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1-12]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시편 5편의 제목을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제목으로 미루어 볼 때 다윗 시대에는 관현악이 발달되어 그 관현악에 맞추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노래가 상당히 성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된 기도의 자세
[시편 5:1-2]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통촉해달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가고 있는 처지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징계를 받는 중에 있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사탄에 의해서 송사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징계하시고 사탄 편에서는 송사하는 양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읊은 이 시는 우리들에게 여러가지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혹시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거나 또 어떤 시련 가운데 있을 때에 한편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받는 과정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탄에 의해서 송사를 받고 도전을 받는 일이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절에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했는데 이 말은 자기 마음의 생각을 살펴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마치 책이나 신문을 펴놓고 읽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그대로 내놓고 자기의 마음을 살펴달라고 하는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도 자체가 매우 위선적이고 하나님 앞에 정당하지 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는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라고 위선적인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자기 마음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 있으면서도 형식적으로 입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그런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죄를 아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진실된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아주 진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이 진실한 기도입니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 조금도 거짓이 없는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내 심사를 통촉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시편 5편 전체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조금도 거짓이 없이 자기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놓는 기도였습니다.
[마태복음 26:39]
...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도 육신의 입장에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게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시몬 베드로가 만류하자 "사탄아, 물러가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신 것은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져야 하는 입장이 결코 즐겁거나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는 것이 육신적으로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만나서 완전히 의논하는 상태입니다. 눈을 감고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내 마음의 진정한 자세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놓는 것이 하나님 앞에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며 또 원수에게 쫓기는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그대로 다 내놓고 거짓이 없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기 위한 기도, 억지로라도 기도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욕심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바른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야고보서 4:3)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 욕심만 부리는 기도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그 뜻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다윗이 "내 마음을 통촉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니 살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 달라는 뜻입니다.
아침의 기도와 주님의 중보
[시편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여기서 '아침'이라는 말은 꼭 밤이 지난 후의 이른 새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앞서'란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다가 제단에 바치라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한 다음 이삭을 바치러 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다른 무엇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께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그 시각이 바로 아침입니다. 해가 뜨는 아침은 바로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떠오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캄캄하고 어두울 때에는 기도하고 싶어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침에 주께 기도한다'는 말씀을 일본어 성경으로 읽어 보았는데, 우리말 성경에 없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제물을 주님 앞에 갖추어 놓고 기다린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맨 마지막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제물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제물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부터 시작하여 홍수 후에 노아가 또 제사를 드렸고, 그 다음에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중보적인 제물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참 제물이신 예수님을 앞세워야 합니다. 나는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해서 대언자가 되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중보의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해야 될지 마땅히 빌 바를 모르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속에 꼭 어떤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 기도를 하지만, 그것을 내가 구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 모르고 하는 기도가 상당히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올바른 기도만 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개인적인 입장보다는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이 오신 날부터 교회가 성립되었고 그 교회를 위해서 성령께서 간구하고 계시고 하나님 우편에서는 주님이 대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빌 바를 모르고 하는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주님의 중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빌어야 할 바를 모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성령이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교회에게 필요한 것과 또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성령께서 아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빌 바를 모르지만 성령께서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시니 얼마나 마음 든든합니까?
