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1:1-13]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시편 41편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에게 배반당할 때 지어진 시라고 생각됩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한 것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것으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 범죄한 결과 생겨난 것입니다.
시편 41편은 다윗을 섬겼고, 친구였던 사람들이 압살롬 편에 서서 다윗을 저주하고 욕하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예표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백성을 섬기는 다윗 왕의 위치
[시편 4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사람은 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 편에 서기 쉽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을 때 일시적이지만 다윗은 약자가 되고 압살롬은 강자가 된 것입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한 것은 다윗을 배반한 무리가 어렵고 딱한 사정에 대해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돌려 배반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것은 개인이나 교회나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 힘을 합하고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시편 35:13]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다윗의 왕으로서의 위치는 일반적인 왕의 위치와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왕은 독재자로서, 사람들은 왕을 신처럼 섬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의 경우도 황제를 태양신으로 숭배하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했는데 특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자가 양 떼를 이끌어가듯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을 섬기는 왕으로 일한 것이지 백성들에게 숭배받기 위해서, 높임 받기 위해서 왕 노릇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으로 발탁이 된 것은 그가 목자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싸우기도 하는 등 생명을 걸고 양을 지키는 목자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커진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목자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다윗은 왕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다윗은 어린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마음으로 왕 노릇을 했지 절대 군주로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곤란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목자의 심정으로 활동하고 노력한 사람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이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지만, 병자들과 약한 자를 돌아보셨습니다.
공의를 기초로 한 참 사랑
[데살로니가후서 1:3-9]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데만 치우쳐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니까 용서하신다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은 틀림없지만 그 사랑이 공의를 기초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은 환난 중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마게도니아 교회들이 극한 가난 중에서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넘치는 연보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마게도니아 지방에 있는 교회입니다. 자기들이 극한 가난 속에 있는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넘치는 헌금을 해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먹고 살기 어려운데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들은 잘못되었다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려운 중에도 참고 견디면서 사랑하면서 사는 생활이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할 때는 아름다운 일이고 상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생활을 바로 하고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대신 핍박하는 사람들은 환난으로 갚으신다는 두 가지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6:10-12]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만일 하나님이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시면 하나님은 불의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눈앞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든지 무슨 이권이 생기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는 믿음이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열심으로 하다가도 마음이 식어져버리고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세밀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며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서 모른 척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육신의 의지나 인간의 의를 앞세워 자신이 하는 대로 하나님이 뭘 해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모임이 나가는 방향에서 성도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약한 자를 도우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징계를 통해 오는 축복
[시편 41: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다윗은 왕이었지만 어린 양을 돌보는 목자의 심정으로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들이 자기를 배반하고 또 아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육신이 병드는 재앙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기억하셨습니다. “여호와께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죄는 죄대로 징계를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징계가 하나님의 저주는 아닙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입니다.
[히브리서 12:5-9]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징계받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고 사랑의 채찍입니다. 그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때문에 만일 징계가 없다면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죄 때문에 다윗과 같이 징계받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그 징계가 여러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아들이 죽기도 했고 또 다른 아들은 다윗을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육신이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다윗을 원수의 손에 맡겨 처리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혹시 어떤 죄를 지어서 징계를 받아도 마음속에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시편 41: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병에서 고쳐주시고 일어나게 했습니다. 다윗은 다시 회복이 되어 오랫동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다가 나중에 나이 많아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왕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죄짓고 회개하는 모습, 징계 속에서도 믿음이 변치 않는 것,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는 자세, 자신의 인간성을 철저히 점검하고 알아가는 자세, 한 인생으로서 실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위치에서 사명을 완수해 간 사실 등입니다.
