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편]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1-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윗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시편 8편은 주의 이름이 영광스럽고 아름답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으나 사탄으로 말미암아 황폐한 죄악 세상이 되었습니다. 각종 공해와 질병, 지진, 기근 등의 재난, 자원 고갈로 인한 분쟁, 흉악한 범죄 등의 소식을 접하다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고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3천 년 전에 씌어진 이 시는 먼 미래를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없는 부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루하루 이 세상을 창조해가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는 사탄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범죄하고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보기 좋은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히 실패로 끝날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성경 말씀이 현실적으로 당위성이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아름답지 못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편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민족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과 블레셋 사람이 싸움을 벌였습니다. 골리앗이라는 장군이 자기 신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민족입니다. 따라서 골리앗 장군이 이스라엘을 얕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에게 패배당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완전히 땅에 떨어지는 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새의 아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사무엘상 17:45-46)라고 말하고 물매돌 하나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넘어뜨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 애굽에서 바로 왕의 종으로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애굽기 3:14)라고 했습니다. 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본래부터 있는 자', '영원 자존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원인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근본 원인으로 시작과 끝이 없는 존재이십니다.


[출애굽기 3:15]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란 말은 약속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고, 이삭에게 나타났고, 야곱에게 나타나 그 이름이 전수되었습니다. 그런데 43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다고 하니까 그 하나님이란 분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알려지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이름을 받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임을 뜻합니다.



더럽혀질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


 자기 신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고 더럽힌 골리앗은 사탄의 상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골리앗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사탄에 의해서 파괴되고 인간이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완전히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져 비웃음거리가 된 것 같은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사탄이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고 더럽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8편 1절의 내용과 같이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4:12-16]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타락한 천사 사탄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비겨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하여 그 영광을 빼앗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타락한 천사, 사탄을 그냥 쫓아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탄의 수완이나 세력이 미칠 수 없고 사탄의 능력이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사탄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43절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예언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666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을 것이고, 그 표를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이름이 마음에 성령으로 인쳐졌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


 요한복음 14장 26절 말씀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성령이 있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부터 보면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되어 있으며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 그 날부터 교회가 세워졌는데 교회는 바로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21:12-1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가 성전에 들어가셔서 보니 양과 소를 팔고 돈 바꾸는 모습이 완전히 시장바닥을 연상케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에 흩어져 살다가 절기를 맞으면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따라서 외국에서 가지고 온 돈을 바꾸어서 성전세를 바칩니다.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이나 소, 비둘기 등을 사서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제사장들이 장소를 빌려주고 이익을 같이 나누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광경을 보시고 그들을 성전에서 모두 내어 쫓으시면서 이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에서 집은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두시는 곳이며 주님의 이름으로 성도가 서로 교제하고 주님의 일, 교회의 일,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 의논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예배당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14절 이하에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고 아이들이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소리치는 것을 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을 내어 예수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이 시편 8편에 있는 말씀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나타나는 주님의 이름


[시편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에는 미래에 대한 매우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주님의 이름이 모든 사람에게 높임을 받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계실 당시에 가장 힘이 있고 똑똑하고 지식이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 제사장,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장 무식하고 어리숙하고 보잘것없는, 영적 사실로 말하자면 겸손하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힘없고 겸손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처럼 승리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5-27]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지역이 예수님을 배척하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그 시대에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들, 가장 힘없고 무식하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총칭해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음이 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만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을 깨닫고 주님의 이름을 통해서 사탄을 이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무엇이든지 간구하면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얼핏 현실을 보면 주님의 이름이 사탄으로 말미암아 공격을 받고, 더러워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없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탄이 건드릴 수 없는 아주 높은 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사탄은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사탄을 멸망시키고 영광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고 그 이름이 높여질 것입니다.