육신의 요구와 성령의 간구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태복음 7:9-10)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떡은 진정한 의미의 떡이 아니라 돌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몸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영적인 떡인 주님의 몸을 구하지 아니하고 돌을 구합니다. 육신에게는 이롭지만 영적 생활에는 해로운 것을 구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든지 우리 아이가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면 좋겠다 든지 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것은 실상은 돌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떡인 줄 알고 구하지만 그건 떡이 아니고 돌입니다. 또 생선인 줄 알고 구하지만 생선이 아닌 뱀을 구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니까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 돈이 마침내 내 신앙을 좀먹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전갈로서 나를 쏘는 것과 같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떡대신 돌을 구하고 생선대신 전갈을 구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어린아이가 위험한지도 모르고 칼을 달라고 해도 칼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이러한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은혜의 보좌와 참 제물이신 예수님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올바른 마음의 자세입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아침에 주님 앞에 제물을 갖추어 놓고 기다렸다고 했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무엇이든지 즉시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란 제물이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우리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 깊숙이 있는 영은 죄사함 받아 깨끗하지만, 현재 우리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며 우리 마음속에는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이 묻어 있어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합니다. 그 불결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당장에 죽어야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제물을 갖추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소가 제물이었지만 신약시대의 제물은 주님이십니다. 내 마음이 지금은 깨끗지 못하고 때가 묻었지만 제물을 앞세울 때에는 괜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세상의 때가 묻은 더러운 마음, 고약한 마음으로 어떻게 감히 기도할까 생각하면 기도할 용기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리하여 무관심한 채 기도 없이 살아가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대변해 주시고 계시는데 내가 자꾸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상 바른 생활을 못하고 또 마음에 세상적인 때가 묻곤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이 더럽고 악한 마음을 지닌 나를 위해서 주님이 제물이 되어주신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제물이 되어주신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만 기도가 가능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려고 마음을 모을 때, 양심의 가책이 먼저 찾아옵니다. 자기 마음의 불결한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피흘림이 없는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피흘린 제물이라야 제물이 될 수 있는데,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받아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인의 제물을 가지고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내 인간적인 생활 속에서 열매가 많고 착한 일이 좀 있다 싶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시겠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입니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인의 저주받은 열매에 불과합니다. 가인은 저주받은 땅의 소산인 곡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저주받은 흙으로 된 우리의 육신도 저주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육신을 의지합니다. 내 자신이 선하고 신실할 때에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인의 제사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에 육신적으로 잘못을 따지면 안됩니다, 물론 죄를 지었으면 자백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뉘우치는 마음만으로는 안되고 하나님 앞에 내놓을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제물은 바로 주님입니다. 이런 죄를 지은 나, 더러운 나, 악한 나를 위해서 주님이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그 제물을 앞세우는, 즉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항상 주님을 앞세워야 됩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
[누가복음 18: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은 기도를 하는데 참으로 믿음으로 하는 기도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끈질기고 열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 뿐이시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데 실상 그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자기의 의에 만족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는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살고 신앙이 좋아도 여전히 죄를 짓고 세상을 접촉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실을 앞세워야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다윗은 믿음 안에서 자기의 마음을 통촉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피시고 통촉하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 정직하고 잘하는 그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마음,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실을 믿는 마음을 훨씬 더 인정하십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제물이 없이 나아가는 오만한 자
[시편 5:4-6]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제물이 없는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제물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함께 계실 수 없습니다. 마음에 주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인 나와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한 대로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갖추어놓고 그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못 믿게 하고 예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악한 그대로 나가도록 합니다. 송사를 하여 힘을 빼서 하나님께 못 나가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이 육신 속에 머무는 악한 힘이 할 수만 있으면 제물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유혹이 항상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를 거짓말하고 남을 미워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도 사탄이지만, 항상 참소해서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탄의 궤휼입니다.
"선을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는 바울의 말처럼 우리에게도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에게 선이 없습니다. 바울은 마음속에 이러한 죄의 법, 곧 사망의 법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 죄의 법은 사탄이 심어준 것이고 사탄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잔뜩 기대를 거는 것은 굉장한 오만입니다.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선한 것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오만한 자입니다.
