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편] 주는 나의 방패시요 영광이시라

[시편 3:1-8]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룰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이 시편 3편의 부제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사무엘하 15:13-18]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고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의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더라 

왕이 나갈 때에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궁을 지키게 하니라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머무니 

모든 신복이 그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육백인이 왕의 앞으로 진행하니라


 이 말씀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달아난 내용의 첫 대목입니다. 사무엘하 15장부터 18장까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이 지은 시가 시편 3편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죗값으로서 이러한 일을 당할 것을 나단 선지자는 미리 예언을 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다윗은 혹독한 징계를 받았지만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압살롬은 그 형 암논을 죽이고, 다윗을 피해서 몇 년 동안 고생하고 있다가 다윗의 신하인 요압대장의 권유에 따라 다윗에게로 돌아왔지만 다윗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도 왕위를 둘러싼 여러가지 세력 다툼들이 있었음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다윗이 여러 아내를 두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난 아들들이 서로가 왕권을 빼앗으려는 쟁탈전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자기 힘으로 왕위를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인심을 도적질해서 이런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왕권에 대한 도전


 이스라엘 민족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다윗 왕 이전까지는 가나안 땅을 다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사울 왕이 통치를 하였지만 나중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동안 왕노릇한 후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기꺼운 마음으로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중간에 서서 사람들이 재판 받으러 오면 친절하게 입을 맞추면서 "네 일이 옳지만 그걸 바로 판결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판결해 주겠다"하면서 몇 년 동안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아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후 압살롬이 반역을 했을 때에 유다 지파 말고는 거의 모든 지파가 압살롬의 편이 되어 다윗을 추격하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편 1절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라는 다윗의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셨습니다.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곧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에 대해서 징계하신다는 말씀을 했지만 다윗을 대적하여 다윗을 멸망시키려는 압살롬과 그를 추종하는 많은 세력들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중에 압살롬은 그 전쟁에서 죽음을 당했고 또 압살롬을 따르던 많은 군인들도 죽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또 한 가지 배워야 할 것은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죄를 지은 것까지 예수님의 그림자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혈통상으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은 아니지만 언약의 계통상으로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러 오신 분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 다윗은 범죄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 지은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시켜 인구조사한 것이라든지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오게 한 것 등 잘못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지은 죄에는 거짓말한 죄, 사람을 죽인 죄, 간음한 죄 등 여러 가지 죄가 복합적으로 들어 있었습니다. 다윗 역시 육신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약점이 많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우셨다는 그 일만은 엄연히 살아있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의 왕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잘 몰랐었는지 아니면 알고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압살롬은 다윗에게 도전하면서 왕권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시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왕권을 내주도록 허락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압살롬이 도전하고 왕권을 빼앗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완전한 도전이었습니다.





영적인 권위를 모르는 육에 속한 사람


이런 점을 생각할 때 현재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서 신중히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계획과 역사를 사람이 맡아서 하는 과정에서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이 상당히 많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어그러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인데 사람들이 볼 때에는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이 안 보이고 주님의 뜻도 모르니까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 정도로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행위만 평가하게 되어 마음이 상해서 교회에 도전을 하는 실수나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2:14-16]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회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 안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순전히 육의 생각으로만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전히 육신의 생각에서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합니다.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 의해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자기의 육신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탈취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왕권을 빼앗기 위해 많은 사람을 이간 붙이고 또 많은 사람을 동원시켜서 자기 편을 만들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도 다윗이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왕으로서 왕권을 집행하고 있는 근원적인 힘과 권위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사실을 모르고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의 이간 붙이는 그 행동에 말려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아서 왕이 된 사실을 인정을 하지 않고 그냥 그 왕권을 빼앗을 수 있다고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문제가 아주 중요합니다. 민수기를 읽어보면 백성들이 모세에게 도전하는 일이 많이 나옵니다. 그 시대의 제사장들이라든지 또 고라 자손들, 아론과 그 누이 미리암 등이 모세의 영적인 권위를 무시하고, "모세, 네가 뭐냐? 너 혼자만 왕 노릇 하느냐?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할 수 있지 않느냐."고 도전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성령의 일을 무시하는 것으로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아주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우리 모임의 역사 속에서도 여러 번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누가 잘되나 한번 해보자는 말을 하면서 모임을 뛰쳐나가기도 했습니다만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앙생활이나 전도나 교회의 운영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사람의 꾀나 노력이나 어떤 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은 다윗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아무도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은 다윗에게 징계가 닥쳐오고 있는 상황에서, 다윗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지식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외부적으로만 판단을 하기 때문에 다윗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잘못했지만 아무리 많은 무리가 자기를 도전하고 반역하고 위협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에는 영적인 판단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들이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일도 하고 어려움도 함께하지만 언제 어떤 회오리 바람이 불어서 누군가에 의해서 마음이 이간을 당하고, 또 현실적으로 교회와 신앙생활의 방향이 자기의 신상에 불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에 그 마음에 영적인 권위와 신령한 사실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으면 다윗을 쫓는 그 많은 군중과 마찬가지로 도전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모임이 어려움을 당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올 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실을 믿는 사람은 자기가 희생을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확실한 위치를 지킬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항상 변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주어진 왕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통치를 받고 다윗에 의해서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을 평정했습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한 통치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서 믿음을 지켜갔고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서 아주 충성스럽게 봉사한 사람입니다.


