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6:1-12]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시편 36편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남달리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경험 속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고난 속에서도 성령의 힘을 의지하는 마음을 이렇게 시로 읊었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시편 36:1]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악인의 사악한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이라는 말씀을 보면 다윗 자신 속에도 악인의 죄얼, 죄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다윗이지만 자신도 죄성을 지녔음을 시인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자기 안에 죄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 중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데서 근본적인 악이 생겨난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기 이전에 죄는 이미 아담의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라고 했듯이 악인은 하나님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다는 두려움조차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을 보면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경제 문제, 환경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계속 생기면서 이 세상은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지만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모든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편 36:2]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죄도 드러나지 않고 죗값으로 받는 심판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할 때에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죄의 심판자가 없고 죄가 영원히 숨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죄를 지어도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악과 궤휼이 가득한 자
[시편 36:3]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마태복음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태복음 12:34)는 말씀이 있습니다. 입과 마음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대개는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입으로 표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악이 있기 때문에 입으로 악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고상하고 선한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악에 속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전부 선을 논하고 거룩함을 지향합니다. 어떤 종교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악을 제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도를 닦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고상한 악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선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 속에서 선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노력이 종교입니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 아담 때부터 인간은 인간 자신에게 없는 선을 만들어내려고 애써 왔습니다. 없는 선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 종교이고 도덕이고 철학입니다.
인간에게는 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선은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전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간이 추구하는 선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고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고 했습니다. 입으로 내뱉는 말은 죄악과 궤휼뿐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과 궤휼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악을 쳐부수고 깨끗케 하는 것은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9:13-15]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브리서 4:12)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속에 있는 부정한 것을 해부하여 낱낱이 수술하는 칼입니다.
[시편 36:4]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주로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게 됩니다. 누워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게 되고 그런 공상을 하다 보면 어두움이 찾아오고 죄가 찾아듭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침상에서 공상을 하기보다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1-2)라고 했습니다.
변함 없는 주의 언약
[시편 36: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악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진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복잡하더라도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선은 악과 싸워 패배한다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악이 성한 세상이지만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으로 창조된 우주 만물은 그 법칙대로 하나님이 성실하게 지켜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33:19-26]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찐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택하신 두 족속을 버리셨다 한 것을 네가 생각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여 자기들 앞에서 나라로 인정치 아니하도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주야의 약정이 서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찐대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근본 뜻은 예수님이 다윗의 계통으로 오셔서 왕이 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왕위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성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야의 약정”은 낮과 밤이 이루어지는 자연법칙을 말합니다. 지구가 자전하는 과정에서 낮과 밤이 이루어지고 공전하는 과정에서 사계절이 이루어지는 법칙을 말합니다. 만약 그 법칙이 변하여 자연계가 파괴되어버린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변해 버리고 하나님의 성실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35)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실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비추어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라는 말씀을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말씀은 인간에게 베푸시는 인자하심을 나타냅니다.
모든 자연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빛과 수분을 받아 식물이 자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동물들이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 그 인자하심을 자연을 통해 나타내십니다. 세상은 악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은 변함이 없고 그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또한 변치 않습니다.
다윗은 이 시를 통해서 인간에게 악이 있지만 그 위에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이 있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6: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다”는 말은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많고 세상의 부조리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의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오직 주의 이름만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로 행한 사람은 어떤 환난이 오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사람이 의롭다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환난이 닥치면 인간의 의는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의는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9)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흔들림 없는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의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는 말은 바닷속에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고기들이 살고 있지만 그 고기들이 바다 위로 올라 올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도 신분이 높고 낮은 사람, 힘이 세고 약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모두가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귀하고 천한 것이 있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런 구별이 없습니다. 조금만 영적인 안목이 열리면 인간의 판단이 시시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생물들이 플랑크톤을 섭취하면서 서식하는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의 뜻 안에서 보호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다와 같은 하나님의 일정한 판단의 기준 안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겸손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부요함에 비해 인간의 높고 부함은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는 평안
[시편 36: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넓은 대양 안에서 온갖 물고기들이 마음대로 헤엄치고 사는 것처럼 인생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안식을 누리며 평안하게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리지 않고,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다윗이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얼마든지 쉴 수 있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피한다면,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 어려움에서 헤쳐나올 수가 있습니다.
[시편 36:8]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에베소서 1:22-23]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예수님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 만물이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충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영의 양식을 먹는 곳입니다. 육신을 해갈하는 곳이 아닌 영혼을 해갈하는 곳입니다. 육신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공급을 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빈곤도 맛보아야 하고, 여러 가지 괴로움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이 만물이 충만히 채워지기 위한 과정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 교회이기 때문에 “주의 집에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넓게 펼쳐진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풍족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명을 얻었지만 주의 집, 하나님의 펴신 그 날개 아래서 주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6:8]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한복음 7:37)고 했고 또 4장에는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은 단지 마시는 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한 모든 행위를 뜻합니다. 가령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제시간에 꼭 보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때뿐입니다.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면 허전함이 따르게 되고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주
[시편 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요한복음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는 말씀처럼 모든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했는데 주의 광명은 곧 하나님의 생명의 빛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우리의 영혼, 우리의 심령에는 생명의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왔을 때에 그 생명에 눈이 뜨여 광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주님을 향해서 마음이 열렸을 때에 우리 안에 생명이 왔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주의 광명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마태복음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네게 있는 빛”은 생명의 빛을 말합니다. 마음의 눈이 나쁘면 생명의 활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빛인 예수님을 통해서 빛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생명의 빛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의인의 길은 점점 빛이 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는 말씀처럼 이 광명을 보면서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의 근원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삶 속에서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께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의 길
[시편 36:10]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의인뿐만 아니라 모든 악인들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 곧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인자하심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시편 36:11-12]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우리는 앞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그 큰 인자하심과 의로우심,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않는 근본적인 악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그 은혜와 능력을 맛보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도 마음의 시야를 넓혀야 할 것입니다.
