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편]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하라

[시편 4:1-8]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시편 3편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편 4편도 같은 때라고 생각됩니다.

 시편에는 천지창조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성경 가운데 있는 모든 내용이 포괄적으로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구속의 역사도 나오고, 교회 문제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도 나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을 공부하면 성경 전체의 내용과 여러가지 주제를 포괄적으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시편 속에는 고난 속에서 깨닫게 되는 신앙생활의 비밀과 진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 이외에도 고라, 아삽, 헤만, 에단, 솔로몬, 모세, 히스기야 등의 시도 있습니다만 다윗이 읊은 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그의 깊이 있는 신앙 고백이며 그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체험에 대한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님의 부활


[시편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다윗은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압살롬올 통해서 공격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한 징계였습니다. 다윗은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그 죄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의 의를 발견했습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란 말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는 말씀처럼 의는 인간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9-10]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여기서 죄는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하고, 의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하라


 이것은 로마서 4장 25절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니까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라는 말씀은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신다는 뜻입니다. 승천하시면 제자들이 육신적으로 예수님을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자마자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그 사실은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라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셨으므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주님이시고, 그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계시니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내 자신의 의로써 무엇을 구한다면 절대로 응답을 못 받습니다. 창세기 4장에 나타난 대로 가인의 제사는 응답을 못 받았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자기의 의로 드려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의가 아니고 양의 피로 제물을 바쳤을 때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그림자인 양의 피로써 드린 제사이기 때문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고 또 나아가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참 믿음의 사람


 한편,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음이 좁아지고 굉장히 답답한 상태가 됩니다. 어린 양같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일해 준 백성이 오히려 압살롬을 좇아 자기를 추격하여 죽이려고 하는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때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우리 같으면 그들을 미워하고 적개심을 품는 좁은 마음으로 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들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모든 문제를 초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너그럽습니다. 작은 문제에 매달려 걱정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하는 다윗의 말 속에는 그 어려움을 능히 이기고 주님께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던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했는데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 항상 "들어주소서"라는 미래형을 신약의 입장에서는 "들어주셨나이다"라고 현재 완료형으로 읽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기름부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


[시편 4: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지위를 잘 몰랐습니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말은 다윗의 육신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 받은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충실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로 일곱 족속을 완전히 정복하고 승리를 얻은 사람은 다윗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승리하시는 왕이신 주님의 그림자이고 성전을 지은 솔로몬은 재림하시는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영광이라는 것은 다윗 자신이 어떤 육신적인 지위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 당시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올 때에 그 얼굴에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있을 영광이고,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없어질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얼굴에 수건을 썼는데 그것은 일시적인 영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을 받아서 세워진 사람은 전부 다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고린도후서 4:4-6]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따로 생각하여 예수님을 하나님보다 낮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들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뿐이지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형상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체를 입고 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완전히 캄캄한 지구에 빛이 비쳤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캄캄한 세상에 빛으로 나타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으므로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마음에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진리가 바로 빛이고 그것이 내 마음에 올 때에 빛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다윗은 그 영광의 힘으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물리쳤습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일곱 귀신을 말하는데 그 일곱 귀신을 무찌른 것은 사탄에게 승리한 것을 뜻합니다. 그후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는 것은 일곱 귀신이 물러갔을 때 교회가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아들과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면서 열심히 다스리던 백성들이 다윗을 도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전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복음 16:15)라고 묻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마태복음 16:16)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주님께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직 그 영광을 깊이 모르기 때문에 종종 우리들은 그 영광을 욕되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했습니다.





도덕적인 죄와 성령을 거스리는 죄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 우리아를 통해서 죄를 짓고 징계를 받는 상태지만 압살롬을 앞세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영광을 도전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훨씬 더 하나님께 본질적으로 범죄를 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비록 죄를 지었을망정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백성들이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았다면 감히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없애버리고 그 왕권을 빼앗으려고 도전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도전입니다.


 교회 가운데도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해서 갑자기 무슨 이상한 일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름부음이 있어서 일이 맡겨져 그 일을 통해 복음이 역사하는 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자칫 잘못하면 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하기 쉽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현실적으로 잘못된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하나님이 처리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두 가지 죄가 있는데 도덕적으로 짓는 죄와 성령을 거스리는 죄입니다. 다윗이 지은 죄는 도덕적이고 정욕적인 것입니다. 그런 죄도 굉장히 큰 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징계 받아 마땅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5절에 보면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라는 징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큰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하는 죄입니다. 고라 자손과 같이 모세를 도전하는 죄입니다. "모세 당신만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나섰던 고라 자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하는 죄는 일반 도덕적인 기준에서 볼 때 죄처럼 안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착각할 가능성이 많은 죄입니다.