[시편 8:3-4]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천지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이 지구는 은하계의 한 부분입니다. 지금은 많이 낡았지만 50억 인구가 이 지구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50억 인구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이 지구에 곡식과 풀을 나게 하시고 물이 흐르게 하시고 짐승들이 살게 하셨습니다. 시편 104편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 104:1-13]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 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 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 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자비하심을 표현한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이 광활하고 엄청난 우주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자신의 추악함, 더러움, 무가치함을 아는 만큼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자비하심을 더 깊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시편 저자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는 말씀에서 인자라는 말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천지만물의 창조가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계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짝인 신부를 이룩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21장을 읽어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기를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요한계시록 21:9)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을 보인다는 뜻으로 교회가 완성된 것이 천국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신부, 어린 양의 아내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하고 훌륭해도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모든 우주 만물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것은 사람뿐입니다. 비록 보잘것 없는 티끌 같고 구더기 같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었다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 가운데 성자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따라지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역사적으로 보면 사람이 먼저이고 예수님이 사람의 형상대로 오셨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나중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오고 예수님이 사람의 형상,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먼저이고 우리가 나중입니다. 그 아들은 맏아들이 되게 하시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둘째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위대한 것이 있어도 아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보다 더 귀한 존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 속에서 예수님의 형상을 이룩하고 그들이 합쳐 주님의 아내, 주님의 사랑의 짝이 되어 영원한 세계를 이루는 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도 다 세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연법칙에 의해 이 세상이 창조되어 운행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시는데 진리로 말미암아 구원된 우리 영혼의 상태, 우리 개인의 문제를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진리에 의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 당신의 아들된 사람들을 기억 못하신다든지, 권고하지 않으신다든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 자유의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생각하시며, 권고하시며 하나하나의 생명을 머리털까지도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민족, 하나님의 이름이 붙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히브리서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이 땅에 기초를 두셨고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었지만 그것들은 멸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지만 주님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장 13절에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사에게는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하신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땅 위에서는 사탄을 정복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도 사탄을 정복하는 작업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보내셔서 그 이름으로 이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것"(히브리서 1:14)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는 길


[히브리서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는 천사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도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한 사람의 위치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잠깐 동안 인간 세상에 오셨을 때는 천사보다 낮은 위치에 계셨지만,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룩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게 되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히브리서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도 귀하고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탄도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성경 말씀을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흉악한 죄인인 사람을 그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영광에 함께 데리고 가시려고 낮고 천한 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죽음의 고난을 맛보신 것입니다.



[로마서 8:16-18]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영광은 고난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가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상속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상속권을 가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영광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 영광을 성취하기 위해 사탄과 싸우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고난을 겁내는 사람은 영광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시편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 속에 고난, 죽음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존귀의 관을 쓰시는 것입니다. 이 존귀의 관을 쓰는 것은 영광을 거쳐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탄이 죽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에 붙어있는 것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됩니다. 죽으면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길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로마서 16장 20절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도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교회를 형성하고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육신에 붙어있는 사탄의 생각이 꺾어지는 만큼 교회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 안에서 영적 싸움을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 육신의 생각이 꺾어지지 않고 있으면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영적 싸움을 통해서 고난에 참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탄과 싸울 때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사탄을 이깁니다. 육신의 어려움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면 패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참고 견디면서 고난의 길을 함께 할 때 그것이 바로 영광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함께


[시편 8:6-9]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28-31]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것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심히 좋았던 것이 잠시 동안 멈췄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이 일을 복구하셨을 때 하나님의 좋아하심이 나타납니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완전히 회복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미래가 아니고 영원한 현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아름다움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잠깐 동안 가리워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이름과 영광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실패 없는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우리도 함께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받고 만물의 찌끼같이 되고 바울이 말한 대로 여러 가지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부끄러움을 당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야에서 볼 때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닙니다.


 이 시편의 저자 다윗은 이 모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현실은 비참하고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윗은 그 영광을 시로 읊고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실을 믿을 때 우리의 현실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고, 그 아름다운 이름 아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