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0:1-17]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예수님의 그림자로서의 다윗
시편 40편의 부제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40편은 예언적인 시입니다. 예언적이라는 말은 다윗이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것을 표현한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또 한 면을 보면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시편 가운데 다윗이 쓴 것이 가장 많은데, 그 중에 여러 가지 예언된 사실이 많습니다. 가령 시편 2편은 예수님이 장차 재림하실 것에 대한 말씀이고,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시편 40편의 내용도 히브리서 2장, 10장에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도 하고 말씀이시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인격자이신데 그 인격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느냐라고 의문을 갖기 쉽습니다. 또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데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있는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브리서 1:1-2)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말하던 그 말을 이루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 또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실질적으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로서 풍랑이 일어났을 때에 풍랑에 대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시니까 잠잠해졌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며 죽은 나사로를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창조의 근본이신 그 말씀이 어느 날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시를 읊었습니다.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예언이 되게 했고 그 예언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하지만 죄를 짓는 것까지 그림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가는 목자로서, 또 가나안 칠 족속을 물리치고 통치하는 왕으로서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자기의 경험을 시로 읊었을 때에 그것이 예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는 뜻은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예언의 말씀이 그 육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아들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40편에 있는 말씀도 다윗을 통해 예언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
[시편 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다윗은 견디기 어려운 징계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께로부터 소식이 없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풀어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은 예수님이 오실 때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재판관에게 하소연하는 과부는 억울함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남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과부의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과부의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불의한 법관이 과부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과부가 밤낮 와서 괴롭힐 테니까 들어주게 된다는 비유에도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하나님께 바라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기도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가령 양심에 거리끼는 죄가 있으면 죄 문제를 해결하고 또 누군가와 다투었으면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기 때문에 마음속에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보면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했고, 또 이사야 59장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1-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가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가 상달되지 않고 하나님이 듣지도 않으십니다. 지은 죄를 처리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됩니다. 다윗은 철저히 낮아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에 그러한 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회개도 나오지 않고 또 쉽게 실망해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오랜 시일이 걸렸지만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아버지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는 해야 됩니다.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 기도를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의미
[시편 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다윗의 기도하는 태도가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가시는 중에 가끔 따로 산에 올라가셔서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면서 열심으로 때가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도 그러하셨고 죽음에 임해서도 그러하셨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는 말씀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의 웅덩이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그 부르짖음을 다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핍박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는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운명하실 때에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버림을 받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어진 것 같은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히 기도의 응답입니다.
[사도행전 2:31-33]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신 기도의 응답이 예수님에게는 부활이시고 우리에게는 성령입니다. 그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죄가 있는 데는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먼저 오셔서 이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셔야 되는 것 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그때부터 예수님의 작업은 더 가속화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이 세상에 있는 사탄의 세력,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생명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과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이 피 흘려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것을 믿을 때에 내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성령이 오신 것을 압니다.
주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참 고난을 받으시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그것이 주님의 부활과 성령이 오심으로써 응답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데는 온 세상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는 것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에게 새 생명을 이루어 주시기 위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참고 기다리셨고 드디어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이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시편 40: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새 노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새 노래는 옛 세상이 가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뜻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도행전 2:37-4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베드로가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을 설명하자 사람들은 마음이 찔리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찬송을 부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찬송 소리를 듣고 두려운 마음을 갖습니다.
[시편 40: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는 말은 교만히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담대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세력, 하나님을 무시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비굴하거나 겁을 먹지 않는 담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해 겉으로 거만한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담력을 가지고 당당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편 40: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내 몸일지라도 자신의 운명도 모르고 어떻게 할 것도 모르고 내 몸이 어떻게 될는지도 모르고 병이 어디서 어떻게 올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 하나님의 진리나 계획 등을 우리가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 축복을 상상도 할 수 없고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시편 40:6-8]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셔서 제사 드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예표적인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 오셔서 계시는 데도 양을 잡아 제사드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 말씀을 이루려고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으셨으면 구약 말씀이 필요가 없고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 드리는 것도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가르침에 대한 비유지 진짜는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번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에는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브리서 10:8-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서 오셨고 그 육신 안에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뜻합니다.
현재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신앙생활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주님이 행하시는 것이고 주님이 행하신 것이 성령으로써 우리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선포함으로 얻는 영광
[시편 40:9-10]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히브리서 2:10-13]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말합니다. ‘ 인하고’라는 말은 신학적인 술어로 제1 원인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근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담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물이 인한 분, 제 일 근원인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으면 구원의 주님으로서는 온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주님은 고난을 통해서 인생을 구원하시는 것이지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인생을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고 했는데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거룩하게 함을 받은 자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구원받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2-13)고 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는 말씀에서 “교회 중에서”라는 말이 시편 40편의 “대회 중에서”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시편 40:9)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주의 의, 주의 성실함, 주의 사랑, 주의 은혜를 교회 안에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으로 오셔서 그 말씀을 육신으로 이루신 사실이 선포이고 다음에 성령이 오셔서 이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대로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는 자에게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히브리서 2:10).
