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은 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암송되는 말씀입니다.


[시편 1:1-6]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적인 말씀입니다. 3편 이하에는 다윗의 시라는 부제가 나옵니다만 1, 2편에는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시편은 주로 시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그 내용이 열왕기, 사무엘, 역대기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시는 보통 사람들이 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표면에 나타난 뜻보다는 이면에 담긴 뜻이 훨씬 깊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의 말씀도 영적으로 뜻이 깊어 그냥 읽어서는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1편은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고 읽더라도 많은 교훈과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2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에 한번 뜯어 먹은 풀을 다시 새김질하는 소와 양 같은 동물들이 나옵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동물들을 정결한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돼지 같은 동물들은 먹기만 하고 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 중에 일단 말씀을 들으면 다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돼지 같은 사람과 소처럼 언제나 새김질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어 새김질을 잘하면 그 안에서 뜻을 음미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고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듣고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되새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음미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첫 구절에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주로 복 받기 위해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대개 목사가 자기 집에 찾아와서 복을 빌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목사는 마치 복을 짊어지고 복 장사하는 사람처럼 복을 나누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복을 바라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구원과 동시에 이미 복을 다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그 복이 우리의 삶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만 복은 이미 우리들에게 충분히 주어진 것입니다.



 저는 구원받은 다음에 하나님 앞에 금식을 하면서 간절하게 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디엘 무디, 찰스 피니, 그리고 죠지 뮬러와 같이 유명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한번 그렇게 큰일을 해야겠다 하고 굉장히 공을 들여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기도를 했던지 기도하다 지쳐 쓰러져 잠이들 정도였습니다. 구원받고 나서 2년도 채 안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꿈 속에서 성경 구절 하나를 읽고 깜짝 놀라 깨었는데, 그 말씀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는 구절이었습니다. 나중에 정신이 들어서 생각해 보니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것이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은 구원받을 때에 이미 다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구원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단순히 우리의 영혼이 죄사함 받았다는 그런 정도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 속에는 모든 것이 다 포괄적으로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로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성경 말씀을 통하여 구원받을 때에 이미 주셨다고 한 것을 알고부터는 그런 욕심이 없어졌어요. 그것이 제게는 헛된 욕심이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교만하게 큰일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아침 일찍 일어나 묵상하는 가운데 요한복음 6장의 내용 중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사건이 생각나면서 그와 같은 역사가 우리 교회에도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는 당장 한 자리에서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지금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은 영적 양식을 먹은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이라는 말의 개념을 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참 복이란 논리적으로 영적 축복 속에서 참 신앙생활을 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복된 일인 줄 알지만, 실생활 속에서 내가 추구하고 찾는 것이 그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명예와 같은 세상 것에 생각이 더 기울어져 있다면 실제로는 세상 복을 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육신의 복이 아닌, 참다운 복을 구하는 마음의 자세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이 시편 1편을 읽어도 별로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축복이라든지 영적 축복을 받을 마음이 없으면 읽어도 아무 감동 없이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복을 추구하고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성경을 읽을 때 당장에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 태도 여하에 따라서 단 한 개의 단어가 문제를 풀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문제는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나 가시밭에 떨어진 씨나 돌밭에 떨어진 씨나 옥토에 떨어진 씨나 씨는 똑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열매를 맺는다든지 못 맺는다든지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는 이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받을 때에 이 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미 허락된 것이고 약속된 것이며 구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 받은 것처럼 생각이 안되고 별로 귀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깨지면 아무것도 아닌 이 질그릇 같은 육체 안에 굉장한 보배가 들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보배라는 생각을 계속 갖지 못하고, 오히려 구원받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구원 좀 늦게 받을 건데"라는 말을 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라고 했는데, 악인의 꾀는 악인의 계획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인이 누구일까요? 아담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담이 지은 죄는 현대 감각으로 볼 때 큰 죄라는 생각이 안듭니다. 금단의 열매, 따먹지 말라는 열매 좀 따먹었기로 그게 뭐 그리 큰 죄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였다거나 인신매매를 했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아주 악한 죄인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선과 악의 개념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 악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담은 악인이 되었습니다. 왜 악인이 되었느냐 하면, 사탄의 말이 아담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사탄의 법칙이 심어짐으로써 가장 먼저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다 악인에 속해 있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


[잠언 1:7-1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음부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잠언 1장에는 악한 자의 길과 악한 자의 행위가 나옵니다. 악인은 사탄의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이고 사탄의 조종을 받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성령이 없고 사탄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사람은 다 악인입니다. 아담은 원래 죄를 짓기 전에 순수한 육신으로서 사탄에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법칙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면서 사탄에 속한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탄에 속해서 사탄이 계획한 대로 따라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자, 석가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석가와 같이 선량한 사람들의 영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죄의 길,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악인의 꾀입니다.


