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편]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시편 2편은 예수님 재림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부제도 없고 누가 지었는지, 또 언제 지어졌는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시편이 다윗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역시 다윗의 작품이라고 추측할 따름입니다.


[시편 2:1-12]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적중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분노하는 열방


[시편 2:1-3]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역사의 배후에는 조종자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잘 알 수 없고 또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 세상을 조종하고 뒤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탄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정상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지금 여러 나라에서는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개방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세계 평화의 걸림돌이 되어 왔던 공산주의도 사라져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 곧 살기 좋은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장차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전쟁의 배후에는 사탄의 조종이 있습니다. 열방이 분노하는 것은 물론 전쟁 당사자 간이나 또는 사상적, 정책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 정당, 단체 간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 자신이 멸망 받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탄의 분노가 여러 나라의 정책을 통해서 표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마가복음 1:24)하고 말한 것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인의 후손이 나면 뱀의 후손을 멸망시킨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탄생을 막으려는 계획이 계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헤롯을 통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지금 열방이 분노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 거의 끝마무리되어 가는 이 시점에 사탄이 가장 악랄하게 온 세상 나라들을 앞세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배후에는 사탄의 계획이 있고, 그 마지막 분노가 나라들을 통해서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과 태도가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름부음 받은 삶


구약시대에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직함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지자의 사명, 제사장의 사명, 왕의 사명을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는 뜻이 됩니다.


 다니엘 9장 24절에 보면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왕으로 오실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주님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대적해오고 있습니다. 25절에도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는 26절의 말씀은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 주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셔서 제사장으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34절에 보면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침례 받고 올라오실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심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서른 살이 되실 때까지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례 받고 올라오시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다음에 일을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일을 못 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구원받은 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생각 모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처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는 일을 안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신 것은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기름이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경험은 있지만 기름부음의 경험은 없는데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시작될 때에 기름부음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 교회 안에 함께 연결되어 있으면 그 기름부음의 역사 속에 함께 사는 것입니다. 교회와 함께 살고 움직여 나가면 개인적으로 따로 기름부음이 없다 하더라도 이 안에서 함께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떨어져 나가면 기름부음이 있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서 울타리 밖에 있게 됩니다. 그 울타리 밖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간혹, 혼자 떨어져 나간 사람에게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로 기름부음 받은 경험은 없지만 교회 안에서 함께 구원받아 교제하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기름부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이 있는 곳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함께 움직여가는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시편 2:2-3)하는 것도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방해하고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한 운동입니다. 현재 이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러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럽이 개방 정책과 통합 운동의 물결 속에 유럽 합중국이 형성되는 과정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대항하기 위해 666이 정권을 잡기 위한 운동의 일환입니다. 바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꾸며지고 있는 운동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유럽만 아니라 온 세계가 적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온통 자유의 물결, 민주주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의 젊은 세대에게는 민주화라는 말이 거의 절대적인 단어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민주화 바람이 어디까지 불어갈 것 같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부패해 있고 속에는 죄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이렇게 속이 썩어 있고 죄와 악이 가득 차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정당한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개인적인 욕망이 있고 사리사욕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앞세운다 할지라도 다 어떻게 하면 자기 개인이 손해를 보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인간이 만든 제도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민주주의도 현실에 맞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가령 열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리더쉽이 강하고 생각이 아주 건전하며 모든 것을 다 알고 매사에 흠이 없는 훌륭한 사람이라면 전체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그 한 사람의 뜻으로 전체를 이끌어가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결함이 많은 아홉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필경 전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아무리 해도 되지 않을 때, 민주주의라는 것을 앞세워 마지막에 666이라는 독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라는 것도 사실은 인간의 힘을 앞세워 주님을 대항하기 위한 운동인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 중의 1/3은 구원을 받았으나 2/3가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만일 민주주의의 원칙대로라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성령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 구원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2/3의 힘에 의해서 끌려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힘으로, 인간이 주인 노릇하자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살자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하나님을 도전하는 이성의 힘


[시편 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자기 딴에는 잘난 척하고, 아는 척하고 힘 있는 척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스운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1절부터 24절을 읽어 보면 예수님 당시에 제일 공부 많이 하고 똑똑했던 사람들,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의 이성과 지능 중 혼의 능력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잃은 것은 영적 생명을 잃은 것이었지 이성적인 능력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양심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대신 이성은 아주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이성적인 면만 발달하면 영적으로 퇴보를 하고 자기 이성의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현대는 완전히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만 발전해가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도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앉으며, 다니엘서 12장에 있는 말씀대로 빨리 왕래하고 지식이 더해가는 시대, 지식의 힘으로 인간이 앞길을 개척해가는 시대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이라는 학문까지도 생겨 참으로 양심에서 하나님을 알기보다는 인간의 학문, 논리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논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666, 사람의 이마나 손에 표를 하는 문제 등 모두가 인간의 이성, 두뇌 활동의 산물이며, 결국 그 결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대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웃음거리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자기의 이성의 힘과 판단력만 의존하면 신앙의 깊은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머리로만 움직이면 마음이 움직여지질 않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머리나 이성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때로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이나 방법 등은 사람들의 생각과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는 내 생각과는 관계 없이 성령이 이끌어 가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의 이성적인 판단에 비추어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무엇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을 때에는 내 생각이나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지 말고 양심을 한 번 더듬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 양심에 평안이 없고 마음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이 바로 죄에 걸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아 불쾌하고, 화나고 하는 것들은 다 죄입니다. 성령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내 생각에 맞는다 할지라도 내 마음이 함께하지 못하는 사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머리로 따지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함께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따로 떨어져 있거나 불쾌하거나 힘이 없으면 따라가질 않습니다. 우리는 자칫 세상의 방식대로 머리로 판단하고 계획하고 처리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 없는 짐승처럼 행동해서도 안됩니다. 마음이 앞서면 이성은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어딘가 생각은 맞지 않지만 마음이 먼저 앞서고 함께하고 싶으면 문제 없이 함께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이 하는 일을 다 알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지금 머리(두뇌)가 주인 노릇하고 머리가 왕 노릇하는 세상에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하는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헛된 일에 분요한 인생과 예수님의 재림