다윗 왕은 여호수아 이후로 정복하지 못하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는 사명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죄도 짓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버려지지 않는 인생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때로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죄를 지어도 평소에 우리가 남을 돕는다든지 성도가 서로 섬긴다든지 하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병 낫기를 서로 기도하라
[시편 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야고보서 5:14-16]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모임의 초기에는 어떤 사람이 병들면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하여 혹 병이 나은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요즈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 성경 말씀을 깨달아 버리면 병이 낫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병 낫기 위해서 세 번 기도했는데 너무 교만할까 해서 그 몸을 약하게 하신 것을 알고 더 이상 구하지 않았습니다(고린도후서 12장). 야고보는 편지에서 병든 자가 있으면 죄를 서로 고하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죄를 묻어 두고 있는 것은 영혼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병 낫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영적인 질병을 먼저 고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도 죄를 고백하며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병 낫기를 간절히 구하면서 영혼의 죄를 짓고서도 그 죄를 숨긴다거나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죄를 고하면서 병 낫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16:15-20, 17:1-4]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저와 함께 이른지라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올 때에 저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거할 것이니이다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모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왕만 쳐 죽이고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아히도벨은 본래 다윗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자, 다윗을 배반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간사하고 꾀가 많은 사람으로서 가룟 유다의 그림자입니다. 그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압살롬을 따르고 압살롬의 세력이 강해지니까 그편에 서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죽고 압살롬이 세력을 잡으면 압살롬의 세력하에서 자기가 권세와 영광을 누리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지 압살롬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히도벨 같은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모릅니다. 현실적으로 압살롬이 강하니까 그편에 선 것입니다. 자기의 모략대로 되기만 하면 자기가 마치 왕이 된 것처럼 영광을 누리려는 개인의 욕망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그러나 후새라는 사람은 다윗의 친구로서 다윗을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있다가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라고 하면서 후새를 돌려보낸 것입니다.
[사무엘하 17:5-14]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저의 말도 듣자 하니라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저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히도벨이 여차여차히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않거든 너는 말하라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 때에는 아히도벨의 베푼 모략이 선치 아니하니이다 하고
또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부친과 그 종자들은 용사라 저희는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이제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좇는 자 가운데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찌라
비록 용감하여 사자 같은 자의 마음이라도 저상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부친은 영웅이요 그 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나의 모략은 이러하니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왕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우리가 그 만날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두지 아니할 것이요
또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곳에 한 작은 돌도 보이지 않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아히도벨이 군사 일만 이천을 주면 당장 다윗에게 달려가 겁을 주어 사람들이 다 도망하는 틈에 다윗만 죽이고 오겠다는 모략을 꾸몄습니다. 이것을 본 후새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다윗에게 불리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전 국민을 모아 다윗을 치자고 했습니다. 시간을 지연시켜 다윗은 도망치도록 만들려는 것입니다. 후새 때문에 다윗은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려면 친구를 잘 사귀는 것이 중요합니다. 친구를 잘못 사귀면 내 믿음이 손상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도 친구가 힘을 빼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면 다 교제할 수 있는 것이지만 너무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사람은 조금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원수시할 필요는 없지만 마음을 완전히 풀고 살면 손해를 봅니다.
[사무엘하 17:23]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아히도벨에게 있어서는 그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은 것이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였습니다. 육신의 생애에서 자신의 영광이 완전히 꺾여버리는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의 그림자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
[시편 41:5-9]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 말씀은 가룟 유다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원수들의 모습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그려놓은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4:17-18]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을 공회에 불러놓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지긋지긋한 것입니다. 예수를 죽여서 무덤에 장사 지냈는데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핍박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예수“하고 다닌다고 해서 예수 이름 때문에 핍박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있다는 뜻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오순절에 주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 안에 구원받은 새 생명이 있다는 것뿐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역사가 있다거나 일이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3장부터 8장까지를 읽어보면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이 어떻게 내가 손으로 지은 이 집에 하나님이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보좌에 앉아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시는 그 크신 하나님 이 내가 지어 놓은 이 조그마한 집안에 어떻게 계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의 이름을 두시려고 이 집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두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구원받고 나서 성령이 다시 내리는 성령의 기름 부음 받는 역사가 있어야 주님의 이름을 두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9-21]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사도행전 5:28]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는데 그 이름을 전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라고 했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역사한 것은 주님의 이름이 역사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예수”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핍박을 받느냐 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계시는 교회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사탄은 주님의 이름을 싫어합니다. 사탄은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을 압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주님의 이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릅니다. 수십만 명 모여도 핍박을 받지 않는 곳에는 주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없는 곳은 사탄이 알기 때문에 핍박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영입니다.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계신 곳을 압니다. 주님의 이름이 없어지면 진정한 교회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사탄이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21-2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 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는 말씀처럼 사탄이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을 가까이 섬기고 친구이던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앞세워 왕을 세우려던 모습이 예언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시편 41:10-11)라는 말씀대로 그 예언이 예수님에게 다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생활
[히브리서 10:37-39]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역경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승리는 재림과 연결이 됩니다.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하다가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머리로서 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배반하는 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오셔서 성령이 계시는 곳입니다.