시편 36편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남달리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경험 속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고난 속에서도 성령의 힘을 의지하는 마음을 이렇게 시로 읊었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악인의 사악한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이라는 말씀을 보면 다윗 자신 속에도 악인의 죄얼, 죄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다윗이지만 자신도 죄성을 지녔음을 시인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자기 안에 죄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 중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데서 근본적인 악이 생겨난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기 이전에 죄는 이미 아담의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라고 했듯이 악인은 하나님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다는 두려움조차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을 보면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경제 문제, 환경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계속 생기면서 이 세상은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지만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모든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죄도 드러나지 않고 죗값으로 받는 심판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할 때에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죄의 심판자가 없고 죄가 영원히 숨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죄를 지어도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악과 궤휼이 가득한 자
마태복음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태복음 12:34)는 말씀이 있습니다. 입과 마음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대개는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입으로 표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악이 있기 때문에 입으로 악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고상하고 선한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악에 속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전부 선을 논하고 거룩함을 지향합니다. 어떤 종교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악을 제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도를 닦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고상한 악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선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 속에서 선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노력이 종교입니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 아담 때부터 인간은 인간 자신에게 없는 선을 만들어내려고 애써 왔습니다. 없는 선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 종교이고 도덕이고 철학입니다.
인간에게는 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선은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전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간이 추구하는 선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고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고 했습니다. 입으로 내뱉는 말은 죄악과 궤휼뿐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과 궤휼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악을 쳐부수고 깨끗케 하는 것은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브리서 4:12)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속에 있는 부정한 것을 해부하여 낱낱이 수술하는 칼입니다.
주로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게 됩니다. 누워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게 되고 그런 공상을 하다 보면 어두움이 찾아오고 죄가 찾아듭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침상에서 공상을 하기보다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1-2)라고 했습니다.
변함 없는 주의 언약
악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진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복잡하더라도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선은 악과 싸워 패배한다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악이 성한 세상이지만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으로 창조된 우주 만물은 그 법칙대로 하나님이 성실하게 지켜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근본 뜻은 예수님이 다윗의 계통으로 오셔서 왕이 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왕위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성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야의 약정”은 낮과 밤이 이루어지는 자연법칙을 말합니다. 지구가 자전하는 과정에서 낮과 밤이 이루어지고 공전하는 과정에서 사계절이 이루어지는 법칙을 말합니다. 만약 그 법칙이 변하여 자연계가 파괴되어버린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변해 버리고 하나님의 성실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35)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실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비추어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라는 말씀을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말씀은 인간에게 베푸시는 인자하심을 나타냅니다.
모든 자연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빛과 수분을 받아 식물이 자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동물들이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 그 인자하심을 자연을 통해 나타내십니다. 세상은 악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은 변함이 없고 그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또한 변치 않습니다.
다윗은 이 시를 통해서 인간에게 악이 있지만 그 위에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이 있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다”는 말은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많고 세상의 부조리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의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오직 주의 이름만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로 행한 사람은 어떤 환난이 오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사람이 의롭다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환난이 닥치면 인간의 의는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의는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9)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흔들림 없는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의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는 말은 바닷속에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고기들이 살고 있지만 그 고기들이 바다 위로 올라 올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도 신분이 높고 낮은 사람, 힘이 세고 약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모두가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귀하고 천한 것이 있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런 구별이 없습니다. 조금만 영적인 안목이 열리면 인간의 판단이 시시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생물들이 플랑크톤을 섭취하면서 서식하는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의 뜻 안에서 보호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다와 같은 하나님의 일정한 판단의 기준 안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겸손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부요함에 비해 인간의 높고 부함은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는 평안
넓은 대양 안에서 온갖 물고기들이 마음대로 헤엄치고 사는 것처럼 인생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안식을 누리며 평안하게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리지 않고,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다윗이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얼마든지 쉴 수 있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피한다면,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 어려움에서 헤쳐나올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 만물이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충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영의 양식을 먹는 곳입니다. 육신을 해갈하는 곳이 아닌 영혼을 해갈하는 곳입니다. 육신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공급을 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빈곤도 맛보아야 하고, 여러 가지 괴로움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이 만물이 충만히 채워지기 위한 과정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 교회이기 때문에 “주의 집에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넓게 펼쳐진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풍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명을 얻었지만 주의 집, 하나님의 펴신 그 날개 아래서 주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한복음 7:37)고 했고 또 4장에는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은 단지 마시는 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한 모든 행위를 뜻합니다. 가령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제시간에 꼭 보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때뿐입니다.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면 허전함이 따르게 되고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는 말씀처럼 모든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했는데 주의 광명은 곧 하나님의 생명의 빛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우리의 영혼, 우리의 심령에는 생명의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왔을 때에 그 생명에 눈이 뜨여 광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주님을 향해서 마음이 열렸을 때에 우리 안에 생명이 왔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주의 광명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네게 있는 빛”은 생명의 빛을 말합니다. 마음의 눈이 나쁘면 생명의 활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빛인 예수님을 통해서 빛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생명의 빛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인의 길은 점점 빛이 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는 말씀처럼 이 광명을 보면서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의 근원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삶 속에서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께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의 길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의인뿐만 아니라 모든 악인들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 곧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인자하심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그 큰 인자하심과 의로우심,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않는 근본적인 악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그 은혜와 능력을 맛보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도 마음의 시야를 넓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