참 회개와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시편 5: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주의 집은 바로 성도들의 교제가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오늘날은 주님의 몸된 교회가 바로 성전입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말씀을 두신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시편 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원수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찾아옵니다. 죄를 지었으니까 벌을 받는 것이라며 마음에 송사를 합니다. 사탄에게 참소를 받을 때에는 실망이 옵니다. 하나님이 무섭고 멀게 느껴져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만듭니다. 그것이 원수가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낙망하여 힘이 빠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것도, 모임에 나오는 것도 싫어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우리는 이미 속죄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피 흘려 죄를 사해주신 것을 알고 있는데 죄 때문에 점점 멀어지는 것은 참 회개가 아닙니다. 참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하나님,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벌을 주시면 벌을 받고 징계를 하시면 징계를 받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서 그 처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벌써 그 마음속에 충분히 그 죄에 대해서 회개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로우심으로 나를 인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뿐만 아니고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 의에 의지해 주님을 옷입고 사는 생활입니다. 주님의 의로 인도해달라는 그 말은 굉장한 믿음입니다. 큰 죄를 지었으면서도 주의 의를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지만 하나님을 떠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 있고 멀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는 믿음에 달렸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깊이 회개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그 마음이 치료가 됩니다. 주님이 내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을 저버리는 가장 큰 죄
[시편 5:9-10]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전부 원수 사탄의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탄에게 공격받으면 하나님을 떠나서 배역을 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 때문에 더 큰 죄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더 큰 죄는 불신앙이요 배역하는 죄입니다. 배역하는 죄는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입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아서 죄를 짓게 되면 그때 사탄은 '그것 보라, 하나님이 널 버렸다, 너는 이제 하나님 앞에 희망 없다.'고 생각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불신하여 떠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간계입니다. 우리가 어떤 순간적인 실수로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하나님의 의를 배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
때때로 마음에 빛이 없고 가는 길이 캄캄하여 오리무중의 상태에 놓여 암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고 하나님을 떠나기 쉽습니다. 그때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 곧 주님의 이름을 의뢰하고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여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옵니다. 마음이 캄캄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아침이 가까이 왔다는 증거입니다. 참고 견디며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캄캄함이 그칠 때 참으로 감사함이 있습니다. 참으로 반갑고 즐거운 주님의 축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캄캄하고 고통스러울 때는 죽는 순간이고 죽음 뒤에는 열매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거듭난 사실을 말하지만 우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항상 평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아갈 때보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했을 때 캄캄하고 깊은 절망의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의 빛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말로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환부를 수술하지 않고 겉만 발라버리는 식으로 끝나버립니다. 참고 기다려야 됩니다. 환부가 완전히 곪아서 터져버리면 나중에 해결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편 5:11]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환난을 당한 자 주께 오라'는 찬송가 가사대로 우리가 사탄의 꾀임에 빠져 죄를 짓고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즉시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주님이 나를 멀리하신다든지 싫어하신다든지 하는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득이 죄를 짓는다고 해도 주님은 우리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근심하시고 깊이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스스로 뉘우쳐서 주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고통을 받는 동안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오는 자는 주님의 더 큰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
[시편 5: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의인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주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자입니다. 구원받을 때 뿐만 아니고 구원받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로마서 10:2-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우리가 어려움이 많고 유혹이 많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꼭 죄를 안 지으면서 사는 것만 믿음일까요?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 죄악의 세상에서 죄를 안 짓고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는 말씀처럼 의인은 믿음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 5편을 통해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시편 5편의 제목을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제목으로 미루어 볼 때 다윗 시대에는 관현악이 발달되어 그 관현악에 맞추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노래가 상당히 성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된 기도의 자세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통촉해달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가고 있는 처지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징계를 받는 중에 있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사탄에 의해서 송사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징계하시고 사탄 편에서는 송사하는 양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읊은 이 시는 우리들에게 여러가지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혹시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거나 또 어떤 시련 가운데 있을 때에 한편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받는 과정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탄에 의해서 송사를 받고 도전을 받는 일이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절에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했는데 이 말은 자기 마음의 생각을 살펴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마치 책이나 신문을 펴놓고 읽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그대로 내놓고 자기의 마음을 살펴달라고 하는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도 자체가 매우 위선적이고 하나님 앞에 정당하지 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는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라고 위선적인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자기 마음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 있으면서도 형식적으로 입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그런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죄를 아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진실된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아주 진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이 진실한 기도입니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 조금도 거짓이 없는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내 심사를 통촉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시편 5편 전체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조금도 거짓이 없이 자기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놓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의 입장에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게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시몬 베드로가 만류하자 "사탄아, 물러가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신 것은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져야 하는 입장이 결코 즐겁거나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는 것이 육신적으로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만나서 완전히 의논하는 상태입니다. 눈을 감고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내 마음의 진정한 자세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놓는 것이 하나님 앞에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며 또 원수에게 쫓기는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그대로 다 내놓고 거짓이 없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기 위한 기도, 억지로라도 기도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욕심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바른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야고보서 4:3)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 욕심만 부리는 기도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그 뜻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다윗이 "내 마음을 통촉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니 살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 달라는 뜻입니다.