믿음이 무너지면 패배자가 되고 주님이 오시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참고 견디는 인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믿음이 필요하고 승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싫어하고 마음이 세상으로 흐르면 분명히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됩니다.
[시편 41:11-13]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신다”는 말씀은 완전함으로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온전한 것이지 우리 자신이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 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할 자도 없고 우리를 끊을 자도 없고 그 완전한 중에서 우리를 영원히 보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나를 돌아보면 완전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완전하심 속에서 우리들이 신앙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보호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편 41편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에게 배반당할 때 지어진 시라고 생각됩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한 것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것으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 범죄한 결과 생겨난 것입니다.
시편 41편은 다윗을 섬겼고, 친구였던 사람들이 압살롬 편에 서서 다윗을 저주하고 욕하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예표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백성을 섬기는 다윗 왕의 위치
사람은 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 편에 서기 쉽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을 때 일시적이지만 다윗은 약자가 되고 압살롬은 강자가 된 것입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한 것은 다윗을 배반한 무리가 어렵고 딱한 사정에 대해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돌려 배반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것은 개인이나 교회나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 힘을 합하고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으로서의 위치는 일반적인 왕의 위치와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왕은 독재자로서, 사람들은 왕을 신처럼 섬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의 경우도 황제를 태양신으로 숭배하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했는데 특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자가 양 떼를 이끌어가듯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을 섬기는 왕으로 일한 것이지 백성들에게 숭배받기 위해서, 높임 받기 위해서 왕 노릇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으로 발탁이 된 것은 그가 목자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싸우기도 하는 등 생명을 걸고 양을 지키는 목자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커진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목자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다윗은 왕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다윗은 어린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마음으로 왕 노릇을 했지 절대 군주로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곤란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목자의 심정으로 활동하고 노력한 사람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이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지만, 병자들과 약한 자를 돌아보셨습니다.
공의를 기초로 한 참 사랑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데만 치우쳐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니까 용서하신다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은 틀림없지만 그 사랑이 공의를 기초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은 환난 중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마게도니아 교회들이 극한 가난 중에서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넘치는 연보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마게도니아 지방에 있는 교회입니다. 자기들이 극한 가난 속에 있는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넘치는 헌금을 해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먹고 살기 어려운데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들은 잘못되었다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려운 중에도 참고 견디면서 사랑하면서 사는 생활이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할 때는 아름다운 일이고 상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생활을 바로 하고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대신 핍박하는 사람들은 환난으로 갚으신다는 두 가지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시면 하나님은 불의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눈앞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든지 무슨 이권이 생기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는 믿음이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열심으로 하다가도 마음이 식어져버리고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세밀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며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서 모른 척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육신의 의지나 인간의 의를 앞세워 자신이 하는 대로 하나님이 뭘 해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모임이 나가는 방향에서 성도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약한 자를 도우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징계를 통해 오는 축복
다윗은 왕이었지만 어린 양을 돌보는 목자의 심정으로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들이 자기를 배반하고 또 아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육신이 병드는 재앙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기억하셨습니다. “여호와께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죄는 죄대로 징계를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징계가 하나님의 저주는 아닙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징계받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고 사랑의 채찍입니다. 그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때문에 만일 징계가 없다면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죄 때문에 다윗과 같이 징계받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그 징계가 여러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아들이 죽기도 했고 또 다른 아들은 다윗을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육신이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다윗을 원수의 손에 맡겨 처리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혹시 어떤 죄를 지어서 징계를 받아도 마음속에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병에서 고쳐주시고 일어나게 했습니다. 다윗은 다시 회복이 되어 오랫동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다가 나중에 나이 많아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왕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죄짓고 회개하는 모습, 징계 속에서도 믿음이 변치 않는 것,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는 자세, 자신의 인간성을 철저히 점검하고 알아가는 자세, 한 인생으로서 실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위치에서 사명을 완수해 간 사실 등입니다.
