받아주시지 않은 것은 그 제물이 가인의 노력과 의로 드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22-23 )고 하신 말씀처럼 자기가 행한 일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도둑질이나 간음을 범하는 것 등 눈에 보이는 죄만을 큰 죄로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큰 죄는 하나님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큰 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성령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찬송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찬송을 불렀다고 했습니다(시편 106:12). 다윗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첫째 예수님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여호와는 산성이시라고 했습니다.
아론의 수염에 흘러 옷깃까지 내린다는 것은 주님의 몸, 교회에 성령이 내린다는 뜻입니다.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 속에 많은 사탄의 장난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도전하고 참 교회 운동을 도전하는 거짓된 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했고 교회를 부패하게 했습니다.
중세 암흑시대 때는 천주교 일색이었으나 재침례파 둥 복음의 선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참 교회 운동, 주님이 머리되신 교회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아람 군대와 사마리아 군대가 싸우기만 하면 엘리사가 미리 알고 다 방비를 해버리니 상대가 안됐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사들이 엘리사가 사는 곳을 포위했습니다. 이를 본 엘리사의 종이 엘리사에게 큰일났다고 하니 엘리사가 걱정 말라고 하고 그 종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종의 눈을 여시매 그 종의 눈에 불말과 불병거 등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호와는 기름 부으신 자의 산성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큰 시련과 순교할 지경에까지 이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이 그르치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의 이 기도는 교회를 위한 기도로 주님이 목자가 되어서 영원토록 인도해주시기를 바라는 다윗의 진심을 표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