 왕권은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왕권이라고 하면 흔히들 영광과 권세를 누리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기름부음을 받은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을 충실히 감당한 사람입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고 그를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영적 권위를 알았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이 사울을 버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을 자기 손으로는 죽일 수 없다는 단호한 자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기름 부음에 대한 영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가 걸어가는 과정에서 영적인 어떤 사실들이 모든 사람들의 눈에 일일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그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섞여 살고 있는데, 육에 속한 사람이 그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고 함부로 도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기 입장에 불리할 때에 도전을 합니다. 이러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자주 읽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아는 성경이라도 또 다시 읽어서 마음에 성경 말씀이 자리를 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4:1-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은 주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서 지체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사탄과 죄에게 사로잡혔는데 주님이 우리를 다시 주님의 포로로 사로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린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께 사로잡힌 우리들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첫째는 구원을 받게 하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 사실이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심으로써 구원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성령의 선물이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신 것'인데 주님 대신으로 일을 맡기는 선물입니다. 그것을 은사라고 말합니다. 그 은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즉 주님이 보내신 성령의 선물로 받은 여러 직분을 통해서 교회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즉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 의해서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그 가나안 일곱 족속을 무찌르고 그 땅을 정복하여 그 후 솔로몬 시대에 와서 성전이 지어지는 것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성령의 일을 모릅니다. 구원받았으니까 누구든지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성령의 일을 자기 힘으로 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자기가 왕이 되려고 사람들을 모아 다윗을 추격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시편 3:1-2)라고 했습니다.





무너진 믿음


 왜 사람들이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을까요?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이며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므로 다윗을 따르면 안된다고 선전하고, 하나님은 다윗 편이 아니며 다윗을 돕지 않는다고 이간 붙여 다윗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무너진 제단을 수축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단이 다 무너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믿음이 다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다 무너졌기 때문에 그 무너진 믿음을 다시 세워야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제단을 다시 수축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14-18]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말을 가지고 시비하며 다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말이 독한 창질에 썩어져감과 같다는 것은 속이 썩어서 냄새가 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사람을 온통 썩게 만들고 죽이는 말입니다. 부활은 이미 지나갔고 앞으로 부활이 없으므로 부활 같은 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고 퍼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앞으로 부활이 없다면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또한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말은 믿음을 무너뜨리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무너뜨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안됩니다. 



 모임에 있으면 때로는 마음에 부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겨운 일을 앞세우면서 안 따라가면 믿음 없다고 할 것 같고 따라가려니 힘이 듭니다. 이렇게 마음에 무거운 부담을 가진 사람에게 누가 와서 약간의 달콤한 말 한 마디만 해주면 그냥 그 말이 귀에 들어 오면서 마음이 돌아서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은 상당히 고된 훈련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이 육신의 소욕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좋아하고, 부귀와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육신을 훈련시키고 쳐서 복종시키기까지 계속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훈련 도장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주님이 예비하신 상급을 바라보며 가는 것입니다. 믿음을 무너뜨리는 소리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일, 성령의 권위에 대해서 눈이 뜨이지 않으면 이러한 소리에 그만 마음이 동요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요 상급이시라


[시편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여기 이 다윗의 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다윗이 어떤 환경에서 이 말을 했습니까? 자신이 낳은 아들이 많은 국민의 마음을 빼앗아 가지고 무리를 지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비통한 상황에 이러한 말을 한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참 비참한 일입니다. 예루살렘은 아직 성전이 지어지진 않았지만 법궤가 있는 곳입니다. 자기의 궁궐과 법궤가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본래 목자였던 다윗은 백성들을 어린 양처럼 길렀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부였던 베드로를 불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듯이 양치는 목자였던 다윗을 이스라엘 민족을 기르는 목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끼면서 기르고 사랑하고 보호하던 백성들이 배반을 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말을 한 것입니다. 이 시 속에는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영적인 사실, 기름부음에 대한 믿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15:1]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방패'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가정에서 훈련시킨 318인이라는 소수의 군인으로 대군을 무찔렀습니다. 바벨론 지방 북쪽의 여러 나라 동맹군을 무찌르고, 롯을 구출해오고, 소돔 성에 있는 모든 물건을 구해왔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그들이 다시 치러 올 것에 대한 염려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조카 롯이 잡혀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생명을 걸고 조카 롯을 건져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성도 섬기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도를 섬기는 진정한 행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사탄에 의해서 반격을 받을 위험 부담이 항상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동맹군의 보복을 염려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네 방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모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기름부음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한 영적인 지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것을 다윗은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말은 보통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므로 상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신다는 것쯤은 다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에도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 안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의 힘이나 노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압살롬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왕권을 뺏으려는 노력을 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처럼 윗사람 되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가 무슨 지배력을 가지는 것을 좋아하여 수단과 방법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서 자신이 존경받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것이 압살롬의 마음입니다.