 칼 막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보면 그가 굉장히 정의감에 넘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부나 귀천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못 견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로 잘 먹고 잘 사는데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못 사느냐는 정의감에 불타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감이 강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계획, 그의 논리, 그의 생각이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산주의는 이제 이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큰 의미에서 보면 악인은 사람들 보기에 굉장히 선량하고 정의롭고 자비심이 많은 계획을 세워 가지고 사람들을 잘못 이끌어 갑니다. 그러한 것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계획이 악인의 꾀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서 오만한 자는 남을 폄론하고 비웃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비웃고 업신여기는 그러한 사람이 오만한 자예요.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교회를 비판하고 불평하는 사람도 오만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불평스러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말이 아닐 때에는 해결될 때까지 혼자 마음에 감추어 놓고 그러한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과 비판은 오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의 신앙을 죽이고 용기를 죽입니다.


 내 마음속에 불평스러운 마음, 비판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이것이 과연 성령의 마음인가 한번 판단을 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마음은 남을 미워한다든지 화를 낸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기는 것은 성령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틀림없이 내가 하는 말은 정당하고 바른 말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바른 말, 바른 생각, 그 정의로운 마음은 사실은 아담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아담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마음이 되었는데 그 마음은 죽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선이 아니고 육체 안에 나타난 선이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이론도 똑같은 것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사람을 못 살게 만들고 완전히 질서를 파괴하는 운동인데 기본 바탕은 얼마나 정의롭습니까? 공산주의 이론은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홀딱 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 이론이 현실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또 공산주의는 진정한 사랑이 빠진 공허한 정의만을 주장합니다. 사랑이 배제된 정의는 완전히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라는 말씀은 불신자들이 진리를 비웃는 것만을 지적하는 말씀이 아니고, 교회의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 교제하는 가운데 어떤 잘못된 것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비웃어서는 안 돼요. 그 잘못된 일에 대해서 내가 마음속에 성령의 마음으로 걱정을 하고, 염려를 한다면 비웃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육신적으로 내 친동생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사람들 앞에 나가서 "내 동생이 이런 놈입니다" 하고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동생이 잘못했으면 그 잘못은 곧 자기의 잘못이고, 그 잘못에 똑같이 동참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형제간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교회 안에서 형제된 사람들은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보실 때 굉장히 불쌍히 보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구원을 주셨는데 구원받은 우리가 피차간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항상 그 태도가 남을 비웃고 비판하고 흉을 봅니다. 우리는 누가 그런 말한다든지 그런 태도를 가지면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여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는 뜻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은 우리가 육신적으로 바라는 복하고 다릅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때에 이미 그 복도 주셨는데 이 복이 우리 생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듯이 이 복이 이미 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에서 그 복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과제입니다.





말씀을 얼마나 묵상하는가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구약 성경에서는 '율법'하면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저 사람 악하다 선하다 이렇게 평가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행위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중심 속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사람이 보는 관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은 하루 중 몇 시간이나 말씀을 묵상하십니까? 지금 이 세상은 너무 바쁜 세상입니다. 보통 밤 12시, 1시, 2시에 잠을 자면 그 다음 날 출근하기 직전에 일어나고 하루종일 바삐 뛰고 하다 보면 묵상하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쁜 가운데서라도 이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와서 닿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적어 보거나 암기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연애하는 사람들이 연애 편지 오면 어떻게 합니까? 읽고 또 읽어 보고 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편지해 놓고 답장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우체부가 오면 편지 가지고 왔는가 싶어 쫓아나갑니다. 그것을 얼마나 사모하고 기다립니까? 그처럼 이 성경 안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 성경은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말 그대로 나오는 음성이 있고, 한 면은 성령의 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읽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순전히 사람의 말로 읽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밭에 따라서 단순히 사람의 말로 지나치기도 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령 갑이라는 처녀와 을이라는 처녀가 있다고 합시다. 갑이라는 처녀가 미스터 박이라는 사람하고 사랑을 하는데 어느날 미스터 박이 갑이라는 처녀에게 사랑의 편지를 썼습니다. 갑은 그 편지를 보고 책 속에 끼워 놓았는데 을이라는 처녀가 서랍 속에 있는 편지를 슬쩍 보았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습니다. 갑이라는 처녀는 그걸 읽고 좋아하고 연모하는데, 자기는 읽어 보니 아무 감정이 없어요. 자기하고는 관계가 없으니 그렇습니다. 그와 같이 이 성경을 정말 사모하고 간절히 찾는 사람이 묵상을 하는데 그가 곧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성경 말씀에서 무엇을 깨닫거나 가르침을 얻으면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얻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즐거움과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이 복은 우리 마음 상태에 따라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 개념으로 생각하는 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눈이 밝아 작은 글자도 볼 수 있을 때에 다른 것보다는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쓰기도 하고 생각도 해 보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


