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1-10]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 6편은 다윗이 징계를 받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하였고, 하나님이 그 호소를 들으심으로써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 주시는 것과 징계하시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이 에브라임은 북쪽 지역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을 마치 사랑이 많은 부모가 자식을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깊이 책망하는 것 같이 하셨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진정으로 교육시키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책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때로는 자식을 징계할 때에 분함을 못 견뎌서 분풀이로 자식을 때리는 일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는 그 동기가 전혀 불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므로 징계도 완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당시에는 굉장히 슬플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2:7-8]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을 징계하시되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징계 받는 것이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공의로운 징계와 사랑
스가랴서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과 포로생활 70년이 되었을 때 선지자가 하나님의 노하심이 언제 그치겠느냐고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스가랴 1:15)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잡아간 바벨론의 백성들은 평안히 살고 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굉장히 큰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하고 죄 짓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방 열국을 통해서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편에서는 조금만 노하셨는데 그 열국은 힘을 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괴롭혀 이스라엘에 고난을 더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신 것은 그를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다윗의 왕권을 빼앗고 예루살렘에서 축출하려 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임 안에서 생활하다가 심히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에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굉장히 노하시기나 한 것처럼 그 형제 자매들을 대하기 쉽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여쭈었을 때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는 커녕 마치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처럼 자기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화를 내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분으로 책망하시거나 진노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5:5).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육신의 소욕을 좇아 죄를 짓고 세상을 향할 때에는 그 안에 있는 구원받은 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육신을 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입니다. 육신 안에 있는 죄나 사탄은 어떤 경우에는 죽이기까지라도 해서 하나님이 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영과 육이 완전히 구별된 것을 뜻합니다. 사망에 속한 것은 몸이지 그 안에 있는 영은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영은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사망의 몸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전혀 기능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또 선한 일을 할 수도 없는, 완전히 죽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육신 때문에 갇혀서 곤욕을 당하고 육신 때문에 방해를 받아 활발하지 못하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육신을 쳐서 그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을 활기차게 만드시려고 징계를 주시는 것입니다. 육신을 징계해야만 안에 있는 영의 생명이 활발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적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오해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여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육신적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편 6:1)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6편 마지막 부분에 가면 다윗의 승리의 노래가 나옵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처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속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활기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징계를 받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는 의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심한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도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사랑이라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끝까지 온전한 인내를 이루라
[시편 6:2-3]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기에 나타난 다윗의 고통은 너무 심각합니다. 아주 바짝 말라서 기진맥진한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심한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영혼마저도 수척하고 떨리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한 것은 징계에 기한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과 어려움도 시한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한계가 없이 완전히 버림당했다고 생각하면 절망 상태에 빠지고 믿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야곱이 시험당할 때에 참는 문제를 얘기하면서 욥의 인내를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5:7-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이 성경 말씀은 이천 년 전에 씌여졌습니다. 이천 년 전에 쓰면서 주님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벌써 다 죽었습니다. 이 성경은 꼭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쓴 것 같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도 주님이 곧 오실 것처럼 바라고 살았습니다.
욥은 결말을 볼 때까지 참았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욥을 우리가 항상 표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욥은 아무 이유없이 한꺼번에 재산과 자식을 잃고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으면서 친구들이 와 자기를 조롱해도 끝까지 참고 견뎠습니다. 욥은 물론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우리 모임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했습니다. 외부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공격을 받고 내부적으로 여러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참아 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덕택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갓 구원받은 사람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함께 하는 고난
다윗이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질문한 것처럼 참는 것은 반드시 기한이 있고 끝까지 참으면 욥처럼 결말을 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참는 한계가 아닙니다. 내 성격이나 인내심의 한계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기한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 기한을 모릅니다. 그러나 참고 견뎌가면 그 기한이 끝날 때 좋은 것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때를 따라 주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 속에서 우리 개개인이 신앙생활해 가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개개인에게 따로 어떤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머리되신 주님께 속해 있는 몸된 교회 전체에 있습니다. 이 몸이 해야 할 일이 독립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갈증이 생겨서 물을 마실 때 손은 물컵을 드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손은 독립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개개인도 주님의 몸인 교회를 떠나서는 아무런 사명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몸인 교회와 상관없이 자기가 어떤 일을 주님께로부터 맡은 줄 알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의가 됩니다.