[시편 2:5-6]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재림하십니다. 거기가 시온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멸망합니다. 지금 유럽에는 자유와 평화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지만 조금 있으면 이마나 손에 표를 받고, 그 다음에 666이 나타나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새로운 질서에 따라 희망찬 설계를 하지만 인간들이 계획하고 꿈꾸던 그 모든 것들이 완전히 한꺼번에 백지화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얼굴에 얼마만한 실망이 나타나겠습니까? 땅이 꺼지도록 탄식하며 통곡한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헛된 일에 너무 분주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만일 주님이 오신다면 내가 하고 있던 일, 꿈꾸고 계획하는 일, 가족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계획하던 그 모든 일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교회에서 행하는 일도 다 마찬가지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꼭 어떤 결과를 보기 위해 모여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손에 손잡고 서로 부딪치면서 무엇인가를 배워가고, 양보해가고, 자신이 꺾여져가고 하면서 사랑을 알아가고 훈련 받아가는 소중한 체험 때문에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목적 때문에 일을 한다면 그것은 주님 오시는 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예배당을 짓는다고 합시다. 한참 지어 올라가다 주님이 오신다면 다 내버리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짓는 것일까요? 우리는 현재 일을 하고 있는 이 순간순간에 서로 서로 배워가고, 자기를 훈련시켜가고, 자기가 깨져가는 데 소중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을 통하여 신앙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배우는 데에 있지 결코 일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그 결과로써 얻어질 것에 뜻을 두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거기에는 형제자매 사이의 대화, 친밀한 관계, 또 때로는 서로 다투는 문제 등이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무엇인가를 배워가고 단련 받아 가는 것, 자신을 낮추어가는 것, 서로 돌보아가는 자체에 의미가 있지만 그래도 주님이 오시면 모두 놀랄 것입니다.


 더구나 잘못 살다가 주님을 맞게 되는 사람은 엄청나게 놀라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일단 주님이 오시면 세상 모든 일은 완전히 의미없는 일로 재가 되어서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헛된 일에 분요하며 살지 말아야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생활


[시편 2:7-9]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하시도다


 여기에서 '철장'은 말씀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부터 16절까지를 보면 그때에는 주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죽은 자도 일어나고 바다와 풍랑도 잔잔해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재림하신 이후에도 말씀으로 통치를 하십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 마음속에는 이 말씀을 도전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배반하고 말씀을 거스리는 힘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의 대립입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이 마음에 한번 스치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이 나를 다스려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적 경험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육신이 있을 때까지는 완전히 말씀에 이끌려 사는 생활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씀이 마음을 스쳐가면 기꺼이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의해 다스림을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곤란이나 시련을 통한 훈련의 과정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는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그 말씀이 히브리서 2장에 있는 말씀대로 믿음으로 화합되지 않습니다. 듣기만 하고 실제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머물지 않으므로 나를 다스려가는 힘이 약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내 마음의 상태가 주님의 말씀과 대립되고 있는가, 말씀에 의해 잘 다스려지고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야만 합니다. 만일 잘 안되고 있다면 그 문제의 근원을 따져서 그것과 더불어 씨름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말씀으로 하십니다. ' 철장'이라는 것도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2 —3)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주님이 창조주입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는 분이고, 주님은 실천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계획을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몸으로 오셔서 구원을 실천하신 분은 주님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재림하시면 완벽하게 그 말씀으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의 법칙을 보면 매우 세밀하고 빈틈이 없습니다. 이런 법칙도 주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현상이 다 주님의 법칙이잖습니까? 주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을 생명의 주로만 알고 있기가 쉬운데 앞으로는 주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5절에 보면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한복음 5:2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에 나는 말씀대로 정말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상고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의해 우리 마음이 다스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는 태도는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마음의 태도가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말씀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실텐데 그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런 태도로 기다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삶


[시편 2:10-11]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욥기 28장 28절에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경외하고 섬길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어떤 금은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엄청난 행복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함께 일하고 참여는 하지만 주님께 참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를 드리고 기뻐하는 생활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함께 모여 찬송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예배와 주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그냥 우연히 생기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떤 말씀에서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 자체가 지혜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떤다는 말은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고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존경하는 마음 때문에 떤다는 뜻입니다.





주님과의 입맞춤


[시편 2: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다"는 말이 잠언 24장 26절에도 있습니다. 어떤 때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마음으로 진정 아멘하고 화답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들에게 입 맞추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말로 화답이 되면 그것이 주님께 입 맞추는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