 사람들은 가령 어떤 사람이 무슨 불의한 일을 행했다고 하면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이러쿵 저러쿵합니다. 가령, 구원받은 이후에도 성적인 죄를 짓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순간적인 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을 등한히 여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런 죄보다는 하나님의 어떤 계획에 도전하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이 그냥 두시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가 미워서가 아니라 가만히 두면 하나님의 계획이 삐뚤어지니까 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교회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일에 우리들이 잘못하면 죄를 짓고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가운데 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간 교회를 도전한 사람들이 모임을 떠나는 일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교회를 떠나면 신앙생활이 완전히 죽어 버립니다. 입으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도 보고, 전도도 하지만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자신을 바쳐가는 생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가면서 처리되고 교회가 당하는 어려움을 함께 참아가면서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택하신 교회


[시편 4: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여기에 "택한다"는 말은 에베소서 1장 4절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이 "택하사" 라는 말을 칼빈은 착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하나님의 예정과 택함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결과 칼빈의 교리를 받아들인 장로교에서는 예배당에 오는 사람은 구원받은 체험이 없어도 자기가 택함 받은 줄로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예정이다'라고 생각하니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그냥 살다 죽으면 천당 간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택하사'라는 말은 이 세상을 아직 창조하시기 전에 그 아들의 신부를 하나 택해놓았다는 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창세 전에 택정한 사랑의 짝인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역사의 과정은 하나님이 택하신 그리스도의 신부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성령이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신부를 보이리라' 하더니 예루살렘을 보였습니다. 교회가 완성된 것이 이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일꾼의 자세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한 그리스도인으로 택함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부의 한 지체로 들어가기 위해서 택함 받는 것이 구원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일꾼으로 쓰인 바울은 '모태로부터' 택함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택함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3절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원 전의 계획이겠지만 사울 왕이 버려지고 다윗이 택함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기름 병을 가지고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앉아 있을 때 이새가 맏아들로부터 하나하나 데리고 오니까 사무엘이 "이도 아니다. 저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다윗을 불러오라고 하여 보고 기름을 부어 그를 택했습니다.


 그 당시 다윗은 양치는 목자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소년이었지만 사자가 오면 입에 손을 넣어 찢어버리는 힘이 있었고, 골리앗을 죽일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는 저 사람을 왜 그냥 두느냐고 할 만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면 주님의 쓰시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헌신'이라는 말은 자신을 주님께 드린다는 뜻인데, 그 드린다는 말 속에는 구별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굉장히 시련을 많이 겪는 고달픈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삶의 본보기가 바로 아브라함의 삶입니다. 고향, 친척, 조카, 자기 육신으로 낳은 이스마엘까지 버리고 나중에는 이삭까지 바쳤습니다. 


 현재 주님을 섬기는 데 장애가 되는 것,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에 뭔가 방해되는 것을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사람들이 헌신한다고 하니까 물질 등을 바치는 문제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분을 품지 말라


[시편 4:4]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여기에서 '떨며'라는 말은 주석을 보면 '분내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4:25-27]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우리가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분을 내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라는 말은 분한 마음이 날 때에도 죄는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해가 진다'는 말은 마음이 어두워져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분한 마음이 오래 쌓여있으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그러한 상태가 오래가면 마음에 해가 져버립니다.