다윗 왕은 여호수아 이후로 정복하지 못하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는 사명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죄도 짓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버려지지 않는 인생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때로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죄를 지어도 평소에 우리가 남을 돕는다든지 성도가 서로 섬긴다든지 하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병 낫기를 서로 기도하라
모임의 초기에는 어떤 사람이 병들면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하여 혹 병이 나은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요즈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 성경 말씀을 깨달아 버리면 병이 낫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병 낫기 위해서 세 번 기도했는데 너무 교만할까 해서 그 몸을 약하게 하신 것을 알고 더 이상 구하지 않았습니다(고린도후서 12장). 야고보는 편지에서 병든 자가 있으면 죄를 서로 고하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죄를 묻어 두고 있는 것은 영혼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병 낫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영적인 질병을 먼저 고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도 죄를 고백하며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병 낫기를 간절히 구하면서 영혼의 죄를 짓고서도 그 죄를 숨긴다거나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죄를 고하면서 병 낫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아히도벨은 본래 다윗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자, 다윗을 배반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간사하고 꾀가 많은 사람으로서 가룟 유다의 그림자입니다. 그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압살롬을 따르고 압살롬의 세력이 강해지니까 그편에 서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죽고 압살롬이 세력을 잡으면 압살롬의 세력하에서 자기가 권세와 영광을 누리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지 압살롬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히도벨 같은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모릅니다. 현실적으로 압살롬이 강하니까 그편에 선 것입니다. 자기의 모략대로 되기만 하면 자기가 마치 왕이 된 것처럼 영광을 누리려는 개인의 욕망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그러나 후새라는 사람은 다윗의 친구로서 다윗을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있다가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라고 하면서 후새를 돌려보낸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군사 일만 이천을 주면 당장 다윗에게 달려가 겁을 주어 사람들이 다 도망하는 틈에 다윗만 죽이고 오겠다는 모략을 꾸몄습니다. 이것을 본 후새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다윗에게 불리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전 국민을 모아 다윗을 치자고 했습니다. 시간을 지연시켜 다윗은 도망치도록 만들려는 것입니다. 후새 때문에 다윗은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려면 친구를 잘 사귀는 것이 중요합니다. 친구를 잘못 사귀면 내 믿음이 손상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도 친구가 힘을 빼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면 다 교제할 수 있는 것이지만 너무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사람은 조금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원수시할 필요는 없지만 마음을 완전히 풀고 살면 손해를 봅니다.
아히도벨에게 있어서는 그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은 것이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였습니다. 육신의 생애에서 자신의 영광이 완전히 꺾여버리는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의 그림자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
이 말씀은 가룟 유다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원수들의 모습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그려놓은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공회에 불러놓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지긋지긋한 것입니다. 예수를 죽여서 무덤에 장사 지냈는데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핍박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예수“하고 다닌다고 해서 예수 이름 때문에 핍박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있다는 뜻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오순절에 주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 안에 구원받은 새 생명이 있다는 것뿐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역사가 있다거나 일이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3장부터 8장까지를 읽어보면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이 어떻게 내가 손으로 지은 이 집에 하나님이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보좌에 앉아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시는 그 크신 하나님 이 내가 지어 놓은 이 조그마한 집안에 어떻게 계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의 이름을 두시려고 이 집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두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구원받고 나서 성령이 다시 내리는 성령의 기름 부음 받는 역사가 있어야 주님의 이름을 두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는데 그 이름을 전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라고 했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역사한 것은 주님의 이름이 역사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예수”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핍박을 받느냐 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계시는 교회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사탄은 주님의 이름을 싫어합니다. 사탄은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을 압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주님의 이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릅니다. 수십만 명 모여도 핍박을 받지 않는 곳에는 주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없는 곳은 사탄이 알기 때문에 핍박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영입니다.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계신 곳을 압니다. 주님의 이름이 없어지면 진정한 교회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사탄이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 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는 말씀처럼 사탄이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을 가까이 섬기고 친구이던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앞세워 왕을 세우려던 모습이 예언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시편 41:10-11)라는 말씀대로 그 예언이 예수님에게 다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생활
역경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승리는 재림과 연결이 됩니다.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하다가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머리로서 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배반하는 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오셔서 성령이 계시는 곳입니다.
믿음이 무너지면 패배자가 되고 주님이 오시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참고 견디는 인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믿음이 필요하고 승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싫어하고 마음이 세상으로 흐르면 분명히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됩니다.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신다”는 말씀은 완전함으로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온전한 것이지 우리 자신이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할 자도 없고 우리를 끊을 자도 없고 그 완전한 중에서 우리를 영원히 보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나를 돌아보면 완전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완전하심 속에서 우리들이 신앙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보호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