우리를 그 영광에 동참케 하기 위해서 그 사실을 선포하시고 알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진리, 하나님의 모든 계획, 하나님의 모든 사실을 다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구속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에 한 번 돌아가심으로써 소제, 화목제, 속건제, 모두를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던 사랑, 은혜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고 다 말씀하셨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그 비밀을 알았습니다.
죄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시편 40:11-12]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를 토로하면서 죄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온 세상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신 예수님은 그 죄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주님이 세상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신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도 없고 쳐다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실지로 악한 죄를 짓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은 자체는 예수님의 그림자가 아니지만 머리털보다 많은 죄 때문에 눌리는 그 마음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너무 무거워 마치 예수님이 죄인이 된 것처럼 고통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시편 40:13-14]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이것은 곧 예수님의 부르짖음입니다. 이 부르짖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는 것도 참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참고 계 셨던 이유는 그것이 죄를 처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처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공의로우셨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아들이 죽을지라도 그냥 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는 그만큼 엄격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죄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죄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이 세상에 와서 인생들의 죄를 짊어지고 사흘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진 지경에까지 이르러 죄를 처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예수님의 부르짖는 음성을 들으시고 아들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는 묻어버리고 옛날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으면 죄가 또 살아나겠지만 죄를 지신 옛 주님은 묻어지고 새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죄를 처리해버리고 주님은 새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받은 새 생명이 우리 속에 성령으로 계시는 것뿐이고 우리의 육신은 새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생활
[시편 40:15-16]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35:21-25]
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예수님을 죽여서 무덤 속에 묻어 놓은 다음에 사탄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이제는 소원 성취했다. 우리가 목도했다.’며 성공한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이 정치가보다 발언권이 더 센 위치에 있을 만큼 종교적으로 선민의식 속에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패한 종교인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고 세리나 가난한 사람은 무시하면서도 거룩한 척 거리에 서서 기도하곤 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 나타난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로 나신 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서 거짓되고 부패한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을 책망하고 그들이 하늘같이 여기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난 이후부터는 그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전긍긍하다가 드디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공의롭게 판단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시편 36: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얼마나 광대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스스로 마음이 움츠러져 좁은 세계에서 고통스럽고 한심스럽고 미래가 없는 세상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받았을 때에 마음이 열립니다. 답답하고 괴롭고 고통스럽던 것이 트이면서 영원한 미래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주의 광대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시편 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에베소서 1:22-23]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채우신 분이십니다. 교회는 그분의 충만입니다. 현재는 고통스럽고 어려움이 있지만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시편 40편은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을 간절히 바라고 주님께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이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결국은 그 약속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림자로서의 다윗
시편 40편의 부제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40편은 예언적인 시입니다. 예언적이라는 말은 다윗이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것을 표현한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또 한 면을 보면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시편 가운데 다윗이 쓴 것이 가장 많은데, 그 중에 여러 가지 예언된 사실이 많습니다. 가령 시편 2편은 예수님이 장차 재림하실 것에 대한 말씀이고,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시편 40편의 내용도 히브리서 2장, 10장에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도 하고 말씀이시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인격자이신데 그 인격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느냐라고 의문을 갖기 쉽습니다. 또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데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있는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브리서 1:1-2)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말하던 그 말을 이루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 또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실질적으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로서 풍랑이 일어났을 때에 풍랑에 대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시니까 잠잠해졌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며 죽은 나사로를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창조의 근본이신 그 말씀이 어느 날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시를 읊었습니다.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예언이 되게 했고 그 예언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하지만 죄를 짓는 것까지 그림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가는 목자로서, 또 가나안 칠 족속을 물리치고 통치하는 왕으로서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자기의 경험을 시로 읊었을 때에 그것이 예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는 뜻은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예언의 말씀이 그 육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아들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40편에 있는 말씀도 다윗을 통해 예언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
다윗은 견디기 어려운 징계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께로부터 소식이 없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풀어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은 예수님이 오실 때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재판관에게 하소연하는 과부는 억울함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남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과부의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과부의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불의한 법관이 과부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과부가 밤낮 와서 괴롭힐 테니까 들어주게 된다는 비유에도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하나님께 바라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기도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가령 양심에 거리끼는 죄가 있으면 죄 문제를 해결하고 또 누군가와 다투었으면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기 때문에 마음속에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보면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했고, 또 이사야 59장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1-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가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가 상달되지 않고 하나님이 듣지도 않으십니다. 지은 죄를 처리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됩니다. 다윗은 철저히 낮아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에 그러한 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회개도 나오지 않고 또 쉽게 실망해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오랜 시일이 걸렸지만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아버지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는 해야 됩니다.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 기도를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의미
다윗의 기도하는 태도가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가시는 중에 가끔 따로 산에 올라가셔서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면서 열심으로 때가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도 그러하셨고 죽음에 임해서도 그러하셨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는 말씀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의 웅덩이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그 부르짖음을 다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핍박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는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운명하실 때에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버림을 받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어진 것 같은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히 기도의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신 기도의 응답이 예수님에게는 부활이시고 우리에게는 성령입니다. 그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죄가 있는 데는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먼저 오셔서 이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셔야 되는 것 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그때부터 예수님의 작업은 더 가속화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이 세상에 있는 사탄의 세력,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생명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과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이 피 흘려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것을 믿을 때에 내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성령이 오신 것을 압니다.