이 교회 안에서 개개인의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어느 시점까지 교회 전체가 주님의 일을 위해 협력하며 어려운 일들을 견디고 참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서 각자가 당하는 개별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 역시 개인적으로 참고 견뎌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때, 주님의 일을 위한 때까지 참고 견뎌 가야 합니다. 그때까지 참으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지 못하고 개인주의적인 입장에 서면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앞으로 혹시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어떤 어려움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확실히 구원받고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 666표를 받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인침을 못 받았으면 그 표를 받습니다. 혹시 어떤 경우에는 그런 문제로 말미 암아 목숨을 잃는 일까지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산 자의 하나님
[시편 6:4-5]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다음에는 이삭의 하나님이 되었고, 이삭이 죽고 난 다음에는 야곱에게 상속되어 야곱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하나님은 현재 누구의 하나님입니까? 이제 우리들이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상속 받아 우리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방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방 사람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복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복으로 받았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 아무도 하나님을 얻은 사람이 없는데 아브라함만이 하나님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상속해 주고, 자손들에게 상속해 주고 그 다음에 믿음이 있는 우리에게까지 상속이 온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상속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복 중에 참으로 엄청난 복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상으로 얻은 것입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편 6:5)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 영이 낙원에 간다든지 거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논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든지, 기쁘시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 육신의 생명이 떠나기 전에 현실에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현재 우리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섬기고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망 중에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라는 말씀은 낙원에 가서 주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고 사는 문제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현재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이 기간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문제를 결정짓는 분기점이 살아있는 현재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주님을 기억한다는 말은 밥 먹으면서 기억하고, 잠잘 때 기억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생활에서 즉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는 말씀은 무엇이든지 주님을 기억하는 가운데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살아있는 동안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되어지는 일은 내 영원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현재 이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분명히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성도들이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살다가 죽었을 때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지나간 과거를 생각해 보면 잘못 산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이 참으로 주님께 드려진 생활이 아니면 마음으로 불러지는 찬송이 잘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 향한 마음의 감사가 없고 사랑이 없으면 진정한 찬송이 아닙니다. 육신이 살고 있는 이 기간 동안 우리들이 열심히 살고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삶이 된다면 그것은 영원히 연장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에서 찬송이 떠나간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노래를 잘하기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보다는 평소에 콧노래로 부르던 찬송이 끊어져버리고 내 마음에 찬송이 없어졌다면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육신을 지니고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 부르며 살아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육신상의 행복이나 어떤 즐거움이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는 삶을 위해서 '나를 이 어려움에서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이 세상에서 비난을 받고 살다가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후에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찬송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시편 6:6-7]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여러분은 진정한 마음으로 회개나 감사의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감상적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눈물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육신적으로도 실컷 울어버리면 스트레스가 해소됩니다. 실컷 울어버리면 어떤 문제가 풀리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눈물에 인생의 마음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운다고 죄를 용서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이나 안 받은 사람이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릴 정도면 그 마음이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그 다음에 죄 씻음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씻는 것은 주님의 피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님의 피에 다시 감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22-24]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에 이어서,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 그 두 가지를 보려 하면 눈이 어두워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눈이 뜨이고 하나님과 사이에 빛을 가지고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장차 멸망받을 예루살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죄를 짓고 선지자의 충고를 받았을 때, 충고를 물리치지 않고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고 침상이 젖도록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 다윗의 회개를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눈물이 찬송으로 변했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힘찬 간증
[시편 6:8-9]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우리의 육신은 늘 우리를 강압하고 참소합니다. 그 사탄으로부터 참소당하는 것을 주님 앞으로 조용히 가져가 구체적으로 의논하면 참소가 끊어집니다. 계속적으로 고통을 받고, 찔림을 받는 마음을 조용히 주님 앞에 내놓고 진실된 마음으로 호소를 하면 그 마음속에 주님의 피가 연상되면서 원수, 마귀가 물러갑니다.