[예레미야 17:5-8]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구원은 받았는데, 주변에 좋은 일이 있어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굉장히 큰 축복과 엄청난 은혜 속에 살고 있어도 그것을 모르는 상태가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마른 땅이라는 말입니다. 그 마음의 피곤한 상태가 마치 사막에서 허덕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며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며,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무서워 아니하는 것처럼 든든합니다. 아무리 해가 쨍쨍 쪼여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하고 잎이 청청합니다.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것이 영적인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의 강이 흘러내리는데 거기 좌우에 나무가 서 있고, 그 나무는 달마다 과실을 맺고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케 하는 약 재료가 됩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시편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오는데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결과입니다. 이 신앙생활의 열매는 아무 때나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분명히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시절이 무엇입니까? 이 열매 맺는 생활은 반드시 십자가를 거쳐야 됩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으려면 마냥 안일한 상태에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열매는 반드시 어떤 고난과 시련의 시절을 거쳐서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기 때문에 그 시절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절을 간과해 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맺을 수 있는 시절을 우리에게 통과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억울한 일 당할 때가 있고, 욕 먹을 때도 있고, 핍박 받을 때도 있고, 여러가지 어려움과 경제 문제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이나 교회나 전부 다 똑같아요. 그 시절을 거쳐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생각하여 시절이 지나가도 열매가 맺지 못하면 쭉정이가 되어 버립니다. 어떤 시련 기간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잘 통과를 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기 26:36]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여기에 보면 바람에 불리는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서 도망을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만국을 소생시키는 청청한 잎사귀처럼 힘차고 복 있는 삶이 있는가 하면 바싹 마른 나무 잎사귀처럼 바람만 불면 버석버석하고 놀라 도망치는 삶이 있습니다. 청청한 잎사귀는 만국과 마음을 소생시킨다고 했습니다. 이 두 잎사귀를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청청한 나무 잎사귀가 얼마나 복이 있습니까!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입니다.




[시편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반면 악인은 뿌리가 없고, 무게가 없고, 생명이 없습니다. 완전히 말라 비틀어진,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습니다. 모진 환난의 바람이 불고, 고난의 바람이 불면 언제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쭉정이의 운명입니다.




[시편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주님이 오시면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시절이 곧 다가옵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창세기 5장에 아담 자손 중 가인의 계보나 셋의 계보가 나오는데 이는 악인과 의인의 계보에 대한 예표입니다. 가인의 계통은 홍수 때 완전히 멸망해 버렸습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복 있는 사람들이고, 복 있는 계통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장자의 총회가 있습니다. 장자의 총회는 주님이 오시면 이루어질 회인데 악인이 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의인의 회중에 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 감사한 일인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일인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구원받아서 이렇게 의인의 회중에 들어 있으면서도 긍지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무엇이 다릅니까? 셋의 계통은 의인의 계통으로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바가 됩니다. 그러니까 나이를 다 얘기하면서 그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창세기 10장부터 죽 내려가면서 계통이 이어져 나갑니다. 이 세상은 연대가 계산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의인의 계통, 경건한 계통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도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된다는 말입니다. 기억이 안되는 계통은 다 삭제되어 버립니다. 가인의 계통은 노아의 시대에 가서 끝나고 멸망해 버렸습니다.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러분은 의인이 아닙니까?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인정하시는 그 일들이 얼마만큼 많으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이 인정하시는 길을 따라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