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4편] 주여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 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나이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 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시 44: 1 -26)


 이 시는 역사적인 배경이 분명치 않습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과 관계가 있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그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윗이 이 시를 읊은 것 같습니다.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 성령의 역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시 44: 1-2)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과거 역사에 근거해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13장에 이스라엘 후손들이 유월절 절기에 대해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그 때에 바로가 강팍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출 13:14-16)


 신명기에도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을 명령하고 강론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젊은 사람들은 출애굽할 때의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40세 미만의 사람들과 애굽에서 나온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후손들에게 전해지게 되는데 그 후손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과거에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역사하시던 그 역사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냈고 또 가나안 땅을 허락하여 그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다는 데 근거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간 광야 생활을 하고 가나안 정복 후 나라를 형성할 때까지는 500~ 600년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떻게 역사하였는지를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인도하셨는데 현재는 왜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가 하는 내용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참으로 알려면 교회의 기본적인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오순절 때부터 시작된 교회 역사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성령이 오셔서 오순절의 역사가 있었고 그 다음에 여러가지 핍박과 환난 속에서 교회가 이어져 나가는 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다른 사상을 받아들여 곁길로 가거나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 형식만 남는 교회로 전락해버리곤 했습니다. 그러한 교회들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것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신 것 등을 믿지만 하나의 교리로서만 믿었지 성령의 역사와는 무관했습니다.

 중국의 그리스도인 역사를 읽어보면 성령이 역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어떤 지식이나 결심이나 재주에 의해서 되지 않고 성령께서 교회를 이룩하셨고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믿을 수 있고, 그 주님과 함께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가 나간 사람들의 이간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는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데서 재판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슬픈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당하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얼마만큼 징계나 매를 맞으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때는 구원받았다고 좋아하고 감사하던 사람들이 돌아서면서 원수처럼 대적하는 것은 성령의 참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순절의 역사가 계속되는 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교회를 이루어가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도 그 사도행전의 연속인 것입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잘 모르면 세상의 수많은 교회 중의 하나라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각 교회들이 자신들의 교회가 정통이라고 주장합니다. 성령이 지금도 사도행전의 역사와 함께 계속되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거듭나는 것을 기초로 해서 진행되는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에 의해서 이루어져 갑니다. 이것이 확실치 않으면 문제가 생길 때 언제든지 모임을 떠나버릴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잘 모르면 자기에게 불리할 때 언제든지 떠나버릴 수 있습니다.예수님 말씀이 “겨자씨 한 알이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1 -32)고 했습니다. 겨자씨를 심어서 나무가 되었다는 것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거기에 새가 깃들인다는 것은 마귀가 깃들인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 마귀가 활동한 것입니다. 마귀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새처럼 날아가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참 역사, 하나님이 일하시는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시편 44편에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부제가 있는데 이 는 다윗이 이 시를 읊고 고라 자손이 그것을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비밀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시 44:3)


 여호수아 24장에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수 24:12 —13)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사람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처음 맞부딪힌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법궤를 메고 일곱 번 돌았습니다. 양각 나팔을 불며 마지막 일곱 번을 도니까 성이 무너졌습니다. 활 쏜 일도 없고 칼 쓴 일 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전부 그런 식으로 점령했습니다. 그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신약시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오순절 역사를 보면 열 한 사도는 대다수 어부 출신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 —14절에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고쳐 주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해서 그 병자가 나았습니다. 예루살렘 지역에 그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공회 에 잡혀가 나사렛 예수를 증거하자 본래 학문이 없는 무식한 사람인데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란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말은 베드로 자신의 지식도 아니고 학문도 아니고 용기도 아니고 완전히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지식이나 수완, 사람의 열심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공부를 별로 못하고 독학을 한 사람입니다. 제가 말재주가 없는 것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일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등을 돌리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고 손해를 보는 일인지 알게 됩니다. 이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등을 돌릴 뿐만 아니라 모임을 망치려고 합니다. 그게 얼마나 큰 죄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과 영의 싸움이 있을 때 육신으로 생각이 치우치는 것은 그 싸움에 물질, 명예, 이권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면 서로 원수처럼 생각해선 안됩니다. 현재 내게 아무리 해롭고 불리하게 해도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육신적으로 불리하고 육신적으로 손해볼 것 같으면 영의 일에 대항하게 됩니다. 그 육신 속에 마귀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도 속에 있는 생각은 육신입니다. 정의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은 완전히 마귀의 것입니다.

 어떤 일을 정의감을 앞세우고 할 때 화가 나면 그 일은 성령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의감은 아담에게서 내려온 선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에 알게 된 선이 육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의감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생명과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적으로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명 자체가 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선은 자연히 흘러내려온 정의이고 의로움입니다. 참된 정의고, 참된 선이고 참된 사랑 입니다. 선과 사랑과 정의는 전부 다 하나입니다.