다윗을 공격하던 무리도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압살롬은 죽고 그 군대들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다윗을 무너뜨려버리고 왕권을 빼앗으려던 자들이 다 실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다윗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의 계획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그 위치에 있는 분이 다윗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시편 6:10]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지만 실망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우리에게 아주 세밀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던 사람이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가장 많은 찬송을 부르고 시를 읊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같이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편 6:10)하는 말씀에서 믿음으로 승리한 힘찬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편 6편은 다윗이 징계를 받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하였고, 하나님이 그 호소를 들으심으로써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 주시는 것과 징계하시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에브라임은 북쪽 지역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을 마치 사랑이 많은 부모가 자식을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깊이 책망하는 것 같이 하셨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진정으로 교육시키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책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때로는 자식을 징계할 때에 분함을 못 견뎌서 분풀이로 자식을 때리는 일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는 그 동기가 전혀 불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므로 징계도 완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당시에는 굉장히 슬플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을 징계하시되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징계 받는 것이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공의로운 징계와 사랑
스가랴서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과 포로생활 70년이 되었을 때 선지자가 하나님의 노하심이 언제 그치겠느냐고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스가랴 1:15)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잡아간 바벨론의 백성들은 평안히 살고 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굉장히 큰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하고 죄 짓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방 열국을 통해서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편에서는 조금만 노하셨는데 그 열국은 힘을 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괴롭혀 이스라엘에 고난을 더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신 것은 그를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다윗의 왕권을 빼앗고 예루살렘에서 축출하려 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임 안에서 생활하다가 심히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에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굉장히 노하시기나 한 것처럼 그 형제 자매들을 대하기 쉽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여쭈었을 때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는 커녕 마치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처럼 자기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화를 내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분으로 책망하시거나 진노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5:5).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육신의 소욕을 좇아 죄를 짓고 세상을 향할 때에는 그 안에 있는 구원받은 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육신을 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입니다. 육신 안에 있는 죄나 사탄은 어떤 경우에는 죽이기까지라도 해서 하나님이 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영과 육이 완전히 구별된 것을 뜻합니다. 사망에 속한 것은 몸이지 그 안에 있는 영은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영은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사망의 몸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전혀 기능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또 선한 일을 할 수도 없는, 완전히 죽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육신 때문에 갇혀서 곤욕을 당하고 육신 때문에 방해를 받아 활발하지 못하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육신을 쳐서 그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을 활기차게 만드시려고 징계를 주시는 것입니다. 육신을 징계해야만 안에 있는 영의 생명이 활발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적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오해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여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육신적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편 6:1)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6편 마지막 부분에 가면 다윗의 승리의 노래가 나옵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처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속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활기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징계를 받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는 의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심한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도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사랑이라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끝까지 온전한 인내를 이루라
여기에 나타난 다윗의 고통은 너무 심각합니다. 아주 바짝 말라서 기진맥진한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심한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영혼마저도 수척하고 떨리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한 것은 징계에 기한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과 어려움도 시한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한계가 없이 완전히 버림당했다고 생각하면 절망 상태에 빠지고 믿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야곱이 시험당할 때에 참는 문제를 얘기하면서 욥의 인내를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이천 년 전에 씌여졌습니다. 이천 년 전에 쓰면서 주님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벌써 다 죽었습니다. 이 성경은 꼭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쓴 것 같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도 주님이 곧 오실 것처럼 바라고 살았습니다.
욥은 결말을 볼 때까지 참았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욥을 우리가 항상 표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욥은 아무 이유없이 한꺼번에 재산과 자식을 잃고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으면서 친구들이 와 자기를 조롱해도 끝까지 참고 견뎠습니다. 욥은 물론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우리 모임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했습니다. 외부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공격을 받고 내부적으로 여러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참아 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덕택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갓 구원받은 사람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함께 하는 고난
다윗이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질문한 것처럼 참는 것은 반드시 기한이 있고 끝까지 참으면 욥처럼 결말을 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참는 한계가 아닙니다. 내 성격이나 인내심의 한계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기한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 기한을 모릅니다. 그러나 참고 견뎌가면 그 기한이 끝날 때 좋은 것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때를 따라 주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 속에서 우리 개개인이 신앙생활해 가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개개인에게 따로 어떤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머리되신 주님께 속해 있는 몸된 교회 전체에 있습니다. 이 몸이 해야 할 일이 독립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갈증이 생겨서 물을 마실 때 손은 물컵을 드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손은 독립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개개인도 주님의 몸인 교회를 떠나서는 아무런 사명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몸인 교회와 상관없이 자기가 어떤 일을 주님께로부터 맡은 줄 알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의가 됩니다.