 어떤 구원받은 사람은 피차간의 개인적인 문제로 마음이 상해버리면 모임에 안 나옵니다.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기 싫은 것입니다. 빛 가운데 나타나기 싫은 것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분한 마음이 생기면 참고 있다가 서로 얘기해서 풀어버리고 자백하고 서로 얘기해야 합니다. 그걸 해결하지 않고 마음속에 품고 미운 마음이 오래가면 마음에 빛이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맺힌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도 만나기 싫어져서 결국 모임에 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는 데 제일 잘 걸려 넘어지는 문제가 바로 그 문제입니다. 웬만한 일은 넘기는데 분한 마음이 생기면 그것 때문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럴 때에 그것을 잘 다스릴 수 있으면 빛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해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사무엘하 16:7)하고 저주하면서 먼지를 날리고 돌을 던지는 시므이를 아비새가 치려고 할 때,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사무엘하 16:10)하며 그것을 저지하였습니다. 다윗은 시므이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분한 마음이 생길 때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즉시 '어쩔 수 없는 나 자신이구나, 내가 그런 것 하나 참지 못하고 미워하고, 분을 내는구나. 주여, 이 마음까지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활 속에서 구원을 받아가는 문제입니다. 영혼이 단번에 구원받을 때 지옥가지 않기로 된 것이지만 우리는 시시때때로 생활 속의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자신을 먼저 살피라


[시편 4:4]

...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조용히 자기 일을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상대가 내게 잘못한 것이나 내 마음에 미워하는 것이나 둘이 똑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큰소리칠 수가 없는 존재요 내 속도 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자신의 새로운 면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중에 마음이 상하고 괴롭고 불쾌하거든 그 사람에 대해서 불쾌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그 일에 대해서 내 마음이 왜 이러는가 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의의 제사와 새로운 차원의 믿음


 바울은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21)라고 말했고, 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고 했습니다. '내 마음도 내 행위도 하나님께 제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 앞에,제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받았지만 아직 내 속에는 악한 마음이 있는데 이런 죄인을 위해서 주님이 죽어 주셨군요.'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의의 제사입니다.



[시편 4: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자기를 믿는 사람은 얻을 것이 없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중에 화를 안 내려고 해도 화가 나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을 의지하고 기대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비교적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일수록 별다른 변화가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오르내림이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풀어질 때에 신앙이 한 계단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문제가 풀어지는 것이 없으니까 신앙이 자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너무 심각한 문제 속에 쌓여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실망을 해서 그런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고 선하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는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남을 미워하고 이런 저런 잘못된 생각을 가졌을 때에 자기를 깊이 따져보고 자기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을 때에 비로소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게 새로운 차원의 믿음입니다.





주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시편 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주시오."하는 말과 시편에 있는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하는 말이 똑같은 말입니다. 유대 민족은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쳐부수는 기적을 원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로마 시저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기적을 행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야는 그들 앞에서 소경과 앉은뱅이를 낫게 하고 죽은 자까지 살리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조용히 우리 삶에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는 기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기적이 성경 속에 있고, 성경 말씀에서 우리가 기적을 봅니다. 처음에 말씀을 깨달아서 구원을 받았고 그 다음에 어려운 문제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해결되고 눈이 뜨는 기적이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큰 기적을 원했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들 마음속에 없었습니다. 그 영광을 아는 빛이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큰 기적인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알았으면 그들 마음 속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겠습니까? 사람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을 보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선을 주장하는 겁니다. 인간의 선은 아담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 줄 알고 있어요.


 우리는 주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예수님 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다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 우리에게 은혜로, 진리로, 구원으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엄청난 영광을 받았고 그 영광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육신적이기 때문에 다른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다른 영광을 찾으면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고 자기 개인의 생활 속에도 하나님의 어떤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를테면 가난하게 살다가 갑자기 돈을 버는 그런 기적이라도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


[시편 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우리가 처음 구원받을 때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주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그 생각이 바뀌어집니다. 육신의 마음을 만족시키려고 다시 세상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에 있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 우리가 알아갈 수 있다면 그 마음에 두신 기쁨이 곡식의 풍부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기저기 우리의 마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두신 기쁨,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일 때 그러한 마음이 바뀝니다.


[에베소서 5:18-2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하나님 안의 참 평화


[시편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이 말을 하고 있는 다윗은 쫓겨다니는 상태였습니다. 아들과 자기가 사랑했던 많은 백성들에게 배반당하고 시므이가 티끌을 날리고 돌을 던지면서 욕을 할 때 얼마나 엄청난 아픔이 있었겠습니까?


 그 속에서 다윗은 이 시를 읊었습니다. 그런 외부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다윗의 마음속에는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저주도 하나님의 음성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믿는 마음입니까? 누가 때리든지 저주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품에서 눕고 자는 상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매로 때릴지라도 자식이 잠들 때에 이불을 덮어 주고 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다윗은 죄 때문에 징계를 받고 엄청난 환난을 당했지만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히 쉴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