 성령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마음에서 참으로 미운 마음이 없고 화나는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없이 하는 말은 입으로는 바른 말을 하는데 속에서는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일에는 성령으로 되는 것과 육신으로 되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엡 4:26)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쫓아내 버리고 상을 둘러 엎어버렸어도 그것은 예수님이 죄를 짓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떤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 이끌려가야 됩니다. 성령이 주관해야 합니다. 이 교회는 그렇게 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있는지 없는지 겉으로는 잘 모릅니다. 성령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도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는 것, 그런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비밀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걸 확실히 알고 깨닫는 것은 복음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영적인 지식입니다. 확실히 알 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 승리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시 44:4-5)


 “자기 힘”으로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 그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한고로 그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사 37:36-38)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해줄 줄 아느냐”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선지자의 위로를 받고 기다리고 있는데 앗수르 군 18만 5천 명을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이 멸망시켰습니다. 또 앗수르 왕 산헤립은 그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는 사람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벌어지는 전쟁은 물질적인 전쟁이 아니고 영적인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전쟁이 바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쳐준 일이라든지 바울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한 일이라든지 전부가 주님의 이름으로 한 주님의 일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제가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세우고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왕상 8:27 —29)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주님의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다. 개인 안에 생명의 성령이 오시는 것과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가 이루어지는 데는 요한복음 14장 26절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는 말씀대로 보혜사 성령이 분명히 오십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다릅니다. 기름 붓는다는 말은 위에, 겉에 부어진다는 말이고 구원받는 것은 성령이 영 속에 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은 겉에 기름이 부어진다는 뜻으로 일이 맡겨진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기름이 부어질 때 거기에 성령의 일이 맡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교회는 성령이 기름 부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령으로 이루어져가는 역사적인 근거입니다. 이런 것을 잘 모르면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했으니 무조건 두 세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교회가 된다고 말하게 됩니다. 성경을 그처럼 잘못 해석하면 안됩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은 물리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0 —12)고 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지 혈과 육, 혈기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 육신 속에는 피가 있습니다. 그래서 혈기의 싸움을 해서는 안됩니다. 혈기가 나면 앞도 뒤도 가리지 않고 싸웁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 씨름해서 승리하는 것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투고 경쟁해서 이기면 이기는 줄 압니다. 그렇게 이기는 것은 사실은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과 싸운 것이 아닙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속에 들어 있는 사탄을 보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싸울 상대는 악한 영입니다. 육신을 상대해서 싸우면 그 자체가 육신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싸워야 되고 걱정해야 됩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이기신 것이 분명하지만 그 승리는 어느날 현실적으로 우리 육신에 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육신이 꺾어져야 됩니다. 육신이 꺾어질 때에 주님이 이기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기셨는데 마지노선을 치고 있는 것이 육신입니다. 육신이 이기려고 하면 매번 패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지 육신의 싸움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이 확실히 있으면 승리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통한 믿음의 단련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시 44:6-12)


 ‘우리 조상들을 이끌어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가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하는데 ‘왜 이와 같은 일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다고 하시는데 왜 우리는 그 승리를 모릅니까? 왜 우리는 패배자가 됩니까? 유혹을 당할 때에 약하고 시험이 올 때에 괴로워하고 화를 참을 수 없고 싸우고 욕하고 원망하는 게 모두 패배입니다. 그게 전부 사탄에게 짓밟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그것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 아니면 몇 년 만에 한 번씩 큰일을 겪습니다. 혹독하게 당하는 이유가 겉으로는 이해가 안됩니다.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시 44:13-16)


 우리는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멸시를 받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든지 한국 사람에게는 배격을 받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시 44:17-18)


 왜 이런 고통과 억울함을 당하고 왜 온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고 미움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믿음에는 의리가 있고 지조가 있어야 됩니다. 약간만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그래도 “퇴축지 않는다”는 말은 물러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즉각 나타나셔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씀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것을 지켜보십니다. 그 이유가 하박국 3장에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6-19)


 하박국 선지자는 원수가 치러오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 식물이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절개와 의리가 있어야 됩니다. 믿는다고 했다가 조금 불리하면 등을 돌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고난이 와도 믿음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묵묵히 아무 대답도 안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면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답이 없어도 물러서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환난이 있는 것은 바로 이 의리 있는 참 믿음을 갖게 단련하는 과정입니다. 눈앞에 좋은 일이 생기면 좋아하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낙심하고 하지만 차츰차츰 단련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불 같은 시험이 많지만 그 시험을 통하여 연단되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연단을 받은 믿음이 아니면 칭찬이 없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키우듯이 하나님은 장래에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복을 주시려고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19-21)


 이 시편 저자는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것 같은 어두운 생활 가운데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유지해 가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행음하므로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음녀를 아내로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행음했다는 것은 우상 숭배를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호세아가 아내를 얻었는데 그녀는 남편을 버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호 2:5)고 했습니다. 고멜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연애하는 자는 바알 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섬겨봐야 배 고프고 불행하고 아무 이득이 없으니 나를 연애하는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의리가 없으면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명예를 주고, 나를 잘되게 해주는 곳으로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냐’(약 4:4)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벗된 것’ 이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세상 쾌락이라든지 세속을 따라가는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분명히 일을 하시고 계시지만 거기에는 고난이 따르고 시련이 있습니다. 왜 모임을 떠나는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도전합니까?

 성령이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생각하지 말라”(요일 3:13)고 했습니다. 세상이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핍박이 없거나 욕을 먹는 것이 없으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시 44:22)


 이 말씀은 로마서 8장과 연결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예수님이 도살된 양인데 우리도 그 주님의 고난에 함께 참예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끊어내거나 우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시련과 환난은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날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여러가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생길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가 하나의 독재자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를 이끌어줄 사람을 원하기 때문에 세계가 하나가 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그 영향을 받습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개개인에게도 영적인 싸움이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많은 싸움이 계속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의리를 참으로 지킬 때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 칭찬과 영광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는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수 있고 그러한 각오로 순교할 수 있다면 엄청난 영광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