아침의 기도와 주님의 중보
여기서 '아침'이라는 말은 꼭 밤이 지난 후의 이른 새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앞서'란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다가 제단에 바치라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한 다음 이삭을 바치러 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다른 무엇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께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그 시각이 바로 아침입니다. 해가 뜨는 아침은 바로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떠오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캄캄하고 어두울 때에는 기도하고 싶어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침에 주께 기도한다'는 말씀을 일본어 성경으로 읽어 보았는데, 우리말 성경에 없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제물을 주님 앞에 갖추어 놓고 기다린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맨 마지막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제물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제물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부터 시작하여 홍수 후에 노아가 또 제사를 드렸고, 그 다음에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중보적인 제물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참 제물이신 예수님을 앞세워야 합니다. 나는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해서 대언자가 되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중보의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해야 될지 마땅히 빌 바를 모르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속에 꼭 어떤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 기도를 하지만, 그것을 내가 구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 모르고 하는 기도가 상당히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올바른 기도만 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개인적인 입장보다는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이 오신 날부터 교회가 성립되었고 그 교회를 위해서 성령께서 간구하고 계시고 하나님 우편에서는 주님이 대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빌 바를 모르고 하는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주님의 중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빌어야 할 바를 모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성령이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교회에게 필요한 것과 또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성령께서 아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빌 바를 모르지만 성령께서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시니 얼마나 마음 든든합니까?
육신의 요구와 성령의 간구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태복음 7:9-10)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떡은 진정한 의미의 떡이 아니라 돌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몸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영적인 떡인 주님의 몸을 구하지 아니하고 돌을 구합니다. 육신에게는 이롭지만 영적 생활에는 해로운 것을 구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든지 우리 아이가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면 좋겠다 든지 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것은 실상은 돌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떡인 줄 알고 구하지만 그건 떡이 아니고 돌입니다. 또 생선인 줄 알고 구하지만 생선이 아닌 뱀을 구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니까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 돈이 마침내 내 신앙을 좀먹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전갈로서 나를 쏘는 것과 같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떡대신 돌을 구하고 생선대신 전갈을 구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어린아이가 위험한지도 모르고 칼을 달라고 해도 칼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이러한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은혜의 보좌와 참 제물이신 예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올바른 마음의 자세입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아침에 주님 앞에 제물을 갖추어 놓고 기다렸다고 했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무엇이든지 즉시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란 제물이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우리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 깊숙이 있는 영은 죄사함 받아 깨끗하지만, 현재 우리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며 우리 마음속에는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이 묻어 있어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합니다. 그 불결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당장에 죽어야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제물을 갖추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소가 제물이었지만 신약시대의 제물은 주님이십니다. 내 마음이 지금은 깨끗지 못하고 때가 묻었지만 제물을 앞세울 때에는 괜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세상의 때가 묻은 더러운 마음, 고약한 마음으로 어떻게 감히 기도할까 생각하면 기도할 용기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리하여 무관심한 채 기도 없이 살아가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대변해 주시고 계시는데 내가 자꾸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상 바른 생활을 못하고 또 마음에 세상적인 때가 묻곤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이 더럽고 악한 마음을 지닌 나를 위해서 주님이 제물이 되어주신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제물이 되어주신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만 기도가 가능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려고 마음을 모을 때, 양심의 가책이 먼저 찾아옵니다. 자기 마음의 불결한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피흘림이 없는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피흘린 제물이라야 제물이 될 수 있는데,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받아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인의 제물을 가지고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내 인간적인 생활 속에서 열매가 많고 착한 일이 좀 있다 싶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시겠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입니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인의 저주받은 열매에 불과합니다. 가인은 저주받은 땅의 소산인 곡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저주받은 흙으로 된 우리의 육신도 저주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육신을 의지합니다. 내 자신이 선하고 신실할 때에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인의 제사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에 육신적으로 잘못을 따지면 안됩니다, 물론 죄를 지었으면 자백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뉘우치는 마음만으로는 안되고 하나님 앞에 내놓을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제물은 바로 주님입니다. 이런 죄를 지은 나, 더러운 나, 악한 나를 위해서 주님이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그 제물을 앞세우는, 즉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항상 주님을 앞세워야 됩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
여기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은 기도를 하는데 참으로 믿음으로 하는 기도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끈질기고 열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 뿐이시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데 실상 그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자기의 의에 만족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는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살고 신앙이 좋아도 여전히 죄를 짓고 세상을 접촉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실을 앞세워야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다윗은 믿음 안에서 자기의 마음을 통촉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피시고 통촉하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 정직하고 잘하는 그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마음,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실을 믿는 마음을 훨씬 더 인정하십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제물이 없이 나아가는 오만한 자
제물이 없는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제물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함께 계실 수 없습니다. 마음에 주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인 나와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한 대로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갖추어놓고 그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못 믿게 하고 예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악한 그대로 나가도록 합니다. 송사를 하여 힘을 빼서 하나님께 못 나가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이 육신 속에 머무는 악한 힘이 할 수만 있으면 제물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유혹이 항상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를 거짓말하고 남을 미워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도 사탄이지만, 항상 참소해서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탄의 궤휼입니다.