[이사야 33:16-19]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너의 눈은 그 영광 중의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하겠고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칭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네가 강포한 백성을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서 네가 알아 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여기 보면 계산하고 계수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다윗이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낱낱이 헤아려 본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다윗이 후궁들을 예루살렘에 두고 왔는데 아들 압살롬이 자기 아내되는 후궁들과 사람들이 보는 대낮에 관계를 맺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고 은덕을 많이 베풀었던 그 많은 백성이 거의 돌아서서 자기를 배반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였습니다. 그 추격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는 자신을 생각해 보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어도 시원찮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믿음은 그런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계산하면 실망하고 낙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다윗의 마음속에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고난과 시련 가운데 생긴 믿음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바울은 사람이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할 만큼 어려운 환경 속에 들어갔을 때에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가르치고 하는 것이 그냥 인간적으로 된 것이 아니고 어느날 주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사명과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이 가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는 길도 평탄치만은 않습니다. 외부적으로는 핍박과 비방, 온갖 억울한 일들이 닥쳐오고, 내부적으로도 사탄의 장난에 의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어려움 속에서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일을 초월하여 더 멀리,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고, 영광스러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제 피부로 느끼는 작은 문제에 매달려 그러한 일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아주 중요한 것을 못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이방인 왕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오줌을 누고 미친척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신 그 고된 훈련이 지나가고 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진작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한 번도 자기 힘으로 왕이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오면 왕이 될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무서운 훈련을 받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윗이기 때문에 압살롬과 백성이 자기를 배반하는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요 영광이시라는 것, 나의 머리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머리를 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20)고 하셨는데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머리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고된 훈련과 고난과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얻는 과정입니다. 다윗은 그 무시무시한 환난 속에서도 현실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계산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늠름하게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의 배후에 숨은 뜻을 잊고 말로만 하나님을 믿노라고 지껄여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의 맹점이 뭐냐하면 성경을 그냥 이론적으로만 인용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과하는 훈련 속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형식적으로 하나님 말씀만 읊조리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큰 실수입니다. 신앙생활은 경험입니다. 그 경험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다윗은 이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시온산


[시편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성산은 높은 곳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이 성산은 예루살렘입니다. 다윗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이 여호와의 성산에서 응답을 한다고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비록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상태이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부터 응답이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라는 찬송이 있듯이 교회는 성산이며 시온산입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붙드시는 주님


[시편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누가 누워 자고 깨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마다 누워 자고 깨는데 왜 다윗이 여기에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마태복음 8장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어나 두려워할 때 예수님이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일이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데 조그마한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기 시작하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셨습니다. 왜 믿음이 적습니까? 그 배 안에 누가 있습니까? 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그 배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의 마음에 있는 뜻을 이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풍랑이 아무리 심하게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소리치며 떠들고 야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구원과 교회를 상징하는 것처럼 그 배도 교회를 상징합니다. 아드리아 바다에서 바울이 타고 가던 그 깨진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안 상했습니다. 그것도 역시 교회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면 목적지에 갈 때까지 결코 파손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셨기에 바울이 탄 배는 사람이 다 건져졌을 때까지 파선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그 배가 부서진 것은 주님 오시면 이 세상에 있는 현실적인 교회는 필요가 없게 됨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주님이시지만 풍랑 속에서도 아무 걱정 없이 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주무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평온함, 그것이 바로 다윗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시에 다윗의 마음 상태가 나타나있는 것입니다. 아들과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에게 완전히 배신을 당해 생명까지 사냥 당하는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도 다윗은 편안히 자고 깰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속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혼자만이 아는 깊은 비밀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보이는 현실에 부화뇌동하고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징계를 받는 줄 알면서도 그 징계가 자기가 당하는 징계가 아닌 것을 분명히 알았으며 하나님이 자기의 방패이시고 영광이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루어가야 할 구원


[시편 3:6-8]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우리는 복음을 깨달았을 때에 구원받은 그것만 항상 생각하고 현재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구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대로 우리의 영혼이 단번에 구원받았으면 이제는 그 구원의 생활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누가 내게 섭섭한 말을 할지라도 그 섭섭한 것을 이길 수 있는 마음가짐,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 구원을 받기 위해서 현재 우리가 시련과 뼈를 깎는 듯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완성되는 날 주님이 오십니다.


 현재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하지 말고 주님 오시면 나타날 상을 위해서 훈련 받고, 믿음으로 열심히 살아가야 됩니다. 다윗처럼 징계를 받을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신앙의 간증을 담대히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원수를 갚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를 짓고 징계 받는 다윗 편에 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도전하는 그들을 완전히 꺾어버리셨습니다. 다윗이 직접 그들에게 원수를 갚지 아니하였어도 하나님께서 친히 원수를 갚아 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