이 교회 안에서 개개인의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어느 시점까지 교회 전체가 주님의 일을 위해 협력하며 어려운 일들을 견디고 참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서 각자가 당하는 개별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 역시 개인적으로 참고 견뎌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때, 주님의 일을 위한 때까지 참고 견뎌 가야 합니다. 그때까지 참으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지 못하고 개인주의적인 입장에 서면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앞으로 혹시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어떤 어려움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확실히 구원받고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 666표를 받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인침을 못 받았으면 그 표를 받습니다. 혹시 어떤 경우에는 그런 문제로 말미 암아 목숨을 잃는 일까지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산 자의 하나님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다음에는 이삭의 하나님이 되었고, 이삭이 죽고 난 다음에는 야곱에게 상속되어 야곱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하나님은 현재 누구의 하나님입니까? 이제 우리들이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상속 받아 우리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방 사람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복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복으로 받았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 아무도 하나님을 얻은 사람이 없는데 아브라함만이 하나님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상속해 주고, 자손들에게 상속해 주고 그 다음에 믿음이 있는 우리에게까지 상속이 온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상속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복 중에 참으로 엄청난 복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상으로 얻은 것입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편 6:5)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 영이 낙원에 간다든지 거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논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든지, 기쁘시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 육신의 생명이 떠나기 전에 현실에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현재 우리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섬기고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망 중에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라는 말씀은 낙원에 가서 주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고 사는 문제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현재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이 기간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문제를 결정짓는 분기점이 살아있는 현재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주님을 기억한다는 말은 밥 먹으면서 기억하고, 잠잘 때 기억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생활에서 즉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는 말씀은 무엇이든지 주님을 기억하는 가운데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살아있는 동안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되어지는 일은 내 영원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현재 이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분명히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성도들이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살다가 죽었을 때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지나간 과거를 생각해 보면 잘못 산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이 참으로 주님께 드려진 생활이 아니면 마음으로 불러지는 찬송이 잘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 향한 마음의 감사가 없고 사랑이 없으면 진정한 찬송이 아닙니다. 육신이 살고 있는 이 기간 동안 우리들이 열심히 살고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삶이 된다면 그것은 영원히 연장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에서 찬송이 떠나간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노래를 잘하기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보다는 평소에 콧노래로 부르던 찬송이 끊어져버리고 내 마음에 찬송이 없어졌다면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육신을 지니고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 부르며 살아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육신상의 행복이나 어떤 즐거움이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는 삶을 위해서 '나를 이 어려움에서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이 세상에서 비난을 받고 살다가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후에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찬송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마음으로 회개나 감사의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감상적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눈물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육신적으로도 실컷 울어버리면 스트레스가 해소됩니다. 실컷 울어버리면 어떤 문제가 풀리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눈물에 인생의 마음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운다고 죄를 용서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이나 안 받은 사람이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릴 정도면 그 마음이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그 다음에 죄 씻음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씻는 것은 주님의 피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님의 피에 다시 감사하게 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에 이어서,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 그 두 가지를 보려 하면 눈이 어두워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눈이 뜨이고 하나님과 사이에 빛을 가지고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장차 멸망받을 예루살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죄를 짓고 선지자의 충고를 받았을 때, 충고를 물리치지 않고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고 침상이 젖도록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 다윗의 회개를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눈물이 찬송으로 변했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힘찬 간증
우리의 육신은 늘 우리를 강압하고 참소합니다. 그 사탄으로부터 참소당하는 것을 주님 앞으로 조용히 가져가 구체적으로 의논하면 참소가 끊어집니다. 계속적으로 고통을 받고, 찔림을 받는 마음을 조용히 주님 앞에 내놓고 진실된 마음으로 호소를 하면 그 마음속에 주님의 피가 연상되면서 원수, 마귀가 물러갑니다.
다윗을 공격하던 무리도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압살롬은 죽고 그 군대들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다윗을 무너뜨려버리고 왕권을 빼앗으려던 자들이 다 실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다윗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의 계획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그 위치에 있는 분이 다윗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지만 실망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우리에게 아주 세밀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던 사람이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가장 많은 찬송을 부르고 시를 읊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같이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편 6:10)하는 말씀에서 믿음으로 승리한 힘찬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