"선을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는 바울의 말처럼 우리에게도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에게 선이 없습니다. 바울은 마음속에 이러한 죄의 법, 곧 사망의 법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 죄의 법은 사탄이 심어준 것이고 사탄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잔뜩 기대를 거는 것은 굉장한 오만입니다.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선한 것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오만한 자입니다.
참 회개와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주의 집은 바로 성도들의 교제가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오늘날은 주님의 몸된 교회가 바로 성전입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말씀을 두신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원수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찾아옵니다. 죄를 지었으니까 벌을 받는 것이라며 마음에 송사를 합니다. 사탄에게 참소를 받을 때에는 실망이 옵니다. 하나님이 무섭고 멀게 느껴져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만듭니다. 그것이 원수가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낙망하여 힘이 빠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것도, 모임에 나오는 것도 싫어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우리는 이미 속죄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피 흘려 죄를 사해주신 것을 알고 있는데 죄 때문에 점점 멀어지는 것은 참 회개가 아닙니다. 참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하나님,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벌을 주시면 벌을 받고 징계를 하시면 징계를 받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서 그 처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벌써 그 마음속에 충분히 그 죄에 대해서 회개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로우심으로 나를 인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뿐만 아니고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 의에 의지해 주님을 옷입고 사는 생활입니다. 주님의 의로 인도해달라는 그 말은 굉장한 믿음입니다. 큰 죄를 지었으면서도 주의 의를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지만 하나님을 떠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 있고 멀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는 믿음에 달렸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깊이 회개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그 마음이 치료가 됩니다. 주님이 내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을 저버리는 가장 큰 죄
전부 원수 사탄의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탄에게 공격받으면 하나님을 떠나서 배역을 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 때문에 더 큰 죄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더 큰 죄는 불신앙이요 배역하는 죄입니다. 배역하는 죄는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입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아서 죄를 짓게 되면 그때 사탄은 '그것 보라, 하나님이 널 버렸다, 너는 이제 하나님 앞에 희망 없다.'고 생각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불신하여 떠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간계입니다. 우리가 어떤 순간적인 실수로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하나님의 의를 배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때때로 마음에 빛이 없고 가는 길이 캄캄하여 오리무중의 상태에 놓여 암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고 하나님을 떠나기 쉽습니다. 그때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 곧 주님의 이름을 의뢰하고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여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옵니다. 마음이 캄캄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아침이 가까이 왔다는 증거입니다. 참고 견디며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캄캄함이 그칠 때 참으로 감사함이 있습니다. 참으로 반갑고 즐거운 주님의 축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캄캄하고 고통스러울 때는 죽는 순간이고 죽음 뒤에는 열매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거듭난 사실을 말하지만 우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항상 평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아갈 때보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했을 때 캄캄하고 깊은 절망의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의 빛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말로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환부를 수술하지 않고 겉만 발라버리는 식으로 끝나버립니다. 참고 기다려야 됩니다. 환부가 완전히 곪아서 터져버리면 나중에 해결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환난을 당한 자 주께 오라'는 찬송가 가사대로 우리가 사탄의 꾀임에 빠져 죄를 짓고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즉시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주님이 나를 멀리하신다든지 싫어하신다든지 하는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득이 죄를 짓는다고 해도 주님은 우리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근심하시고 깊이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스스로 뉘우쳐서 주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고통을 받는 동안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오는 자는 주님의 더 큰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
의인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주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자입니다. 구원받을 때 뿐만 아니고 구원받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이 많고 유혹이 많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꼭 죄를 안 지으면서 사는 것만 믿음일까요?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 죄악의 세상에서 죄를 안 짓고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는 말씀처럼 의인은 믿음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 5편을 통해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