주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참 고난을 받으시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그것이 주님의 부활과 성령이 오심으로써 응답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데는 온 세상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는 것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에게 새 생명을 이루어 주시기 위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참고 기다리셨고 드디어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이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새 노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새 노래는 옛 세상이 가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뜻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을 설명하자 사람들은 마음이 찔리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찬송을 부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찬송 소리를 듣고 두려운 마음을 갖습니다.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는 말은 교만히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담대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세력, 하나님을 무시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비굴하거나 겁을 먹지 않는 담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해 겉으로 거만한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담력을 가지고 당당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몸일지라도 자신의 운명도 모르고 어떻게 할 것도 모르고 내 몸이 어떻게 될는지도 모르고 병이 어디서 어떻게 올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 하나님의 진리나 계획 등을 우리가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 축복을 상상도 할 수 없고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셔서 제사 드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예표적인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 오셔서 계시는 데도 양을 잡아 제사드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 말씀을 이루려고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으셨으면 구약 말씀이 필요가 없고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 드리는 것도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가르침에 대한 비유지 진짜는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번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에는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브리서 10:8-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서 오셨고 그 육신 안에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뜻합니다.
현재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신앙생활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주님이 행하시는 것이고 주님이 행하신 것이 성령으로써 우리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선포함으로 얻는 영광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말합니다. ‘ 인하고’라는 말은 신학적인 술어로 제1 원인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근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담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물이 인한 분, 제 일 근원인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으면 구원의 주님으로서는 온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주님은 고난을 통해서 인생을 구원하시는 것이지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인생을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고 했는데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거룩하게 함을 받은 자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구원받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2-13)고 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는 말씀에서 “교회 중에서”라는 말이 시편 40편의 “대회 중에서”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시편 40:9)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주의 의, 주의 성실함, 주의 사랑, 주의 은혜를 교회 안에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으로 오셔서 그 말씀을 육신으로 이루신 사실이 선포이고 다음에 성령이 오셔서 이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대로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는 자에게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히브리서 2:10).
우리를 그 영광에 동참케 하기 위해서 그 사실을 선포하시고 알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진리, 하나님의 모든 계획, 하나님의 모든 사실을 다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구속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에 한 번 돌아가심으로써 소제, 화목제, 속건제, 모두를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던 사랑, 은혜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고 다 말씀하셨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그 비밀을 알았습니다.
죄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를 토로하면서 죄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온 세상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신 예수님은 그 죄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주님이 세상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신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도 없고 쳐다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실지로 악한 죄를 짓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은 자체는 예수님의 그림자가 아니지만 머리털보다 많은 죄 때문에 눌리는 그 마음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너무 무거워 마치 예수님이 죄인이 된 것처럼 고통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부르짖음입니다. 이 부르짖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는 것도 참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참고 계 셨던 이유는 그것이 죄를 처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처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공의로우셨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아들이 죽을지라도 그냥 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는 그만큼 엄격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죄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죄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이 세상에 와서 인생들의 죄를 짊어지고 사흘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진 지경에까지 이르러 죄를 처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예수님의 부르짖는 음성을 들으시고 아들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는 묻어버리고 옛날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으면 죄가 또 살아나겠지만 죄를 지신 옛 주님은 묻어지고 새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죄를 처리해버리고 주님은 새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받은 새 생명이 우리 속에 성령으로 계시는 것뿐이고 우리의 육신은 새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생활
예수님을 죽여서 무덤 속에 묻어 놓은 다음에 사탄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이제는 소원 성취했다. 우리가 목도했다.’며 성공한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이 정치가보다 발언권이 더 센 위치에 있을 만큼 종교적으로 선민의식 속에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패한 종교인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고 세리나 가난한 사람은 무시하면서도 거룩한 척 거리에 서서 기도하곤 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 나타난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로 나신 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서 거짓되고 부패한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을 책망하고 그들이 하늘같이 여기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난 이후부터는 그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전긍긍하다가 드디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공의롭게 판단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광대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스스로 마음이 움츠러져 좁은 세계에서 고통스럽고 한심스럽고 미래가 없는 세상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받았을 때에 마음이 열립니다. 답답하고 괴롭고 고통스럽던 것이 트이면서 영원한 미래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주의 광대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채우신 분이십니다. 교회는 그분의 충만입니다. 현재는 고통스럽고 어려움이 있지만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시편 40편은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을 간절히 바라고 주님께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이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결국은 그 약속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